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시작합니다. (3)2021.10.29.
이상훈은 실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괘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태 딸아이는 연애다운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여타 다른 집안과는 달리 이런 유의 일들로 속을 썩여본 적 없는 딸을 은근 자랑스러워했더랬다. 그랬던 딸이 남자를 데려왔으니, 속이 불편할 수밖에.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식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무조건 반대부터 할 정도로 꽉 막힌 아버지이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는 내 허락을 받았고?”
“히힛. 아빠아앙.”
차량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다가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딸애를 보자니 웃음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소녀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큰, 흔히 말하는 처자라지만 이럴 땐 여전히 아이 같은 딸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결혼까지 허락한 건 아니니까.”
“누가 뭐래요.”
혀를 쏙 내밀고 눈웃음을 치고 있는 딸애의 모습에 또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이상훈의 표정이 한순간 바뀌었다가 돌아왔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느라 정신없는 이하연은 보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것을. *** 후우! 장난 아니네. 두 시간 남짓인가? 식사까지 포함해 겨우 그 정도 시간이었을 뿐인데, 이하연의 아버지를 뵙고 나오는 난……. 한 십 년은 늙어 보인다. 차를 몰면서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잘한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자신 없다. 이게 면접이었다면 지금쯤 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겠지. 망했다고 한탄하면서. 뭐, 그 와중에도 나레이션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내 생각을 말할 수는 있었지만……. 그거와는 상관없이, 이하연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현 그룹의 사장이었다. 그것도 무늬만 사장도 아닌 창업주의 혈육. 대한민국에서 삼한과 더불어 재벌 중에선 최상위에 속하는 그룹의 영애. 이하연이 어떤 여자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거기에 비하면 난……. 씁쓸하다. 차라리 이하연이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한심하네. 내 처지를 생각해서 한숨을 내쉬는 건 그렇다 치지만, 상대방인 이하연을 원망하는 듯한 자세는 아니지 싶다. 뭐, 진짜로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응?”
전화가 걸려온다. 이하연이다. 웬일로 톡을 안 하고. 벌써 집에 갔나? 의아하지만, 일단 전화부터 받았다.
“하연 씨.”
- 지금 운전 중이죠?
“예. 하연 씨는 벌써 도착했어요?”
- 집은 아니고요. 도중에 내렸어요. 회사에 남겨놓고 온 일이 있어서요.
“오늘도 밤새려고요?”
- 내일 업무에 지장 주지 않으려면 하는 수 없죠.
진짜 열심히 산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나도 질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 그나저나 곧 첫 방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예.”
- 금요일이네요? 예전에 했던 방송이란 같은 시간대면…… 부담스러우시겠어요.
“그러게요. 좀 그렇긴 해요. 그래도 뭐,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하필이면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와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에 방영이 결정된 <맛있는 도전>이다. 모르긴 몰라도 과거 내가 출연했던 방송과 현재 출연하는 방송이라는 점 때문에 이슈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내색은 안 하지만, 이종무 CP가 의도한 게 아닐까 싶다.
- 저어…….
첫 방이 눈앞에 다가온 <맛있는 도전>을 생각하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망설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온다.
“예, 하연 씨.”
- 많이 불편했죠?
“아뇨. 괜찮아요. 아버님도 잘해주시고, 생각했던 것보다 편했어요.”
- 진짜요?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이런 면이 내가 이하연을 만나는 이유 중 하나다.
“에이, 제가 하연 씨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려고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오히려 제가 너무 마음 편하게 있다가 온 게 아닐까 해서 살짝 후회될 정도예요.”
- 아뇨, 아뇨. 오늘 진영 씨 멋졌어요.
계속되는 이하연의 얘기였다. 그렇게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전화통화를 이어나갔다. *** 금요일, 7시. 흔히들 말하는 황금시간대. 모니터룸 안에 모여있던 이들 중 누구 하나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제 몇 분 뒤면 첫 방이 나가게 될 텐데 누군들 함부로 입을 놀리겠는가. 그러면서도 다들 방영 전 흘러나오는 광고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C 마트 광고에 이어 삼한 식품의 새로운 광고인 ‘서 셰프의 선택’ 광고, 그리고 KS 자동차의 NEW SJ7 광고까지. 연이은 서진영의 출연에 다들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이종무 CP가 한마디 한다.
