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7화 (7/315)

7화

첫걸음

강원도에는 스키장이 많다.

보드 타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 우진은, 전생에서도 매년 한 번 정도는 강원도에 있는 스키장에 가곤 했다.

하지만 회귀 후 첫 스키장 방문에서, 우진은 그 좋아하던 보드를 만져볼 수조차 없었다.

“아니, 왜!”

“일정표에 없다니까, 오빠.”

“그럴 거면 대체 왜 여기로 오티를 오는 건데?”

“알겠냐? 나도 신입생인데?”

오티 목적지는 강원도에서도 큰 규모의 스키장 리조트였지만, 정작 학생들이 스키를 탈 수 있는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젠장.”

툴툴거리는 우진을 보며, 혜진이 피식 웃었다.

지금 우진은, 혜진과 함께 다니고 있었다.

영상디자인학과인 세영은 학교에서 출발할 때부터 다른 버스로 이동했고.

혜진도 딱히 공간디자인과 신입생 중에 지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우진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진도 오늘 아침에 만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혜진의 친화력 덕에,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오빠. 근데 오빠는 왜 공디과 지원했어?”

“우와, 그럼 군대도 다녀온 거야?”

“뭐야. 우리 언니보다도 나이가 많잖아? 할배네, 할배.”

노인네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곡(?)을 찔린 탓에 조금 버럭 할 뻔하기도 했지만…….

“아 알았어, 발끈하기는. 할배 소리 듣고 발끈하는 건 우리 삼촌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혼자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혜진과 함께하는 편이 좀 더 나은 것이 사실이었다.

‘뭐……. 심심한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조교의 인솔에 따라, 오티가 진행되는 대강당에 도착하였고.

그의 안내에 따라, 강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간디자인과 신입생분들은, A열부터 C열까지 앉으시면 됩니다!”

조교의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학생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흠. 이쪽에 앉은 친구들은 전부 같은 과 동기라는 얘기겠네.’

그리고 곧, 살짝 어색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학부답게 신입생 대부분이, 여학생들로 구성되어있었으니 말이다.

공간디자인과의 정원 55명 중, 얼핏 봐도 여자의 비율이 마흔 명은 넘어 보였던 것.

항상 현장의 땀내 나는 사내놈들 사이에서 생활해 오던 우진으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꽃밭이라 할 수 있었다.

‘여초학과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물론 우진도 남자다.

때문에 개중에 눈에 띄는 예쁘장한 여학생들을 발견할 때면, 절로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비롯하여…….

“할배, 뭐하냐?”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우진을 응시하는 방해꾼 덕에, 그 기분 좋은 시간이 오래 이어질 수는 없었다.

“너 자꾸 그렇게 태클 걸면…….”

“뭐. 그러면 뭐.”

“오전에 소개팅 건, 나가리 되는 거 알지?”

“아, 오빠 잠깐. 아니, 오라버니……!”

단숨에 태세전환을 하는 혜진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얘기했던 소개팅 제의란, 바로 그의 맞후임이었던 김성관과의 소개팅 주선.

성관은 까만 눈썹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 축에 속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그의 사진을 본 혜진이, 소개팅 주선을 졸라댔던 것이다.

물론 혜진도 외모가 빠지는 편은 아니었기에, 우진이 흔쾌히 수락했었지만…….

‘흐흐. 적어도 오티 하는 동안에는 이걸 좀 우려먹을 수 있겠군.’

건방진 꼬마 녀석의 버릇을 고쳐주기 전까지는, 약속을 잠깐 보류할 용의도 있었다.

“너 하는 거 봐서.”

“하……. 이 야비한 노인네…….”

“후후. 일단 3점! 감점 되셨구요.”

“감점 말고 가산점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건가요……?”

“글쎄.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야 되는 거 아닐까?”

“히잉…….”

두 사람이 강당에서 티격태격하던 사이.

몇백 자리는 족히 되어 보이던 강당의 의자는, 금세 거의 다 들어찼다.

그리고 실내가 점점 더 시끌벅적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즈음.

지이잉-

강당 전면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 갑자기 환한 불이 들어오며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시끄럽던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어서 자연스레 그 스크린을 확인한 우진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오호. 저게 오늘 일정인가 본데?”

우진과 마찬가지로 스크린을 응시하던 혜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러게. 심플하네.”

그런데 잠시 후.

“……!”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두 사람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스크린의 하단부에 고정되었다.

표제만으로도 지루해 보이는 앞단의 순서와 달리, 마지막 순서는 단번에 둘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니 말이다.

Step5 – 디자인의 밤.

디자이너로서의 첫걸음을 뗀 신입생 여러분의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내는 시간입니다.

……후략……

만약 지하철에서 혜진과 세영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우진은 고개를 갸웃 했을 것이다.

‘디자인의 밤’이라는 표제는 너무 추상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경연’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지금.

우진은 본능적으로 이 순서가 디자인 경연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거…….”

그리고 그것은, 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맞아, 오빠. 아무래도 이게 경연 같은데?”

“그렇지?”

우진은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에 떠 있는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 내용에도, 딱히 경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다만 우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마지막 한 줄의 문장이었다.

디자인의 밤은 여러분들의 축제입니다.

그리고 이 밤은……. 여러분의 상상보다 훨씬 더 긴 밤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진은 스크린의 설명을 보며, 뭔가 경연에 대한 힌트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긴 밤이 될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경연에 대한 우진의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스크린이 띄워져 있는 강단의 위로, 저벅저벅 걸어 올라가는 누군가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어……?”

