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71화 (71/315)

71화

반가운 재회

예능에는 컨텐츠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는 포맷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그 메인 포맷을 살려줄 감초가 될 컨텐츠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감초의 역할을 할 ‘컨텐츠’들이 많이 만들어지려면, 출연진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것은 출연진의 방송 역량일 수도 있고, 출연진 간의 시너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PD가 그런 방송능력을 기대하는 대상은 출연 연예인들이지, 특수한 포메이션 때문에 섭외된 일반인들은 아니다.

그래서 예능에서 일반인 패널들을 섭외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스토리였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배경 같은 것들.

패널의 평범하지 않은 배경은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음과 동시에, 예능에서 쉽게 써먹을 수 있는 컨텐츠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때문에 우진은, 공진영 PD가 자신을 무척이나 매력적인 카드로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물두 살에 한국 최고의 디자인학부를 보유한 K대학교 신입생이면서, 그와 동시에 WJ 스튜디오라는 번듯한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

게다가 얼마 전에는 SPDC라는 권위 있는 건축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으니, 확실히 평범한 배경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어떤가요. 배우님이 피디였다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질 카드 아닌가요?”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임수하는, 이미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다른 건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수하가 놀란 부분은, 방금 처음 알게 된 우진의 나이.

“에……. 그러니까, 스물둘. 정말 스물두 살이라는 거죠? 서 대표님?”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때 배우님은 스물여덟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전 스물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우진이 한 달 전에 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자, 수하는 딴청을 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상황이 어쨌든, 스물두 살 새내기에게 스물여덟이라 얘기한 것은. 꽤 실례가 아닐 수 없었다.

“서 대표님…….”

“네?”

“동안이 아니라 노안이셨네요.”

“…….”

“농담입니다. 노안까진 아니고, 다시 보니 대충 그 나이로 보이는 것도 같네요.”

“하…….”

우진의 나이로 인해 놀랐던 감정이 희석되자, 수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이 나이에 이 정도 스펙이라면…….’

우진이 장담했던 대로.

그가 가진 배경은, 예능 PD 입장에서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낄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키도 훤칠하니 비율도 나쁘지 않고. 잘만 꾸미면 화면빨도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을 곧바로 프로그램의 일반인 패널로 섭외할 수 있을 거란 얘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배경이 좋아도 피디가 보기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섭외는 이뤄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다만 이 정도의 배경이라면, 수하가 공피디에게 직접 추천해볼 만한 명분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좋아요. 확실히 대표님 말씀대로, 피디님도 매력을 느끼실 수 있겠군요.”

“다행입니다.”

“한번 추천은 해볼게요. 저도 처음 보는 일반인이랑 호흡을 맞추는 것보다는, 서 대표님 쪽이 좀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요.”

수하의 긍정적인 대답에, 우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아니, 재밌는 정도가 아니실걸요?”

“뭐에요. 오늘따라 자신감 왜 이래?”

“의욕 어필 정도라고 해 두죠.”

우진의 반응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된 수하가, 커피를 한 잔 홀짝인 뒤 슬쩍 물어보았다.

“으음……. 방송을 그렇게 타고 싶어요?”

그 질문에 우진은, 조금 솔직히 대답하였다.

자신이 방송 자체에 욕심이 있다고 오해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방송을 타는 데 욕심이 있다기보단, ‘디자이너 서우진’을 브랜딩하는 것의 일환에 가깝겠네요.”

“브랜딩이라…….”

“대중의 인지도를 쌓는 것은, WJ 스튜디오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우진의 대답에, 수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생각해도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긴. 인테리어 쪽도 하는 것 같던데. 방송 한 번 타고나면, 일 따는 게 몇 배는 더 쉬워질 테지.’

KBC는 공중파 채널이다.

그리고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주말의 괜찮은 시간대에 방영되는 예능.

우진이 여기에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WJ 스튜디오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첫인상은 훨씬 더 호의적이 되리라.

