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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잊는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2) (77/204)

#77. 잊는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2)2021.03.28.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울음을 그친 뒤에도 페이슬리 박은 할아버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의사는 몹시 놀라워했다. 그간 둘째 아들 내외를 비롯해 손주들이 여러 번 왔다 갔지만, 전혀 알아보지 못하던 박갑진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의 손녀만은 단번에 알아보았으니…….

“기적이라고밖에는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한참 만에 진정한 페이슬리 박이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 앉아 쉴 새 없이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의사가 한 말이었다.

“그만큼 그리워했다는 거겠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지만, 말하고 보니 참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끊임없이 말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는 손녀의 모습과, 그런 손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말로도 저 모습들을 설명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타깝네요.”

한진석의 말대로였다. 시한부. 아니, 정확히는 이미 온몸에 퍼진 병마로 인해 예고된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온 상황.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상태라니. 조금만 늦었어도 만나지 못했을 뻔했다는 건 분명 다행스러운 일임이 분명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기나긴 기다림에 비해 그토록 고대하던 만남이 너무 짧다는 게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철수하는 촬영진들을 뒤따라 나온 페이슬리 박이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발음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고, 우린 그녀와 그녀의 할아버지…… 박갑진을 뒤로 한 채 부산을 떠났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휴게소에 들렸을 때, 난 전화를 걸었다.

“예. 외숙모. 촬영 때문에 부산 내려갔다가 지금 올라가는 길이에요.”

- 그러니? 근데,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왜일까. 코끝이 시려 왔다.

“아, 아프긴요. 아시잖아요. 저 몸 하난 튼튼하다는 거.”

- 그래도 조심해. 요즘 부쩍 추워졌는데, 감기라도 들면 어떡하니? 그러니까 혹시라도 몸이 이상하면 돈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꼭 병원 가고.

……외숙모에게 있어서 여전히 난 물가에 내놓은 아이인가 보다.

“내일 찾아뵐게요. 말씀드릴 것도 있고…….”

- 애도 참.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지. 뭐하러 와? 너 바쁜 거 다 아는데. 우린 괜찮으니까 네 할 일부터 해.

“괜찮아요. 저번에 김장도 끝났고 크게 바쁜 일도 없어요.”

- 그러니? 호호호. 수아가 좋아하겠다. 요즘 입만 열면 네 자랑하느라 바쁜데. 어머! 내일 온다고 했지? 얼른 장이라도 봐야…….

오지 말라고 하시더니, 좋으신가 보다. 말씀만 들어선 내일 점심 식사 때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럼, 내일 뵐게요.”

-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해서 올라가고.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망설였다. 사모님께도 전화를 드릴까 해서.

“출발합니다!”

그때, 조강훈 F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사모님껜 서울에 도착해서 전화를 드려야 할 듯싶다. 서둘러 차에 올랐고, 인원 점검을 끝낸 두 대의 차가 서울로 향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서 셰프님도 고생하셨어요.”

촬영을 마치고 방송국을 떠날 때만 해도 집에 도착하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지 싶었다. 그만큼 오늘 하루가 피곤했고, 완전히 녹초가 된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숙소, 문 앞에 놓여 있는 상자 때문이었다. 사모님 이름이 쓰여 있는 소포. 뭔지는 몰라도 무거운 스티로폼 박스를 방안에 들여놓은 뒤, 박싱테이프를 뜯으며 자책했다. 틈을 봐서 전화 드린다고 하고선 그새 까먹은 자신을.

“뭘 보내신 거지?”

