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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제안? (2) (97/204)

#97. 제안? (2)2021.05.14.

솔직히 말하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입안에 욕부터 맴돌았다. 물론 뱉어낼 순 없다. 그전에 당황스러워서 주춤거리기도 했고. 그러건 말건 그는 내 형편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뭐하고 섰지? 안 들어갈 건가?”

아, 당연히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할 줄 알았더니, 내 방으로 가자는 얘기인가?

“그, 그러시죠.”

앞장서 숙소 건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방안. 미니 냉장고에서 뭐라도 마실 만한 게 있나 살피고 있을 때, 강윤식은 앉지도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캔 음료 하나와 생수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중 캔 음료를 꺼내 그냥 가지고 가려다가 컵에 따라 돌아섰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원래 표정이 저런 건가? 아니면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아래로 보이는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재수 없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컵을 내밀려는 찰나였다. 강윤식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금방 갈 건데, 뭐.”

아씨, 그럴 거면 미리 말하든가. 인상이 구겨지려는 걸 애써 참으려 할 때, 그가 다시 한번 방 안을 휘둘러보며 픽하고 웃는다.

“지낼 만은 한가?”

저건 또 무슨 뜻일까 고민하며 말을 고르고 있을 때, 그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여긴 처음 와봤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그러더니 불쑥 묻는다.

“형식이보다 한 살 많다고?”

“아, 예. 그렇습니다.”

“그래. 요즘 녀석도 철이 든 건지, 꽤 열심히 하더……. 아, 이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또 볼 사이도 아닌데, 길게 얘기할 건 없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

“형식이랑 거리를 두게.”

잠시 멍해졌다. 대체 지금 뭔 소리를 들은 거지? 혹시 잘못 찾아온 거 아냐? 아침드라마 풍의 대사. 내 귀에 필터가 달린 건지, 이상하게 들렸다. 뭐랄까. ‘부족하겠지만, 이 돈 먹고 떨어져 줘요. 내 아들은 당신 같은 여자가 넘볼 남자가 아니니까.’라고 말하는 남자친구의 엄마 같은 저 대사는 뭐냐고. 그럼 난 사랑 하나만 믿고 남자의 아이까지 가진 비련의 여주인공인가? 와씨, 갑자기 열불이 확 치미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말 희한하게도 그 순간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지고 이내 표정마저 담담해진다. 어느새 가라앉은 눈빛이 되어 잠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대화의 주도권을 이쪽으로 가져오려면 되도록 부드럽게 물어야 할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릿속이 그렇다는 거다. 이미 가슴속에선 날이 서 있다 보니, 묻고 있는 어조가 딱딱하기만 했다. 그걸 느낀 걸까? 강윤식의 눈이 깊어진다. 그런 채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쪽의 볼이 살짝 파이며 보조개가 생겨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강윤식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입이 열렸다.

“이유라…….”

“…….”

“요즘 자네가 꽤 인기라지?”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저렇게 묻는 건 내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윤식이 어디까지나 우회해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을 가장한 대답……. 그 속에 담긴 뜻은 이미 내가 예상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강형식 옆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뭔가가 붙어 있는 게 싫다는 얘기일 터. 솔직히 말해서 어이가 없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한들 다 같은 사람이건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다 못해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간섭하려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형식을 도와주는 역할을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맡고 있는 내가 아닐지라도.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말해놓고 후회했다. 이번에 나간 말은 아까보다도 더 차가웠기 때문이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아직도 멀었나 보다. 흥분을 가라앉히긴 했는데, 그게 너무 지나쳐서 점차 말투가 차가워지다니. 이래서야 대화를 이어나가긴커녕 뺨이라도 한 대 맞는 게 아닐지. 아니, 그 정도는 약과일 테지. 상대는 다름 아닌 고용주의 가족. 돈을 직접 주는 건 아니지만, 나 하나 자르는 건 일도 아닐……. 아니지. 막말로 내가 여길 그만두지 않는 건 강형식과 주방 식구들 때문인데, 굳이 저런 놈한테까지 목맬 필요가 있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고소가 지어졌다. 물론 속으로만. 그만큼 냉철해진 것이다. 아까보다 더. 상황도 보다 명료하게 보였고. 특히 날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강윤식의 얼굴이 눈에 띈다. 계속해서 차갑게 튀어나간 내 말투와 그의 시선에선 건방지기 짝이 없을 내 태도에 화가 났을 테지만, 입가에 빙글빙글 미소만 맴돌고 있을 뿐 여전히 날 내려다보는 눈빛이다. 아마도 그건, 네까짓 게 까불어봐야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 즉 자신이 언제라도 원한다면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오만함 때문일 터다. 그 눈동자에 깃든 오만을 직시하며 말했다. 내친김이었다.

