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셰프의 선택 (2)2021.04.11.
김서연의 눈빛에 내가 잠시 의아해하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 이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높은 톤의, 한껏 반가움을 드러내는 음성이었다.
- 여기요! 여기!
주변을 밝게 만드는 건 전등만이 아닌 모양이다.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한 손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흔들고 있다. 이건 뭐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그때였다.
“약속이 있으셨나 보네요.”
도로 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시선을 돌리니, 김서연이 산뜻한 미소로 날 보고 있다.
“아, 예.”
차를 얻어 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태워다주겠다는 제안을 해준 건 그녀 나름의 배려이니,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차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 저, 저기요.”
부드럽게 올라가던 차창이 잠시 멈췄다. 어느새 좁아진 틈새로 김서연의 얼굴이 보인다.
“감사합니다.”
또다시 옅게 미소짓는 그녀. 김서연답다고나 할까. 그녀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지만, 살짝 도도해 보이면서도 싱그럽게 느껴지는 미소가 일품이었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
차창이 채 닫히기도 전에 차는 출발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하연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뛰어온 그녀의 입술 사이로 허연 입김이 토해지고 있었다.
“천천히 오죠. 그러다 숨넘어가겠습니다.”
“힝. 그래도 반가운 걸 어떡해요?”
살짝 울상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겠노라고 찌푸린다고 찌푸린 모양인데, 그런 얼굴마저 어울린다. 그건 아마 이목구비가 뚜렷해서만은 아닐 터다. 워낙 밝은 얼굴의 그녀라 그런가. 아무튼, 이내 활짝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뭐 먹을래요?”
“스파게티!”
“그리고?”
“피자요!”
오늘은 음식을 만들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와 나란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물어왔다.
“근데, 방금 누구?”
“예? 아…….”
모를 일이다.
“……방금 미팅할 때 만난 사람이에요. 김 실장이라고 시아그룹에서 나왔다네요.”
그냥 이름을 말해도 됐을 텐데, 나는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아! 요 근처에 제가 아는 가게가 있어요! 거기 파스타 정말 맛있어요. 얼른 가요!”
날 잡아끌기 전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착각이겠지? 그나저나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선 그저……. 조금이라도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까. 김서연이 탄 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 쪽으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거둬들였다. ***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채로 바라본 백미러로 뒤창 유리 너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변 보도블록 위에 서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이야 두 번째 만난다 하더라도 꽤 인상 깊은 남자라 한눈에 들어왔고, 방금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김서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연이네?’
천천히 움직였다고 해도 차 속도가 있는지라 먼 거리의 얼굴이 제대로 보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그 특유의 활발함과 살짝 높은 텐션이 느껴지는 행동들은 세월이 이만큼 흘렀어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3년 만인가?
‘돌아왔다고 하더니.’
자신보다 2년 늦게 유학을 떠나고,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3년을 더 있다가 들어왔다고 들었다. 얼마 전부터 대현 어페럴 이사직을 맡아 상당히 공격적으로 중화권 시장을 공략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뜻밖이다. 서진영과 아는 사이라니. 아니, 한눈에도 보통 사이론 보이지 않는다.
