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요리사입니다만. (3)2021.12.03.
얼마나 달렸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될 때까지 제트스키를 타다 보니 어느샌가 옆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컷! 커엇!”
응?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또 한 대의 제트스키가 보인다. 그 위에는 슈트를 입은 남자가 보였고, 뒤쪽엔 카메라맨이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다. 저런 상태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피식하고 웃고 있는데, 카메라맨이 서둘러 외쳤다.
“서 셰프님! 촬영 끝났대요!”
“아! 그, 그래요?”
벙찐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핸들을 꺾었다. 잠시 후 계류장에 제트스키를 대고 뭍으로 오르자, 권태홍 감독이 후다닥 달려온다. 한데, 그 뒤에……. 김서연? 저 여자는 왜 또 온 거람. 흠칫했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 셰프님! 굳입니다, 굳!”
엄지를 척 치켜세우더니 권태홍 감독이 혀를 내둘렀다. 너무 오바하는데?
“와아! 엄청 잘 타네요! 선수 해도 되겠어! 말해봐요! 또 뭘 잘해요! 응? 혹시 압니까? 촬영에 도움이 될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취미로 배운 건데요, 뭐.”
“무슨! 내가 보기엔 완전 수준급인데! 저기 저 양반도 그러더만. 제트스키 모는 수준이 프로라고!”
권태홍 감독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강사 한 명이 고개를 까딱거리는 게 보인다.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녜요. 프로는 무슨.”
그냥…… 요리사입니다만. 단지 나레이션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요리사긴 하지만.
“아닌데. 내가 보기엔 또 뭔가 있을 거 같은데……. 뭐, 좋습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저번에 김 회장님 보니까 조만간 또 광고 찍을 거 같던데, 그때 확인해보면 되겠죠. 흐흐흐. 아무튼, 오늘 정말 끝내줬습니다!”
다시 한번 권태홍 감독이 호들갑을 떨고 난 뒤, 김서연이 가만히 다가와 말한다.
“또 뵙네요.”
“예. 잘 계셨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 보이는 그녀였다. 저 얼굴 위로 왜 갑자기 이하연이 겹쳐 보이는지 모르겠다. 살짝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돌아서 걸음을 내딛는데, 데크에 찍힌 내 발자국이 보인다. 젖어 있는 맨발 위로 발목부터 이어지는 다리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제트스키를 타는 동안 흠뻑 뒤집어쓴 물보라 때문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젖어있다. 그래도 뭐 상관은 없지만. 슈트를 입고 있었던 터라 간단히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될 터다.
“서 셰프! 진짜 수고 많았어요!”
권태홍 감독이 날 따라오며 웃어 보인다.
“뭘요. 감독님이랑 스텝분들이 더 고생했죠.”
“하하하. 그럼 얼른 옷 갈아입으시고 추가 촬영하도록 하죠. 얼마 안 되니까, 한 시간이면 끝날 겁니다.”
*** 권태홍 감독의 말대로였다. 재촬영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추가 촬영에 불과했고, 그 덕분에 해가 지기도 전에 끝낼 수 있었다.
“자자!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죠! 제가 잘 아는 집이 있는데, 거기서 대게나 좀 먹고 올라갑시다!”
오늘 촬영한 분량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기롭게 외치는 권태홍 감독을 보다가 말했다.
“죄송해서 어쩌죠? 저, 약속이 있어서 먼저 좀 가봐야 할 거 같은데.”
“어? 그래요? 흠, 하는 수 없죠. 그럼 편집 끝난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고요.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예, 감독님도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김서연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안 가세요?”
“먼저 가세요. 전 감독님이랑 얘기 좀 하다가 출발할게요.”
“아, 예……. 그럼.”
돌아서기 전 그녀를 봤는데, 날 보는 눈빛이 어째 마음에 걸린다. 뭐, 상관없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촬영지를 벗어났다. ***
“왜 올라오라고 하는 거지?”
