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성장을 위한 밑그림
하루가 지나, 금요일이 되었다.
우진은 학교에서 나와, 신사동 가로수길로 향하는 중이었다.
물론 단순히 놀러 나온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 잡힌 미팅의 약속장소가, 바로 이곳 가로수길이었을 뿐이었다.
‘흐음. 가로수길이라. 진짜 오랜만에 가보네 여긴.’
하지만 일하러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우진이었다.
우선 미팅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 상대가 특별한 격식을 차릴 필요 없는 아주 편한 사람이었으며.
오늘 오전 학교에서,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교수님이 그런 제안을 해 주실 줄은 몰랐지.’
우진은 사실 오늘, 전공 수업이 하나도 없었다.
오전 교양수업만 제외하면, 아무 수업도 없는 날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학과장이자 ‘건축조형’ 수업의 교수인 ‘윤치형’ 교수를 만날 일은 없었다.
교양수업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조교의 전화가 오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서우진 학생 전화번호 맞죠?]
[네, 조교님. 어쩐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혹시, 지금 학교에 계신가요?]
[네. 방금 수업 막 마쳤습니다.]
[윤 교수님께서 찾으시는데,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윤 교수님…… 께서요?]
우진은 무슨 일인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지만, 일단 학과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시간까지는 어차피 넉넉하게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도착한 학과장실에서.
우진은 윤 교수로부터 재밌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서우진이.]
[예, 교수님.]
[요즘, 학교생활 힘들지?]
[네? 딱히 그렇지는…….]
[수업 들어올 때마다 얼굴 누렇게 떠 있으면서.]
[제가…… 그랬나요?]
[회사 일 때문에 바쁜 거 다 아니까, 아닌 척하지 않아도 돼.]
[……!]
윤 교수는 그동안, 우진의 회사에 대해 제법 알아본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 내부적으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까진 알지 못했지만, 카페 프레스코부터 시작해서 WJ 스튜디오의 꽤 많은 포트폴리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윤 교수는 우진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아 보였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기는 한데……. 자네 혹시 학부 생활 전에 해외에서 따로 건축학교라도 다닌 적이 있나?]
[그런 건 아니고, 현장에서 일을 좀 하긴 했습니다.]
[무슨 일?]
[잡다하게요. 설계도 해봤고 시공도 해봤고, 감리도……. 메인은 목공이었습니다.]
[…….]
윤 교수와 우진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게 많은 윤 교수의 일방적인 질문들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대화는 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윤치형 교수는 시종일관, 우진의 작업물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카페 프레스코. 나도 주말에 한 번 가봤다네.]
[헛. 정말이세요?]
[와이프랑 드라이브할 겸. 교외로 바람이나 좀 쐬러 나갈 겸 해서 말이야.]
[드라이브하기에는 차가 좀 많이 막히셨을 텐데…….]
[하하. 그래서 가는 길에는 조금 후회했네만……. 괜찮네. 도착해서는 스트레스가 싹 다 날아갔으니까.]
사실 우진에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치형은 <우리 집에 왜 왔니>도 첫 방송부터 빠짐없이 챙겨보는 중이었다.
물론 처음 보기 시작한 이유는, 잠깐이나마 자신이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디자인은 좀 마음에 드셨나요?]
[마음에 들었냐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네.]
[네……?]
[그냥 감탄하기 바빴지. 아니, 놀라기 바빴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 솔직히 그냥 디자인만으로도 충격을 받았으니까.]
[교수님 그건…….]
[난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일 열심히 해. 학교 눈치 너무 보지 말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진은 윤치형의 이야기가, 진심으로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학과장인 그의 입장에서는, 요즘 들어 수업에 불성실한 우진의 모습이 얼마든지 고까울 수도 있었을 텐데.
우진에게 눈치를 주기는커녕,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윤치형이 단지 우진을 칭찬하기 위해 학과장실까지 부른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기분 좋은 대화의 끝에서, 치형은 본론을 꺼내놓았다.
