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발아(發芽)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번 기세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을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더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진의 상황이 딱 그랬다.
‘이렇게까지 흥할 줄은 몰랐는데…….’
원래 기대했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성과.
그로 인해 찾아온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
갑작스런 전화를 통해 듣게 된 박경완의 선물은, 순풍을 타고 나아가던 우진의 배에 날개를 달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다음에 소고기는, 네가 사라 애늙은이.]
“감사합니다, 부장님. 소고기가 대숩니까. 제대로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또, 또.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기는……. 인마, 너랑 얘기하면, 과장급이랑 대화하는 것 같아, 꼭.]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창창한 청춘인데.”
[여튼 조만간 보자. 이번 건은 좀 크니까, 아마 우리 마케팅팀이랑도 같이 미팅해야 할 거야.]
“옙. 곧 뵙겠습니다.”
단지 학업을 위해 걷어차기에는 너무 큰 기회가 우진에게 찾아왔고.
여기서 노를 젓지 않는 것은 너무 미련한 선택이었다.
노를 저을 능력이 없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조금 시기가 이르긴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우진에게 온 기회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천웅건설의 분양홍보관 전체를 꾸미는, 내장 인테리어 외주가 통짜로 들어온 것.
아직 논의된 바는 없지만, 금액도 최소 억 단위에서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매출 크기를 떠나 남는 돈만 따지자면, 모형 외주만큼 짭짤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최고의 퀄리티를 뽑아내려면, 고급 자재를 아끼지 않고 발라줘야 했으니까.
‘그렇게 시공하고 나면……. 순이익이 3할 정도는 남으려나.’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신생 건축사무소가 일을 받기 얼마나 힘든지 아는 우진의 입장에서.
천웅건설같이 큰 기업의 일을 받아서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액수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일이 풀리려니까……. 이렇게도 풀려버리네.’
인생이란 본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했던가.
그것은 인생 2회 차인 우진에게도 다를 것 없는 명제인 듯하였다.
처음에 모형제작 사업을 시작한 것은, 훗날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
장기적으로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세우려면,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기반이 있는 게 좋았으니 말이다.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소소하게 모형제작 일을 하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리고.
그 과정에서 쌓인 인맥과 인프라를 활용해, 졸업과 동시에 사무소를 오픈하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다.
계획을 세운 우진이 생각하기에도, 대학 생활과 병행할 수 있는 최상의 빌드업.
하지만 어쩌다 보니, 첫 프로젝트부터 대박이 나버렸다.
천웅이 ‘SH물산’이나 ‘제운건설’급으로 업계 최상위 건설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1군으로 분류되는 건설사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따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진이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들을, 처음부터 리빌딩 해야 할 상황이 왔다.
빌드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발판이 생겨버렸으니까.
‘오늘부턴 두 배로 뛰어다녀야겠어.’
머릿속을 정리한 우진이, 작업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제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Holy shit! 갑자기 왜 벌떡 일어나?”
“갈 데가 좀 생겨서.”
“어딜? 나랑 맥스 해야지!”
“금방 올게. 하던 거나 마저 만들어 놔, 헬보이.”
“제기랄. 네가 옆에 있어야 집중이 잘 된다고.”
“집중은 원래 혼자 있어야 잘 되는 것 아냐?”
“난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후우, 정 없는 코리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헬보이를 작업실에 남겨둔 채.
우진은 빠르게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지.’
우진은 곧바로 행동을 시작하였다.
* * *
모든 일이 과할 정도로 잘 풀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반되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을 최선의 결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진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시간.
모형작업은 몰라도 이 정도 덩치의 프로젝트를 학업과 병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스케줄이지.’
하지만 우진이 실무자가 아닌 ‘오너(Owner)’의 포지션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본인이 직접 목공을 두들기는 것이 아닌, ‘관리자’의 포지션에서 일을 진행한다면.
충분히 학교를 다니면서도, WJ 스튜디오를 굴릴 수 있었다.
“내가 시간이 없으면…… 사람을 쓰면 돼. 어차피 언제까지, 내가 일선에서 일을 할 수는 없는 거였어.”
그래서 우진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선행한 일은, 바로 같이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되는 것은.
앞으로 우진을 대신해 헤더의 역할을 해 줄, 믿을 수 있는 인재.
모형 쪽에서는 그 역할을 석현이 해 줄 것이었으니, 시공 파트를 컨트롤해 줄 사람이 한 명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괜찮게 수행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우진은 한 명 알고 있었다.
“여기에요, 진태 형!”
“오! 우진이 일찍 와 있었네?”
“저야 뭐, 학교에서 가깝잖아요.”
우진은 수서현장의 일이 끝난 뒤에도, 김진태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언젠가 함께 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람 자체가 무척이나 호인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현장에서 오랜 기간 굴렀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진태는 가끔 만나도 편하고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김진태는 우진과 자신에게 그런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 할 테지만 말이다.
“이야. 우진이 이거, 지난번 봤을 때 보다 훨씬 더 대학생 같아졌는데?”
“대학생 같아진 게 뭐에요?”
“빡빡이가 사람 됐단 소리지.”
서로 편하고 죽이 잘 맞는 것을 떠나, 진태는 우진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수서현장에서 워낙 합이 잘 맞기도 했었지만, 그 이후에도 우진이 꼬박꼬박 연락하며 그에게 잘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박경완이 목공 일을 제안했을 때도, 그 일을 김진태에게 넘기며 챙겨주었으니.
진태의 입장에서 우진은, 예쁜 동생이 아닐 수 없었다.