“대세는 대세인가 보네.”
다들 납득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번 방송의 메인이 서진영이기 때문에 방송 전후의 광고에 서진영이 출연한 광고가 대거 포진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이종무 CP의 얘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어딜 가나 서진영의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의 척도는 곧 인지도이고, 같은 논리로 CF를 많이 찍는다는 것은 인기가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흔히들 CF의 여왕이네, 여신이네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다.
“요즘 진영 씨가 잘나가긴 하죠.”
박신영 작가의 말에 신현정 PD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마치 자기 일인 양 좋아하라 하는 두 여자의 모습에 이종무 CP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서진영도 박신영 작가도, 신현정 PD까지 포함해 전부 한 팀이니까. 컨셉도 나쁘지 않았고, 한진석을 비롯해 다들 사이가 좋다. 분위기가 좋아서일까, 심지어 며칠 전 함께 촬영했던 패널들조차 케미가 죽여줬다고 들었다. 이런 방송이 잘 안될 턱이 있나. 그간의 경험상 대박은 몰라도 중박은 떼놓은 당상이었고, 그뿐만이 아니라 롱런할 공산이 크다.
‘역시 베스트 초이스였어.’
신현정 PD를 영입한 것도. 그녀의 말을 듣고 파일롯 제작 없이 바로 정규방송으로 잡은 것도. 무엇보다도 서진영을 메인으로 내세운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당시에는 다소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도전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그 결과를 볼 때다.
“슬슬 시작하겠군.”
마지막 광고가 나가고 있었다. 모니터를 주시하는 이들의 눈동자에 기대감 가득한 빛이 흘러넘쳤다. ***
“미치겠네!”
걸그룹 스피너스 출신의 헤나. 현재는 활동 영역을 확대해 연기돌 혹은 연예돌이라고 불리는 그녀였지만, 요즘 들어 잠식해 들어오는 불안감에 예전에 없던 버릇까지 생긴 터였다. 까득! 까득!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가져간 손톱을 짓씹고 있던 헤나는 그걸로도 모자라 입술을 잘근 씹고 말았다.
피까지 난 것은 아니라도 꽤 세게 씹은 건지 이빨 사이에 낀 입술에 핏기가 가셨지만, 정작 당사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다. 그저 거실 벽 한복판에 걸려 있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불안한 눈빛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광고 더럽게 많이 하네.”
TV를 양분하고 있는 화면. 양쪽 다 광고 중이었는데, 둘 모두 상단 오른쪽에 곧이어 방영할 프로그램명이 떠 있었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와 <맛있는 도전>. 객관적으로 보자면 솔직히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다. 한쪽은 지상파였고, 다른 한쪽은 케이블이었으니까. 하지만, 안다. 그녀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알고 있다. 그런 평범한 잣대로 재기엔 이미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게임임을. 두 개의 방송, 그중에서도 <맛있는 도전>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으니까. 일분일초가 징그럽게 안 간다고 생각하며 헤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버튼을 가볍게 누르자 켜지는 화면 위로 기사들이 줄로 펼쳐진다. <갓솁 대 갓솁?> <고향을 떠난 갓솁, 칼을 겨누다.> <맛있는 도전? 누구에 대한 도전인가?> <흥미로운 대결의 승자는 갓솁.> <케이블로 옮긴 갓솁,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누가 봐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꽤나 자극적인 제목들을 달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자연히 반응도 폭팔적이다. 기사마다 달린 댓글들이 현 상황을 고스란히 알려준다. - 또다시 갓솁이 사고 치는 건가요? - 흐흐흐, 역시 갓솁.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네요. - ㅋ 구려. 사나이가 몹니까?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 맞춤법이나 제대로 쓰시죠. - 오올, 갓솁. 자신을 버린 KBC에 복수하는 건가? - 흥미만땅! 팝콘, 팝콘! - 나 지금 한 화면에 방송 두 개 띄워놓고 보고 있음. 완전 꿀잼. - ㅋㅋㅋ 나도 지릴 거 같음요. 갓솁 대 갓솁이라니! 이런 거 보게 될 줄 상상도 못 했음. - 에헤이. 그건 아니죠. 갓솁 대 갓솁이라니. 갓솁이 떠나버린 방송인데. - 요즘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완전 하락세였는데, 이번 일로 다시 화제 몰이하는 건가? -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갓솁이 자길 버린 본처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는 셈 아닌가? - 오! 새로운 해석! - 역시 갓솁은 혜자롭도다. - 아무튼, 갓솁 VS 갓솁 아님. 굳이 말하자면 노 갓솁 VS 갓솁 아닐는지. - 아, 몰라 몰라. 둘이 ㅈㄴ 치고받고 싸워라. 이기는 편이 나 편임. - 하아, 이기적인…… 나도 같은 편. 까득! 다시금 이빨로 손톱을 물어뜯는 소리가 거실을 울린다.
