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힘! 힘! 힘! (2)2021.02.05.
오, 이것 봐라. 여기저기 류승렬과 ‘내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대한 글들이 떠 있었다. 어느새 난 자세가 무너져 있었고,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이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조금만 보고 자려고 했는데. 이것만 이것만 하다가……. 솔직히 눈을 떼기 힘들었다. 아니, 그렇잖아? 내가 나온 방송이라서가 아니다. 실검에 오른 류승렬의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댓글이며 SNS에 올라온 글들이 어찌나 흥미로운지. 기사도 그렇다. 자극적인 건 아니지만, 글발들이 어찌나 뛰어난지. 남들 하는 말만 듣고 기레기 기레기 했는데, 기자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특히 김유린이라는 기자가 쓴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 ……이처럼 일찌감치 대립 구도를 형성한 두 방송이 마침내 격돌했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앞서 말했다시피 S 방송국 측의 일방적인 승리가 점쳐졌으며 이는 방송 초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방송 막판 게스트로 초대된 류승렬이 불같이 화를 내다가 망연자실 탄식을 내지르는 장면에서 시청률이 쏠리며 비등해졌다. 예상 밖의 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반전은 본방이 끝나고 나서 일어났다. 다음 주 방송분을 예고하는 영상에서……. 음, 류승렬이 불같이 화를 냈던가? 그건 아닌 듯하지만, 다시 읽어도 입에 착착 감긴다. 방송을 보지 않은 사람은 진짜 그런 줄 알 거 같달까. 게다가 본방 후 예고편에 대해선 찬사 일색이었다. 이 부분만 읽으면 무슨 아카데미상을 시상한 영화쯤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러다 보니 기사만 읽으면 없던 흥미도 생길 지경이다. 그 증거로 댓글이 아주 폭발적이다. - 방송 미쳤다! - 미친 건 류승렬이죠! - 류승렬이 울었어! 울었다고! - 그전에 화부터 냈죠. - 와 진짜! 형니이이이임! 왜 이러십니까? 대한민국 상남자 중의 상남자인 형님께서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 궁금해 미치겠다니까요! - 다음 주 방송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네요. - 대체 다들 왜? 뭔 일이 있었냐? - 핑프 가시고요. - 반모도 가시고요. - 윗분 예의 좀 지키죠? 그리고 묻기 전에 검색부터. - 검색 전에 방송부터 보시죠. - ㅇㅇ 다시 보기. - 와, 얼리힐링이나 하려고 봤는데 막판에 깜놀함. - 다시 보고 있는데 완전 대박. - ㄴㄴ 본방은 중박, 예고는 초대박. - 벌써부터 짤이 돌고 있음. - 짜고 치는 거 아님? - 그런 거 같지 않은데요? 류승렬 저러는 거 처음 봄. - 그러게. 얼굴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데. - 우는 건 더 황당. - 난 예고만 봤는데도 짠하던데……. - 진짜, 어그로 제대로임. - 근데, 님들 SNS에 돌아다니는 글 봤나요? - 뭐 또 재밌는 거 있나요? - 아우, 보면 님들 지릴 거임. 흑. 저 지금 팬티 갈아입고 옴. - 난 소름이……. - 어딘가요? 좌표 좀. 뭘 봤기에 소름 끼친다는 걸까? 란 의문이 안 들면 그게 사람일까? 그래서 나도 찾아봤다. 다행히 좌표가 찍혀 있었고, 누구는 팬티까지 갈아입었다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 제가 류승렬하고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친하진 않았고요. 다들 아시다시피 승렬이 걔 성격 장난 아니잖아요? 학교 다닐 때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어지간한 애들은 옆에도 가지 못했어요. 졸업 후엔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영화관에서……. 아무튼, 동창회에도 잘 나오지 않고 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관심 딱 끊고 살았는데. 아까 방송 보고 진짜 소름 끼쳤음. 걔가 방송에서 말한 친구라는 애……. 아무래도 찬승이 얘기하는 거 같은데……. 찬승이 죽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러고 나서 승렬이가 며칠인가 두문불출하고……. 흠칫하고 말았더랬다. 이게 왜 튀어나와? 허, 방송 진짜 무섭네. 전부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얘기는 다 까발려지고 있었다. 신상을 터는 수준까진 아닌데, 내가 만일 류승렬이면 도저히 못 견딜 수준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녀석한테 전화를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괜찮냐?”