호텔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선 이하연에게 내려오라고 전화를 하자, 그녀가 오히려 나더러 올라오란다. 뭐냐고 묻기도 전에 끊어버려서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다. 띵. 1층에서 중간에 멈춰선 엘리베이터로 누군가 타려다 말고 날 보곤 멈칫한다. 여행을 온 건지 두 명의 여자였는데, 그중 하나가 날 알아본 듯하다.
“저…….”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아는 체한다.
“서진영 씨 아닌가요?”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표정을 편하게 했다. 그러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곤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어색하다…… 진짜.
“어머! 맞네! 맞아.”
손뼉까지 치며 웃더니, 여자가 대뜸 핸드폰부터 내민다.
“사진 찍어도 돼요?”
이십 대로 보이는데, 쾌활하다 못해서 발랄하기까지 하다. 어느새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까지 가세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진 촬영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고 나서야 객실이 있는 6층에서 내릴 수 있었다.
“여행 잘하세요!”
귀엽네. 내게 손까지 흔들며 인사하는 여자들을 뒤로 한 채 복도를 걸어 나갔다. 잠시 후, 객실 안으로 들어선 나를 이하연……으로 짐작되는 이가 맞았다.
“뭡……니까?”
얼굴 반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 이마까지 깊게 눌러쓴 검은색 야구모자. 길게 내려오던 머리칼은 돌돌 말린 채 모자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 상태로 그녀가 씩 웃는다. 그러더니 내게 왁하고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뒤로 물러나려다가 발이 엉키며 넘어졌다.
“왜, 왜 그래요?”
엉덩방아까지 찐 뒤, 놀라서 소리치는데……. 이하연이 막무가내로 내 얼굴을 만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황당해서 뭐라고 하려고 할 때,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만있어 봐요. 이러고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본다니까 그러네.”
*** 하아…….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언제 준비한 건지는 몰라도, 그녀가 내게 씌워준 선글라스와 모자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코까지 확실하게 가려주는 검은색 마스크가 단번에 시선을 강탈한다. 이게 더 눈에 띄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는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더니 불쑥 말했다.
“지금,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어떻게 알았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또 한 번 웃어 보였다.
“진영 씨는 어떨 때 보면 진짜 순진한 거 같아요.”
“흠, 칭찬?”
“쿠룹! 그렇게 들려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하연이 또다시 킥하더니 내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를 매만지며 얘기한다.
“셀럽님, 자각 좀 하시죠. 언제 어디서 핸드폰을 들이댈지 모른다니까요. 저야 괜찮지만, 스캔들 기사라도 나면 어떡해요.”
오히려 내 쪽이야말로 괜찮은 거 아닌가? 만일에 하나라도 사진 찍혀서 SNS에 오르락내리락하면 정작 피해 보는 건 이하연 쪽일 텐데. 혹여라도 기사가 나면 대현 그룹 측에서 가만있을 거 같지도 않고.
“알겠어요.”
“…….”
“알겠는데, 왜 나만 마스크를 쓰는 거죠?”
내가 묻자, 그녀가 입을 씰룩거린다. 마스크가 없어서 확실하게 잘 보이는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쿡하고 웃음을 토해냈다.
“왜긴요. 불편하니까 그러죠.”
*** 왜 나만 마스크를 해야 하는가. ……하는,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납득해버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변장 아닌 변장을 해야 하는 건 나지, 그녀가 아니니까. 그런데도 이하연 쪽 역시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일 터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의리? 같은 마음 아닐까? 하긴, 나 혼자만 이러고 다니면 굉장히 부끄러울 거 같단 생각이 들긴 한다.
“이게 꿀빵인가 봐요!”
통영 중앙시장. 건어물 거리를 지나자 꿀빵 가게가 보인다.
“얼른 들어가요.”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건지. 이하연이 내 손을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1963년부터 만들어왔다는 꿀빵. 꿀빵을 샀더니 책자와 명함까지 덤으로 주시길래 읽어보니 아주 오래된 가게였다.
“아앙.”
이쑤시개로 꿀빵을 콕 찍어서 내미는 이하연. 그녀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릴 수밖에. 맛있네. 빵은 매우 얇고, 안에 든 팥소의 양은 무지 많은 데다가 덩어리가 거의 없이 무척이나 부드러운 식감이다. 이거 우유랑 먹으면 맛있겠는데?
