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잊는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3)2021.03.31.
브랜드 런칭? 너무 느닷없는 제안에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잠시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아까도 말했듯이 그거 내가 만든 게 아니라서 물어봐야 한다니까?”
“아, 그분? 사모님이시라는……?”
“그래.”
“음, 그럼, 넌 레시피…….”
“그건 나도 알지. 다만…….”
“그분 허락 없인 안 된다는 거네?”
“……그렇지.”
말씀드리면 반대하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로서도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면 반대하실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연히 물어봐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일을 진행한다면, 그거야말로 도둑질이니까.
“오케이. 접수했어. 아무튼, 이 얘기 빨리 해주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
고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뭐든 상품화되는 이 상황이. 어쩐지 사모님의 정성을, 그 오랜 세월 쌓아오셨을 노하우를 돈 몇 푼에 팔아치우는 것만 같아서. 쯧, 내가 아직 어린 걸까? 뭐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 돈이 된다고 판단하면 달려드는 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그럼, 사모님이란 분께 물어보고 얘기해줘. 아, 돈 얘기는 그때 정확히 할 테니까 만날 때 미리 얘기해주고.”
변호사라도 대동할 생각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알겠다고 했다. 꼭 녀석 말대로 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사모님께 여쭤보고, 일이 될 성싶으면 그때 돈 얘기와 함께 회사 관계자들과 만나면 될 테니까.
“얘기 끝난 거지?”
“응? 벌써 가게?”
“나, 오늘 쉬잖아.”
“아, 그래? 그럼 좀 더 있다가 가지그래? 맥주도 한잔하고.”
“아냐. 어디 좀 갈 때가 있어.”
내 말에 강형식의 눈이 가늘어진다.
“뭐야? 친구는 버리고, 하연이 만나러 가는 거냐?”
“뭐래.”
살짝 비웃어주곤 돌아서는데, 녀석답지 않게 끈질기게 물어온다.
“아님, 어디 가는데?”
“뭐야? 오늘따라?”
“글쎄. 널 따라가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은 느낌? 뭐 그런 거지.”
“지랄. 밤샜다며? 잠이나 주무셔.”
“크크큭. 그래야겠다. 아함. 솔직히 아까부터 졸려서 미칠 지경이다.”
“난 간다∼”
“그래. 멀리 안 나가마.”
픽하고 웃고 말았다. 언제는 멀리 나왔나? 미소를 머금은 채 그곳을 벗어났다.
*** 해가 뜨기도 전에 저택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곧 12월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차다 못해 칼날처럼 옷 안을 파고든다. 뛰다시피 해서 역사로 내려갔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도착한 지하철에 오르니, 객차 내부는 등산복 차림의 중년인들과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 몇 분을 제외하곤 한적하기만 했다. 하기야 일요일 아침, 그것도 첫차를 탈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요즘은 주5일 근무하는 곳도 많아서, 대부분 금요일 저녁까지만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쉬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도 가만히 살펴보니,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도 몇 명 보이긴 한다. 일용직인 모양인데 어디 건설 현장으로라도 가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대학을 가지 않고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던, 그저 의욕만 앞서고 치기 어리던 시절. 마음처럼 요리는 쉽게 배울 수 없었고, 그 바람에 수중에 지니고 있던 돈도 떨어져 하는 수 없이 노가다판을 뛰곤 했었다. 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말았을 때였다. - 다음 정류장은 오이도 역입니다.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차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들이닥친다. 음, 마트에라도 들렀다 갈까? 차에서 내리며 든 생각이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트엔 가지 않았다. 대신 오이도 역에서 좀 떨어져 있는 시가지에 들렀다. 일요일 아침이라 문을 연 곳보다 닫은 곳이 더 많았지만, 다행히 등산복 전문 매장이 한곳 눈에 띄어 들어갔다. 한때 고등학생들에게 유행하면서 등골브레이커라는 별칭까지 얻은 업체의 매장이었다. 뉴스에서 보면서 혀를 찼던 기억이 나는데, 그만큼 비쌌다.