[오늘 자네를 보자 한 것도, 사실 그 때문이야.]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지금 자네한테, 1학년 전공 수업 절반은 의미 없지 않나?]
[……!]
[내가 학과장으로서, 자네랑 딜을 하나 해볼까 하는데.]
윤치형의 제안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우진이 출석 여부와 관계없이, 학사경고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것.
그러니까 시험만 나쁘지 않게 보면, 최소 D 이상의 학점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K대학교의 학칙상 C등급부터는 인원이 정해져 있는 상대평가였지만, D~F까지의 학점은 교수 재량으로 절대평가가 가능하다.
다른 학생에게 피해 주지 않고도 교수가 보장해줄 수 있는 학점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이 제안은, 우진에게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는 우진의 입장에서 딱히 학점은 필요하지 않았고.
졸업할 때까지 모든 수업을 정상적으로 이수할 수 있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우진이 학교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장에서 배울 수 없었던 각종 디자인 툴들과 학문적인 지식들.
그러니까 윤치형의 제안대로라면, 우진은 이제 듣고 싶은 수업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덤으로 졸업장까지 무리 없이 받을 수 있을 테니, 우진은 아쉬울 게 없었다.
[저야 그럼 너무 감사한데…….]
[물론 그냥 해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그렇겠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때문에 우진은, 윤 교수가 어떤 것을 원할지 조금 긴장했었다.
이 정도의 특전이라면, 꽤 곤란한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윤 교수의 말이 점점 더 이어질수록, 우진은 점점 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얘기해 준 특전만 해도 우진은 감지덕지했는데, 윤 교수가 댓가로 바라는 부분마저 우진에게 전혀 손해될 것이 없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윤 교수의 제안은, 바로 다음과 같았다.
[자네, 혹시 우리 학교에 있는, 산학협력이라는 제도에 대해 아는가?]
[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작년에 처음 생긴 제도라, 모르는 교수들도 많으니까.]
산학협력이란, 기업과 교육 기관 사이의 제휴와 협력을 의미한다.
교육이나 연구 활동 등에서,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생긴 K대의 산학협력제도란.
제휴된 회사에서의 활동을 수업으로 대체하여, 그것을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방식의 제도였다.
각 학과의 분야와 관련된 수업을 현장에서의 실습으로 대체하는 개념인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학교에서 경험하기 힘든 현장경험을 얻을 수 있어 좋았고.
학교의 입장에서는 교육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아낄 수 있어서 좋았으며.
기업의 입장에서는 낮은 비용으로 인력을 수급할 수 있어 좋은. 그런 제도.
그리고 이 제도 안에서 윤치형 교수가 우진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WJ 스튜디오와 K대 공간디자인학과 간의 산학협력이었다.
[사실 작년에 생긴 제도이지만, 아직까지 유명무실하다네.]
[되게 괜찮은 제도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럴까요?]
[아직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소하기도 하고, 기업들의 입장에서도 조금 회의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야.]
[음…….]
[학부생들을 데려다 쓰면 일단 가르치기부터 해야 할 텐데, 그렇다고 해서 애들이 풀 타임으로 회사에 근무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아무래도 그렇죠. 수업을 들어야 하니…….]
[가르치다가 끝날 것 같은 거지. 제대로 써 먹어보지도 못하고.]
윤 교수의 입장에서는 신생이지만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이는 우진의 회사가, 이 제도와 함께 성장해 나가기 적합해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우진을 ‘학부생’이라는 색안경 없이 봤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을 한번 잘 갖춰 놓으면, 장기적으로 아주 괜찮은 제도가 될 것이라 생각하네.]
[저도 그렇습니다.]
[해서 자네도 이 시스템을 만드는데……. 한 손 보태주는 건 어떻겠는가?]
윤 교수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제휴되어있는 회사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K대 디자인과의 교수들은 다들 기업과의 연결고리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큰 기업들은 컨트롤 하기도 쉽지 않았고, 자세도 워낙 고압적이다 보니.
