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시작합니다. (2)2021.10.27.
놀랍거나 하진 않다. 다만, 뜻밖이긴 하다. 나레이션이 갑자기 들려오는 거야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 타이밍에 들려온다는 게 의아하기만 했다. 아니, 기대가 된달까.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귀를 기울였다. 아, 물론 그러는 동안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눈앞에 놓여 있는 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아마 앞에서 보고 있는 이상훈 사장의 눈에는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묻는 질문에 긴장해서 물을 찾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비칠 터다. 그렇게 쇼 아닌 쇼를 하며 시간을 벌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인간X극장을 떠올리는 BGM이 들리고, 나레이션이 머릿속을 울렸다. - 서진영은 몹시 당황한 상태다.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곁에는……. 아아, 어지간히 좀 해두지. 나레이션이 엔간해선 다큐멘터리 해설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솔직히 지금은 좀 아니잖아? 다른 건 둘째치고 시간이 없잖아, 시간이.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나한테 뭔가 팁이라도 주기 위해 이러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굳이 이럴 필요가 있냐고. 괜히 말만 길어질 뿐인데. 그렇다고 그만 좀 하라고 한들 소용없겠지. 은근 까다롭단 말이야. 답답한 구석도 좀 있고. 뭐랄까, 원리원칙에 충실한 FM이랄까?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만, 나레이션이 진짜 여자라면 연애 상대로는 별로란 생각도 든다. 여자친구가 눈치 없게 상황파악 못 하고 잔소리부터 늘어놓으면……. 후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 나레이션이 본론을 끄집어낼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서진영, 멍충이. 하?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을 정도다. 헐, 황당하기도 하지. 멍충이? 유치하긴 진짜.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원래부터도 귀로 들려오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은……. 삐쳤나? 흠……. 삐쳤군. 한숨을 내쉬곤 중얼거렸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이러지 말자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더 이상은 나레이션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사라졌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왜냐면 여전히 내 머릿속에선 인간X극장의 BGM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내가 사과하기를? 속으로 실소하며 물잔을 입가에서 떼어놓곤 내려놓았다. 그러곤 인정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실수한 것도 사실이니까. 후……. 그래, 미안하다.
“…….”
그런데도 여전히 나레이션이 들려오지 않는다.
“왜 그래요, 진영 씨. 혹시 어디가 안 좋아요? 하아……. 아빤 괜한 걸 물어가지고.”
이하연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왔다.
“아,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서 머릿속을 좀 정리하느라고…….”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날 쳐다보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보고 있는 이상훈 사장. 쯧, 한심하네, 한심해. 지금 이 상황에서 나레이션의 도움을 받아 어쩌자고? 그렇게까지 해서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냐? 솔직히 내가 요리사지, 사업가는 아니잖아? 아니, 애당초 꼭 사업가라야만 방금 들었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수준에서 지닌바 생각을 최대한 잘 얘기하면 그만일 뿐.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강형식과 브랜드 런칭에 대해 얘기하며 귀담아두었던 것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서 셰프의 선택’이란 브랜드 신규 사업도 본의 아니게 휩쓸리듯 참여하게 된 터라, 해외 진출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만.”
묘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이상훈 사장을 지나쳐, 작게 주먹을 말아 쥐고 입술을 잘근거리는 이하연을 보았다. 보는 내가 다 간절해질 정도다. 날 걱정하는 게 느껴진다.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런 대비 없이 해외 진출을 시도한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할 것임이 분명하겠죠.”
“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들어보니 현재 매출 현황이 무척 고무적이라고 하던데? 그 정도면 어디로 진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국내에서만큼은 아닐지라도 해외에서도 꽤 선전하지 않겠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사업은 도박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한층 더 가라앉는 이상훈 사장의 눈빛을 느끼며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가슴이 점차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젠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분명한데, 그걸 표현하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뭔가 예시를 들면서 말하면 딱 좋겠는데 말이다. 그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 브랜딩은 한두 가지 요소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제품력, 기술력, 가격, 유통, 현지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며……. 어라? 삐친 거 아니었나? 피식.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웃으며 내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기적절하게 얘기해 주는 나레이션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만일 ‘서 셰프의 선택’이 꼭 해외 진출을 해야만 한다면, 진출을 모색하는 나라의 현지 사정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겠지요. 원칙적인 얘기라 우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원칙을 무시해서 손해 볼 것도 없거니와 이제껏 해외 진출을 시도했던 기업 중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원칙들에 소홀해서 실패한 경우가 꽤 많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아는 것과 행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아빠, 그만해요. 진영 씨가 사업가도 아닌데……. 밥 먹은 거 다 체하겠어.”
“괜찮습니다, 하연 씨.”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이하연에게 옅게 미소를 보내며 다시금 얘기를 이어갔다.
“제가 비록 대학을 나오거나 경영학을 공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수준에서라면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재밌군. 얘기해 보게.”
이상훈 사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말을 놓고 있다. 그만큼 집중한다는 걸까, 아니면 같잖게 여기는 걸까. 뭐, 상관없지. 이미 여기까지 왔으면, 뒤로 물러나는 게 오히려 우스울 터다. 더구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나레이션이 내 생각을 읽어가며 제시해 주는 예시들이 있으니 한결 말하기 편하다.