“겨울맞이 세일기간이라서 10% DC 행사 중이에요.”
그래서 오리털 파카 한 벌 가격이 70만 원이란다. 확실히 가격이 세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는지, 매장 직원이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그러면서 다른 쪽에 걸려 있는 옷을 꺼내 든다. 딱 봐도 내가 지금 들고 있는 것보다 싸 보인다. 그럴 수밖에. 두툼하긴 한데, 너무 무거워 보인달까. 그에 비해 내가 원래 사려던 건 신소재와 함께 털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게 들어있다고 해서 무척 가벼우면서 따뜻하다고 하니까.
“손님, 그럼 이 제품 어떠세요? 이것도 가격대비…….”
“아뇨. 그냥 이걸로 주세요.”
“아, 그러실래요?”
“다른 디자인도 있죠?”
안 그래도 안 살 것처럼 인상을 쓰던 내가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걸 사겠다고 하니까, 얼굴이 활짝 핀 꽃처럼 변했던 매장 직원이 환하다 못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만 같다.
“누가 입으실 건데요?”
“외숙모…… 50대 여성입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나쁘지 않다. 색이 얌전하니, 외숙모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이왕이면 누나 거랑 수아 것도 살까? 에이, 괜히 디자인 구린 거 사 왔다고 구박하는 거 아냐? 어른들이야 모르겠지만, 누나나 수아 입장에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을 굳히곤 가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외삼촌은 내가 내민 종이백을 들고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셨고, 외숙모의 입에선 ‘너나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 입을 일이지, 뭐하러 돈 아깝게…….’로 시작해 끝도 없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꺼내든 옷만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고 계셨다. 수연이 누나는 그저 좋은지 옷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다가 날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고, 수아는…….
“꺄하아아아! 너무 예뻐!”
“좋아?”
“응!”
“다행이네. 마음에 든다니.”
“응응. 그리고 따뜻해. 히잉……. 오빠 사랑해∼”
요거 요거 며칠 안 본 사이에 여우 다됐네. 그럼에도 밉지 않다. 아니, 너무 예뻐서 꼭 안아주고 싶다. 덥석!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녀석이 점프하듯 달려들어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그 바람에 수아를 안고 뒤로 넘어간 나는 숨이 막혀서 일어난 후에도 한참이나 콜록거려야 했다.
“그냥 오지 뭐하러 이런 걸 사가지고 와. 안 그래도 피곤한 애가.”
하아, 외숙모도 참……. 평소엔 그렇게 자상하시고 말없이 날 응원해주시는 분인데, 내가 돈을 쓰거나 뭔가 무리를 한다 싶으면 잔소리가 진짜……. 엄마는 엄마인 걸까? 그래도 마냥 좋기만 한 건 왜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픽하고 웃고 있을 때였다. 안방 문이 열리며 외삼촌이 모습을 드러내셨다.
“어? 아빠, 어디 나가세요?”
“아빠 어디가?”
두 딸의 물음에 외삼촌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근데, 왜 그런 차림으로……?”
집에 있을 땐 늘 추리닝 바람이셨는데, 지금은 바로 출근해도 될 정도로 제대로 갖춰 입으셨다. 면바지에 셔츠까지. 심지어 양말까지 신으셨다. 그런 채로 위에는 낡은 잠바 대신 가볍고 폭신해 보이는 남색 파카를 걸치고 계셨다. 그러곤 소파에 앉아 별일 없다는 듯 TV를 보시는 모습에 가족들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저녁때까지 이어졌다. 외숙모가 집에선 더우니까 벗으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끝까지 입고 계시는 걸 보니 나로선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아침 아직 안 먹었지?”
“예.”
“금방 기다려 바로 밥 안칠 테니까.”
응? 밥을 지금 안친다고? 그럼 다들…….
“설마?”
“웅. 오빠 오면 먹는다고 기다리고 있었어.”
