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차 조심해. (2)2021.02.12.
- 주말에 쉬고 있는데 죄송해요.
“아뇨. 일하던 중이었습니다.”
- 그럼 더 죄송하죠.
“괜찮습니다. 저야 이렇게라도 피디님 목소리도 듣고 좋죠.”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셰프님도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예. 그렇긴 한데…….”
직접 전화를 다 주고, 웬일이지? 방송과 관련해 어지간한 일은 조강훈 FD와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화요일에 촬영 있는 건 아시죠?
“그럼요.”
대답과 함께 살짝 웃으며 농담을 보탰다. 어쩐지 오가는 대화가 딱딱한 게 좀 어색해서.
“그나저나 놀랐네요. 잘린 줄 알고.”
- 예?
“어제 방송 봤는데, 진짜 어색하더라고요. 평소 연기 못 하는 배우들보고 왜 저렇게 못 하냐고 욕했는데, 직접 해보니까 진짜……. 무슨 국어책 읽는 것도 아니고. 하아, 정말 창피하더군요. 그래서 덜컥했죠. 피디님이 직접 전화하실 정도면 그것밖에 없다 싶어서. 아무튼, 잘린 건 아니란 거네요? 하하하. 그럼 됐어요.”
잠시 말이 없던 신현정 피디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답게 호들갑스러운 건 아니었고, 날 배려하느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는 몰라도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였지만. 아무튼, 그녀도 이렇게 웃을 줄 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그럴 리가요. 아시면서 그러세요. 저희 방송, 셰프님만 보고 가는 거.
“윽, 지금 부담 주시는 건가요?”
또 한차례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뒤, 신현정 피디가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 다른 게 아니라, 게스트 문제로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어라? 게스트?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거 아닌가요?”
- 맞습니다. 한데, 출연하기로 한 게스트가 입원을 해서요.
“게스트 섭외도 쉬운 일은 아닌가 보네요.”
- 그러게요. 쉽지가 않네요. 아무튼, 새로 게스트를 섭외 중인데 조금 시간이 걸릴 거 같아서요.
흠, 당장 모레가 촬영 일 아닌가? 방송 쪽 일에 관해서 젬병인지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느낌상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데? 뭘까? 게스트가 출연을 취소했으면 꽤 급한 상황인 듯한데, 왜 바로 결정하지 않는 거지? 게스트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이를테면 외부 압력이라든가. 혹은 자금 문제라든가 그런 거 말이다. 아이씨, 그러면 안 되는데……. 이제 좀 사정이 피나 싶었는데, 만일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서 방송이 엎어지기라도 하면 완전 폭망인데.
“저어…… 그럼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신중하게 결정하려다 보니 그런 거죠.
신현정 피디의 얘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중하게라……. 뭐, 그럴 만도 하지. 게스트의 인지도도 인지도지만, 게스트가 지니고 있는 사연도 중요하니까. 뭐라 뭐라 해도 우리 방송은 쿡방을 빙자한 힐링 프로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민되긴 하겠네. 그나저나 원래 촬영은 모레, 그러니까 다음 주 화요일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밀리는 건가?
“어쨌든 게스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거네요?”
- 예. 그래도 이틀 안에는 결정해야죠. 다음 주중으로 촬영 들어가지 못하면 스케줄을 맞출 수 없을 테니까요.
“그도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결정되는 대로 연락주세요.”
-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굳이 나한테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만큼 날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겠지.
“아뇨. 저야말로 감사드리죠. 이렇게 직접 전화를 주시고…….”
- 셰프님껜 제가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 물론 연애감정 같은 건 아니다. 뭐랄까. 동료애?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이상할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한배를 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진짜 몸 바쳐서 일해야겠네요. 아, 당연히 촬영날짜도 달라지는 거겠죠?
- 예, 다음 주 수요일에 스튜디오로 나오시면 됩니다. 그전에 조강훈 FD 통해서 대본 나갈 거고요.
“알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요. 그때 뵙겠습니다.”
- 셰프님도요. 그럼 이만 전화 끊을게요.
끊긴 전화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로선 다행인 건가?”
사실 불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으니까. 원래 촬영이 잡혔던 화요일까지 시간을 맞추려면 무조건 내일까진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저씨가 과연 그때까지 칼을 다 갈 수 있을지 살짝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뭐, 내일이면 끝난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전화 받느라고 잠시 쉬었더니 다리가 다 부들부들 떨린다. 아니 어떻게 쉬었더니 더 아파? 끙. 잘 움직이지도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이며 또다시 투덜거렸다.
“아우씨, 이러다가 골병드는 거 아냐?”
