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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07화 (107/315)

107화

10월의 피날레(Finale)

우진과 유리아는, 이제 꽤나 친해진 상태였다.

워낙 바쁘다 보니 촬영 때가 아니면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카페 프레스코 가맹과 관련된 일 때문에 종종 개인적인 연락도 주고받으면서 금세 친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렇게 둘이서만 따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오늘의 만남도, 일 때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야, 이 건물이야 누나?”

“맞아. 이면도로 안쪽이라 조금 아쉽긴 한데, 상권 괜찮은 구역의 코너 라인이라서 눈 딱 감고 질렀어.”

우진과 리아가 만난 약속장소는, 그녀가 가로수 길에 매입했다는 건물의 바로 앞이었다.

그리고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우진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부동산의 가치를 분석하는 것은, 그의 오랜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오, 직접 임장(臨場)*[현장에 직접 나와 봄.] 와보니까 더 좋은데?’

부동산을 분석할 때에는, 지도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상권이 그러했고 지형이나 건물의 노후도가 그러했다.

물론 몇 년만 지나도 로드뷰나 항공뷰가 기가 막히게 이미지로 보여주면서 사이버 임장으로 볼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지게 되지만.

적어도 2010년에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일이었다.

‘진짜 제대로 샀네. 어지간한 대로변 건물보다 수익성 좋을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리아를 따라, 우진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외관 공사만 끝난 상태여서 내부가 휑했지만, 두 사람 마주 앉을 탁자와 의자 정도는 놓여있었다.

이전에 건물을 사용하던 업장에서, 남겨놓고 간 낡은 가구들.

아마 외관 리모델링 공사하던 인부들이, 쉬는 시간에 썼던 모양이었다.

“여기 너무 누추한가? 인근 카페라도 갈까?”

리아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이 안으로 들어온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누추하다니, 수십억 넘을 가로수길 건물인데.”

“수십억이던 수백억이던. 지금은 누추하지 뭐.”

“괜찮아 누나. 나도 사람 없는 여기가 얘기하기 편해. 가로수길 카페는 조용한 데가 없더라고.”

아무리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도,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미팅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리아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현재 연예계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될 게 뻔했다.

그럼 일 얘기 같은 것은, 할 수 없게 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 건물은, 부동산 컨설턴트가 알아봐 준거야?”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비슷해. 물건 한 다섯 개 정도 브리핑받았는데, 내 눈에는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더라고.”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도 돈만 있었다면 바로 지르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위치의 탐나는 건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리아가 이 건물을 얼마에 매입했는지도 대략 알고 있었는데, 값도 아주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나도 조만간…….’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우진은 유리아의 보는 눈이 제법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부동산 컨설턴트가 매물을 물어다 준다고 해도, 이렇게 괜찮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은 본인이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애초에 안목이 없다면, 눈탱이를 맞기 정말 쉬운 게 부동산이었다.

‘이런 게 감이겠지? 돈 되는 자리를 찾아가는 감.’

하지만 아무리 감이 좋다고 해도, 감에만 의존하는 투자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진은 슬쩍 한 가지 팁을 알려주기로 했다.

“누나.”

“응?”

“나중에 여유 좀 생기면, 이 반대편 대로변 건물도 하나 사봐.”

“대로변?”

“응. 이 건물이랑 등 맞대고 있는 거.”

“야, 대로변은 넘사벽이야 넘사벽. 여기랑 가격대가 또 틀려.”

그 말이 장난이라 생각했는지, 리아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우진은 결코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설명을 좀 더 덧붙였다.

“대로변에 이만한 사이즈로 사면, 당연히 세 배는 비싸지.”

“그럼?”

“내가 오면서 봤는데, 대지 40평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 누나 건물이랑 붙어있더라고.”

“그래? 그걸 사라고?”

“응. 아마 면적이 좁아서, 누나 건물보다도 더 쌀 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대체 왜?”

우진은 펜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여있던 이면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왕 하나 알려주기로 한 거, 좀 더 자세히 알려줄 요량이었다.

“이게 누나 건물이고, 이게 대로변 작은 건물이야.”

“흠……?”

“만약 누나가 이 작은 물건을 사서, 같이 허물고 ㄱ자로 생긴 건물을 짓는다고 쳐.”