“여튼. 그럼 전 오늘 피디님 만나서 일단 방송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장난기 어린 표정이 된 수하가, 우진을 힐끔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서우진 대표님도 살짝 끼워팔아 보도록 할게요.”

우진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훌륭하십니다, 배우님.”

“그럼 제가 대표님께, 빚 하나 지워드린 거예요?”

“당연하죠. 제가 또 이런 빚은 배로 갚아드리거든요.”

“프하하, 말만으로도 고맙네요, 그래.”

사실 우진이 스물둘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 수하는 살짝 위화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얘기를 계속하다 보니, 우진의 나이가 많이 어렸다는 사실은 금세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우진과의 대화는 또래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했으니까.

‘진짜 무슨 스물두 살이, 이렇게 능글맞아?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사업도 하는 건가…….’

그런데 우진과 수하가 즐겁게 대화하던 그때.

수하의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하, 임수하. 여깄었네. 너 왜 휴대폰을 안 봐!”

“아, 지호 오빠. 문자 했었어?”

“문자만 했냐. 전화도 했지.”

“진동인데……. 언제 울린 거지?”

수하의 매니저로 보이는 곰 같은 이미지의 한 남자.

그리고 그 뒤에 함께 온, 뿔테 안경을 쓴 왜소한 체구의 여자.

그녀를 발견한 우진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고…….

‘설마, 공진영 피디?’

우진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송지호가 수하를 향해 그녀를 소개하였다.

“여기, 이분이. 너 섭외하고 싶다셨던 공피디님.”

“아, 안녕하세요, 피디님! 임수하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배우님. PD 공진영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하는 밝게 웃으며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고, 맞은편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우진을 소개해 줬다.

“여기는 제가 개인적으로 조금 친분이 있는 서우진 대표님이에요. 오빠도 인사해.”

“서우진…… 대표님?”

그렇게 수하와 카페에 앉아있던 우진은, 얼떨결에 그녀의 매니저와 PD까지 소개받게 되었다.

* * *

“뭐야, 사오십 분 안엔 온다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아, 그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좋은 일이니까, 걱정 마.”

우진이 KBC 사옥에서 뜻밖의 미팅을 갖는 동안, 카페 프레스코 공사의 실측 작업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하여 지금은 다시, WJ 스튜디오의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이번에 우진은,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공진영 피디라……. 그녀를 오늘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뜻밖의 만남은, 우진에게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안겨 주었다.

단순히 수하의 추천으로 프로그램 패널 자리를 얻어내는 것 보다.

<우리 집에 왜 왔니> 프로그램의 전반을 전부 기획하는 메인 피디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더 큰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일단 우진과 수하가 어떤 제안을 하기도 전.

우진의 소개를 들은 공진영 피디가, 먼저 패널 자리를 제안했다는 상황부터가 그랬다.

[정말, 인테리어 설계사무소 대표시라고요?]

[단순히 설계라기보단, 건축모형부터 시작해서 공간디자인, 시공, 설계 전반을 전부 하는 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대학생……. 이시고요.]

[어쩌다 보니까요.]

[수하 씨. 이분, 같이 섭외해도 되나요?]

[그걸 왜 저한테……?]

[그야, 서우진 대표님이 섭외되신다면, 당연히 친분이 있는 수하 씨한테 붙여드릴 테니까요.]

[그래도 서 대표님 의견을 먼저 들어 봐야죠.]

[아, 참. 그렇지! 서우진 대표님, 혹시 저희 프로그램, 함께 해보실 생각 있으세요? 그러니까 저희가 지금 어떤 프로그램을 하려는 거냐면…….]

공진영은 뭔가 정신없는 스타일이었다.

뿔테 안경에 단정한 셔츠차림 때문인지 처음에는 차분한 이미지로 보였었지만.

일단 대화가 시작되니, 마치 속사포처럼 정신없이 말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는 점.