치이익-
불판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응시하며, 진태가 은근슬쩍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우진이 너, 어디서 크게 한탕 땡겼나보다?”
“무슨 한탕이요?”
“돈 좀 번거 아냐? 갑자기 형한테 고기를 다 사준다길래 그런 줄 알았지.”
“아, 벌긴 벌었죠.”
“크, 형님!”
“뭐야, 징그럽게 왜 이래요.”
“원래 돈 많으면 형이야 짜샤.”
진태는 우진의 실력을 어쩌면 경완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관리자인 경완과 달리, 바로 옆에서 같이 일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우진이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도, 진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내장목공은 실력만 있으면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고급 기능공이었으니 말이다.
해서 돈을 벌었다는 우진의 말에, 진태는 허리띠까지 풀어놓고 신나게 고기를 집어 먹었다.
“야, 근데. 갑자기 좀 수상한데?”
“또 뭐가요.”
“이렇게 배 터지게 먹이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
진태의 말에 우진은 피식 웃으며 소주를 따랐다.
“그걸 이제 느꼈어요?”
“뭐?”
“이형, 보기보다 더 둔하네.”
“뭔데?”
“일단 먹어요. 먹고 얘기하자고.”
두 사람은 한참을 더 각자의 얘기를 하며 떠들었고.
그렇게 불판이 식어갈 때쯤, 드디어 우진이 운을 띄우기 시작하였다.
“형. 지난번에 제가 드린 일, 슬슬 끝나가죠?”
“그게 왜 네가 준 일이야. 박 부장님이 주신 일이지.”
“어쨌든! 저한테 왔던 일을 형한테 넘긴 거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진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다시 우진을 향한 그의 두 눈에는, 호기심이 살짝 떠올라 있었다.
이제 우진이 본론을 꺼내려 한다는 사실을, 분위기상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 주까지 나가면, 얼추 마무리될 거야.”
“그래요?”
“그건 왜 물어? 또 뭐 나한테 넘길 거 있어?”
사실 진태 정도 되는 목수면 부르는 곳이야 널려 있었기에, 또 우진에게 일을 받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진이 하려는 말이 일과 관련되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넌지시 한번 던져 본 것 뿐.
‘뭐, 큰 건수를 던져준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기대해볼 만하긴 하지만…….’
하지만 우진의 대답이 이어진 순간, 진태의 표정은 묘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넘길 건 없고……. 이번에는 형을 좀 데려가고 싶은데요?”
우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그래서 우진은,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해 줬다.
“형을 고용하고 싶다고요.”
“……!”
우진의 말을 들은 진태는, 순간 벙찔 수밖에 없었다.
나이와 별개로 우진을 무척 높게 평가하긴 했지만, 그래도 스물두 살짜리 꼬마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승낙이나 거절을 떠나서,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달까.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지만 그런 진태의 당황은, 곧 그 수준을 넘어 충격으로 바뀌었다.
말을 잃은 그를 향해, 우진이 더 파격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보다 최소 두 배 정돈 벌게 해 줄게요. 어때요?”
“장난해? 너, 내가 얼마 버는지는 알아?”
“알죠.”
“어떻게?”
“사실 뻔하잖아요. 이 바닥, 하루 이틀도 아니고.”
“…….”
우진의 말에, 진태의 말문이 다시 막혀버렸다.
‘역시 제정신은 아닌 놈이야.’
이 바닥 하루 이틀도 아니고 뻔하다니.
이게 갓 스물둘 된, 대학교 신입생의 입에서 나올 소린가?
하지만 진태가 얼마나 당황했던 그것과는 별개로.
우진은 아주 정신이 말짱하며, 진정성 넘치는 상태였다.
“형 많이 버는 거, 아주 잘 알고 있다고요.”
우진의 판단으로 진태는, 지금도 매달 최소 사오백 이상 챙겨가는 목수였다.
아마 주말까지 풀타임 뛰는 달에는, 육칠백 이상도 충분히 벌어들일 터.
하지만 그것은 진태가 프리랜서이기에 가능한 금액이었다.
월급쟁이 목수에게 그 정도까지 챙겨주는 회사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진태가 뼈 빠지게 뛰어다니고 일을 구해 와야 벌 수 있는 맥시멈이, 대략 팔백 정도라고 우진은 판단하였다.
해서 우진은. 진태가 혹할만한 적정 금액을, 교묘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일단, 연봉으로 육천오백 정도 맞춰줄게요.”
프리랜서가 아닌 안정적인 월급 쟁이로서. 원래 벌던 평균 벌이를, 살짝 넘어가는 수준의 매력적인 연봉.
“뭐?”
놀람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혼란이 뒤섞인 진태의 반문에, 우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두 배가 아니란 거 알아요. 당장 두 배를 주겠다는 얘기도 아니었고요.”
물론 여기서 끝이어서는 안 됐다.
사실 우진의 회사가 어디 굴지의 대기업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냉정히 평가하자면, 스물두 살 대표가 운영하는, 설립 한지 두달 도 채 안 된 구멍가게가 바로 WJ 스튜디오.
때문에 진태를 데려오려면, 그가 눈 딱 감고 몸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카드를 제시해야만 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지?”
“흐흐, 저 아주 진지합니다.”
우진이 소주잔을 집어 들자, 진태가 그 앞에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한번 끝까지 얘기나 들어보자. 여기서 무슨 헛소리가 더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니까.”
“흥미진진하죠?”
“장난 아냐. 이대로 집에 가면 오늘 잠 못 자.”
진태는 소주잔을 그대로 입속에 털어 넣었고, 우진은 한 모금 홀짝인 뒤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