“아, 짜증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옮기지 않는 건데…… 하는 생각이 그녀, 헤나의 머릿속을 휘젓는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만 출연하게 되면 만사가 해결될 줄 알았더니.
“하아…….”
알고 보니 서진영이 빠진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거기다가 찐빵을 쪄낼 사람…… 신현정 PD까지 떠나버린 상황. 당연히 제대로 된 맛을 낼 턱이 있나. 뒤늦은 후회와 함께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화면이 바뀌며 방송이 시작할 조짐을 보였다. ***
“오빠앙! 얼른 와!”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송이 시작하기 30분 전부터 거실에 모여있는 가족들. 삼촌이야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 못 왔지만, 외숙모와 수연이 누나 그리고 수아는 일찌감치 집에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방이 있는 날이라는 걸 알고 있던 주방 식구들의 배려로 식사만 준비해놓고 바로 온 건데도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오이도가 멀긴 멀다는 거지.
“끊어야겠어요.”
- 그래요. 얼른 가봐요.
지난번에 이상훈 사장, 그러니까 이하연의 아버지와 만나고 난 후부터 한층 더 친밀해진 그녀와 통화를 하던 중이다.
“바쁘더라도 꼭 식사는 하고요.”
- 그럴게요. 저도 방송 꼭 볼게요. 하아,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그럴 기회가 있겠죠.”
- 예. 그럼 들어가요.
알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은 후 방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부르르르. 휴대폰이 진동한다. 강형식이나 류승렬이 아닐까 싶어서 확인해보곤 눈을 치떴다.
“아, 이사벨.”
- 하이, 서.
“어쩐 일이에요?”
- 어쩐 일이긴요. 당연히 자기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자꾸 그런 농담하면 저 진짜 믿는다고요.”
- 어머, 진짠데?
민망하다. 원래 이렇게 저돌적인 성격인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더니. 패션잡지 ‘더 센스’의 남윤주 팀장과 함께 인터뷰 때문에 만났던 스튜디오에서 보게 된 이사벨라는 그때도 꽤 적극적이었었다. 팬이라고 했던가?
“하하하,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왜 전화했는지나 말해봐요. 저 지금 좀 바쁘거든요.”
- 오케이. 사실은 인터뷰 스케줄이 잡혀서 연락했어요.
“아, 그래요?”
- 예, 다음 주 화요일. 제가 스텝들 데리고 한국으로 갈 거고요, 촬영한 건 다음 달 잡지에 실릴 예정이에요. 아, 그리고 본사에서 검토 중이긴 한데, 잘하면 미국판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해 몇 군데 보그에도 실릴지 몰라요.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요.”
- 그렇죠? 저도 그래요. 아무튼, 기대해요. 모레쯤에 떠나면서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고요. 알았죠?
“알겠어요. 이사벨도 조심해서 오고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던 이사벨이 전화를 끊었다. 후우, 인터뷰라……. 남윤주 팀장의 소개로 알게 된 보그 본사의 신임 디렉터 이사벨라. 그녀의 강력한 추천과 엄청난 추진력으로 세계적인 패션잡지인 보그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솔직히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긴 한데,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웃고 말았다. 그러곤 방을 빠져나왔다. TV에서는 내가 출연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빠! 얼른! 얼른! 지금 시작할 거 같아!”
수아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소파로 다가갔다. 아닌 게 아니라 화면이 바뀌며 <맛있는 도전>의 인트로가 떠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첫 방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