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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페이슬리 박 (2) (71/204)

#71. 페이슬리 박 (2)2021.03.14.

  뭘 어쩌란 건지. 난감하기만 하다.

“이산가족 상봉이야 뭐야?”

나레이션이 사라지고 나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걸까. 신현정 피디가 날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심란하네. 이건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밀면에 대해선 게스트가 정해지기 무섭게 알려주더니, 정작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 얘기는 촬영 직전에 말해준다? 뭐야? 이거 지금 멕이는 거지? 신현정 피디의 눈길을 피하며 대본을 펼쳐 읽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덜 심란할 것 같아서. 이미 읽어봤던 거지만, 역시나다. 지난번에 보내준 것과 달라진 건 없었다. 이 말은 곧 첫 촬영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전반부엔 한진석이 말발을 앞세워 게스트인 페이슬리 박의 사연을 이끌어내곤, 후반부엔 내가 요리를 앞세워 페이슬리 박의 감정을 극대화한다는 게 계획의 전부다. 다만 한진석이 주가 되는 전반부엔 나한테 할당된 대본이 거의 없었고, 대신 후반부 땐 거의 대부분 내가 대사를 쳐야 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것도 대본에조차 없는 대사들을. 아마 지난번 류승렬 편에서 그렇게 한 게 나름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한데. 글쎄다. 그때 좋았다고 해서 이번에도 좋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더구나 이번엔 이산가족의 상봉까지 이끌어내야 하는데, 그게 잘 될는지도 의문이고. 아, 그전에 페이슬리 박의 뇌내 한구석, 거의 잠재의식이라고 불려도 무방한 무의식 안에서 아주 오래되어 잊힌 거나 다름없는 기억…… 아니, 추억을 끄집어내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밀면의 재현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역시나 제면기가 문제인데……. 촬영 시작 전엔 도착한다고 하더니, 아직까진 감감무소식이다. 이러다가 촬영 끝날 때까지 안 오는 거 아냐? 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원래는 밀면에 대해선 비밀로 하고 촬영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일이 너무 커진 느낌이랄까. 밀면도 밀면이지만, 페이슬리의 박의 할아버지에 관한 일은 나 혼자서 감당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후,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그 시기가 빨랐든 늦었든 간에, 기껏 나레이션이 정보를 물어다 줬는데 그걸 제대로 활용 못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한달까.

“피디님.”

“……?”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촬영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느닷없이 내가 이렇게 말해서 그런지,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진 않았다.

“그러죠.”

  *** 10분 정도였을까? 스튜디오의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서진영과 대화를 나눈 시간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다. 대화라곤 해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건네고 다른 쪽은 그저 듣기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것보다는 대화 내용이 단순한 까닭이 컸다. 서진영이 말한 것은 달랑 두 가지. 이번 회차에 만들 요리가 밀면이라는 것. 그리고……. 서진영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스튜디오로 돌아온 신현정 PD는, 평소 차분하기만 하던 표정과는 달리 다급한 얼굴이 되어 스탭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대기실을 빠져나올 때부터 살짝 붉어져 있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더불어 다급함이 표정만이 아닌 말투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페이슬리 박의 가족관계 다시 한번 알아보세요!”

“예? 가족관계요? 그 문제라면 이미 보고드린 거로 아는데…….”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말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는 조강훈 FD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에 서 있는 스탭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프로다. 이곳 방송국, 그중에서도 예능 쪽에서 일하는 이들치고 촬영장에서 밥 대신 이슬을 먹어가며 밤을 새워보지 않은 이가 없었고, 때론 숨 막힐 정도로 다급히 돌아가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이도 드물었다. 그만큼 역전의 용사들이라 할 수 있는 베테랑들만 모인 곳이 이곳인 셈이다. 그러니 게스트의 가족관계처럼 기초적인 정보를 파악해두지 않는 실수를 했을 턱이 없다. 따라서 페이슬리 박의 가족관계 역시 사전에 파악해둔 것은 너무 당연한…….

“할아버지!”

신현정 PD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조강훈 FD는 의아하단 눈빛이 되어 되물었다.