우진의 두 눈은, 저도 모르게 확대되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시점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낯익은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김기태……? 저놈이 대체 왜 여기에?’

볼륨감 넘치는 가르마 펌을 한 말끔한 헤어스타일에, 까만 뿔테안경을 쓴 남자.

그는 우진이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설마 저놈도……. K대였어?’

한껏 멋을 부린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한 우진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살짝 일그러졌다.

* * *

우진과 김기태의 인연은, 당연히 전생에서의 그것이었다.

서울 토박이나 다름없는 우진과 달리 김기태는 해외에서 나고 자란 유학파 출신이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이도 우진보다 너댓 살 정도 더 많았으니 말이다.

우진이 전생에서 김기태를 처음 만났던 것은, 서른이 훌쩍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서반장님. 데피노스 디자인사무소 김기탭니다.]

우진이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김기태는 스페인에서 손에 꼽힐 만큼 유명한 건축사무소인 ‘데피노스(De Pinos)’의 디자인 팀장이었다.

당시 데피노스는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처음 맡았던 업체였고, 우진은 그들로부터 외주를 받은 하청업체의 목공반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첫 만남이, 사실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데피노스는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건축사무소였고.

그들은 우진의 팀에게, 대금을 후하게 지급하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김기태의 어투가 한 번씩 고압적일 때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현장에서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에, 크게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2층 대리석 타일 마감, 왜 이렇게 지저분해요?]

[분전함 위치가 너무 툭 튀어나와 있잖아요. 이런 건 알아서 벽체 안쪽으로 숨겨주셔야지…….]

굳이 따지자면……. 조금 재수 없고 까탈스러운 유학파 매니저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부분으로 트집을 잡거나 생떼를 쓰는 것은 아니었기에.

우진도 그렇게 큰 불만을 갖지는 않았었다.

준공을 한 달 정도 남겨놨을 무렵.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아니. 서반장님.]

[예?]

[여기 3층 필로티 위에. 대체 왜 이렇게 사선으로 가벽이 쳐져 있는 겁니까?]

[네? 그야, 도면이 그렇게…….]

[뭐라고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대체 도면에 이런 괴상망측한 구조가 어디 있다는 겁니까?]

[……?]

[하……. 미치겠네. 본사에 올려서 손해배상 청구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분명히 도면 주신대로 작업했고.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팀장님이 감리를…….]

건축물은 설계 과정에서, 도면이 수십, 수백 번 변경된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예산에 따라. 그리고 건축법에 따라.

가장 완벽에 가까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수 없이 변경되는 것이 건축도면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김기태와 진행했던 이 프로젝트도, 현장 미팅 과정에서 실시설계가 최소 다섯 번 이상은 바뀌었었다.

그 과정에서 김기태가 클라이언트와 소통을 잘못하여, 일부 도면이 잘못된 구조로 시공된 것이다.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우진의 건축 인생에서 이정도의 대형 사고는, 딱 두 번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끔찍했던 것은, 김기태가 자신의 실수를 서우진에게 덮어씌웠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누락시켰던 도면을 교묘히 바꿔치기까지 하며,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말이다.

[여기, 날짜별로 정리된 도면 파일 보이십니까?]

[…….]

[저희 데피노스는 분명 제대로 된 도면을 전달 드렸고, 반장님께서 시공을 잘못된 도면으로 진행하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의 결말은,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흘러가진 않았었다.

애초에 잘못 시공된 도면도 끝까지 변경안과 함께 고민하던 원안이었고.

때문에 디자인 자체는, 나름 괜찮게 뽑혔으니 말이었다.

하여 책임소재 여부와 별개로 클라이언트가 잘못 시공된 부분을 눈감아주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그 사건 이후로, 우진은 김기태를 경멸했지만 말이다.

[인생 그런 식으로 사시는 거 아닙니다, 팀장님. 이번에야 운 좋게 넘어가셨지만……. 이 바닥 좁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하하. 이 양반, 본인이 잘못해놓고 계속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하시네.]

[…….]

[그리고 말 한번 잘하셨는데. 말씀하신 대로 이 바닥 좁습니다.]

[……?]

[그리고 전 이렇게 좁은 바닥에서, 앞으로 이런 조막만 한 프로젝트 진행할 일 별로 없을 겁니다. 데피노스는 글로벌 기업이니까요.]

오랜만에 잊고 있던 최악의 기억이 떠오른 우진은, 좋았던 기분이 확 다운되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불쾌한 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그 쓰레기 같은 기억이, 김기태에게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일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우진이 지금 달려나가 김기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면.

우진만 나쁜 놈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거 은근히 기분 묘하고 더럽네.’

그리고 썩어들어가는 우진의 표정을 눈치챈 것인지, 옆에 있던 혜진이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물었다.

“오빠……? 갑자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혜진의 목소리에 감정을 추스른 우진은, 김기태에게서 시선을 떼고 살짝 눈을 감았다.

‘그래. 뭐, 회귀했다고 저 개 같은 놈 본성이 어디 가겠어?’

이번 생에서도 김기태와 부딪칠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우진은 굳게 다짐하였다.

놈은 분명 이번 생에서도 더러운 짓을 저지를 놈이었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전생의 빚을 배로 갚아 주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진이 속으로 감정을 삭이고 있던 그때.

강당에 김기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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