“절 찾아오신 게 그런 이유시라면…… 정말 우습군요.”

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순간, 바로 치고 들어갔다. 아직은 내 턴이었으니까. 몰아칠 땐 몰아치는 게 정석이란 거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강윤식의 눈썹이 펴지며 이내 얼굴에 ‘응?’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 하긴, 나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을 리도 없고, 처음 들어봤겠지. 이런 식의 얘기는. 어떻게 보면 사람을, 그것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을 농락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만, 뭐 어떤가. 상황이 이 모양인데. 그러게. 대우를 받고 싶으면 최소한 인간적인 면모는 보여줬어야지.

“솔직히 요즘은 8살짜리 애들도 그러진 않잖습니까? 부모가 친구를 골라 사귀라고 강요할 수 있는 애들도 아니고, 제 나이쯤 되면 친구 정도는 알아서 만나는 거죠. 아닙니까?”

강윤식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입술이 벌어지며 튀어나오는 말이라곤…….

“허! 이런 건방진 놈을 봤…….”

그 말을 끝까지 들어줄 의무도, 의리도 없었다. 저 자식과 나 사이에는.

“아니면 제가 형식이랑 안 만난다고 하면 한 백억쯤 주실 겁니까?”

피식.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친구 팔아 마련한 돈, 어디 소름 끼쳐서 쓸 수나 있겠습니까?”

“너 이 자식! 지금 말 다 했냐? 어디서 감히 나한테 그런 얘길 씨불이는 거냐! 정말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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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폭 모드다. 아니, 화가 나다 못해서 얼굴이 씨벌건 게 이미 그 이상이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서 부르르 떠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무엇보다 저 더럽게 탐욕스럽고, 징그럽게 일그러진 입매 그리고 날 벌레 보듯 보는 눈동자가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가주셨으면 좋겠군요. 제가 좀 피곤해서요.”

“이익!”

이를 갈아대는 강윤식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러면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우선은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하진 않았는지부터.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말실수라는 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그저 언어폭력에 가까운 폭언이라거나, 양아치들이나 쓸법한 욕을 토해냈는가일 뿐. 돌이켜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한 대 맞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그 순간 강윤식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동시에 저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 일…… 후회하게 될 거다.”

하! 이런 거 어릴 때 보던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물론 소리까지 낸 것은 아니다. 다만,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강윤식의 심기를 거스르기엔 충분했나 보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날 쳐죽일 듯 노려보다가 그대로 돌아서고 있었다. 다행인지, 그는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윤식이 사라지고 나서, 살짝 후회가 들었다. 살살 꼬셔서라도 얘기를 들어볼걸 그랬나?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 보면, 강윤식이 왜 내게 강형식과 만나지 말라고 하는지 들을 수 있을지. 어쩌면 강형식에 대해 모종의 음모 따위를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을지도……. 됐다 그래라. 음모는 개뿔. 설사 그런 게 있다고 한들, 벌레보다 못한 놈 취급하는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겠냐고.

“후, 오늘 뭔 날인가?”