- 형도 참.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자다 일어난 건지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긴 한데, 괜찮은 모양이다. 괜한 걱정이었나?
“미안하다, 짜샤. 내가 오지랖이 태평양이라 그런다 왜?”
- 흐흐흐. 형은 연예인 하긴 글렀네. 그래서는 못 견뎌요. 이 바닥에선.
“그, 그러냐?”
참네, 그래서 이 형이 만들어 준 도시락 까먹고 질질 짠 거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아 삼켰다. 나로선 짐작도 하기 어렵지만, 티를 안 내고 있을 뿐이지 녀석이라고 해서 마음이 좋을 리 없을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에 저 정도로 담담하게 반응하려면 그간 어떤 일들을 겪어야 가능하단 말인가. 배우? 스타? 나라면 일찌감치 집어치웠을 거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말이다.
“암튼, 내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 그렇다니까요.
“그래. 아침부터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그럼 이만 끊…….”
- 형.
“응?”
- 그래도요.
“…….”
- 이렇게 물어봐 주는 사람, 형밖에 없어요.
“아. 그, 그래.”
- 크크큭. 그것도 티 팍팍 나게.
끄응. 미안하게 됐다, 자식아!
“자라. 자다 깬 거 같은데.”
- 옙! 형도 하루 잘 보내시고요.
“엄청 고맙다. 그럼 끊는다.”
- 들어가세요!
목소리 한번 크다. 근데 그게 더 가슴을 후빈다. 왠지 내 귀에는 그게 갑옷을 한 겹 더 걸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옆에서 몇 마디 말은 해줄 수 있지만, 정작 그 마음을 나눌 수는 없으니까.
“후우.”
망할! 아무리 내 일이 아니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사람 죽음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걸 그렇게 함부로 떠들어대면 어쩌자는 거냐고. 내가 다 속이 뭉그러지는 거 같은데, 당사자는 어떻겠냔 말이다.
“이놈아. 방구들 무너지겠다. 젊은 놈이 한숨은.”
응? 방문이 열려 있었나? 마루랑 통해 있는 문틈 사이로 아저씨께서 뭔가를 끈으로 묶고 계시는 게 보인다. 그게 뭔가 해서 쳐다보는데, 불쑥 던지셨다.
“그게 다 몸이 허해서 그래.”
“에이, 저 보기만 이렇지 몸 좋아요.”
“염병! 그래서 집게 하나 못 잡냐?”
“아우, 그건…….”
“망치질 열 번도 못 버티는 게 허세는. 후우,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어제 그게 뭐냐? 풀무질을 하는 건지 장난을 하는 건지.”
“참내, 어젠 별말 없으시더니.”
“그거야 안 그래도 힘없는 놈이 풀 죽어서 주저앉기라도 하면 나만 고생이니 그렇지.”
“와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랄 말고 운동이라도 좀 해. 마당에 역기 봤지?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뭘 해도 하는 거다.”
요리사가 힘이 세면 뭐가 좋지? 안 그래도 험하디험한 주방인지라 어지간한 요리사는 다들 힘깨나 쓰는데. 여기서 더 힘이 세지면 그게 요리사인가? 차력사지. 그렇긴 한데, 어째 아저씨한테서 저런 말을 들으니까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아저씨가 몰라서 그러시는데요. 그래도 제가 이쪽 바닥에선 나름 힘 좀 쓴다니까 그러네요.”
“헛참. 그놈의 바닥, 비실이들만 모였나 보다.”
“아 진짜! 이 팔뚝 좀 보시라니까요. 제가요. 칼 딱 잡고서 주방 한복판에 서면요. 막 응? 울트라 슈퍼 파워 아우라가 팍팍 뿜어지면서…….”
“그런 놈이 망치질 몇 번에 집게를 놓…….”
“아씨! 집게는 미끄러워서 놓친 거구요!”
“흠, 정말 미끄러워서 그런 거 맞아?”
“아 그렇다니까요!”
“내가 만질 땐 바짝 말라 있더만, 왜 네놈이 만질 때만 미끄러운지 모르겠군.”
“그야 나도 잘 모르죠. 뭐가 묻었……. 아, 몰라요. 아무튼, 미끄러웠다니까요.”
“그래? 그럼 다시 한번 해 보든가.”
와! 이 아저씨 진짜! 사나이 자존심 제대로 건드리네. 난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해요! 해!”