북북 뜯어나가는 테이프들이 한옆에 쌓이고, 마침내 박스 뚜껑을 연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스티로폼 안에 줄지어 들어 있는 페트병들과 플라스틱 반찬통들. 그리고 쪽지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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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영아. 일도 좋지만 끼니 거르면 안 된다. 마음 같아서 찾아가서 밥이라도 한 끼 해주고 싶은데, 그이가 말리네. 한창 바쁜 애 괜스레 신경 쓰이게 한다고. 아, 그이는 며칠 후면 퇴원할 거 같아. 한 달에 한 번 항암치료 받고, 통원치료하기로 했어. 혹여 우리 걱정일랑 말고, 쓸데없이 올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정말 고맙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날 걱정해주시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고마워서였고. 아저씨가 늦지 않게 치료를 시작한 게 다행이란 생각에서. 다시 한번 사모님에 보내주신 간장, 고추장, 밑반찬 등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요리사한테 반찬을 보내주시다니……. 사모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 든 것들을 보다가 가만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연락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모님, 저예요. 진영이.”

신호가 간 지 한참 만에 받은 사모님의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저씨의 음성도 들려오는 가운데, 한참이나 통화가 이어졌다. *** - 고객님이 통화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걸어주시면……. 기대하던 목소리 대신 들려오는 안내 음성에 이하연은 입을 삐쭉거렸다.

“계속 통화 중이네.”

아까 낮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런다. 그녀는 축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핸드폰 배경화면에 깔아놓은 서진영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힛.”

새하얀 치열이 고스란히 드러난 웃음과 함께 앱을 켜며 중얼거렸다.

“많이 바쁜가 보지.”

그녀가 톡을 한 무더기 보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예.”

급히 핸드폰을 끄고 한쪽에 내려놓는 그녀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 되었다.

“회의 들어갈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쉬운 듯 핸드폰을 챙겨 주머니에 집어넣는 그녀였다. *** 새벽에 잠이 깨고 말았다.

“으음…….”

언제 잠이 들었지? 방 안이 어둡다. 사모님이랑 통화하다가 아저씨가 전화를 바꾸고, 또 짧게나마 통화를 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후우, 씻지 않고 자서 그런가. 몸에서 냄새도 나는 거 같고. 무엇보다 피곤하다. 샤워라도 하고 다시 자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시간을 확인할 겸 핸드폰을 켰다. 어라? 톡이 잔뜩 와 있다.

- 앙! 계속 통화 중이네.

-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했더니…….

- 많이 바쁜가 봐요.

- ……하는 수 없죠.

- 촬영은 잘 끝났나 궁금.

-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 하아! 회의 엄청 길어서 이제야 퇴근해요.

- 자겠죠?

- 히잉.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기다렸다가 통화할걸.

- 혹시라도 안 자면 전화해요.

- 자요?

- 자?

- 서진영, 자?

- 자냐고요!

- ……자나 보네요.

- 잘 자요.

자냐는 질문만으로 무려 7통의 톡을 보내는 기염을 토한 이하연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킥하고 웃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잘 자요…… 하고 묻는 데선 어째 처연하게 느껴져 안쓰럽기도 하다. 나참,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레이션 말로는 나한테서 아버지의 향기…… 음, 갑자기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인데, 아무튼 그렇다니까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유학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향수병 같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혹시 강형식처럼 집에서 따돌림이라도 받는 건가? 흠, 구김살이라곤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런 거 같지도 않고. 아니면 뭐, 그런 건가? 맨날 비싼 음식만 먹다가 떡볶이 같은 분식이 자극적이고 맛있게…… 아아,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좀 비참한 기분인데? 아우, 모르겠다. 그녀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내 마음도 내가 잘 모르는 판국에.

“전화해볼까?”

시간을 확인하니, 어중간하다. 새벽 3시. 톡이 끊긴 시간은 새벽 1시.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가 깨어있을 거 같진 않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톡을 남겨본다.

--- 피곤했나 봅니다.

--- 오자마자 잤네요.

--- 전화 하셨나 본데, 통화 중이라서 몰랐네요.

여기까지 보냈는데도 대화 앞의 1이 없어지질 않는다. 그래도 몰라서 ‘혹시 안 자면.’이라고 쓰다가 지워버렸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1을 보면서 이렇게 쓴다는 게 웃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에 통화하지, 뭐.”

