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요리사입니다만. (2)2021.12.01.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지난번 촬영 때 여기 와서 보았던 제트스키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탈 줄 모르…….”
따라라라라, 라라……. 나레이션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 제트스키는 물 위의 오토바이라고 할 만큼 조종법이 단순하지만, 생각 없이 운전하면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하게 튀어나가기 때문에 액셀 레버는 손가락 한두 개만 이용해 아기 다루듯 살살 조절해야 한다. 시동을 켜는 방법은…….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나레이션이 제트스키 타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걸. 음, 이건 완전히 개인 강습인데? 레이싱할 때가 떠올랐다. 설명만 듣고 있자면 당장에라도 탈 수 있을 거 같다. 그렇다곤 하지만, 과연 내가 제트스키를 몰 수 있을까? 레이싱이야 최소한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상태에서 운전기술만 배우면 되었으니 가능했던 거지, 만일 면허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거 아닌가. - 서진영이 해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제트스키를 모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딱 한 가지만 믿으면 지금의 그도 얼마든지 탈 수 있다. 뭘 말하려는 걸까? 난 나레이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제트스키를 믿어라.
“……!”
뭘 믿어? 의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자기 자신, 즉 나레이션을 믿으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기계를 믿으라니. 하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그러니까 뭐야. 제트스키의 메커니즘 자체가 워낙 잘 설계되어 있어서, 기본 수칙만 잘 지킨다면 운전자의 안전은 충분히 보장된다는 얘기군. 계속해서 듣다 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레이션이 뭘 얘기하려고 하는지를. 제트스키는 오토바이와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 뿐만 아니라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어 그냥 놔둬도 물 위에 떠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 운전자가 물속에 빠진다고 해도 제트스키가 동심원으로 회전해 빠진 사람에게 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단다. 게다가 주행 시 반드시 안전 팔찌를 끼게 돼 있는데, 이 팔찌가 제트스키와 분리될 경우 시동이 곧바로 꺼지게 돼 있다나? 그렇기 때문에 운전자가 물에 빠져도 제트스키가 홀로 멀리 달아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오, 이거 할 만하겠는데?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바꿨다.
“큼, 잘 타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몰 줄 압니다.”
대답을 들은 권태홍 감독이 반색한다.
“그래요? 역시!”
눈을 반짝이는 그를 보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훤하다. 레이싱 때 재미 좀 보더니 이번에도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뭐, 그렇다면 어울려주는 수밖에. 나야 나레이션만 믿으면 될 테니까. 일대일 개인 강습이랄까? 아마 그때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다 가르쳐줄 테지.
“서 셰프님!”
권태홍 감독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서는 걸 보면서 속으로 웃고 말았다. *** 원래는 없던 장면인지라 당연히 대본 수정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권태홍 감독이 이미 대본을 수정해왔다나? 어처구니없었지만, 잘됐다 싶다. 괜스레 촬영시간이 길어지면 그 시간만큼 이하연과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게 될 테니까.
“이게 안전 팔찌인가?”
선창 앞에 세워져 있는 제트스키에 올라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안전 팔찌를 차는 일이었다. 그러곤 차분하게 나레이션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시동 버튼을 누르니 부르릉하고 시동이 걸린다. 핸들 밑 오른쪽 아래에 있는 기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크는 따로 없다고 하더니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오른쪽 손잡이에 달린 액셀로 속도를 조절하는데, 레버를 놓으면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멈추게 된다고 했다. 그거야 뭐, 해보면 알 테고.
“서 셰프님! 준비되셨습니까?”
저만치서 보조감독이 물어온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해주세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오케이 신호를 보내곤 천천히 액셀 레버를 당겼다.
퉁!
“헉!”
제트스키가 급속도로 튀어나가는 바람에 체중이 앞으로 쏠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바다에 빠질 뻔했다. 밀려오던 파도의 새하얀 포말이 선체를 강타하며 튀어 올랐다. 구명조끼 대신 전용 슈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젖는 건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솔직히 식겁했다. 그때,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레버는 꽉 쥐지 말고 손가락 두 개로 달걀을 감싸 쥐듯 가볍게 잡는다. 그런 뒤, 천천히 당긴다. 나레이션이 시키는 대로 하자, 제트스키가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한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느껴진다. -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다. 양쪽 허벅지는 가능한 제트스키에 밀착하고, 항상 핸들의 중앙 부분을 가슴 한가운데와 일직선이 되게 일치시킨다. 또한, 좌회전 혹은 우회전할 경우 제트스키가 기우는 방향대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부다다다당. 엔진음과 함께 제트스키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좋아. 제대로 타보는 거야. 속도를 높이자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게 느껴진다. 어어…….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중심이 흐트러진다. 이럴 때 무게중심을 맞춘다고 제트스키가 기우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맡기면 안 된다고 했지? 후아……! 생각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자꾸만 본능적으로 제트스키가 기우는 반대 방향으로 몸이 기울어지고, 핸들은 핸들대로 잘 돌아가지 않아 따로 놀고 있다.
“큭!”