*** 전화를 끊은 뒤, 신현정 PD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치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다. 갑자기 쇄도한 게스트 신청문의. 그게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하나 살펴보곤 있지만, 결정을 내리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달까. 그나마 다행인 건 임채영이 출연을 고사하자마자 동아줄처럼 출연문의들을 해왔다는 점이다. 첫방이 그만큼 화제가 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안 한 건 아니다. 다만 시기가 좀 빨랐을 뿐. 신현정 PD의 예상으로 그 시기는 두 번째 방송, 그러니까 류승렬이 도시락을 먹는 장면이 나간 후였다. 어찌 되었든 구사일생이랄까, 새옹지마랄까, 그것도 아니면 전화위복? 다 좋은데……. 문제는 그 양이 예상치를 훨씬 웃돌고 있다는 점이다. 신현정 PD로서도 설마 방송 한 번 나갔다고 이렇게 많은 신청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서른 군데도 넘는 데서 연락이 왔고, 그중 추리고 추린 게 열두 곳. 그저 서류만으로 살펴보면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고 사연까지 들여다보기엔 너무 많다.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니다. 끌리는 대상이 없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프로그램의 성질상 그냥 화제가 되거나 인기 좀 있는 사람을 섭외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하아.”
열 장도 넘는 서류를 들고선 신현정 PD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커피를 들이켜며 서류를 살피던 신현정 피디. 그렇게 한참 만에 골라낸 종이엔 ‘페이슬리 박’이란 이름이 박혀 있었다.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피아니스트라…….’
세계적인 거장이라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각종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근래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등 한국보단 외국에서 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연주자였다. 유명세도 그렇고 사연도 그렇고…….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조강훈 FD가 옆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조강훈 FD가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태도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게요, 세원시청에서 연락이 왔는데…….”
세원시청? 아니 거기서 왜? 의아해진 신현정 PD였지만, 내색하지 않고서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요?”
입이 마른 지 입술에 침까지 축이며 조강훈 FD가 말문을 열었다.
“시, 시장님께서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어 하신다고…….”
“……누구요?”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되묻는 신현정 PD.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강훈 FD가 한층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명제준…….”
한 템포를 쉬고 신현정이 되물었다.
“명제준 세원시장?”
조강훈 FD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보면서 신현정 PD가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이슈는 생각보다 금방 가라앉았다. 아니 당연한 건가? 기껏해야 예능 프로일 따름이니까. 그것도 이제 막 시작한.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잠시간이라도 실검에 류승렬의 이름이 올라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뭐,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대세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겠지만. 방송이야 신현정 피디가 알아서 할 테고……. 쾅! 눈앞에서 내려치고 있는 망치와 그 힘이 고스란히 타고 올라와 온몸을 뒤흔들다 못해 뇌까지 흔들고 있다는 게 문제. 쾅! 그래도 어제보단 확실히 나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쾅!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망치질이 스무 번째로 넘어가자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셨고. 그렇게 한참 동안 망치질을 하다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며 말씀하셨다.
“이제야 좀 쓸 만하군.”
노란빛에서 빨간빛으로 식어가는 쇳덩어리를 집게로 들고서 이리저리 보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챌 내가 아니다. 만족스러워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또 한다면 합니다.”
물론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은 등 뒤로 넘겨 애써 숨겼다.
“뭔 소리야 그게? 쇠 얘기하는데, 왜 네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
타박 아닌 타박이었지만, 웃었다.
“예, 예. 그러시겠죠.”
“이놈이! 너 그 웃음 뭐야?”
“근데, 정말 오늘 밤이면 칼 가는 거 끝나는 겁니까?”
“어쭈? 말 돌리는 거 봐라?”
“나참, 누가 말을 돌린다고……. 아, 아저씨가 그러셨잖아요? 처음엔 일주일이면 된다고.”
“누가 그래? 보름은 공을 들여야…….”
응? 보름? 어째 늘어난 느낌인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진영아∼”
사모님이 부르시는 게 들렸다.
“예!”
“간장 담그자∼!”
“에? 지금요? 저 지금 대장간에 있는…….”
말을 하다 말았다. 아저씨가 고개를 내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빨리 가봐! 얼른!’
눈으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듯했고.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가리키자, 아저씨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신다. 난 가만히 집게를 내려놓고선 밖으로 나왔다.
“지금 가요∼”
한껏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역시……. 여기선 사모님이 왕, 아니 여왕님이시다. ***
“내일 가는 거지?”
나물을 다듬으시던 사모님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저씨 손에 달렸죠, 뭐. 왜요? 막상 저 간다고 하니까 아쉬워서 그러세요? 큭큭큭.”
“…….”
“…….”
어라? 이 분위기 아닌데? 머쓱하기도 하고,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서 코를 훌쩍거렸다.
“와, 산이라 그런가 진짜 춥다! 제가 나중에 돈 벌면 여기 보일러 한 대 놔드려야겠다!”
“가스도 안 들어오는데?”
“기, 기름보일러도 있잖아요.”
사모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걸 보고 있자니, 괜스레 가슴이 허전해진다. 난 시선을 피하며 부뚜막 위에서 펄펄 끓고 있는 간장을 휘휘 저었다.
“냄새 장난 아니네요. 진짜 맛있겠다!”
“먹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에이, 제가 괜히 요리산가요? 딱 보면…… 아니 딱 맡아보면 알죠.”