하루 종일 피곤한 일의 연속이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잠시 생각해본다. 이후에 일어날 일을. 내게서 모욕 아닌 모욕을 받고 쫓겨나듯 여길 떠난 강윤식은 어떻게 나올까? 날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얘기했으니 그대로 있을 리는 없고. 역시 가장 큰 보복은 자르는 거겠지? 거기에 더해 불량배들이라도 시켜서 린치라도 가하려나? 설마 가족을 건드리지는 않겠지.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수연이 누나와 수아를 떠올리곤 인상을 확 구겼다. 만일에 하나지만……. 그런 일을 벌이고자 한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는다. 아니 아니.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게 맞겠지. 난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가다가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 뭐야?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했냐? 지금 저녁 식사 준비할……. 아! 오늘 인터뷰한다고 했었지?

강형식의 목소리가 반갑다. 그래도 할만을 잊을 정도는 아니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고.

“방금 네 사촌 형 왔다 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 지금 갈게.

웃음이 나온다. 사촌은 사촌인가 보다. 닮은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네. 성미 한번 급하기는.

“오긴 어딜 와? 지금 일하던 중 아냐?”

- 지금 그게 문제야!

“……뭔 얘기가 오갔는지도 안 들어보고 화부터 내는 거냐?”

- 들을 게 뭐 있어? 그 더러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을지 뻔한데!

뭔데? 하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대신 말해주었다. 이러니까 꼭 동네 형하고 싸우다가 열라 얻어터지고 난 뒤, 힘깨나 쓰는 친구한테 일러바치는 느낌이긴 하다만. 그래도 말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적어도 당사자인 녀석은 알 권리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대책이건 뭐건 함께 얘기를 해둘 필요가 있었고.

“나더러 그러던데? 너랑 놀지 말라고. 크크큭. 순간 내가 초딩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한숨이 들려온다. 그러더니 울컥했는지, 버럭질을 해단다.

- 지금 웃음이 나와!

“그럼? 울까? 개가 짖는다고 네발로 기면서 개나발 불 수도 없는 거잖아?”

잠시 말이 없던 강형식이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되었다.

- 미안하다.

“왜 네가 사과하는 건데?”

- 어찌 되었든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불쾌했다면 내가 대신…….

“지랄.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왜 미안해하냐고?”

- …….

“강형식.”

수화기 너머에선 옅은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녀석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잘 들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나 그렇게 착한 놈 아니거든? 네 사촌 형이 오늘 와서 제안이라고 말하기에도 뭐한 개소리를 하다가 돌아가긴 했다만, 만일 그 제안이 정말 끝내줬다면 난 1도 망설이지 않았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아?”

돌려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거다. 강윤식이 병신이란 거지. 날 얼마나 하찮게 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고. 사람이란 게 그런 거다. 대학병원에서 청진기를 귀에 꽂고 있든, 편의점에서 동네 백수들한테 담배를 팔고 있든 간에 내 나이쯤 되면 대충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는 보이는 법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인 이상 생각이란 게 있고. 딜? 좋지. 다만, 어떤 거래가 오고 가는가에 따라 꽃이 만발하기도 하고 똥물이 넘실거리기도 하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강형식에게 말한 것처럼 내가 진짜 혹할 만큼, 정말이지 끝내준다고 생각할 만한 제안이라는 게 대체 무얼지는 나조차도 상상이 안 간다마는. 그럴 정도로 지금의 난 만족스러우니까. 뭐, 이루고 싶은 일도 있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현재의 내 인생을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니란 얘기다. 더도 말고 딱 이대로만. 정말이지 요즘처럼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던 것…… 가족들이 돈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고, 누구한테도 폐 끼치지 않으며, 좋아하는 요리를 평생 원 없이 하면서 행복하게 살 거 같은 예감이 드니까 말이다. 아, 여기에 요즘은 이하연과 강형식을 비롯해 몇몇이 끼어들면서 좀 더 이루고 싶은 것들이 가지를 치고 있었지만, 막말로 내가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원래 가지고 있는 꿈을 팔아치울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다. 음……. 근데, 확 궁금해지긴 하네. 강윤식의 제안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받아들였으면, 뭐라도 좀 줬으려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픽하고 웃음이 나온다. 퍽이나 줬겠다 싶어서. 줘도 푼돈이겠지. 흐음, 그 돈을 받아서 얼굴에 뿌려줬으면 더 속이 시원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무슨 말인지 알겠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형식의 얘기를 들으며 이번엔 내 쪽이 침묵했다.

