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7화 (27/315)

27화

발아(發芽)

“어이, 박 부장!”

“오, 이게 누구야. 오주형이!”

관리부장인 박경완과 영업부장인 오주형은, 한 기수 차이인 선후배 관계였다.

박경완이 주형보다 일 년 먼저 입사한 선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이는 동년배였기에, 둘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 박경완 부장님, 못 본 새에 신수가 훤해지셨구만 그래.”

“너도 외국물 좀 먹어서 그런지 얼굴이 폈는데?”

“피기는 무슨. 죽겠다, 죽겠어. 하하.”

주형과 경완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일정이 바빠 거의 두세 달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었으니.

장소가 회의실이기는 해도, 반가움만큼은 진짜였던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을 오래 참을 순 없었던 것인지, 주형은 곧 회의실 앞을 힐끔거리며 경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경완아.”

“엉?”

“저기, 쟤들. 대체 모여서 뭐 하고 있는 거냐?”

회의 시작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모여서 웅성이고 있는 사원들.

주형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경완이 웃으며 반문하였다.

“아, 저거?”

사실 다른 사원들과 달리 경완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 회의장 안으로 ‘저 물건’을 들고 들어온 것이 경완이었기에, 그는 이미 질리도록 구경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경완은 이 상황이 재밌었다.

문제의 ‘물건’을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져온 작품으로 인해 모두가 놀라는 표정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인 경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오늘 회의에서 요리하게 될, 메인 디쉬라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하기 힘들어. 그냥 보면 알아.”

주형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대체 뭘 구경하는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음료수부터 뜯었다.

팅-!

다른 것 보다 우선 목이 너무 말랐으며, 젊은 과장급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도 체면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뭐, 회의가 시작되면 알 수 있겠지.’

다만 옆자리에 앉아 실실 웃고 있는 박경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갈수록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다행히도. 주형의 궁금증이 풀리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회의 시작합니다. 자리를 지켜 주세요.”

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으며.

단상 위에 올려있던 그 ‘문제의 물건’이, 곧 주형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본 주형은, 처음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건축모형이잖아?’

뭔가 특이하거나 대단한 것을 상상했던 그의 기준에, 건축모형이라는 것은 너무 평범했으니까.

하지만 실망도 잠시뿐.

곧 주형의 두 눈에는 이채가 어렸다.

멀리서 봐도 충분히 느껴질 정도로, 건축모형의 퀄리티가 평소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곧, 단상 위로 올라선 직원 둘이 바퀴가 달린 모형 다이를 밀어 회의장 가운데로 움직여 왔고.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주형은 점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대체 아파트 모형에 무슨 짓을 한 건데?’

대략 1~2미터 정도 거리까지 모형이 가까워지자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건축모형의 디테일.

그러나 주형의 그 놀람은, 거기서 시작됐을 뿐이었다.

딸깍-

작은 스위칭 소리와 함께 회의실의 전등이 절반쯤 소등되었고.

그와 동시에 모형의 안쪽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총 열일곱 동으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의 창에서 일제히 불빛이 새어 나오자, 그것은 흡사 도심의 야경을 찍어놓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와아…….”

누군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고,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뿐이지,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지이잉-

희미한 점멸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가장 고지대에 우뚝 솟은 아파트 두 채의 측면에 새로운 불빛이 점등되었다.

주형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모형 측면에 새하얀 빛으로 새겨진 멋들어진 타이포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Mapo Clio Prestige)…….”

임원진이 입장하기 전이었지만,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하였다.

다들 이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모형 앞에서, 저마다 생각에 잠긴 탓이었다.

사실 새로운 프리미엄 브랜드를 런칭 한다는 이야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회의실에 들어온 사원들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그런 생각을 않고 있었다.

정말 눈앞의 이 모형과 같은 퀄리티와 디자인으로 아현 뉴타운에 천웅건설의 깃발을 꼽을 수만 있다면.

도무지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았으니 말이다.

‘좋아, 됐어.’

좌중을 둘러본 경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진을 들들 볶아 오늘 이 회의실에 모형을 들여온 자신의 한 수가, 제대로 먹혀들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전무님께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늘었군.’

모형에 머물던 경완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모형을 받치고 있는, 하얀색 아크릴로 제작된 깔끔한 다이.

그 구석에 새겨진 WJ studio 라는 문구가, 경완의 두 눈에 각인되듯 스며들어갔다.

* * *

우진이 알 수는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의 전생에 런칭 됐던 천웅건설의 프리미엄 브랜드 ‘Clio’는, 사실 우여곡절이 무척이나 많았던 브랜드였다.

천웅건설의 보수적인 사내 분위기상 신규 브랜드의 런칭 자체가 크나 큰 모험이었고.

때문에 내부적으로 반대 의견이 제법 강경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반대이기도 했다.

