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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조짐 (3) (66/204)

#66. 조짐 (3)2021.03.03.

강구철 사장이 자신도 채 파악하지 못한 적개심에 불타오르고 있을 때, 삼한 그룹의 강 회장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 그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4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가 안겨 있었는데, 뭐가 불만인지 입이 댓 발이나 나와 있다. 강 회장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저 때가 50여 년 전이었을 거다.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산업이 막 움트던 시기. 의욕만 있으면 뭐든 될 것만 같던 때였다. 실제로도 손대는 것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빴다.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론 부족했다. 잠잘 시간조차 아까웠고, 한국이 좁다 하고 삼팔선부터 부산을 거쳐 거제도까지 사흘이 멀다 하고 출장을 다녔더랬다. 그걸로도 모자라 미국과 일본 등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출자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못 들어가는 날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연히 가족들은 뒷전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얻은 첫 아이였지만, 함께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아이가 한창 뛰어다니기 시작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맘때의 아이들에겐 아빠의 관심과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자신이 가족들과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는 시간에도 경쟁자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뒤처져도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은 느낌에, 한시도 쉴 수 없었다. 덕분에 적어도 한국에서만은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세를 이룰 수 있었지만. 그러는 동안 자신의 아들은……. 스윽.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했던 아이의 어린 시절. 그 시절, 아들과 아버지는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진에서도 역력히 드러나는 어색함. 그것이 이제 와서 못내 아쉽기만 한 강 회장이었다.

“현아…….”

아들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던 강 회장이 회장실 한쪽에 놓인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술병. 대한민국 재계 순위 1위에 올라있는 거대 그룹의 수장이 마실 만한 술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 회장이 가장 좋아라 하는 술이었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소주 한 잔이면 잠깐이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고, 그렇게 지친 몸을 달래고 나면 또다시 달려갈 힘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가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때와는 또 달랐다. 그리움. 달리 말하면 뒤늦은 후회라고나 할까. 강 회장은 양주잔에 따른 맑은 소주를 입가로 가져가며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이내 TV가 켜지고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 상단에는 곧 있으면 시작하는 프로그램을 알려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피식. 강 회장의 얼굴에 또다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손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두려운 현실. 아비를 잃은 자식에게 아들을 먼저 앞세운 할애비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조차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전화를 걸어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지금, 이렇게 TV를 통해 다른 이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손자를 떠올리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

“좋아, 좋아. 아주 잘했어!”

진 회장의 웃음소리가 회장실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KS 그룹의 비서실장인 최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늘 불려올 때마다 옆에 뻘쭘하게 서 있던 김명기 부장 또한 오늘만은 기고만장하다 할 정도로 표정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뒤늦게 광고를 넣으라는 회장의 명령을 완수한 것은 물론이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꽤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겨우 사흘 나갔을 뿐인데도 매출이 20% 증대됐다? 하하하. 역시 유티비가 대세군, 대세야.”

기분 좋은 목소리와 함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진 회장. 최 실장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해당 방송과 관련해 현재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도합 27개인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그중 절반이 각종 포털사이트이고 나머지는 유티비입니다. 특히 보시고 계시는 유티비의 경우 예고편의 조회수가 50만을 넘어섰고, 곧 100만에 이를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렇지. 오늘, 방송이 나가면 수직상승하겠지.”

“탁월한 분석이십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었으니 명백한 아부다. 그럼에도 진 회장은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좋아라 하지도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삼한그룹이나 C 마트에 비해서 뒤늦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진가를 알아보고 뛰어들었지만, 행동이 늦은 만큼 전략을 다변화해서 인터넷을 공략한 것이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좋아! 이대로만 해. 아, 방송할 시간 다 되지 않았나?”

“광고 중이니, 곧 시작할 겁니다.”

“틀어봐.”

“알겠습니다.”

