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힘! 힘! 힘! (3)2021.02.07.
난데없는 진 회장의 불호령에 KS 대외홍보부가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 때, SBC 방송국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그거 봤어?”
“아니, 보진 못하고 듣긴 했지.”
“와아, 장난 아니라니까. 무슨 편집을 그렇게 하냐?”
“그렇게 재밌어?”
“음……. 재미는 모르겠고. 쫄깃쫄깃하달까. 게다가 막판에 예고편은 진짜……! 암튼, 담당 피디가 방송을 알아. 아주 그냥 시청자를 가지고 놀더라니까.”
“그 정도야?”
“여러 말 필요 없고, 한번 봐봐.”
“헛참. 짤이 몇 개 돌아다니기에 좀 했구나 싶었는데……. 진짜 한번 봐야겠네.”
“그래라. 아, 괜히 지리진 말고.”
“지랄. 내가 방송밥 몇 년인데.”
어딘지 모르게 비릿하게 웃는 녀석을 보며 한마디 하려다가 말고 돌아선 조 피디는, 그날 저녁밥을 먹다 말고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쳐버렸다.
“……죽음이네.”
방송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별 내용 없는, 그러나 편안하게 흘러가는…… 한마디로 피식피식 웃다 보면 어느새 리모컨을 한쪽 바닥에 내려놓게 되는, 그 정도 수준이었다. 하지만 막판으로 갈수록 쫀득쫀득해지는가 싶더니 심장이 점점 옥죄어온다. 손에서 땀이 배어나고 있었지만,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그만큼 긴장한 채 한창 몰입했다. 그리고 류승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화를 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무슨 사정이 있나? 하는 정도의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방송이 끝났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흔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예능에선 가끔 볼 수 있었으니까 소문만 요란하지 막상 보니 별거 없네 하며 채널을 돌리려던 순간, 예고편이 나왔고…….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예고편은 후다닥 지나가버렸고, 어느새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움켜잡고 울부짖었다.
“뭐야! 뭐냐고! 쟤가 왜 우는 건데! 대체 뭘 먹고 우는 거야!!!”
자신이 피디라는 것도 잊은 채, 순수하게 시청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조 피디의 절규였다. 그러길 잠시. 그는 털썩하고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는 중얼거렸다.
“국장님, 머리 좀 아프시겠는데?”
자신이야 같은 예능이라도 방영일이 주중이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금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인 만큼 야심 차게 준비해서 첫방이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경쟁자인 KBC의 신규 예능이 저처럼 무섭게 쫓아오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머리에 지진이라도 난 듯 끙끙대고 있을 게 뻔하다.
“뭐, 노경환이야 신경도 안 쓰려나?”
픽하고 웃고 말았다.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고, 마이웨이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 하지만, 조 피디의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음……. 우리가 이십육 프로, 저쪽이 십칠 프로라…….”
SBC 예능국 국장인 최진철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분석자료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다. 9% 차이를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쯤은. 그러나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 보기는 오히려 우리가 밀린다지?”
“그렇다고 하더군요.”
남의 얘기를 하듯 말하고 있는 노경환 피디를 최 국장은 눈살을 찌푸린 채 쳐다보았다.
“대책은 있나?”
“시청자들이 판단해주겠죠.”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임에도 최 국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방송국 차원에서 밀어준들 결국 콘텐츠 자체가 재밌느냐로 판가름 날 거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노경환 피디는 믿을 만하다. 전쟁으로 치면 일당백, 아니 일당천 어쩌면 그 이상이니까. 적어도 예능 프로에 관한 한은. 그 감각을 신뢰하기에 최 국장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일 뿐이었다. 이번에 KBC에서 예능을 만들고 있다는 피디가. 그럼에도 내색하진 않았다. 괜스레 노경환 피디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살짝 돌려 물었을 따름이다.
“저쪽도 꽤 잘 만들었더군. 아니, 판을 잘 짰달까? 아주 지능적인 배치였네. 본방을 그렇게 끝내놓고 예고편을 그렇게 내보낼 줄 누가 알았겠나? 솔직히 말해서 다음 편이 보고 싶더군.”
“그렇습니까?”
안 봤군. 표정으로 봐선 분명하다. 진짜 신경도 쓰지 않고 있거나, 혹 봤어도 중간에 보다 말았을 게 틀림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한마디로 말해서 예고편은 보지 않았다는 거다. 전자인가? 애초에 경쟁상대로 생각도 안 한다는 거겠지. 다른 의미로 최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렇다는 얘기고. 노 피디는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앞으로도 계속하던 대로 해주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다소 사무적으로 말한 뒤, 노경환 피디가 나가고 나갔다. 사무실에 남겨진 최 국장은 잠시 문 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존심에 도움을 준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없고.”
