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첫걸음
O.T(OrienTation)란, 영문단어가 가진 뜻 그대로 ‘예비교육’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새내기들에게 O.T라는 것은,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대학O.T란 특별히 어떤 교육을 받으러 가는 자리라기보단.
대학 생활의 기분을 처음 내 볼 수 있는, 대학문화의 체험판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에 더해 처음 성인으로서 자연스레 음주 가무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게 되다보니.
새내기들의 입장에서는 설레는 것이 어쩌면 너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정신연령이 마흔이 넘은 우진에게, 술 게임 같은 것이 기대될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술이야 회사 다닐 때 지겹도록 마셨지.’
다만 우진이 설레는 이유는, 이 O.T라는 행사가 가지는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었다.
전생에서 걸어보지 못한 한 걸음을 처음으로 내딛는다는 상징성.
‘흐, 흐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설렘의 감정이, 무거워진 눈꺼풀까지 들어올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우진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이 족히 넘는 거리였고.
피로와 별개로 지하철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생각보다 더 지루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후, 멀긴 머네. 자취라도 생각해야 하나?’
앉은 자리 건너편에 붙어있는 노선도를 확인하던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취를 하던 차를 사던 어머니 도움은 바랄 생각이 없었고, 때문에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라도 있었으면 좀 덜 심심했을 텐데…….’
손에 들린 낡은 폴더 폰을 잠시 응시하던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우진은 스마트폰의 빈 자리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우진이 회귀하기 전 2030년대의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만능기기나 다름없었으니까.
‘구닥다리 초기세대 스마트폰이라도 구매해야 하나…….’
덜컹- 덜컹-
이른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지하철은 한적했다.
덕분에 우진은, 구석 자리에 앉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회귀 이후 1분 1초라도 허투루 보내기 싫다는 강박관념이 조금 생겼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는, 자는 것이 남는 것이다.
‘한 삼십 분 정돈 잘 수 있으려나.’
하지만 우진은 예상과 다르게, 그리 오래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대충 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음……?’
제대로 잠에 들기도 전에, 우진의 흥미를 동하게 하는 목소리들이 귓전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혜진아, 우리 잘못 탄 건 아니지?”
“당연하지. 내가 노선도만 세 번 확인했어. 걱정 붙들어 매시라구.”
“으으……! 떨린다! 오티라니……. 오늘이 오티라니!”
재잘재잘 떠드는 두 여학생의 목소리에, 우진은 저도 모르게 슬쩍 눈을 떴다.
우진의 잠이 깬 것은, 당연히 오티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오티라고? 같은 학교 학생인 건가……?’
물론 같은 날 오티를 가는 다른 대학교가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하철 노선도와 지금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아주 높은 확률로 같은 학교 학생일 것이었다.
‘같은 과일 확률은 낮겠지만…….’
우진은 티 나지 않게 슬쩍 시선을 돌려, 방금 지하철에 오른 두 여학생을 응시하였다.
눈에 확 띌 정도로 예쁜 것은 아니었지만, 풋풋한 차림새에 생기가 도는 외모를 가진 귀여운 여학생들.
하지만 잠시 관심을 가졌던 우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 애기들이네 애기들. 하…….’
순간 여학생들이 조카뻘로 느껴지는 것이, 뭔가 죄짓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젠장. 이래서 연애나 할 수 있으려나……. 대학교에 가면 CC도 해보고 해야 하는데 말이야.’
전생의 우진은 노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모태솔로는 아니었다.
외모가 못난 것도 아니고 성격이 모난 것도 아니었으며, 키도 훤칠하고 비율도 괜찮았으니.
전생에서도 연애까지는, 남들만큼 충분히 해봤던 것이다.
다만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고 꿈을 쫓다보니, 결국 아무도 그의 곁에 남지 않았을 뿐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천천히 이십 대 초반에 동화되는 느낌이긴 하니까.’
처음에는 젊어진 어머니의 모습도, 퇴보한 시대환경도. 너무 어색할 수밖에 없던 우진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그런 것들도 다 적응이 되어 갔으니.
우진은 마음 편히 생각키로 하였다.
결국 세월에 찌들어버린 이 정신연령과 감성까지도, 자연스레 이십 대에 맞춰질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하지만 잠시 후.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우진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관심을 접었던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다시 우진의 귓전으로 쏙 들어박혔으니까.
그것도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다.
“저, 저기요……?”
그것은 분명, 우진을 부르는 목소리.
“네? 저요?”
“네네. 그쪽이요.”
우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말을 걸어온 여학생과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이어서 우진에게 다가온 여학생, 임혜진이, 조심스레 그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K대 공간디자인학과 신입생이세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우진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 삼킬 수 밖에 없었다.
* * *
처음 혜진의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독심술이라도 익힌 것이 아니라면, 처음 보는 자신의 학교와 학과를 알 수가 없을 테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어진 이야기를 듣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휴, 또 귀신이라도 만난 줄 알았잖아?’
그녀가 우진의 학교와 학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반쯤 삐져나와 있던, 오리엔테이션 명찰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제법 큼지막한 명찰의 구석에는 ‘공간디자인 학과’ 라는 글씨가 떡하니 인쇄되어 있었고.
그것은 혜진이 가진 명찰과 같은 디자인의 명찰이었다.
“이야, 넌 눈도 좋다. 그걸 어떻게 찾았대?”
“몰라. 그냥 순간적으로 보였어.”
자신의 앞으로 와 재잘거리는 두 여학생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었다.
그녀들의 이름은 임혜진, 유세영이라 하였고, 우진과 달리 나이는 둘 다 스물이었다.
예상대로 둘 다 K대 학생이 맞았고 말이다.