씩씩거리며 방을 나서는 나를 보며 아저씨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곤 씨익 웃으셨다.
“이놈 보게.”
“뭘 자꾸 봐요. 맨날 보는 얼굴. 그게 그거죠.”
“시끄럽고. 그래서 뭐 걸래?”
뜬금없는 얘기에 난 벙쪄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뭘 못 들은 척해, 이놈아.”
“…….”
“내기를 하려면 뭐라도 걸어야 할 거 아니냐?”
어? 내, 내기? 느닷없는 제안에 황당해하고 있을 때, 사모님이 마루로 올라오신다. 그러더니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물을 다듬으시며 아저씨와 날 바라보셨다. 그 눈초리에 흥미롭다는 눈빛이 가득하셨다. 그제야 난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달까. 젠장! 홧김에 대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길 리가 없잖아. 나도 모르게 더듬게 되고, 목소리가 갈수록 기어들어 간다.
“아, 알 만한 분이 그러면 안 되죠! 그렇게 막 응? 도박 같은 거로 응? 사행성 조장하고 그, 그래도 되는 거예요?”
“…….”
“뭐, 뭐요? 제가 틀린 말 했나요?”
“…….”
“왜 그렇게 보시는데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시는 아저씨. 도발하는 듯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소리치는데…….
“질 거 같냐?”
뜨끔. 찔려서 눈알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쳤다.
“지, 지긴 누가 진다고요!”
“쯧, 원래 겁먹은 개가 그렇게 크게 짖는 법이지.”
“누가 겁을……. 그리고 사람한테 개가 뭡니까, 개가.”
“자꾸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끙. 이 아저씨, 진짜 집요하네. 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아저씰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렇게 날 물고 늘어지시는 걸까? 그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다. 확 끓어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으니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참네, 아저씨가 저렇게 자꾸만 도발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내가 왜 그 의도에 끌려다녀야 하냐고? 처음 이 얘기의 발단이 된 원인도 그렇다. 솔직히 요리사가 힘이 셀 이유가 있나? 내가 생각하기엔 전혀다. 픽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러곤 막 고개를 내저으려던 찰나였다.
“그 노인네도 한때는 여기서 쇠를 만졌었지, 아마?”
어? 이건 또 무슨?
“노ㅇ…… 그거 지금 우리 주방장님 얘깁니까?”
아저씨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곤 말했다. 대답은 할 생각조차 없다는 듯.
“30년도 더 된 얘기니까, 내가 여기 들어오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라더라. 한 삼 년 있었다고 했던가? 어떻게 알고 여기로 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왜 왔는지는 알고 있지. 스승님께서 술만 드셨다 하면 얘기하셨으니까.”
“……?”
“처음엔 불을 제대로 다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는데, 결국 3년 만에 그건 포기하고 대신 칼만 날카롭게 벼려서 나갔다던데……. 뭐, 3년이면 나름의 깨달음 정도는 얻었겠지.”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3년이나 걸려서 뭔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지…….”
“하아, 네놈이랑 얘길 하느니 차라리 쇠를 한 번 더 치고 말지.”
한숨을 내쉰 아저씬 눈살을 확 찡그리더니 말씀하셨다.
“쇠도 산 놈이 있고, 죽은 놈이 있다는 건 아냐?”
“어? 그래요?”
“쇠를 살리려면 불이 살아야 하고, 불이 살려면 바람이 살아야 한다. 거기서 끝인 줄 아냐? 그렇게 달궈진 쇳덩이가 모루 위에서 공기랑 만나고 또 망치질 몇 번 하는 사이에 죽는 일이 다반사다. 왜 그런 줄 아냐?”
“……모르죠, 저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아저씬 한층 더 강렬한 눈빛을 흘리면서 얘기하셨다.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망치질.”
“……?”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심정적으로는 잘 납득이 안 된다. 왠지 뜬구름 잡는 얘기 같기도 하고. 솔직히 쇠가 사네 마네 하는 얘기에서 시작해 망치질로 연결되는 로직이 묘하달까. 그런 내 속내를 읽으신 건지. 아저씬 혀를 찰 거 같은 얼굴이셨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셨다.
“모르겠냐? 어설픈 망치질 몇 번이면 애써 살려놓은 쇠가 대번에 생명력을 잃어버린다는 걸?”
“그럼 망치질을 잘하면 되는 거 아닌……. 아!”