“응?”

우진이 작은 건물을 그린 대로변 방향에, 화살표를 하나 추가로 그렸다.

“그리고 정문을 대로변 쪽으로 내면…….”

“……?!”

“이제 좀 감이 와?”

우진의 말을 듣던 리아가,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림으로 보는 순간, 아리송하던 우진의 이야기들이 확 이해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연결하면……. 누나 건물은 더 이상 이면도로 건물이 아니야. 입구만 대로변에 뚫려 있으면, 그게 바로 대로변 건물이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우진의 이야기에, 리아는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우진의 말대로 정말 대로변 건물을 사다가 하나의 건물로 합쳐 짓는다면.

건물 가치가 엄청나게 상승할 테니 말이다.

이건 부동산에 빠삭하지 않은 리아가 보기에도, 너무 당연한 이치였다.

리아가 놀라는 동안,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누나 건물은 대지가 넓은데 이면도로라서 가격이 쌌고, 내가 말한 저 건물은 대로변이지만 면적이 워낙 좁아서 쌀 거야. 위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저 면적에 입점할 수 있는 업종이 거의 없으니까.”

리아가 미리 가져다 놓은 캔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신 우진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말한 대로 되기만 하면……. 누나가 들인 돈의 세 배 정도까지도 건물값이 올라갈걸? 이것도 아주 보수적으로 책정한 값이야.”

“물론 확실한 투자인 것과 별개로, 쉬운 일은 아니지. 일단 저 건물 주인이 팔려고 할지도 모르는 데다, 누나 생각을 알면 후려치려 할 수도 있으니까. 순조롭게 산다고 해도, 입점 중인 세입자들 명도(明渡)*[토지, 건물 등을 점유하고 있는 자가, 그 점유를 타인의 지배하에 옮기는 것.]하는 데도 꽤 시간이 필요할 테고.”

우진의 말은 여기서 끝났다.

리아가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 풀어서 설명했으면 이해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우진의 생각처럼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한 리아는, 곧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미쳤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대체?”

리아의 감탄에, 우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들으면 나만 아는 건 줄 알겠다.”

“그럼, 다들 알아? 이런걸?”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누나한테 건물 소개해 준 컨설턴트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걸?”

“그 사람이야 전문가잖아.”

“나도 전문간데?”

“하, 할 말 없게 만드네.”

우진과 리아는, 각자 커피 캔을 한 모금씩 들이마시며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눴다.

시작은 리아의 건물에 대한 이야기로 했지만.

일상부터 시작해서 촬영 얘기까지,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일 얘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 내서 만나 잡담만 떠들다 헤어지기엔, 둘 모두 바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직접 와보니까 어때?”

“어떻긴. 좋다니까?”

“아니, 디자인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요, 대표님. 삼송역 1호점처럼, 감성 터지게 만들어 줄 수 있겠어?”

리아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적지 않은 기대가 느껴졌으니 말이다.

“물론이야. 솔직히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건물 컨디션이 더 좋아.”

“그래?”

“연식이 한 20년 됐다고 해서, 건물 자체에는 사실 별 기대 안 했거든.”

“내가 리모델링 공사한다고 했잖아.”

“놉. 내가 말하는 건 구조적인 부분을 말하는 거야.”

“구조?”

“리모델링 한다고 해도, 뼈대가 바뀌는 건 아니잖아.”

“아하.”

“옛날 건물이라, 구조가 나쁜 줄 알았어.”

“그런데, 괜찮아?”

“응. 솔직히 10년 안 된 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우진은 리아에게 빈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메모장에 뭔가를 적어 넣고 있었으니 말이다.

“공사는 얼마 정도 걸리겠어?”

“한……. 한 달?”

“삼송쪽은 3주 만에 했다며.”

“누나 건물은 층이 높잖아.”

“음…… 그런가?”

“5층까지 싹 다 하려면, 한 달은 잡아줘야 해.”

우진은 건물 여기저기 살피며 계속해서 메모를 했다.

그리고 디자인 방향성에 대해, 리아에게 의견도 종종 물어보았다.

“물주님, 루프탑은 어쩌시렵니까.”

“루프탑?”

“옥상 말하는 거야.”