어떻게 해야 노경환 피디가 눈치채지 못하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니, 어찌 보면 그를 돕는 게 아니라 자신을 돕는 거일 수도 있다. 만일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면 자신에게까지 피해가 생길 것은 자명한 일. 노경환 피디를 못 믿는다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확실한 게 좋으니까. SBC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선전을 하고 있는 이상, 이쪽으로선 만만의 준비를 안 할 수 없다는 거다. 노경환 피디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상황 자체가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까. 맞대결. 그것도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싸움. 그리고 세상에 제일 재밌는 게 싸움이라는 사실이 진리라는 걸 말해주려는 듯 벌써부터 인터넷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포문을 먼저 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KBC였고. 그러니 이쪽에서도 제대로 한 방 먹일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최진철 국장은 결심을 굳힌 듯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정면 돌파만이 다가 아니란 생각으로.
“오랜만일세. 응? 아니 아니. 별일은 무슨……. 그냥 간만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거지.”
억지웃음을 입꼬리에 매달며 말하는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광고주들이 동요하는 눈치입니다.”
“이게 그렇게 요란을 떨 일입니까? 그래 봐야 시청률이 이쪽의 반도 안 나왔다면서요?”
“그야 그렇지만…… C 마트도 그렇고 삼한 쪽에서도 대대적으로 광고를…….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KS 쪽도……. 그러다 보니 다른 기업들도 KBC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듯 보입니다.”
진짜 오늘 아침 회의에서 이사진들이 했던 말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기업이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 재계 정상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삼한 그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뭐라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이상할 정도로 뒷목이 쭈뼛하다. 그게 운명을 건 승부 때마다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구명줄이었음을 잘 알고 있는 최 국장은 이번에도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하하. 거기 좋지.”
한때 KBC의 전신인 한국 TV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인맥. 세월이 흘러 한 사람은 국장의 자리까지 올랐고, 또 한 사람은 국내 미디어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기획사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이따 밤에 거기서 보기로 하지.”
SBC 방송국 개국과 함께 옮겨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온 인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천둥이 치면 그런 소리가 날까? 그때마다 팔을 물론이고 온몸이 다 후덜덜하고.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엄살 같은 게 아니다. 망치가 모루에 올려져 있는, 시뻘겋게 달궈진 쇠뭉치를 때릴 때마다 거기서 파생된 엄청난 소리가 고막을 후려갈기고 있다. 젠장! 그래. 소리는 참을 수 있다. 귀를 틀어막지는 못해도 이를 악물면 그깟 소리쯤이야 못 참을 것도 없지. 하지만……. 콰-앙! 망치가 떨어지는 순간,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하다. 집게를 잡고 있는 손으로 밀려든 충격에 말 그대로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달까.
“윽!”
꽉 다문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 처음엔 아저씨가 비웃지 않을까 해서 이를 악물었는데, 뜻밖에도 아저씬 나 따윈 관심 밖이라는 듯 그저 망치만 휘두를 뿐이었다. 살벌하진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묵직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을 줄기줄기 뿜어내면서. 그럼에도 이렇게 신음 한번 참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건 단지 욕심 때문이 아니다. 칼을 준다는 약속? 그런 건 대장간에 들어서는 순간 잊어버렸다. 삼십 년 전에 주방장님이 여기에 머무신 적이 있다는 얘기? 내 머릿속에서 순삭된 지 오래였다. 어쩌면 주방장님께서 날 여기 보내신 의도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생각도 버렸다. 대신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저씨의 망치질을 받아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 건 아니다. 당연히 할만하다고 여겼으니, 여기로 온 거였다. 더도 말고 열 번. 딱 열 번만 버티면 되니까. 솔직히 그런 마음도 없진 않았다. 지난번에 아홉 번까지 견뎠으니까, 한 번만 더 참으면 아저씨의 코를 납작하게 누를 수 있다는. 거기에 칼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기기만 하면 대박이란 생각이었다. 더불어 주방장님의 의도를 깨닫게 되면 더없이 좋을 테고. 한데, 딱 한 방이었다. 아저씨가 씩 웃으며 망치를 내려치는 순간 깨달았다. 다르다. 지난번과는 확연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온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쇠집게를 통해 전해진 그 충격에. 그 순간 머릿속에서 투지도 욕심도 싹 사라졌다. 남은 건 한순간 한순간 집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 번 연달아 견뎌냈지만……. 젠장, 이 아저씨 뭘 먹고 이렇게 힘이 장사인 거냐고. 생각 같아선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렇게 하질 못한다. 왜냐고? 맞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망치질 몇 번에 손이 얼얼하다 못해 손목부터 어깨까지 근육이란 근육은 싹 다 갈려 나가는 듯한 고통에도, 집게를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쾅! 그런 날 조금도 봐주지 않고서 저놈의 해머인지 망치인지 모를 쇠뭉치는 어마무시한 무게감을 과시하며 속절없이 모루 위로 떨어졌고.