“예? 하, 할아버지요? 페이슬리 박한테는 할아버지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촬영을 들어가기 전, 얼마나 보았는지 거의 외우다시피 한 페이슬리 박의 인적사항. 그리고 성장 과정 등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려봤지만, 그 어디에도 할아버지란 존재는 없었다. 그러니 저런 표정이 될 수밖에. 뜬금없다 못해 황당하다는 얼굴이 된 조강훈 FD를 향해 신현정 PD가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있어요!”

“예?”

“아직 살아계시다고요, 할아버지!”

“……헉!”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는 사실 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걸 다 떠나서 지금 보고 있는 신현정 PD의 표정만으로도 얼마나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지쯤은 느낄 수 있는 조강훈 FD였다. 이는 그뿐이 아니었다. 스탭들 모두 눈알을 굴리면서 저마다 신현정 PD의 의중을 파악하기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깨달았다. 지금은 그럴 필요도, 시간도 없다는 것을. 전장에서 병사들이 총 대신 지휘봉을 잡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기선 신현정 PD의 지시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걸 순식간에 깨달았다.

“뭣들 해요? 지금 바로 수배하세요! 얼른!”

“알겠습니다!”

눈칫밥만 몇 년인지 모를 조강훈 FD가 스탭들을 대신해 대답하곤 막 돌아서려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되물었다.

“아, 근데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

페이슬리 박이 외모는 비록 한국인이지만, 국적만 따지면 미국인이란 걸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일 테니 조강훈 FD가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신현정 피디의 목청이 살짝 높아졌다.

“아뇨. 미국 말고 한국! 고향이 부산 쪽이라고 했으니까, 부산시청 쪽부터 전화 돌리고, 부친이 서울에서 사업을 한 적도 있으니 서울 쪽으로 알아봐요. 그리고 미 대사관이랑…… 그래요, 혹시 모르니까 미 이민국 쪽까지 싹 훑어요!”

“이민국까지요?”

“혹시 모르잖아요? 함께 미국으로 갔는지도.”

“아!”

“아무튼, 무슨 수를 쓰든 소재 파악이 먼저예요.”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소재 파악되면…….”

“영상부터 준비하세요. 정 안 되면 사진이라도 확보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들 하세요.”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스탭들을 바라보며 신현정 피디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진영의 말대로라면 이번 편 역시 꽤나 이슈가 될 거다. 아니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 회차 방송을 보게 된 시청자들은……. 어쩌면 겨우 하루 실검 1위를 찍는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실검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게스트인 페이슬리 박의 이름이든, 아니면 서진영이든 혹은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됐든 간에. 그때쯤엔 자신의 방송이 단순히 자극과 재미만을 추구하는 흔하디흔한 예능 프로와 아니란 걸 만천하가 알게 될 테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잔뜩 상기된 그녀였지만, 한편으론 의아하기만 했다.

‘이민 간 지 오래된 탓일까?’

어째서 방송국에선 몰랐던 걸까? 아니, 방송국조차 파악하지 못한 그 정보들을 서진영은 어디서 얻은 거지? 진짜 신이라도 내린 걸까? 아니면 다른 정보통이라도 있는 건가?

“후……!”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안에 모든 방송을 마칠 계획이었는데……. 이래서야 하루 만에 찍을 수 있을는지도 의문이다.

‘아! 방영!’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뭘 놓치고 있는지. 단순히 촬영만이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이대로라면 분량이 늘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억지로 늘린 것이 아닌지라 늘어난 분량을 함부로 쳐낼 수도 없을 테고, 또 그럴 까닭도 없다. 신현정 PD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렇게 되면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이 문제만은 자신 혼자서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인데…….

“……!”

그녀는 결심을 굳힌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고민준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어지간해선 방송국 내에선 쓰지 않는 호칭이었지만, 지금은 절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다급했던 탓이다. 신현정 PD는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던 목소리 탓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쏠리자 이내 목청 낮추며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좀 급해서 그런데 나랑 얘기 좀……. 지금 올라갈게. 아니, 바로 간다니까.”

통화를 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한진석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스탭들을 바라보았지만, 누구 하나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말해줄 만한 사람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설사 있다고 해도 속 시원히 말해줄 만큼 자세히 아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

“무슨 일인데 그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뛰어온 건지 헐떡거리고 있는 신현정을 보면서 고민준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악, 학……. 서, 선배…….”

