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제안? (3)2021.05.16.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듣게 되면 느끼게 되는 감정. 뭐라 대꾸하자니 쉽사리 말이 떠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곧바로 거절하기엔 뭐가 뭔지 모르겠고……. 그걸 우리는 당혹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난 당혹스러웠다.
- 실례인 줄은 알지만, 마음이 급해서 이렇게 전화부터 드립니다.
나름 매너 좋게 말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 그 음성 어디에도 음모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통화를 시작했을 땐 그런 생각도 들었으니까. 덫. 강윤식이 날 깊고 깊은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파놓은 회심의 일격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짜증도 나지만, 강윤식의 입장에서 난 벌레 같은…… 아니, 어제부턴 해충 같은 존재가 되어있을 터다. 눈에 거슬리니 없애버려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써 공들여 그렇게까지 할 존재는 아니란 거지. 만일 그렇다면, 내가 강형식에게 붙어 있는 게 그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느껴진다는 걸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거 같다.
“괜찮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신지?”
앞쪽 보조석에 타고 있는 C 마트 직원의 눈치를 보며 나직하게 묻고 있었는데, 차 안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 다름이 아니라, 서 셰프님께서 우리 프로에 출연해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꽤 단도직입적인데? 최종훈 피디라고 했던가? 시원시원한 성격인 모양이다.
“글쎄요. 처음 듣는 얘기라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 아, 예. 그러시겠죠. 이해합니다. 하하하. 원래 출연하고 있던 패널 한 명에게 사정이 생겨서 급히 대신하실 분을 찾다가, 서 셰프님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거든요.
음, 아까 프로그램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서바이벌 우리끼리 산다’였던가?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 인기가 없든가, 그것도 아니면 생긴 지 얼마 안 된 프로인 듯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조금 불쾌해졌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와 같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으니 전화번호 알아내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아무 때도 전화를 걸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아니면 원래 이 바닥은 이런가? 그나마 다른 스탭들에게 시키지 않고 담당 피디가 전화를 건 걸 보면 아주 상식이 없는 거 같진 않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최종훈 피디에 대한 내 평가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일단 듣고서 판단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 이유시라면,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듯합니다만.”
- 하하하. 그렇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침 발라 놓…… 큼, 먼저 운이라도 띄워놓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서 셰프님 요즘 핫하시지 않습니까?
웃는 게 일상인 사람인가?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시질 않는다. 그런 점은 마음에 들었다. 직접 대면한 건 아니지만, 꽤나 유쾌한 인상일 거 같았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꼭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착각하는 것처럼 들리실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죠. 아시다시피 제가 현재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고정출연 중이기도 하고요, 본업도 따로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네요. 죄송하지만, 한동안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은데……. 이해해주실 수 있으시죠?”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절이었다. 왜냐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런저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요즘은 하루걸러 칼을 잡고 있다. 이러다간 진짜 칼질하는 법조차 까먹을 판이다. 그런 데다가 방송도 이젠 정상궤도에 올라, 나름 촬영 스케줄 자체가 팍팍하다. 뿐만 아니라 강형식과 함께 진행 중인 신규 브랜드, ‘서 셰프의 선택’도 조만간 출시할 예정. 그전에 사모님을 찾아뵙고 계약문제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아무튼, 바쁘다. 그것도 몹시. 그런데 무슨 또 다른 방송을 한다고. 게다가 전혀 모르는 방송이었다. 서바이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걸 보니, 어디 섬 같은데 출연진들 떨어뜨려 놓고 수렵과 채집으로 알아서 살아남아라…… 라는 컨셉 같은데. 이거 너무 흔한 패턴 아닌가? 구식도 정도가 있지. 트렌드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존에 있던 프로그램과 비슷비슷한 방송에 출연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안 그래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그리고……. 강윤식. 그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오래된 일도 아니고, 어제 일어난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겁을 내는 건 아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냥 긴장을 풀고 있을 일도 아니잖아? 아직은 경계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어찌 되었든 어떻게 생각해도 거절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한 얘기인데, 안타깝게도 상대방은 알아듣질 못하고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질 못하는 건가?