“아우, 야. 말도 마. 엄마가 갓 지은 밥 먹인다고, 쌀만 씻어놓곤……. 하아, 아들이라 이거지? 참네, 이래서 딸들은 서럽……. 아! 왜 때려!”
“시끄럽고, 얼른 와서 도와. 그래야 빨리 먹일 거 아냐? 진영이가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새벽부터 일어나서 왔을 텐데.”
“봐! 봐! 이런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으면서 외숙모를 따라 주방 쪽으로 향하는 수연이 누나였다.
“저도 도울게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가 먼저 얘기하기도 전에 외삼촌이 말씀하셨다.
“그냥 있어.”
“예?”
“네 외숙모가 너 밥 해먹이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니?”
“……아!”
그런 얘기까지 듣고 나니, 일어서려던 난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어렸을 적에는 그랬더랬다. 그저 엄마 아빠를 따라서 밖에 나가 외식을 하면 그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었다. 그럴 만도하다. 집에서 매일 먹는 밥이라는 게 된장찌개 아니면 김치찌개. 간혹가다 미역국이나 시금칫국 그것도 아니면 콩나물국이니까. 거기에 김치랑 밑반찬 몇 개. 가끔 한 번씩 올라오는 고기반찬과 달걀 후라이가 다였으니까. 물론 그때도 알고는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준수한 걸 넘어 꽤 훌륭한 밥상이었다는 것 정도는. 세상에는 이 정도는커녕 피죽도 못 먹고 사는 아이들이 넘쳐난다는 걸 알지 못할 정도로 모자라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안다고 해서 그걸 감사하게 여기기엔 철이 없는 나이이기도 했다. 아직 열 살 남짓한 아이로선 매일 크게 달라지지 않는 반찬들이 물리기도 했을 거다. 짜장면 한 그릇, 피자 한 조각, 햄버거 하나가 더 맛있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다. 특히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순간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 나로서는 더욱이. 집밥. 그건 그저 좋다 싫다로 평할 만한 게 아니란 걸.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하는 식사는 어디서 무얼 먹든 기분 좋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집에서 매일 함께하는 식탁보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기도 하다. 그래서였을 거다. 아침을 집에서 먹었고, 점심도 집에서 먹었고, 저녁까지 집에서 먹었지만 조금도 물리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저 좋기만 했다. 더욱이 점심때 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칼국수를 해주자, 수아를 필두로 식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걸 보면서 난 콧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끼 전부 집에서 함께 먹고 나서, TV 앞에 모여 앉아 과일을 깎아 먹고 있자니, 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냐? 서진영?”
수연이 누나가 기분 나쁘다는 듯 물어오고 있었다.
“뭐가?”
“왜 자꾸 피식피식 웃는데? 기분 나쁘다, 너?”
“아, 왜 가만있는 사람한테 시비인데?”
“어쭈? 지금 누나한테 개기는 거냐?”
“아씨, 개도 먹을 땐 안 건드린다는데!”
누나가 가볍게 후려친 머리통을 문지르며 항의하자, 누나가 이번엔 암바를 걸어온다.
“와, 서진영이! 마이 컸네. 하늘 같은 누나한테 막…….”
“수연아!”
“어? 아……아니, 난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하아, 철 좀 들었나 싶었더니.”
외숙모의 잔소리가 시작되려 하자, 수연이 누나가 얼른 꼬리를 내렸다.
“괜찮아요. 누나도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러는 거겠죠.”
“그러게. 시집 좀 가라고 하려 해도 여태 애인 하나 사귄 적도 없으니…….”
“윽!”
크큭. 원래 그런 법이지. 수험생이랑 노처녀 노총각들이 괜히 가족들 모이는데 안 가려고 하는 게 아니란 거다. 수세에 몰린 누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수아였다.