“이번에 출시한 ‘서 셰프의 선택’을 가지고 반드시 해외 진출을 해야 한다면, 이전에 해외시장 개척에 성공했던 기업들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벤치마킹이라……. 어떤 기업을 말하는 건가?”
“우리나라에서 4대 라면 회사라 할 수 있는 괄도 기업입니다.”
“괄도? 흠, 계속하게.”
“알고 계시겠지만, 원래 괄도는 일본 자본을 빌려 설립한 음료 회사인 야구르트가 사업 확대의 일환으로 만든 회사죠. 그러다 보니 좀처럼 국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죠. 후발주자이기에 판매는 저조할 수밖에 없었고, 경쟁업체에 비해 기술력도 낮아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열기도 어려웠습니다. 매출은 바닥을 기기 일쑤였고, 십 년 전 분사하기 전까진 모기업의 골칫거리 취급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환점을 맞이했는데…….”
재밌다. 지금 이 자리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시시각각 나레이션이 들려주는 예시들. 그중에서 괄도가 어떻게 러시아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얘기가 흥미로웠다. 1990년대 초. 부산항 보따리 상인들에게서 시작된 괄도 라면…… ‘네모 도시락’의 신화. 그 발단은 ‘네모 도시락’이 당시 부산항을 드나들던, 러시아 선원들이 사용하던 휴대용 수프 용기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한 부산지역 상인들의 기지였다.
그렇게 소량으로 팔려나간 ‘네모 도시락’은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끝내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본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괄도 측은 발 빠르게 그 인기를 직감하곤 사업성에 주목했다. 행동도 빨랐다. 현지에 직원을 파견하고 시장조사에 집중했다. 1997년에는 현지 사무소를 열고 본격적인 판매망도 구축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추구한 현지화 전략은 단순했다. 춥고 배고픈 러시아 국민이 손쉽게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책정된 가격. 어째서 초기에 러시안 선원들이 ‘네모 도시락’을 사 먹었는지를 철저히 분석했고, 그 결과 칼칼한 맛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맛을 개발해 현재엔 10여 종에 이를 정도로 선택의 폭을 늘렸다. 거기에 여타 라면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네모 도시락’ 특유의 건더기 수프도 한몫했다. 씹을 게 많다 보니 부드러운 면발과 매콤한 국물이 더불어 러시아 국민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 게다가 용기의 편리성은 ‘네모 도시락’의 진출에 ‘성공’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비닐을 벗겨낸 뒤 종이 한 장만 빼면, 깔끔한 백색의 용기가 되는 특성상 그 자체만으로도 인기가 높았던 것. 게다가 제품에 포함시킨 플라스틱 포크의 세심함이란 무기로 ‘네모 도시락’을 러시아의 ‘국민 라면’ 반열에 올려놓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기 인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근 십 년에 이르는 꾸준한 현지화 전략으로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내린 결론에 이상훈 사장이 불쑥 물어온다.
“그럼, ‘서 셰프의 선택’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가?”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겠죠.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
“결국 어디에서 팔든,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품은 제아무리 기술력이 높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 돌아오는 길. 이하연이 평소와 달리 이상훈 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아빠가 아까부터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녀로서도 서진영이 사업적인 측면에서 뭔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건 처음 들었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아빠는 어떻게 들었을까. 자신이 느끼기엔 나쁘지 않았는데……. 뭐, 조금은 투박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사실 오늘 서진영이 말했던 것들은 따지고 보면 대학생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우습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으며 되지도 않는 통계 따위를 입에 담는 것보다는 백배 낫달까. 차라리 직관적인 예시가 서진영이 마케팅과 브랜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서진영의 분석은 꽤 날카로웠다. 무엇보다도…….
“재밌는 친구군.”
한창 서진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들려온 아빠의 말에 이하연은 눈을 빛냈다.
“……성격도 좋아.”
피식. 그녀의 말에 이상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간다.
“대학은 안 갔다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그런 것 같더군.”
말은 안 했지만, 이상훈은 이미 서진영이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딸아이가 만나고 있는 남자인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만났을까.
“핵심을 짚을 줄 알더군.”
“그, 그런 거 같아?”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묻고 있는 이하연. 그녀를 보는 이상훈의 눈가에 쓸쓸함이 깃들다가 흩어진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품에 안겨 꼬물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젠가 자기도 사업을 하겠다고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가 싶더니,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훌쩍 유학길에 올랐던 딸이다. 그리고 5년. 오랜 시간이라고 할 순 없어도 요즘 같은 시기엔 강산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돌아온 딸은 꽤 단단해져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인지라,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늘 조마조마했는데……. 그런 딸이 이제는 제 몫을 거뜬히 해내는, 한 사람의 경영인이 되어 작은 계열사를 이끌고 있었다. 작년에 런칭한 브랜드가 꽤 순조롭게 중국시장에 안착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딸이 데려온 남자였다. 기대? 하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애당초 버린 것도 사실이다. 사업적인 재능 따윈 없어도 되니, 그저 인상만은 괜찮기를 바란 건 욕심이었을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지.’
머릿속에 아까 만났던 서진영을 떠올리며 이상훈이 말했다.
“좋은 젊은이더구나.”
눈에 띄게 화색이 돋는 이하연이 활짝 핀 꽃처럼 되어 물어왔다.
“아, 아빠! 그럼, 허락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