“꿀맛이네요, 그쵸?”
그녀가 묻길래 픽하고 웃고는 물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요?”
봉지를 들어 보이자, 이하연이 배시시 웃는다.
“사람들 갖다주려고요.”
나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열 개씩 들은 팩을 무려 스무 개나 사는 건 좀.
“어! 저기 봐요! 대하다!”
꿀빵 거리를 빠져나오자, 활어 특화 거리가 보인다. 사방에 보이는 해산물들. 전복에 새우, 가리비, 종류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활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굴까지.
“우럭 좋아해요?”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인다.
“엄청요. 근데 도미도 좋아요.”
“그래요?”
속으로 웃으며 아주머니께 물었다.
“이거 한 마리에 얼맙니까?”
“아이고, 생선 볼 줄 아시네. 오늘 아침에 들어온 놈인데, 참말로 실하다니까. 3마리 해서 3만 원에 줄 테니까 얼른 가져가요.”
“그래요? 그럼 광어는요?”
“것도 좋지. 같은 가격에 4마리 줄게요.”
“둘 다 주세요. 다 먹을 수 있죠?”
“헷, 없어서 못 먹죠.”
또 한 번 느끼는 건데, 이 여자 참……. 입맛만큼은 누구보다 소탈하다. 게다가 잘 먹고. 안 그래도 큰 눈을 반짝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그녀를 보다가 킥하고 웃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회를 뜨다 말고 물어온다.
“신혼인가 봐요?”
“예?”
“엄청 다정해 보여, 두 사람.”
“그쵸?”
안 그래도 가깝게 서 있던 이하연이 내 팔짱을 덥석 끼더니 찰싹 달라붙는다.
“아주 그냥 깨가 쏟아지네, 쏟아져. 진짜 좋을 때다.”
아주머니의 얘기에 그녀가 히힛 거리더니 손가락으로 오징어를 가리킨다.
“에잇, 기분이다! 저것도 주세요!”
“그럴까?”
신바람이 난 건 이하연만은 아닌 듯하다. 함박웃음을 띤 아주머니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 쇼핑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양손에 든 짐이 생각보다 많다. 광어와 도미가 회가 되어 봉지 안에 들어 있었고, 오징어도 두 마리나 들어 있다. 거기에 더해서 아주머니가 서비스로 준 멍게와 가리비까지. 십만 원어치라고 하기엔 푸짐한 양의 해산물에 아까 산 꿀빵까지 더해지자 손이 모자랄 지경이다.
“막걸리도 한 병 사 가야죠.”
“이거 다 먹을 수 있어요?”
“아이참, 이 정도도 못 먹으면 어떡해요? 당연히 다 먹고 자야죠.”
손이 큰 건지, 속이 큰 건지.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편의점에 들러 술과 음료수까지 사서 호텔로 향했다.
“밥은 안 먹어도 되겠어요?”
“회 먹을 배도 없는데, 밥은요. 얼른 가요. 식기 전에 빨리 먹어야죠.”
응? 회가 식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하연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 만에 도착한 호텔.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선글라스에 모자, 거기에 마스크까지 꼈는데 누가 알아볼까 싶었던 것이다. ***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 검은 봉지를 양손에 든 서진영. 그의 팔뚝에 매달리듯 팔짱을 낀 이하연. 두 사람이 다정하게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둘 다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 있었으니까. 그걸로 모자랐는지, 서진영은 검은색 마스크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누군들 알아볼까. 통영이라는 도시 자체가 여행지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호텔을 드나들곤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도로에 검은색 승용차의 차창이 내려간다. 지이이잉. 창문이 내려진 실내로부터 커다란 렌즈가 불쑥 튀어나왔다. 찰칵찰칵. 흔히들 백마라고 부르는 100mm 렌즈가 향한 곳에 서진영과 이하연의 뒷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쉴 새 없이 찍어대는 카메라. 잠시 후, 다시금 차창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검은색 승용차가 조용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