“음…….”

“선택지가 두 개 있어.”

“뭔데?”

“하나는 조경 좀 넣어서 정원처럼 꾸미는 거고. 하나는 위에 절반쯤 가림막 쳐서, 자릿수를 더 늘리는 거야. 반 정도 야외 느낌 나는 테라스가 되는 거지.”

우진은 디자인 제시를 할 때면, 미리 가져온 래퍼런스 이미지들을 리아에게 꼼꼼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런 우진의 태도에, 리아는 적잖이 만족하였다.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해서, 프로패셔널함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와, 이거 선택 장애 오네. 루프탑 테라스도 좋은데, 정원도 좀 끌려.”

“사실 실용성으로 따지면, 정원보단 테라스야.”

“왜?”

“일단 자리가 늘고……. 정원에 비해 관리도 편하지.”

“자리는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5층까지 있는데?”

“누나, 삼송역 1호점 못 봤어?”

“하긴…….”

“게다가 여긴 가로수길이야. 모르긴 몰라도, 삼송보다 더 많이 몰릴걸?”

우진은 리아를 데리고 건물 옥상부터 1층까지 차례대로 이동하며, 꼼꼼히 디자인에 대한 브리핑을 하였다.

그리고 우진의 얘기가 전부 끝났을 때, 어느새 바깥은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날이 쌀쌀해 지면서 해가 짧아진 탓도 있었지만, 우진과 벌써 네 시간이 넘게 미팅을 한 것이다.

“그럼, 이걸로 마무리?”

“오케이. 충분해.”

“1호점보다 더 예쁘게. 알겠지?”

“아까는 1호점만큼만 해달라며.”

“생각이 바뀌었어.”

“흐흐, 알았어. 최대한 노력해 볼게.”

“재엽 오빠처럼 웃지 말고. 느끼하니까.”

“너무하네. 날 재엽 형 같은 아재로 취급하는 거야?”

“응.”

“…….”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1층으로 다시 내려온 우진과 리아는, 구석에 놓아두었던 짐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먼저 건물 밖으로 나서던 리아가, 문득 우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진, 차는 어디에 댔어?”

“아, 요 뒤쪽 공영주차장에. 누나는?”

“난 매니저 오빠가 데리러 올 거야.”

“아하.”

그런데 그때.

꼬르륵-

리아의 뱃고동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울려 퍼졌다.

“…….”

다음 앨범 컴백 준비를 앞두고 다이어트 중이던 리아의 뱃속에서, 굶주린 장기들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마침 대화도 멈춘 상태였던 탓에, 모른 척해주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다랗게 울려 퍼진 뱃고동 소리.

잠시 어색하게 웃은 리아가, 우진을 향해 물었다.

“뒤에, 일정 있어?”

“나?”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없어. 오늘은 퇴근이야.”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의외의 제안에, 우진은 살짝 멈칫했다.

리아와 밥 한 끼 하는 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 없이 둘이 먹는 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매니저 형이 데리러 오신다며?”

“아직 안 불렀어.”

하지만 마침 우진도 배가 고팠고, 그래서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2010년을 살고 있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면, 유리아가 저녁을 먹자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친해진 우진이 아니라 평범한 20대 남성이었다면.

아마 방금 배 터지게 밥을 먹은 상태였어도, 허겁지겁 따라갔을 터였다.

“뭐, 좋아. 그런데 어디서? 좀 프라이빗한 곳으로 가야 할 것 아냐?”

우진의 물음에, 리아가 피식 웃으며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당연하지. 따라와.”

“차 없잖아?”

“네 차로 가는 거야. 안내는 내가 할 테니까, 운전은 니가 해.”

“계산도 누나가.”

“콜.”

그렇게 리아가 데려간 그녀의 단골 레스토랑은, 당연히 맛있었다.

숨겨진 맛집의 느낌이라기보다는, 비싼 값을 하는 파인다이닝(Fine dining)이었달까?

그렇게 우진의 오늘 하루는, 리아에게 저녁을 얻어먹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윤치형 교수의 제안부터 시작해서, 미녀에게 공짜로 얻어먹는 비싼 저녁 식사까지.

우진이 생각하기에 오늘은, 정말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하루였던 것 같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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