학과장인 윤치형 교수의 입장에서는 스트레스였던 것 같았다.
심지어 담당자조차 제대로 배정해주지 않는 기업들도 많았으니까.
[저도 분명 해보고 싶고,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우진은 여기까지 들었을 때도, 치형의 이야기가 분명히 좋은 제안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다 좋은데……. 일학년인 내가 선배들을 데려다 써야 하잖아?’
물론 이미 자신보다 나이 많은 직원들을 잘만 부리고 있는 우진이다.
하지만 첫 만남 때부터 상하 관계인 직원들과 이미 학교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난 선배들은, 나이를 떠나 조금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신입생인 우진의 입장에선, 꺼림칙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다행히도, 치형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진이 뭐 때문에 망설이는지,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하하. 자네가 뭘 고민하는지 아네.]
[예?]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당장 학생들을 데려다가 쓰라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요?]
[일단 이번에는 제휴만 하고, 본격적인 산학협력 진행은 내후년부터 시작하면 어떤가? 이제 1학년인 자네의 입장에선, 사실 좀 난감할 수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거든.]
그래서 결론적으로 윤 교수의 제안은, 무척이나 합리적인 것이었다.
[해서 만약 자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일단 내년까지 WJ 스튜디오와 우리 공간디자인과의 산학협력을 통해 학점을 이수하는 학생은 자네 하나뿐일 예정이라네.]
[……!]
[그럼 자네는 2학년 1학기부터, 6학점 정도를 덜 들어도 되겠지.]
[그게, 정말입니까?]
[대신 자네가 3학년이 된 뒤에는, 적극적으로 이 산학협력에 협조해줘야 하네. 어떤가?]
대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진도 WJ 스튜디오의 임직원 중 한 명이다.
때문에 우진이 산학협력을 이행하는 학생이라고 해도, 제도상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회사에서 일하는 것으로 전공 수업 두 개 이상을 때울 수 있는 셈이었으니.
우진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꼭 좀 해달라고 부탁드려야 될 수준이었지.’
게다가 ‘산학협력’이라는 제도의 취지와 가능성 또한, WJ 스튜디오의 미래에 보탬이 될 만한 것.
‘내 후년부터는 윤 교수님께 적극 협조해 드려야겠지만……. 그것도 회사 차원에서 나쁠 게 없는 일이고.’
K대 디자인학부 학생들은, 디자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놓고 보면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산학협력을 진행한다면, 그런 재원들을 낮은 비용으로 데려다 쓰며 회사에 맞는 인재들을 미리 선점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우진은, 윤 교수가 내민 손을 넙죽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하는 거지?]
[당연합니다. 교수님도 어차피 제가 할 거라고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하하. 그야 그렇지.]
[다음 주에 바로 담당자 한 명 배정해서, 과 사무실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역시 서우진이. 빠릿빠릿해서 좋구만.]
운전 중에 윤치형 교수와의 대화를 복기한 우진은, 절로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진짜 이게, 웬 떡이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진의 장기적인 플랜에 너무 도움 되는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최근 시간과 일에 쫓겨 숨 막힌 일상을 보내던 우진에게, 말 그대로 숨통을 트여 주는 제안이라고 해야 할까.
“흐흐.”
때문에 신사동으로 진입하는 한남대교가 꽉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었다.
“어디보자, 약속시간도 대충 맞게 도착한 것 같고…….”
밀리는 대로를 뚫고 가로수길 공영주차장을 찾아 들어간 우진은, 차를 대고 약속장소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평일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가로수길은 꽤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자, 어디보자……. 지도상으로 이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차를 댄 뒤 5분 정도 걸었을까?
우진의 귓전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우진! 여기, 여기!”
“뭐야, 누나 빨리 왔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리아.
오늘 우진과 미팅이 잡혀 있던 클라이언트는, 바로 가로수길 건물주(?) 유리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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