리모컨으로 TV를 틀고는 조용히 나가려던 최 실장이었다. 김명기 부장 역시 뒤따라 나가려 했고.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의 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뭣들 해? 거기 서서. 와서 앉지 않고.”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앉은 채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은 조용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 그들의 두 눈은 TV에 고정되어 있었고, 저마다 이번 방송이 짐작대로 대박만 나준다면…… 따위의 생각들을 하며 눈을 반짝였다. *** 차 문을 여는 소리가 거칠게 들리며 여자가 밴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뒤이어 보조석 문이 열리고 김 실장이 올라서기 무섭게 들려오는 커다란 음성.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로드매니저의 인사는 다소 오버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걸 두고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 차 안에는. 아니, 그건 MM2 엔터테인먼트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찬가지일 터였다. 헤나.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걸그룹 멤버였던 그녀다. 그것도 센터. 가창력이 좀 달린다는 평이 있었지만, 그 대신 외모와 끼가 출중했기에 많은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그걸 바탕으로 쇼 프로에 곧잘 출연했고, 그러다가 팀이 해체될 시기가 다가오자 솔로로 데뷔하며 연기 쪽으로까지 영역을 확장 중이었다. 회사에서도 상품성이 높다는 평가였기에 때문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매니저들도 그녀를 애지중지하다 못해 어려워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방송은 어때요?”

“지금 하는 중인데, 보실래요?”

“예. 틀어주세요.”

곧이어 차 안에 달아둔 20인치 TV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예능 프로의 제왕이라 불리는 노경환 피디가 연출한 ‘혼저왕 먹읍서’가 한창 방송 중이었다. 그걸 본 헤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봐도 방송은 잘 뽑혔다. 패널들과 게스트 간의 호흡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것은 방송의 홍일점인 자신의 존재감. 비중과 분량도 적당했고 편집도 잘돼서 누가 봐도 호감 있는 캐릭터로 비쳤던 것. 물론 노경환 피디의 작품답게 재밌었고.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TV를 보던 헤나는 불현듯 궁금해졌다. 항간에 ‘혼저왕 먹읍서’와 비교하며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프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원래 자신 역시 거기에 출연하기로 했었지만, 촬영 직전 바쁘다는 핑계로 하차 아닌 하차를 하고 ‘혼저왕 먹읍서’에 출연했으니까.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린 헤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차 안에 타고 있던 나머지 두 사람도 TV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이나 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고, 대신 TV 소리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 저녁 식사시간까지 모두 마친 뒤 저택을 나섰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그냥 숙소로 가서 쉬고만 싶었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힘들어서는 아니었다.

“아우, 머리야.”

여전히 고윤수 주방장님이 내주신 숙제에 골몰했지만, 좀처럼 답을 구할 순 없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하루 종일 칼질만 생각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몹시 지친 것이다. 일하는 중간중간 김진호 셰프의 칼질을 훔쳐보는 일로 안 그래도 지친 정신을 갉아먹었고. 설마 살면서 당근 써는 문제로 이처럼 골머리를 앓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풀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게 단순히 채소 써는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보단 좀 더 본질적인 문제. 즉 칼질에 대한 심득이랄까. 주방장님은 분명 내게 그걸 알려 주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쩌겠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도 고민하는 수밖에. 한쪽 어깨에 걸쳐 멘 가방을 추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택시는 왜 이렇게 안 와?”

어지간하면 지하철을 타고 가겠지만, 몸도 마음도 지친 데다가 지금 가는 곳이 처음 가보는 곳이라 괜히 헤맬까 싶어서였다. 강형식이 태우러 오겠다는 얘기도 했었지만, 그냥 거절했다. 통화하면서도 계속해서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로 봐선 엄청 바쁜 것 같은데, 무슨 날 태우러 오겠다고. 그 바쁜 와중에 방송을 함께 보겠다고 따로 시간을 내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 싶구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늘따라 강 회장님이 일찍 들어오셔서 저녁식사가 빨리 끝났다는 것과, 주방 식구들이 뒷정리에서 날 빼줬다는 것이다. 덕분에 방송 시작 전에 도착할 듯싶다. 부르르르. 메시지가 와서 보니, 택시가 곧 도착할 모양이다.

“3867이라…….”