- 제트스키를 믿어라. 다시 한번 들려오는 나레이션을 들으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몸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동시에 핸들을 확 꺾었다. 안 그래도 올라간 속도와 함께 핸들까지 그렇게 꺾어버리자 제트스키가 급격히 왼쪽으로 쏠린다. 젠장! 넘어지는 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야가 휙휙 바뀌며 눈앞에서 파도와 함께 바닷물이 튀어 올랐지만, 그뿐이었다. 절묘할 정도로 제트스키는 균형을 잡고서 움직이고 있다. 웬만하면 넘어지지 않게 설계돼 있다고 하더니만. 오케이! 나레이션이 알려준 대로 ‘믿으니’ 내 뜻대로 움직인다. 전진, 회전.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겨났다. 오! 좋은데! 레버를 당기자 제트스키가 쭉쭉 나간다. 더 이상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창 부근에서 빙빙 돌다가 마음을 굳히곤 핸들을 틀었다. 부다다다다당! 엔진이 가열되며 물보라가 튀어 오른다. 그렇게 계류장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맞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날리고 있었다. 탁! 탁! 속도가 높아진 제트스키가 수면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발과 엉덩이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 그에 반해 얼굴을 후려치듯 불어오는 바람. 귀로 들려오는 엔진음. 이 모든 게 합쳐지자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하는 느낌이 들었다. 파도가 점차 거칠어졌고, 제트스키는 그런 파도를 이겨내려는 듯 요동쳤다. 그럼에도 난 핸들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레버를 힘껏 당겼다. 파팡! 파파파당! 제트스키가 연속으로 파도를 치고 나아가며 터진 물보라가 튀어 올라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다. 따끔하다 못해서 얼얼할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후아!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속에서 자꾸만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큭……크크크크. 이야아아아앗!”
체감속도 시속 200km. 실제 속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몸으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속도감에 짜릿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그 상태로 손이 아플 정도로, 있는 힘껏 레버를 당길 뿐이었다. ***
“3번 카메라! 줌 당겨! 저쪽으로 드론 보내야지! 야, 야! 자꾸 그럴래! 지금 제트스키, 화면에서 벗어나잖아!”
서진영이 모는 제트스키가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지라 카메라가 좀처럼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은 혼자서 자유롭게 제트스키를 모는 걸 찍기 위해 일대의 바다는 비워둔 상태였다. 물론 잠시 뒤에는 옆에서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들이대기 위해 제트스키가 대기 중이었다.
“야이씨! 지금 장난해! 2번 카메라! 정신 못 차리지!”
“감독님, 더 늦으면 따라잡지 못할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럼, 안 되지! 출발 시켜!”
권태홍 감독의 지시에 따라 미리 준비해둔 제트스키가 계류장을 벗어났다. 카메라맨이 탄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지금 제트스키를 모는 사람은 수상 레저 일반면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년간의 경험을 지닌 베테랑이니까.
“잘되고 있어요?”
그때,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권태홍 감독이 돌아보니, 김서연이 서 있다.
“어? 오늘 못 오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됐어요.”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리는 그녀. 김서연이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제트스키라……. 저 정도면 잘 타는 건가?”
“아까 제트스키 강사한테 물어보니까 거의 프로급이라고 하더라고요. 뭐, 오랜만에 타는 건지 처음엔 조금 버벅거리긴 했는데, 조금 지나니까 아주 그냥 물 만난 돌고래처럼 미친 듯이 몰고 있네요.”
낄낄거리면서도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권태홍 감독을 김서연이 흘깃 보다가 다시금 눈길을 돌려 서진영이 모는 제트스키를 눈으로 좇는다. 그러면서 어느새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녀는 생각했다. 참 신기한 남자다. 못하는 게 없어서가 아니다. 요리사로서의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이상할 정도로 눈길이 간달까. 원래 김서연은 오늘 여기 올 생각이 없었다. 워낙 갑자기 잡힌 촬영 스케줄이기도 했고, 지난번에 이미 봤기 때문에 다시금 촬영을 지켜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기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KS 그룹의 실세. 비록 총수인 진 회장의 직계는 아니지만, 복잡한 지분 관계에 따라 사실상 그룹을 반분하고 있는 일가가 바로 그녀의 집안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KS 그룹 자체가 두 개의 회사가 병합하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30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 후로 계속된 경영권 다툼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 와선 사실상 김씨 일가가 진씨 일가를 압도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한마디로 진 회장이 타계하고 나면, 김씨 일가 즉 김서연의 아버지가 회장의 직위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김서연의 집안이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 KS 그룹뿐만 아니라 방계에 속하는 그룹들, 이를테면 김진숙 회장의 C 마트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이 한창 물이 오른 채로 대한민국의 경제계를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였기에 자부심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집안도 집안이지만, 그동안 스스로 쌓아 올린 경험치와 스펙 역시 만만치 않으니까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지간한 남자가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웃기는 얘기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생활할 때조차 남자한테는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그녀다. 그런데…….
‘왜 하필 저 사람일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단지 눈길만 가면 무시하고 말겠는데, 문득문득 떠오르는 얼굴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가끔씩 TV에서 보이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자꾸만 일로 엮이고 있다. 뭐, 이번 일은 그녀가 밀어붙여서 그를 광고 모델로 섭외한 거긴 하지만.
“여자분은 안 오셨나 보네요?”
“아, 그분이요? 딱히 다시 찍을 필요가 없어서요. 인플루언서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한 씬들도 이미 다 따놨거든요.”
“그런가요?”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김서연을 보다가 권태홍 감독이 픽하고 웃는다.
“진짜 신기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
“무슨 요리사가 못 하는 게 없어? 레이싱 때도 사람 놀래키더니만, 이건 뭐……. 지난번엔 갑자기 쓰러져서 철렁했는데, 오늘은 제법 쓸 만한 장면들을 건질 수 있겠네요! 흐흐흐, 이거 잘만 편집하면 진짜 대박이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