일부러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는데, 사모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도 뒤돌아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루에서 주방으로 이어진 통로에 앉아 계신 사모님이 나물을 뜯느라 나는 소리만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들려왔다.
“촬영 미뤄졌다며?”
“……예.”
“…….”
“…….”
아, 진짜 미치겠네. 이 분위기 어쩔 거냐고. 어색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니고. 애당초 삶의 터전이 서울에 있는걸. 그런데도 좀처럼 안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말이. 젠장. 그냥 웃으면서 농담하듯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쉽사리 열리지 않는 입술이었다. 그때였다. 쑥하고 숟가락이 얼굴 앞에 들이밀어 진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 숟가락을 덥석 입에 물고는 눈을 홉떴다.
방금 먹은 게 맛간장인가 본데……. 와 이거! 팔아도 되겠는데? 저번에 마신 물도 그렇고……. 대기업에서 알면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지 싶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 그렇게 눈이 휘둥그레져 있으니까, 사모님께서 물어오신다.
“맛이 어때?”
비닐장갑을 낀 채로 내밀어진 손. 그 손에 쥐어진 숟가락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내가 쪽쪽 빨아먹다시피 해서. 난 여전히 커져 있는 눈으로 돌아서서 사모님이 한 손에 쥐고 계신 간장 종지를 바라보았다. 짐작대로다. 지금 끓이고 있는 것보다 먼저 만들어 놓은 맛간장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만드셨길래 이런 맛이 나는 걸까?
“으음.”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며 음미하듯 말했다. 이미 내 눈은 활짝 웃고 있었다.
“맛있는데요?”
“그게 다니?”
“예.”
“하아……. 남자아이라 그런가?”
“예? 지금 뭐라고…….”
“아냐. 신경 쓸 것 없어.”
왜 저러시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맛있어서 맛있다고 했는데. 리액션이 부족했나? 슬그머니 사모님의 눈치를 보다가 덧붙였다.
“신기해요! 설탕을 넣은 것도 아닌데, 단맛이 나네요. 혀끝에 향이 남아 감도는 것도 좋구요. 아, 이거 병에다 담으면 되죠? 참, 제가 정통 한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던가요? 그때도 맛간장을 지겨울 정도로 담갔거든요. 근데 그때랑 너무 다른 거 있죠? 음……. 그때 만든 게 맛간장이라면, 이건 참맛간장? 아니다. 비교하는 거 자체가 사모님께 실례겠…….”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돌리니 사모님이 날 빤히 바라보고 계신 게 보인다. 씨익 웃어 보이자, 사모님이 툭 하고 내뱉으신다.
“여우.”
“윽.”
“그래도 난 그런 진영이가 좋더라.”
“헤헤헤. 저도요.”
“그래?”
“예. 저도 제가 좋아요.”
“욘석이!”
장갑을 끼신 채로 내 머리통을 쥐어박으려고 하시는 사모님. 까짓 한 대 맞아주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지만, 위생상 그건 안 될 얘기. 하지만 아직 벗으면 안 된다. 장을 담그는 김에 고추장까지 만드신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머리를 슬쩍 기울여 피하면서 웃어 보였을 때였다.
“……딱 너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네.”
“예?”
“으응. 진영이 부모님들…… 좋으셨을 거라고. 진영이 같은 아들을 두어서.”
“…….”
“기특해하실 거야. 틀림없이.”
그러실까? 그럼 좋겠다. 스윽. 왠지 울컥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사모님 손이 올라오더니 머리를 쓰다듬으신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얘기했을 뿐.
“머리에서 간장 냄새 나요.”
“괜찮아. 네가 물 길어다 놨잖아.”
“고무장갑도 씻으셔야 해요.”
“그것도 괜찮아. 고추장은 네가 담을 거니까.”
“……예?”
느닷없는 얘기에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사모님. 싱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남자가 힘만 센 바보란다. 남자가 고추장쯤은 담을 줄 알아야지.”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저 말이 사모님 입에서 나오니 그럴듯하다. 그래. 사모님 표 특제 고추장쯤은 담을 줄 알아야 남자지. 난 소매를 걷어붙이며 열의를 불태웠다. 그런 내게 사모님이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씀하셨다. 기특하다는 눈빛이 가득했다.
“저쪽에 가면 고추장 단지 있을 거야.”
“아, 저쪽에요?”
사모님이 가리키는 쪽으로 움직인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언제 꺼내놓으신 건지 뒷마당에 가득한 장독들. 석 줄로 늘어선 장독들은 언뜻 보아도 서른 개는 넘어 보인다.
“저거 다 담그실 건 아니죠?”
“저거 다 담글 건데?”
“설마 오늘 안에 저걸 다?”
“응. 오늘 안에 전부.”
“저 내일 가는…….”
“응응. 그러니까, 오늘 안에 다 해치워야지.”
입꼬리를 끌어올리시며 눈웃음을 치시는 사모님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 장사하시게요?”
사모님께선 대답 없이 웃기만 하실 뿐이었다.
“계십니까?”
문 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손님이 온 듯했다. 돌아보니, 깔끔한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문가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