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페이슬리 박 (3)2021.03.17.
한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나왔지만, 발걸음을 옮긴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고민준 본부장이 김동하 국장에게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사전승인을 받기 위해, 정확히는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사에게 보고 아닌 보고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향할 때, 신현정 PD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스튜디오로 내려왔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잰걸음으로 빠르게 빠져나온 그녀를 맞이한 것은 조강훈 FD였다.
“아,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던 참입니다.”
“찾았나요?”
그녀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마주한 조강훈 FD의 입매가 살짝 휘어져 올라가는 걸 본 신현정 PD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역시 서진영!’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역시 복덩이다.
“어딘가요?”
“부산입니다.”
“아! 부산…….”
페이슬리 박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했지. 그럼…….
“살아있는 게 확실한가요?”
“아직까지는요.”
조강훈 FD의 대답에 묘한 위화감을 느낀 신현정 PD가 되물었다.
“아직?”
“예. 현재 페이슬리 박의 조부 되시는 분은…….”
설명이 이어질수록 신현정 PD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놀랍다면 놀라운데,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웃으며 박수를 쳐도 모자라겠지만, 사람된 도리로선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착잡한 심정이 된 신현정 PD가 잠시 망설이다가 얘기했다.
“일단 출발하세요.”
“그러려던 참입니다. 이미 차도 수배해놨고요. 영상팀도 대기 중입니다.”
잘했다고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신현정 PD였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은 건지, 조강훈 FD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예. 가면서 계속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고생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돌아서는 조강훈 FD를 보다가 스튜디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신현정 PD. 때마침 보인 페이슬리 박을 발견하곤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예정되었던 시간에서 30분이 지났지만, 촬영이 시작될 조짐은 보이질 않고 있었다. 한진석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때마침 지나가던 스탭 한 명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뭐, 피디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죠.’라고 말한 뒤 급히 떠나갈 뿐이었다. 답답해진 한진석이 미간에 주름진 얼굴을 하고선 서진영에게 물은 것도 그때였다.
“서 셰프님, 뭐 아는 거 없어요?”
당연히 안다. 딱히 숨길 만한 일도 아니고. 다만, 그 얘기를 내가 하는 게 맞는지는 좀 의문이다. 그래서 슬쩍 돌려 말했다.
“촬영 스케줄을 조정하려는 거 같긴 한데, 자세한 건 피디님께 들으시죠?”
“흐흠……. 스케줄 조정이라…….”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한진석.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던지듯 말했다. 화제라도 돌려보려는 심산으로.
“예고편 보셨죠?”
“아, 그거요? 당연히 봤죠. 캬하, 확실히 우리 피디님이 센스가 굳이에요. 굳!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내 의도대로 넘어간 건지, 아니면 넘어가 준 건지는 몰라도 한진석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이대로만 찍으면 그림 좀 나오겠는데요?”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내게 묻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아니스트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그냥 뻥카인 줄 알았더니, 진짜로 구현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니까요. 더도 말고 예고편만큼만 나오면 진짜 대박이겠다 싶어요.”
확실히 대본만 보자면 그렇다. 한진석 말마따나 누가 그런 생각을 할까? 다만, 나로서는 살짝 당황스럽긴 하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요리를 하라니……. 무슨 난타도 아니고. 아아, 모르겠다. 굳이 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 돈까지 받는 처지에.
“그럴까요?”
“에이, 딱 보면 척이죠.”
“…….”
“암튼 잘만 되면 죽이긴 할 텐데, 가능하시겠어요?”
“잘 안 되면 저만 죽겠죠.”
“설마 그 정도로 죽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편집이라는 게 있는데.”
“악마의 편집도 있는 법이죠.”
“하긴, 이도 저도 안 되면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죠. 피디님이 그럴 것 같진 않지만요.”
“그야 모르죠. 사람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있지만, 신현정 피디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저 앓는 소리를 한 것뿐이다. 내 방식대로. 희한한 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진석이 받아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크큭. 근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욕만은 배 터지도록 먹겠네요.”
“배 터져 죽기야 하겠어요?”
촬영이 들어가기도 전에 그와 난 한마디씩 번갈아 가며 치고받았다. 그러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을 때였다.
“한진석 씨! 서 셰프님! 잠시 얘기 좀 하죠.”
언제 왔는지 저만치서 신현정 피디가 우릴 부르고 있었다.
“아이고. 들은 거 아닌지 모르겠네.”
한진석이 과장된 표정으로 뜨끔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나만 들릴 만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우, 몰라 몰라. 무슨 얘긴진 몰라도 얼른 가시죠.”
설마 또 따…….
“따-악!”
아무래도 진짜로 재미 들린 거 같은데? *** 신현정 피디로부터 급히 수정된 게 분명한 대본을 받았고, 그걸 잠시 살펴보는 동안 이번에 한해서 촬영된 분량에 따라 어쩌면 ‘3회차에 걸쳐 방영될지도 모른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그에 따라 출연료도 추가로 지급될 거란 얘기도 있었다. 문제는 일정인데…….
“음, 그럼 오늘 안에 촬영이 다 안 끝날 수도 있겠네요?”
“예. 그럴 공산이 큽니다.”
“내일까진 돌아와야 하는데…….”
“힘들면 부산은 저만 다녀와도 괜찮습니다만.”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이 프로 MC예요. 서 셰프님도 가시는 마당에 그럴 수는 없죠. 아, 피디님도 가시나요?”