잠이 완전히 깬 건 아니지만,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잘지 말지 결정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샤워를 하고 나오니 잠이 완전히 깨버렸다. 하는 수없이 몸을 일으켰다. 운동이라도 할 생각으로. 그렇게 이른 아침…… 아니 새벽 댓바람부터 조깅을 하는 바람에 또다시 땀을 흘린 난 다시 샤워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오니……. 응? 전화가 와 있다. 이하연인가 싶어서 확인해 보니, 뜻밖의 이름이 떠 있다.

“뭐야? 이 시간에 웬일이래?”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녀석이 받는다.

“야이, 지금 몇 신 줄 알고…….”

- 워워, 릴렉스 릴렉스. 얀마, 아무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전화했겠냐? 오면서 보니까, 방에 불 켜져 있더만.

녀석…… 강형식의 얘기에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 아직 안 잔 거야? 아니면 깬 거야?

“일어난 거.”

- 오, 잘됐네. 그럼 잠시 나와라.

“뭔 일 있어?”

말투가 살짝 떠 있는 게 어째 걱정된다.

- 일? 있지.

응? 뭐지? 의아해져서 물었다.

“뭔데 그래?”

- 일단 나와.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음, 대체 뭔데 그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거기로 가면 되냐?”

녀석의 아지트라고 불러야 할 차량 수납고를 떠올리며 묻자, 강형식이 그리로 오란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옷을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서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싶어서. *** 뛰면 5분 거리에 불과했지만, 또다시 땀을 흘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걸어서 갔더랬다. 덕분에 10분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뭐야? 전화한 지 언젠데, 이제 와?”

여전히 각종 공구와 부품들로 어질러져 있는 정비창으로 들어서자, 강형식이 불퉁하게 물어온다.

“누구처럼 차가 없어서.”

“차?”

뭐야? 왜 눈을 빛내고 난리야? 저러다가 차라도 한 대 뽑아줄 기세다.

“그냥 하는 말이야. 하여간 생긴 것답지 않게 예민해선…….”

“맥주?”

벌써 한 손에 캔맥주를 들고 들이켜고 있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곧 해 뜨는데 무슨.”

“난 이제 잘 참인데?”

“여태 일한 거야?”

설마 차량 정비한 건 아니겠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강형식이 픽하고 웃는다.

“접대.”

“빡세네.”

“그러니까.”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숨 좀 돌리자.”

다시 한차례 맥주를 들이켜는 걸 보고 있을 때, 녀석이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훑으며 말했다.

“그거 있잖아.”

“그거?”

“간장 말이야.”

아, 맛간장? 그러고 보니 엊그제 그런 얘길 했었지.

“그게 왜?”

설마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얘기가 나온 지 이틀밖에 안 됐기에 별거 있겠나 싶어 가볍게 물은 터였다. 한데……. 씨익하고 웃는 강형식. 녀석이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결정됐다.”

응? 뭐가 어떻게 됐다고? 눈가를 좁히며 되물었다.

“설마?”

“맞아. 오늘 장동일 상무님이랑 얘기했는데, 꽤 놀라는 눈치더라고. 아아, 내가 샘플로 가져간 거 이미 맛보신 모양이야.”

“그래서?”

“그래서는 뭐. 상품화하기로 결정한 거지.”

헐. 삼한그룹……. 대기업 아니었나? 근데 무슨 일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냐? 난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었나?”

혼잣말을 하다가 아차 싶어서 말했다.

“얀마! 내가 말했잖아. 그거 내가 만든 거 아니라고.”

“알지.”

“그런 놈이…….”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자는 거잖아. 아, 참고로 말하자면 적당히 돈 몇 푼 주고 끝내려는 생각은 아니다?”

“그건 또 무슨…….”

“셈은 제대로 치르겠단 얘기지.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녀석의 입술 한쪽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런 채로 강형식이 얘기했다.

“장 상무님이 단순히 상품만 발매하지 말고, 차라리 새롭게 브랜드 런칭하자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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