“크악!”
기어이 입이 쩍 벌어지며 비명이 튀어나왔다. 때마침 번쩍 들어 올려진 망치가 다시금 떨어지려다가 멈칫하더니 모루 옆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곤 아저씨의 음성이 들려온다.
“견딜 만하냐?”
크윽. 지금 장난하나?
“벼, 별거 아닌데요?”
피식.
“그래? 나도 늙긴 늙었나 보다. 예전 같으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텐데.”
끙. 사실인지라 뭐라 대꾸할 말이 없다.
“후우!”
아저씬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훔치며 말씀하셨다.
“잠깐 쉬었다 할까?”
큭. 쉬자고? 농담하시나, 이 아저씨가 진짜. 사람 자존심을 박박 긁어놓고서 이제 와서 봐주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 나 서진영이라고!
“뭡니까? 고작 망치질 몇 번 했다고 힘에 부치신 겁니까?”
안다. 억지라는 걸. 누가 힘에 부치는 상황인지는 아저씨도 아시고, 땅도 알고, 하늘도 안다. 그리고 언제 나오셨는지 저만치에 놓인 평상 위에 앉아 나물을 다듬으며 구경하고 계신 사모님도 아실 테고.
“와, 무섭네요. 저도 늙으면 아저씨처럼 되는 겁니까? 농담하지 말고, 얼른 치세요. 쇠 식는다니까요!”
그럼에도 오기가 생겨서 박박 우겨보는데…….
“그래, 이놈아. 늙으니까 하루하루가 다르다. 됐냐?”
그러시면서 기어이 망치를 놓고 허리를 펴신다. 아, 씨…….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결국, 봐주시는구나.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 아직 서른도 안 된 시퍼렇게 젊은 놈이 오십 줄에 들어선 아저씨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게 생겼으니. 앞으로 진짜 어디 가서 힘자랑은 절대 못 할 거다.
“젊은 놈이 한숨은. 이놈아. 팔뚝에 근육만 잔뜩 붙어 있으면 뭐하냐?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할 거.”
“…….”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런저런 변명을 하기엔 드러난 결과가 너무 처참해서. 후우, 그래도 그렇지. 이제까지 견뎌낸 건 겨우 다섯 번. 지난번엔 봐준 게 확실하다는 얘긴데……. 그런데도 몸 상태는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봐라.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혹여 아저씨가 볼까 봐 손을 등 뒤로 숨기다 보니 자존심이 더 상한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을 때였다.
“역시 날 생각해주는 건 당신밖에 없네.”
언제 떠오셨는지 시원한 냉수를 건네시는 사모님. 그걸 또 넙죽 받아서 쭉 들이켜시는 아저씨. 와아, 진짜 치사하네. 어떻게 한 모금도 안 남기시고 혼자서 다 드실 수가 있냐고. 어? 나를 향해 내밀어진 그릇을 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사모님, 사랑합니다!”
“알아. 아니까 마시기나 해.”
사모님 손에서 낚아채듯 잽싸게 사발을 받아 한 큐에 들이켜……고 싶었지만, 망할! 손이 벌벌 떨려서 손에 든 물그릇까지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이 넘치고 난리도 아니다. 민망해서 시선을 슬쩍 돌리고 힘겹게 그릇을 들어 올렸다. 어우, 뭐 이렇게 무거워. 물 한 그릇이 이렇게 무거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래도 갈증으로 생긴 욕구가 훨씬 강했던지라 어떻게든 들어 올려 입안에 쏟아붓듯 물을 마셨다. 후아! 속이 뻥 뚫리는 듯……. 응? 뭐지? 그냥 물이 아닌데?
천연암반수는 말할 것도 없고, 스위스 광천수로 만들었다는 에비 어쩌고 하는 생수도 댈 게 아니다. 아니, 이온 음료보다 더 갈증 해소가 빠르달까. 거기에 향은 또 어찌나 좋은지, 물을 마시고 난 뒤 입안에 맴도는 향에 가슴까지 다 시원해질 정도다. 대체 뭐로 만들었길래……. 난 눈을 껌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갖다 팔면 대박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