심지어 우진에게 말을 건 혜진은, 그와 같은 공간디자인학과 신입생이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겠지. 뭐, 나였더라도 같은 과라는 것까지 알았으면……. 꽤나 반가웠을 테니까.’
K대의 신입생은 한 해에 천 명이 넘는다.
하지만 공간디자인과 신입생의 숫자는, 많아야 오십 명을 넘지 않았다.
때문에 단지 같은 학교 신입생인 것과 같은 과 동기라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거 은근히 반갑네요. 제가 원래 이렇게 막 모르는 사람한테 말 잘 걸고 그런 타입은 아닌데…….”
혜진은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말 끝을 흐렸고, 우진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하하. 과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을 텐데, 잘됐죠 뭐. 오티 가서 심심하지는 않겠네.”
우진의 대답에, 이번에는 세영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녀는 혜진과 달리 공간디자인 학과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건물을 쓰게 될 학생이었다.
세영의 과는 영상디자인학과였다.
“어차피 오티에서, 심심할 일은 없었을 걸요?”
그녀의 말에, 우진이 반문하였다.
“네? 그게 무슨……?”
그리고 어리둥절한 그의 표정에, 세영이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오빠, 정보가 하나도 없네.”
우진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회귀자에게 정보를 논하다니.
‘나만큼 이 학교 조사를 많이 한 사람도 없을 텐데…….’
하지만 그는 잠자코 세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세영은 놀랍게도, 정말 우진이 몰랐던 정보를 꺼내었다.
“다른 과는 몰라도 디자인학부 오티는……. 거의 전쟁이에요.”
“전쟁? 무슨 전쟁이요?”
세영이 씨익 웃으며 답하였다.
“첫 학기 등록금이 걸린 전쟁이랄까요……?”
잠시 뜸을 들인 세영이 천천히 말을 이었고, 그 이야기를 듣던 우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 * *
우진이 K대학에 대해. 정확히는 K대의 디자인학부에 대해 조사했던 것은, 회귀 전인 전생이었다.
결국 입학하지는 못했었지만, 수십번도 넘게 입학을 고민했던 학교였으며.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대학에 대한 미련이 생길 때면,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K대였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세영의 이야기는, 그런 우진에게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매년 K대 모든 과에는, 특별장학금 티오(T.O)가 과마다 세 개씩 나와요. 하나는 전액 장학금. 나머지 둘은 반액 장학금이죠.”
T.O는,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이다.
학교 뿐 아니라 어느 집단에서나 통용되는, 조직의 정원이나 자릿수를 의미하는 단어.
“그리고 이건 약간 전통 같은 건데, 디자인학부는 그 특별장학금의 주인을 매년 O.T에서 뽑아요.”
“그럼 그 특별장학금이라는 건, 신입생밖에 못 받겠네요?”
“그렇겠죠. 뭐, 고학년에게 줘도 문제는 없는……. 학과장 재량 장학금이라는데. 지금까지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대요.”
세영의 말에 의하면 K대의 디자인학부는, 매년 오티에서 그 특별장학생을 뽑기 위한 경연을 벌인다고 한다.
그 경연에서 정해진 1, 2, 3등에게, 각각 장학금이 주어지는 것이다.
‘반액만 되도 최소 200 이상이잖아?’
때문에 우진의 입장에서도, 이건 제법 혹할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등록금을 아낄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을 벌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니 말이다.
“경연은 어떤 식으로 하는데요? 디자인…… 과제라도 내주는 건가?”
우진의 물음에, 이번에는 혜진이 대답하였다.
“아마 그렇겠지만, 자세한 부분은 저희도 잘 몰라요. 매년 방식이 바뀐다고도 하고……. 학과마다, 담당 교수마다,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고 들었어요.”
우진은 제한된 정보가 살짝 아쉬웠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장학금도 장학금이었지만.
디자인 경연이라는 그 컨텐츠 자체가, 그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재밌네, 이거.’
경연 상대가 새파란 조카뻘들이라는 생각도 잠깐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지워졌다.
어찌됐든 전생의 우진은 디자이너가 아니었고.
때문에 디자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큼은, 다른 학생들과 출발선이 다를 게 없었으니까.
“이건 어떻게 알았어요?”
우진의 물음에, 세영이 혜진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얘 언니도, 디자인학부 학생이거든요. 과는 저희랑 다르지만요.”
“아하.”
경연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세영과 혜진은 과에 대한 이야기들을 제법 많이 해 주었다.
학부에서 유명한 괴짜 교수라던가.
디자인학과에서 많이 쓰는 은어 같은 것들 말이다.
“언니가 김기환 교수 수업은 웬만하면 피하라던데…….”
“그래? 그분 너네 과 교수 아니야? 시디(시각디자인)다니는 언니가 어떻게 알아?”
“언니 우리 과 수업 몇 번 들은 적 있거든.”
“아하.”
“그 교수 수업 듣는 동안, 언니 거의 집에 들어 온 적이 없어.”
“그 정도야?”
“이틀에 한 번은 야작했다고 하던데?”
“야작이 뭐에요?”
“야간작업의 약자일걸요.”
“아…….”
물론 경연에 대한 내용만큼 흥미로운 정보는 더 없었지만, 그래도 우진은 충분히 흥미롭게 들었다.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 듣는 이야기들은 전부 신선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우진은 K대학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대외적인 내용이다.
때문에 이런 학부 내의 자잘한 이야기들은, 우진의 입장에서 재밌기까지 하였다.
“정보 고마워요.”
우진의 말에, 세영이 웃으며 대답했고.
“별말씀을요.”
혜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오빠.”
“음?”
“이제 서로 말은 편하게 하는 게 어때? 어차피 동기인데.”
본인을 내성적이라고 소개했던 혜진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거짓말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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