그게 더 신선하달까. 그러면서도 의아해지긴 하다. 어떤 접점이 있어서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서진영이 대한민국 재계 탑3에 들어가는 대현 제국의 황녀를 만나고 있는지. 또 재벌가치곤 꽤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허용하는 자신의 집안과는 달리, 엄격하다면 엄격한 연애관을 강요하는 대현가의 딸이 저러고 있는 걸 그냥 지켜만 본다? 아직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놔두는 걸까? 차가 도로를 달려나갈수록 시선이 닿아있던 풍경이 멀어지면서 김서연의 눈길 또한 백미러에서 떨어져나왔다. 조용히,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인 그녀가 손을 뻗었다. 버튼이 눌리자마자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 간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활기차기만 했다. 12월에 접어들며 급격히 추워졌음에도 주말은 주말인지 북적거리다 못해 인파로 넘쳐나는 거리를 날 끌고서 잘만 돌아다녔다. 그렇게 함께 간 그녀의 맛집은 눈이 저절로 커질 만큼 음식 맛이 좋았다. 파스타도 그랬지만, 특히 피자. 피자를 만들 줄은 알아도 그리 좋아한다곤 말하기 어려웠는데, 이 정도면 나도 앞으로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 피자를 올려놔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먹은 답례로 커피는 내가 쏘기로 했고, 근방에서 1층에 있는 가장 카페를 찾아 들어가다 보니 결국 별다방이다. 가끔 인터넷을 하다 보면 향이 적고 탄내가 강해서 별로라고 인색한 평도 있더라만, 내 입에 잘 맞는달까. 싸구려 입맛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진하지 않고 구수한 느낌도 들어 좋기만 하다. 커피를 한 잔씩 한 후엔 거리 곳곳을 돌아다녔다. 희한한 건 근방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 볼 만도 한데, 이하연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뒤쪽으로 난 골목 어귀에 위치한 공원에 그득한 사람들 틈으로 날 이끌었다. 플리마켓. 골동품인지 폐품인지 모를 중고물품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고, 듬성듬성 자신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들…… 이를테면 반지라든가 필통이라든가, 시중에선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독특한 디자인과 색감을 지난 물품들도 눈에 띄었다. 파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다들 행색이 남달랐다. 개성 넘치는 코디와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그들의 모습 때문인지,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활기차기만 하다. 여기저기서 물건 값을 두고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보였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이들 앞에는 애들 몇 명과 이십 대 여자 한 명이 앉아서 곧 있으면 완성될 자신의 캐리커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보고 한참을 둘러보던 중, 그녀가 말했다.
“여기 좀 봐봐요.”
“……?”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내 목 아래에 두툼한 천을 들이대고 있다. 뭔가 해서 봤더니 머플러다. 보랏빛이라기보단 자줏빛 쪽에 가까운 머플러였는데, 마음에 든 건지 이하연이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걸로 주세요.”
“어? 사려고요?”
“헤에. 선물이에요.”
값을 치르고 난 뒤, 내 목에 둘러주는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대신 뻘쭘함을 감추고자 말했을 뿐이다.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인가요? 그럼 저도…….”
“항! 어린 없는 소리! 이건 그냥 오늘의 행운? 그런 거구요.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 따로…… 있거든요?”
근데 왜 얼굴은 붉히는 겁니까? 눈이 가늘어진 채 그녀를 보다가 하핫! 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요, 그럼. 저도 그때 줄게요, 크리스마스 선물은. 대신 뭐라도 하나 골라봐요. 마음에 드는 거로. 저만 받으면 좀 그렇잖아요? 오늘의 행운……?”
“정말? 진짜 뭐든 골라도 돼요?”
“뭐든지요.”
그게 뭐 그리 신나는 일일까. 그때부터 방관자 모드에서 구입자 모드로 기어를 바꿔 넣은 그녀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반지를 껴봤다가 귀걸이를 귀에 대봤다가, 어느 틈엔가 구제 청바지를 파는 곳에 가서 허리둘레 치수를 확인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피규어들을 늘어놓은 좌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반짝인다. 마음에 드는 것들이 많은지 좀처럼 결정을 하지 못하고 이 물건 저 물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녀. 그냥 다 사도 되는데…….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삼키며 그저 지켜만 보았다. 나로서는 뭐가 뭔지도 모를 만큼 넘쳐나는 이 수많은 물건들 중에서 그녀가 고를 물건이 뭔지도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빨빨거리며 공원 안을 휘젓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색다르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정말 이거면 돼요?”
“앙. 그렇다니까요.”