CW라는 천웅건설의 기존 브랜드에서 지금까지 쌓아 온 인지도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외관디자인의 혁신과 별개로 브랜드만큼은 그대로 가는 편이, 확실히 안전한 선택지였으니까.

그래서 우진의 전생에서는.

내부에서 이어진 갑론을박 때문에, 아현 3-2구역의 착공이 시작된 이후까지도 단지의 브랜드가 확정되지 않았었다.

만약 해당 구역의 조합원들이 강하게 프리미엄 브랜드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Clio’는 런칭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 안에서, 재밌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Clio 브랜드의 홍보관 오픈이, 우진의 기억 속에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적 없던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진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말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던 것.

그래서 지금 경완이 추진 중인 브랜드 홍보관 오픈 계획은, ‘바뀐’ 미래였다.

우진이 모형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경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테고.

경완이 푸쉬하지 않았더라면, 홍보관 오픈을 두고 고민하던 재무팀과 마케팅팀이 결국 폐기했을 계획.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 하나의 미래가, 우진으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회의도, 어쩌면 우진으로 인해 바뀐 작은 미래 중 하나일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회의에 우진의 모형이 함께할 일은 없었을 것이고, 주요 안건이었던 프리미엄 브랜드 런칭 건은, 다시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우진이라는 변수와 경완의 추진력으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저거……. 디자인 생각보다 더 잘 빠졌는데?”

“단지 네이밍도 입에 착착 감겨.”

“보고서로 볼 때랑 느낌이 완전 다르네.”

“이거……. 잘하면 되겠는데?”

우진의 모형 덕에.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모두의 관심사는 이미, 프리미엄 브랜드 Clio였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 회의장에서는, 브랜드 런칭 계획과 관련된 모든 안건이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브랜드를 런칭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의는 이미 임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날쯤 모두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정해진 아파트 단지 이름은,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 였으니까.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것과 시각적 확신을 얻는 것에는, 그만큼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좋습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천웅건설의 이사이자 브랜딩 본부장을 맡고 있는 류준욱.

그의 말을 끝으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깐깐하기 그지없는 성향의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회의를 끝낸 것만 보아도, 회의 결과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한 번 제대로 뛰어 보십시다.”

그리고 분위기가 이쯤 되자, 사람들이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부분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실사 같은 모형을 만들어낸 ‘WJ studio’ 라는 업체의 정체.

몇몇 직원들이 그에 대해 물어봤지만, 경완은 말을 아꼈다.

어차피 설명을 해도, 누구도 믿기 힘든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이해시킨다고 힘 빼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마케팅팀장의 감사 인사를 들을 때만큼은, 경완도 만면에 떠오르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의 입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를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부장님, 이번에 진짜 거하게 한번 질러볼 수 있게 생겼습니다.”

“그래요?”

“류 이사님께서, 이쪽 예산을 확 올려주셨거든요.”

“하하, 그거 참 잘 됐네요.”

“남의 일인 듯 얘기하십니까, 왜.”

“네?”

“이사님께서, 박 부장님 오더 받아서 TF 팀 꾸리라고 하셨는데요.”

“……!”

프로젝트의 TF(Task Force)팀을 따로 꾸린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해당 프로젝트를 밀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권을 박경완에게 줬다는 것은, 그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

그리고 경완의 눈에 그 기회는, 임원 승진이 걸린 기회로 보였다.

‘이거, 이렇게 잘 풀려도 되는 건가?’

의아할 정도로 술술 풀리는 상황들에, 경완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물론 어느 정도 콩고물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전격적인 지원이 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권한 덕분에.

어쩌면 복덩이 꼬마 놈에게, 괜찮은 선물을 하나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완이었다.

“잘 한번 해봅시다, 팀장님.”

“하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참. 이번 홍보관, 청담 본관이죠?”

“당연하죠. 명색이 프리미엄 브랜드인데요.”

“VIP 명단도 미리 뽑아놔야겠고…….”

잠시 뜸을 들이던 경완이,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홍보관 내장작업, 아직 업체 정해진 곳 없죠?”

“네. 아마도요.”

“그럼 WJ 스튜디오에 한번 맡겨보는 건 어떻습니까?”

홍보관의 내부 디자인이야, 당연히 천웅건설의 디자인 팀에서 한다.

하지만 건설시공이 아닌 인테리어 시공의 경우, 외주로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WJ 스튜디오라면……. 이번에 모형 작업해온 거기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경완의 제안을 들은 마케팅팀장은 반색하였다.

이 정도의 모형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업체가, 일을 못 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거기라면 저희야 당연히 환영이죠.”

“하하. 저도 사실 그쪽이랑 다시 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럼 제가 한번 연락 넣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마케팅팀장과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눈 뒤, 엘레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박경완.

그렇게 우진이 뿌려둔 씨앗은, 그의 생각보다 더욱 빠르게 발아(發芽)하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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