“근데, 오빠. 이번엔 누구랑 방송 찍었어?”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천진난만하게 물어오는 수아 덕택에 화제는 수연이 누나의 연애문제에서 자연스럽게 방송 얘기로 전환되었다. 다들 관심이 많았는지, 내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고들 있다. 그러다가 페이슬리 박이 할아버지를 만나는 얘기를 해주자, 거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수아마저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수연이 누나는 훌쩍거리며 어찌할 줄을 모른다. 외숙모께선 고개를 돌리고선 연신 소매로 눈가를 찍으시는 모습이셨고. 그나마 외삼촌만이 담담한 모습으로 앉아계시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오셨는데, 눈이 빨간 게 퉁퉁 부으셨다. 혹시 우셨냐고 물어도 죽어도 아니라고 하시긴 하시는데…….
“흑. 그 언니 너무 불쌍해.”
“그래도…….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다.”
두 자매의 얘기를 들으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촬영 얘기는 방송 전에는 해선 안 되지만, 가족들이니까 괜찮겠지. 그건 그렇고……. 슬슬 얘기를 하긴 해야 하는데, 두 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살짝 걱정스럽긴 하네. 난 눈치를 보다가 외삼촌과 외숙모께 말씀드렸다.
“저……. 삼촌.”
“응?”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의아해하는 두 분을 이끌고 안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수연이 누나가 묘한 눈빛을 보이다가 이내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수아는 한시라도 내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는지, 날 따라오려고 하다가 수연이 누나에게 붙잡혀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두 분을 모시고 안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
“……예약 날짜는 두 분께서 상의하셔서 결정하시면 되고요. 여기 병원은 시설이 좋아서 그런지, 딱히 입원까진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전날 약만 먹고 오면 된다고 하네요.”
서울에 있는 모 대학병원에 신청해둔 종합검진 패키지에 관해 설명을 해드리자, 두 분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계셨다.
“……이미 결제했다고 했니?”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외숙모는 돈 걱정부터 하셨고, 외삼촌은 말로는 고맙다고 하시면서도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한가득이셨다. 아마도 버는 족족 다 쓰는 거 같이 보여서 그러시는 거겠지.
“혹시 돈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신경 쓰지 마세요. 저 많이 벌어요. 진짜로요. 그러니까…….”
스윽. 외삼촌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시곤 한참이나 말없이 날 보시다가 살짝 붉어진 눈이 되어 나직이 말씀하셨다.
“누님이 이런 널 봤어야 하는 건데. 고맙다. 잘 커 줘서.”
옆에 앉아계시던 외숙모께선 뭐라고 하시려던 건지,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대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문이 닫히기 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살짝 아팠지만, 슬퍼서 저러시는 게 아니란 걸 알기에 애써 모른 척했다. *** 아파트 앞의 공원. 누나랑 둘이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다. 그네에 나란히 앉아 흔들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서울도 아닌데, 여기도 미세먼지 장난 아닌가 봐. 눈을 씻고 봐도 별이라곤 보이질 않네.”
누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딱히 맞장구쳐주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란 걸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수연이 누나가 불쑥 말한다.
“……고맙다.”
쯧, 다 들었나 보네. 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
“응?”
“나 요즘 방송하잖아.”
“…….”
“그거 하면서 느낀 건데…….”
날 빤히 쳐다보는 누나의 시선을 느끼며 발밑의 모레를 발로 툭툭 차올렸다.
“행복은 미루면 안 되는 거 같아.”
누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네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덧붙였다.
“그냥 그렇다고.”
더불어 속으로만 말했다. 페이슬리 박이 떠올라서. 누군가를 잊은 거 같아도, 잊힌 게 아니더라고. *** 다음날,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른 아침 집을 나섰을 때였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 일터로 나가신 외삼촌을 제외하고 가족들을 배웅한 채 낡은 아파트단지를 빠져나와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도로 쪽에서 중형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가 왔다. 번화가와는 한참 떨어진 동네라 차가 막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싶었는데 차는 내 앞에 와서 멈춰선다. 응? 길이라도 물으려는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차 문을 열고 누군가 내린다.
“아!”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우리 구면이죠? C 마트 코퍼레이션 비서실장 박상진입니다.”
그가 내미는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