그녀가 품에 안고 볼에 부비고 있는 강아지 인형은 아무리 봐도 못생겼다. 그나마 중고는 아닌지 적어도 겉으로 봐선 깔끔해 보였고, 빳빳한 종이로 된 태그까지 제대로 붙어 있으니 상품 자체는 나쁘지 않은 듯. 그래도 그렇지 너무 못생긴 거 아닌가? 흔히 인형 눈알이라고 불리는 것 대신 크기도 색깔도 다른 눈깔이 붙어 있고, 주둥이에는 실로 수놓듯 삐뚤삐뚤하게 표현된 코와 입이 보인다. 흠, 수제라는 건가? 그럼 태그는 왜 있는 거지? 아무래도 중국산이지 싶은데……. 쯧, 아무렴 어떤가. 본인이 마음에 든다는데. 흔쾌히 값을 치르고 난 뒤에서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고, 아까부터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가로등도 켜진 채였다.
“저녁 먹고 들어갈까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물었는데, 반응이 뜻밖이다. 그때까지 인형을 꼭 끌어안고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하연이 급 풀이 죽어선 힘없이 말했던 것이다.
“미, 미안해서 어쩌죠?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아! 그, 그래요?”
“예. 실은…… 일하다 말고 나온 거거든요. 그래도 책임자인데 직원들한테만 일 시켜놓고서…….”
알 만하다. 그러니 굳이 뒷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으리라. 서둘러 그녀의 말을 막으며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되살릴 심산으로 애써 밝게 말했다.
“아깝네요. 오늘 밤엔 진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엄청 비싸고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하하. 아까 낮에 형식이가 저녁 같이 먹자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녀석이나 만나서 왕창 뜯어먹어야겠어요.”
조금은 어색한 어투로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는데, 이하연이 날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진다.
“……?”
말문을 닫고 바라보니,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그러곤 내 손을 덥석 잡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헐. 뭐지? 이젠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 아니지. 이만큼 만났으면 손 정도는 자연스럽게 잡아도 되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을 때였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 그녀가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가볍게 힘을 쥐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차까지 모셔다드리죠. 어디로 갈까요?”
“흡끅!”
코를 들이마시는 듯한 웃음소리 끝에 그녀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뭐양! 꼭 택시 아저씨 같앙.”
“어? 방금 그 말 좀 위험한 거 같은데? 택시 기사분들 들으면 대현 그룹 상품 보이콧할 수도 있어요! 아시죠? 대현 자동차 구매자들 중 상당수가 그분들인 거?”
“와아, 진짜. 별거로 다 사람 협박하고. 근데, 원래 그랬어요? 갈수록 느물거리는 게 진짜 아저씬가 봐!”
“무슨! 저 아직 이십 대거든요?”
별것도 아닌 거로 투닥거리는 건지, 속닥거리는 건지 모를 대화를 이어가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땅거미가 짙어진 거리는 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어두웠지만, 사방이 불빛인지라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목에 둘려 있는 머플러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리를 지나쳐가는 행인들의 표정은 한결 푸근하게 느껴졌다. ***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나는 간편한 차림으로 조깅을 나섰다. 한 시간 남짓 동네를 달리고 온 후 샤워를 하고서 짐을 꾸렸다. 뭐, 짐이라고 해봐야 어제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산 화장품이랑 몇 가지 건강보조식품들인데…… 인터넷을 검색해서 산 거라 좀 불안하긴 하다.
“좋아하시면 좋겠는데.”
사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화장품들을 배낭에 집어넣곤 일어섰다. 이미 어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으니, 갑자기 왔다고 놀라거나 하진 않으실 터다. 어쩌면 아침부터 일어나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고. 두 분 성격에 내색은 안 하시겠지만, 거의 그럴 확률이 높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형한테 좀 미안하긴 하네.”
원래 일요일에는 돌아가면서 주방을 지키게 되어 있는데,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빠지게 되니 사람들한테 미안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사정을 들은 준석이 형은 흔쾌히 나 대신 주방을 맡겠다고 말하며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었었다.
“형수한테 뭐라도 좀 선물해야 할 거 같은데…….”
이따가 이하연에게 물어볼까? 아무래도 여자한테 뭘 선물하는 게 좋은지는 여자가 잘 알 테니. 그러기로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다. 아우라지까지는 제법 먼 길이라 서둘러야 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