발음이 좋은 것인지 말을 잘하는 것인지, 우진은 그녀가 랩을 해도 잘하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중간에 나한테도 말할 기회를 줬다면, 대화가 조금은 짧아졌을 텐데…….’

그녀는 우진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출연 제의부터 시작해서 프로그램 설명까지 쉴 새 없이 퍼부었으며.

덕분에 우진은 수하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그대로 한 번 더 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서우진 대표님이 함께 출연해 주신다면, 제가 괜찮은 그림을 뽑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하,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정말 감사하긴 한데…….]

[제가 대표님 이미지도 아주 예쁘게 만들어 볼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에……. 또…….]

하지만 공진영의 목소리가 정신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결국 우진은 그녀를 만난 덕에 조금 더 빨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당연히 우진이 그녀의 제의를 승낙했으며, 원했던 대로 수하와 함께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그럼, 확답 주신 겁니다?]

[뭐, 제 포지션이 오늘 말씀해 주신 부분에서 바뀌거나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야,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여기에 더해 우진은, 즉흥적으로 생각난 한 가지 제안을 덧붙일 수 있었다.

[아 그런데, 피디님.]

[넵?]

[이건 저도 아직 확답을 드릴 수는 없는 부분인데…….]

[말씀하셔요.]

[제가 사실 요 인근에서, ‘카페 프레스코’라는 매장 인테리어를 조만간 시작하거든요.]

[오호. 그런데요……?]

[혹시 제가 너무 어려서 따로 전문가스러운 이미지 메이킹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 현장을 살짝 찍어서 삽입하는 건 어떨까요?]

[……!]

[시청자들 입장에선, 저 어린놈이 무슨 전문가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우진의 이 제안은, PD의 입장에서 조금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이 만든 예능 포맷에 훈수를 둔 셈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은 사실 이러한 포맷을 <우리 집에 왜 왔니> 시즌2에서 본 적이 있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슬쩍 제안해 본 것이었다.

시즌1을 본 적이 없던 우진은, 이 포맷 자체가 원래 존재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진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공진영은, 우진에게 아이디어를 얻은 셈이 되어버렸다.

[와우! 그거 괜찮네요! 대박! 잠깐만요. 저 잠깐 메모 좀 해도 되죠?]

[그, 피디님. 이거 저도 클라이언트분께 여쭤는 봐야…….]

[잠깐만요. 저, 메모 좀 하고. 메모 좀!]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임수하와 그녀의 매니저 송지호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야, 임수하. 이거 우리 미팅 맞지?]

[몰라, 오빠. 좀 이상하긴 한데, 아마 맞을걸?]

원래 그들의 미팅 장소는, KBC 내부에 있는 회의실 중 한 곳이었다.

그런데 우진을 소개하다 보니 자연스레 카페에 함께 눌러앉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우진까지 함께 미팅에 끼어버린 희한한 구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수하나 송지호가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우진이라는 변수의 등장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지켜봤으니까.

[수하 씨 덕에, 생각지도 못했던 보너스를 얻어 가네요.]

[하, 하하.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잘 부탁드릴게요, 두 분.]

[감사합니다.]

[그럼, 우진 씨는……. 그 카페 사업주분께 허락 맡으시면 개인적으로 연락 좀 부탁드릴게요!]

[뭐,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KBC 사옥에서 있었던 일을 한 차례 복기한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

클라이언트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던 ‘카페 프레스코’와 관련된 부분도, 사실상 거의 성사될 게 확실했으니 말이다.

‘강석중 대표 입장에선,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카페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 말이야.’

예상치 못했던 하루의 전개에 머리가 복잡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이 전부 정리되자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즉흥적으로 수하에게 연락했던 것이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마치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던 퍼즐 조각들처럼, 우진이 그리고 있던 모든 그림 조각들을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깔끔하게 완성 시켰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의외성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내는 것이, 사업의 묘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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