“그러려고요.”
응? 조금 놀랐다. 나나 한진석은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신현정 피디까지 갈 거라곤 생각지 못한 탓이다. 근데 왜 날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 신현정 피디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한진석이 잠시만요……라고 말하더니 그의 매니저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김진호 셰프한테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야 주방장님께 방송에 관해선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던지라 관계없지 싶었던 것이다.
“회사에 연락했더니 알아서 스케줄 조정한다네요.”
그때, 한시름 놨다는 얼굴이 되어 돌아온 한진석이 신현정 피디에게 물었다.
“근데, 대본 보니까 부산 가는 얘기는 없던데……. 혹시, 페이슬리 박에겐?”
뒷말은 없었지만, 여기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궁금한 얼굴이 되어 바라보자, 신현정 PD가 씁쓸한 얼굴을 해 보인다.
“……얘기는 해뒀어요.”
“아……. 그러셨군요.”
더 이상 묻기 곤란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신현정 PD가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준다.
“솔직히 제가 상상하던 반응은 아니더군요. 조금 놀랐다는 정도?”
나로서도 좀 의외네. 이런 반응이라면……. 밀면을 선택한 게 잘한 건지…… 의심이 드는데?
“뭐,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보죠.”
한진석의 얘기에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신현정 PD가 곧 촬영 들어갈 거라는 말과 함께 떠나간 뒤였다.
“와우, 들었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페이슬리 박이 저만치서 우릴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온다. 참 발랄한 아가씨다. 미국에서 자라서 그런가, 사교성도 좋고. 그렇긴 한데…….
“지져스! 저 진짜 놀랐다니까요! 그랜파가 있다니! 어메이징! 저 막 두근거리는 거 있죠!”
……한진석의 말대로 아메리칸 스타일인 건가? 나로선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러려는 하는 수밖에. 같은 땅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나랑 같길 바라는 건 무리일 테니.
“예. 그러네요.”
내가 말해놓고도 참 영혼 없는 대꾸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진석이 웃으면서 잘됐다고 얘기하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줬다는 점이랄까. 아무튼, 마음이 다소 심란한 가운데 촬영이 시작되었다. *** 신현정 피디의 큐사인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예의 그 화려한 음악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자 한진석의 유쾌한 음성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다시 찾아왔습니다. 서 셰프의 신들린 요리를 맛볼 수 있는 희한하고 상큼한 신개념 힐링 쿡방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입니다!”
찰지기가 찹쌀떡 저리가라인 멘트를 날리는 한진석이었다. 물론 난 그 옆에 앉아 보릿자루 신세를 유지 중이었고. 여기까진 지난번 촬영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짝짝짝짝짝짝짝!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건 아니었고, 100명 남짓한 방청객들이 스튜디오 한쪽에 마련된 방청석에 앉아 있다. 단기 알바인지, 아니면 추첨으로 뽑은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지난번에 비해선 확실히 활기가 돈다. 이것도 다 지난번 방송이 나름 성과를 거둔 덕분이겠지만, 나로서는 괜스레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씨, 나 혹시 무대 공포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살짝 긴장돼서 얼굴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한진석이 불시에 기습한다.
“서 셰프님, 잘 지내셨죠?”
“예?”
“얼래? 방송 중에 혹시 딴 생각하신 건 아니죠? 와, 어제 보니까 실검 1위하셨던데 벌써부터 어깨에 힘 빡 들어가셔서…….”
“아뇨, 아뇨. 전혀요!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
나참, 이게 웃기나? 방청객들이 웃고 난리도 아니다. 하아, 이래서야 제대로 요리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슬금슬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을 때, 한진석이 픽하고 웃더니 익살스럽게 멘트를 친다.
“예. 오늘도 변함없이 친근한 모습 보여주시고 계신 서 셰프님이십니다. 그럼 이제 오늘의 초대손님을 모셔볼까요?”
프로페셔널한 한진석의 진행에 환호하며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는 방청객들. 역시 국민 MC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싶다.
“와, 이분…… 장난 아니네요. 리사이틀이라고 하나요? 15살 때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무려 76회에 이르는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지금 막 유럽 순회공연을 마치고 오신 피아니스트, 페이슬리 양을 모십니다.”
팟! 한진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튜디오의 불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커튼에 가려져 있던 무대 안쪽에 조명이 들어왔는지, 밖에서는 그저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이는, 긴 머리도 긴 머리거니와 가냘픈 몸매 덕에 커튼에 비친 그림자만으로도 여성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딴 따다다단 단……. 어디선가 들어본 피아노 선율이 귀를 통해 들어와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굳이 대본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알려진 곡이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 물론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치기 쉽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뿐. 스튜디오 안의 사람들……. 나를 비롯해 한진석은 말할 것도 없고 스텝들까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연주를 들었다. 한국에선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에선 꽤 유명하다고 하더니, 과연 연주 실력이 탁월하다. 그 증거로 누구 하나 몰입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간을 흔들며 스튜디오 곳곳으로 퍼져나간 음률에 다들 넋을 잃고 듣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체감상 1분도 안 지났을 거 같았지만, 이미 대본을 본 나로선 5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끝난 피아노 연주가 그저 아쉽기만 했다. ……따다다다단 딴. 마침내 연주가 끝나고, 박수라도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소리 없이 커튼이 위로 올라갔다. 팟팟팟. 그사이 핀 조명이 켜지며 어느새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선 페이슬리 박을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