아, 저기 보인다. 골목 모퉁이를 돌고 있는 택시를 보곤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서행하던 차가 조금 속도를 높여 내 앞에 와서 섰다.

“어디로 모실까요?”

“신사동 가주세요.”

택시에 탄 후 목적지를 말하면서 안전띠를 매고 있을 때였다. 택시운전사 아저씨가 날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러다가도 내 눈과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곤 딴소리를 해댄다.

“요즘 분위기 좀 그렇죠?”

“예?”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 막으려고 별별 정책을 내놓곤 있는데도 집값은 오르기만 하고…….”

역시 어딜 가나 서민들의 관심사는 별게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집을 살지, 혹은 사놓은 집의 가격이 오를지. 특히나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 변동에 민감한 듯하다.

“……이러니 미칠 노릇이죠. 아무튼, 없는 사람만 죽어나는 거죠.”

그래서 그런가, 운전사 아저씨는 거의 경제 전문가 수준이었다. 뭐, 그래 봐야 뉴스 등을 통해 들은 지식이겠지만. 근데, 이 아저씨 왜 자꾸 아까부터 날 힐끔거리는 걸까? 그것도 가끔 한 번씩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러다가 급기야 묻는다. 목적지에 거의 다가와서였다.

“저어…….”

“예?”

“혹시 연예인이세요?”

헛웃음이 나왔다. 제 얼굴 어딜 봐서 연예인으로 보이실까? 아무래도 지난번 방송을 보신 듯한데. 난 딱 잘라 말했다.

“아뇨.”

“그, 그렇죠? 아, 다 왔습니다.”

“여기요.”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곤 거스름돈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되게 쑥스럽네. 연예인들은 어떻게 사나 몰라. 난 겨우 이 정도에도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인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돌아섰다. 눈앞에는 높다랗게 솟아 있는 건물이 있었다. *** 초인종을 누르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왔어요?”

간만에 본 이하연의 얼굴이 반갑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쑥스럽다. 그러다 보니 말이 짧아졌다.

“예.”

그런 내 팔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녀였다.

“얼른 들어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현관으로 들어와 거실 쪽을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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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왔어?”

강형식이 보였고,

“오셨어요?”

“아, 안녕하셨죠?”

“지난번엔 정말 고마웠습니다.”

살짝 나온 배를 쓰다듬고 있는 박유나도 보이는데……. 김주형이라고 했던가. 그 옆에는 그녀의 남편도 어색한 미소로 날 반기고 있었다. 참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원래 강형식과 단둘이서 보기로 했었는데, 거실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다행히 오피스텔의 거실은 꽤 넓어서 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벌써 시작한 거야?”

난 시간을 확인하며 외투부터 벗었다.

“아뇨. 광고 중이에요.”

이하연이 내 외투를 받고 있다. 나도 모르게 주춤하다가 엉겁결에 내밀고, 그걸로도 모자라 가방까지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응?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여기가 우리 집이고, 그녀가 내……. 어우, 별생각을 다 한다. 그때, 강형식이 버럭 소리친다.

“야, 넌 방송인이라는 놈이 뭔 꼬라지가 그래? 안 되겠다, 나중에 나랑 백화점이라도 좀 가야지.”

“내가 뭘 어때서?”

강형식의 타박 아닌 타박을 들으며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류승렬이 이때다 싶었는지 툭 끼어든다.

“뭐가 어때? 어떻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외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뭐래. 다 너 같은 줄 아냐? 옷이야 깨끗하게 입고 다니면 되는 거지. 중요한 건 알맹이 아냐?”

“그건 네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본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안 보는 사람들은 안 만나면 되는 거지, 뭐.”

“하아, 너 진짜……. 하연아, 넌 쟤 어디가 좋아서 만나냐?”

강형식이 계속해서 날 돌려 까기하고 있는데도 이하연은 그저 웃으면서 날 바라볼 뿐이다. 박유나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배를 만지면서 속닥거리기 바빴고. 그러다가 소리쳤다.

“어! 한다!”

방송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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