“야야,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일단 앉아. 물도 좀 마시고.”

마음만 앞서는 건지, 선 채로 아니 무릎을 짚고서 연거푸 대화를 시도하던 신현정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그러곤 고민준이 잔에 따라 내민 물을 받자마자 한입에 털어 넣듯 마셨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순식간에 비워지는 유리잔을 보면서 고민준의 숨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다. 대체 뭘까? 고민준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침착하다 못해서 냉정하다고까지 할 정도로 차분한 그녀였기에 더 그랬다. 여태 그녀와 알고 지내면서 저런 모습을 본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제 말해봐. 뭔데 그렇게 흥분해서…….”

슥. 아직도 숨이 찬 건지 고개를 숙인 채로 손만 간신히 들어 올린 신현정이 그의 말을 막았다.

“……잠시만.”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쳐드는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반짝이다 못해서 빛을 뿜고 있는 듯하다.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인데…….

‘거참, 쟤 왜 저래?’

자신이 알기론 저 녀석은 결론이 나기 전엔 입을 열지 않는 타입인데, 저러는 걸 보면 아직도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하니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해서 고민준은 좀처럼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러든가 말든가, 그 잠깐의 사이 만에 침착함을 되찾은 신현정이 숨을 길게 내쉬곤 말문을 열었다. 어느샌가 차분한 음성이 된 그녀를 보며 저런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어 살짝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고민준이 뜨끔하고 있을 때였다.

“선배.”

“그래그래. 네 선배 여기 있으니까, 그렇게 목놓아 부르지 않아도…….”

“이번 편 2회론 안 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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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게 무슨…….”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안 된단다. 앞의 2회는 그렇다 치고, 신현정이 안 된다는 말을 한다는 게 신기하기보단 당황스럽기만 하다. 첫째도 계획. 둘째도 계획. 마지막도 철저한 계획이 신조인 녀석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뭐, 확실히 이쪽 바닥은 변수가 많기는 하지.’

예능이라는 게 시사 교양국처럼 딱 짜여져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바닥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좀처럼 익숙해지진 않는다. 항시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저러는 모습이.

‘오늘 촬영 아니었나?’

그것도 당일날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니, 살짝 무섭다. 대체 뭘 얼마나 엄청난 음모를 꾸미…… 아니 계획을 짜고 있길래 저러는 건지.

“말을 하려면 사람이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지.”

급작스러운 준비니만큼 좀처럼 말은 나오질 않는 법이다. 그래도 신현정은 최대한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명료하게 의사를 전달하려 애썼다. 촬영까지 미루고 온 탓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편 게스트가 미국에서 온 피아니스트인 건 알지?”

“알지. 근데 그게 왜?”

“아무래도 그녀가 한국에 온 게 우연만은 아닌 거 같아.”

“그거야 그렇겠지. 공연차 왔다가 이왕이면 자기가 태어난 나라니까…….”

“아니, 아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내면에 그리움 같은 게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그리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민준 본부장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국장님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자신 또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고. 그런 그의 머리로는 겨우 8살 무렵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대부분의 성장기를 보낸 여자가 고국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운 나라에 대해 그리움을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눈빛에 그 내심이 그대로 표출됐는지, 신현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도 믿기 어렵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진영이 알려준 정보였다. 더구나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증거? 그거야 조금만 파 보면 드러날 테고. 서진영에 대한 믿음은 둘째 치더라도, 그녀가 알고 있는 서진영은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믿기 힘들지만……. 그래서 지금 조사 중이야.”

“조사? 뭘?”

아직까지 그리움이란 단어와 그 대상과의 연결점을 찾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신현정은 고민준이 미간을 찡그리는 걸 이해한다.

“할아버지가 있었나 봐.”

“할아버지?”

되묻는 고민준에게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준 신현정이 다시 한번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서진영이 단독으로 알아낸 정보를 방송국이란 거대 조직을 등에 업고 있는 자신이 미처 알아내지…… 아니, 확인은커녕 그 존재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이 불러온 결과였다. 그로 인해 이어진 그녀의 음색은 어쩐지 처량한 느낌까지 들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미국으로 가기 전, 페이슬리 박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게 그 할아버지였던 모양이야.”

소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아니었다. 고민준이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신현정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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