- 내가 너무 흥분했어. 좀 더 차분하게 굴어야 하는데……. 일단 좀 알아보고 알아서 조치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라. 혹시라도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거 같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

“알겠어. 그럼, 끊어.”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지만, 이 정도면 알아서 하겠지. 애당초 강윤식 정도 되는 사람은 내가 싸울 체급도 아니고, 설사 그 정도로 내가 힘을 지고 있다 한들 당사자인 강형식 대신 싸워줄 생각도 없다. 물론 도와줄 의향은 있지만. 적어도 강형식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에선 나레이션의 얘기처럼 난 어디까지나 조연이니까. 대신, 아까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강윤식이 이번 일로 앙심을 품고 뭔가 내게 혹은 가족들한테 해코지를 하려고 한다면 나 역시도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거다.

“하, 진짜…… 피곤한 하루네.”

침대에 몸을 눕히곤 눈을 감았다. 씻어야 하는데……. 졸리다. 귀찮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습관이란 무서운 거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고, 평소와 다름없이 운동복 차림으로 동네를 달렸다. 물론 그 와중에 이하연으로부터 온 톡을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귀엽고 따뜻한 메시지들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강형식한테선 더 이상의 연락이 없었고. 물론 강윤식에게서도. 모르는 전화번호로 걸려온 것도 없는 걸 보면 둘 중 하나겠지. 날 무시하고 있던가, 아니면 내게 큰 타격을 입힐 만한, 단순히 해고 정도 수준이 아닌 무언가를 준비 중이란 건데. 느낌상 후자다. 아무튼, 그 후 샤워를 하고 주방으로 출근. 오늘은 광고 촬영이 있는 날이라서 굳이 주방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잖아?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난 탓에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고, 김진호 셰프한테 보고 차원에서 어제 인터뷰와 오늘 할 광고촬영 얘기도 말씀드리긴 해야 하니까. 그렇게 30분쯤 기다리니 주방 식구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한다. 준석이 형과 혜순이 누나, 그리고 안성댁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아침 식사 준비를 돕고 있으니 김진호 셰프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역시 오늘도 고윤수 주방장님은 못 뵙는 건가? 얼마 전부터 손에 붙기 시작한 칼질에 생각이 미친다. 후우, 이래서야 본말전도인데……. 요리사가 요리에 힘써야 할 텐데, 자꾸만 밖으로 도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김진호 셰프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다. 내 얘기를 모두 들으신 김진호 셰프의 반응은 무척이나 심플하면서, 진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생해라.”

어깨를 쳐준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고개를 끄덕여준 것도 아닌데도 희한하게 그 순간 힘이 났다. 난 미소와 함께 알겠다고 말씀드리곤 주방을 떠났다. 광고 촬영이 오전 일찍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뒤, 연락을 받고 저택을 나서니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타시죠.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뻘쭘하네. 난 C 마트 쪽에서 나온 직원에게 간단한 인사와 함께 멋쩍게 웃어 보이곤 차에 올랐다.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

모르는 번호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머릿속에 강윤식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놀랐다.

- 안녕하십니까? ‘서바이벌 우리끼리 산다’를 맡고 있는 KBC 피디 최종훈입니다.

음……. 이건 또 뭘까?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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