-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그러지 마시고, 일단 만나보시기라도 하시죠? 아마 우리 프로 컨셉이랑 출연진들 만나보시면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놔두면 끝없이 이어질 거 같은 예감에 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모를까, 현재로선 어렵겠습니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은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좀 싸가지가 없는 대응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라, 라라……. 얼씨구? 이 타이밍에 나레이션? 뭔가 싸한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을 때, 익숙한 배경음과 함께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서진영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여기저기서 갓솁이라 불러주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아마 이런 경우는 초등학생 때 반장선거에서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일는지 모른다. 헐. 지금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왜 이래? 나도 한때는 제법 인기가……. -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추한 일이겠지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그가 언제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아봤겠는가. 그래서인지 서진영은 방송국에서 걸려온 섭외전화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리고 분명 거절했거든? 즐거운 비명은 개뿔! 난 나레이션의 음해성 짙은 멘트를 들으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엄청난 얘기가 훅 치고 들어온다. - 그러나 그는 알아야 한다. 요즘 들어 그의 인생에서 전례 없을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담당 피디가 직접 전화를 해서 그를 섭외할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이건 음모다. 강윤식이 깔아놓은 덫이란 얘기다.
“…….”
한참이나 말을 잃고 있었다. 그사이 나레이션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사라져 있었고. 당연히 BGM도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침묵 속에서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부르르르르. 핸드폰이 진동한다.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다. 한데 눈에 익다. 잠시 생각해보니, 아까 걸려왔던 전화다. 최종훈 피디라고 했지? 난 거절 버튼을 누르고, 곧바로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하아!”
참았던 한숨이 바람 빠진 풍선에서 빠져나오듯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강원도 인제에 있는 촬영장에 다다라 차가 멈춰 서고, 차에서 내려섰을 때 C 마트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습니다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배려해주는 건 좋은데, 대우가 지나쳐서 불편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일로 만난 사이에 ‘편하게 대하세요.’ 할 수도 없으니. 그저 포기하고 나 역시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이미 차 안에서 다 들었을 테니까.
“광고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냥 좀…… 뜻밖의 제안이라서 거절했을 뿐이죠.”
“아, 방송……인가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하하하. 역시 서 셰프님이시군요. 요즘 우리 딸애도 방송 보면서 갓솁이라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인가가 많으면 어떤 기분일지…… 저로선 상상이 안 갑니다만, 역시 좋겠죠?”
글쎄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마냥 좋지만은 않은데. 사과가 익어 떨어질 때쯤이 되면 벌레가 꼬이는 법이라고.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이야 조금 낯설고 불편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강윤식과 최종훈 피디. 그들이 번갈아 가며 제안이랄지, 농락이랄지 모를 행태를 벌인 걸 생각하면……. 예상했던 거보다 이번 일…… 심각한 건가? 생각 끝에 얼굴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오셨어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전형적인 오피스룩 차림의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검은색 바탕에 세로줄 무늬가 들어간 바지와 재킷, 그리고 단정한 블라우스. 추운 날씨임에도 코트를 걸치지 않고 서 있는 김서연을 보면서 희한하게도 이하연이 떠올렸다. 그때가 여름이었던가? 아니 가을이었구나. 이하연이 클럽 주차장에 밍크를 입고 나타났던 게 떠올랐다. 그게 첫 만남이었는데……. 크큭. 진짜 특이하단 생각을 했었지. 그러고 보니 얼마 안 됐네. 그녀를 만난 지.
“왜 웃으시죠?”
김서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고 있다. 그제야 난 내가 다른 여자를 보면서 이하연을 떠올렸다는 걸 자각했다. 동시에 눈앞의 여자에게 실례 아닌 실례를 했다는 것도.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그만 딴생각을 하고 말았네요.”
“……알겠어요. 가시죠.”
응? 어째 차가운 태도다? 이전에 비해서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딱히 말하긴 어려운데, 그럼에도 확 느껴진다. 뭐랄까. 찬바람이 분달까. 여기가 야외라서 그런가? 설마 내 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닐 테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러면서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생긴 건물. 호텔이라는 붉은 글자가 최상층에 붙어 있는 건물 아래쪽으로 펼쳐진 서킷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 장비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고!”
한창 짐을 나르고 있는 스탭들이 보였고, 그사이에서 콘티를 확인하고 있던 권태홍 감독이 날 알아보곤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춥죠?”
“그러네요.”
“천막 안에 온풍기 틀어놨으니까, 얼른 가시죠. 거기서 몸 좀 녹이고 계시다가 몇 장면만 찍고 가시면 됩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권태홍 감독이 나를 비롯한 일행을 서킷 한편에 마련된 천막으로 이끌면서 물었다.
“근데, 어쩌실래요?”
응? 뭐가? 하는 눈빛을 해 보이자, 권태홍 감독이 살짝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본이랑 콘티는 이미 확인해보셨을 테니 아실 거고. 운전 말입니다, 운전.”
운전이라……. 광고의 컨셉은 이미 알고 있었다시피 겉으로 보기엔 언뜻 차가워 보일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가진 남자, 즉 호텔 주방을 책임지는 정상급 셰프가 퇴근과 동시에 자상한 남편으로 바뀐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차도남이면서 동시에 가정적인 남자가 선택한 차라는 게 이번 광고의 핵심이었다. 찍게 될 광고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일상적인 그러면서도 로맨틱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촬영 장소는 대체로 도심. 그런데도 이곳…… 인제의 서킷을 찾은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3분으로 기획된 광고에서 2분 40여 초간의 실질적인 광고, 즉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자동차가 호쾌하게 도로를 질주하며 다른 차들을 제치고 석양 아래 멈춰서는, 이른바 자동차 광고의 정석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번 제품의 이름이 화면에 떠오른다고 했었지. 당연한 얘기지만, 원래 기획된 광고 촬영은 오늘 하루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광고만 찍고 있을 수 없는 내 사정상, 온종일 강행군을 해서라도 오늘 안에 끝나기로 되어있었다.
“꼭 운전을 직접 하셔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대역으로 뛸 카레이서도 준비 중이고, 나중에 마지막 장면에서 차가 멈춰선 후 내려 석양을 바라보는 모습만 찍어도 됩니다.”
권태홍 감독의 표정이 묘하다. 뭐라고 할까? 겁나면 안 해도 돼. 그렇게 얘기하는 듯하다. 살짝 오기가 생기지만, 그 오기를 아무 생각 없이 현실화할 정도로 무모한 내가 아니다.
“보통은 어떻게 합니까?”
“통상 대역을 쓰죠. 속도가 꽤 되거든요. 함께 달리기로 되어있는 차들이 대부분 외제차인 데다가, 운전자도 카레이서들이라서 무지막지하게 밟아대거든요. 뭐, 그편이 화면에 담으면 살기도 하고요. 아, 근데 운전면허는 있으시죠?”
당연한 걸 묻는다. 아니, 그전에 저번에도 물어보지 않았나?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있긴 한데, 운전을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내 차를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대리운전이나 발렛파킹을 해본 적도 없으니 운전이 능숙할 리 없다.
“그럼, 그냥 대역으로 가시죠. 안전장치는 해놨지만, 그래도 혹여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요. 아, 물론 시내 주행 쪽은 레카 쓸 거니까, 그냥 운전대만 잡고 계시면 됩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김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한데 눈빛이 참 기묘하다. 뭔가 날 관찰하는 듯한 눈동자랄까. 조금 거북하긴 하지만, 그래도 웃어주었다. 그러곤 막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따라라라라라, 라라……. 오늘따라 웬일이래? 여태 이런 일은 없었는데. 오늘은 무려 두 번이나 들려오고 있다. 그나저나 무슨 말을 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나레이션이 들려올 까닭이 없지 싶은데. 의아해하고 있을 때, 인간X극장의 배경음 닮은 BGM과 함께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서진영! 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