자꾸만 아저씨가 힘 타령을 하셨던 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게 또 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아저씬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알겠냐? 힘이 제대로 실린다는 의미는 그냥 무식하게 때린다는 얘기가 아니란 걸.”
“무식하게가 아니라면……. 요령?”
“쯧, 그게 다면 그 노인네가 3년이나 여기 붙어 있으면서 겨우 칼이나 벼리고 나갔겠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데요?”
“이놈아. 뭐든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있는 줄 아냐? 다 때가 있고, 단계라는 게 있는 거다. 네 그 무식한 힘자랑도 그래서 망치질 몇 번에 작살나는 거고.”
알 것 같은데 모르겠고. 그러다가도 아저씰 얘길 듣다 보면 또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다. 아니, 짐작이 간달까. 고윤수 주방장님이 괜히 여기로 날 보낸 게 아니란 것. 그저 짐작뿐이긴 하지만, 단순히 칼만 받아오라고 한 건 아닌 듯하달까. 그랬으면 칼 다 갈고 나서 날 보내도 되셨을 테니.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가요.”
갑작스러운 태세 변환에 아저씨가 묘한 눈빛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셨다. 그러다가 얘기하셨다.
“나중에 후회해도…….”
그걸 중간에 잘라먹으며 이번엔 내가 도발했고.
“아저씨나 나중에 딴말하지 마시죠. 이참에 왕창 뜯어낼라니까.”
나름 협박이라고 한 건데, 오히려 아저씬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신다. 그게 더 기분 나쁘다. 그때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기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원하는 걸 다 들어주마. 뭣하면 칼이라도 한 자루 주고.”
멍해져서 아저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카, 칼이요?”
“왜 못 믿겠냐?”
뭐지 싶다. 갑자기 웬 칼? 흠, 이거 왠지 함정 같은데?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아저씰 쳐다보았다. 아저씬 아까완 달리 무표정한 얼굴이셨고. 어? 진짠가? 이리저리 짱구를 굴려보지만, 거짓말 같진……. 헐. 그런 거였나? 고윤수 주방장님 얘기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게 다 미끼였다 이거지? 난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나참, 칼 한 자루 만드는 데 반년은 걸리더만. 그걸 핑계로 날 여기에 붙들어두고서 얼마나 부려먹으려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가 피식 웃으시고, 저만치 앉아 계시던 사모님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쿡쿡거리셨다.
“아, 왜들 웃어요!”
“얼척이 없어서 그런다 이놈아.”
“뭐가요? 맞잖아요? 지금 당장 칼이 어딨다고…….”
“있다.”
“예?”
“칼 있다고. 예전에 만들어 놓은 거. 사정이 있어서 아무한테도 못 준 게 있는데, 네가 이기면 그걸 주마.”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난 눈을 깜빡거리다가 내가 놓친 게 뭔지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아우, 큰일 날 뻔했네. 칼이고 나발이고, 그건 내가 이겼을 때 얘기. 문제는 내가 질 때인데……. 더 큰 문제는 질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점이다.
“그, 그럼 제가 지면요?”
“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에? 그런 게 어딨어요! 나중에 아저씨가 뭘 요구할 줄 알고요!”
“왜? 질 것 같냐?”
……도돌이표도 아니고. 이쯤 되니 느낌이 온다. 개미지옥처럼, 한번 빠지면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 아저씨가 정교하게 설계한 함정에 내가 빠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한 입으로 두말할 수도 없고. 이제 와서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 그래. 근성 하면 서진영, 서진영 하면 근성이잖아? 까짓 힘이 안 되면 근성으로 버티면 될 일. 악착같이 쥐고 있으면 그놈의 집게가 내 손을 빠져나갈 리가 없잖아.
“대장간으로 가시죠!”
결심을 굳히고 호기롭게 앞장서는데, 뒤따라오는 아저씨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뒤쪽에선 사모님께서 웃음을 꾹 참는 얼굴로 쳐다보고 계셨고. 아, 뭐냐고. 이 상황은? 나 지금 부부 사기단한테 걸린 거야? *** 쾅!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회장실을 울렸다. 흠칫한 김명기 부장은 안절부절못하다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을 판이다.
“말했지? 제대로 지켜보라고!”
진 회장의 노기가 공기를 뚫고 김명기 부장의 머리통에 직격하고 있었다. 고함뿐만이 아니다. 분기를 참지 못하고 몸까지 부르르 떨고 있다. 그나마도 끝까지 갈 생각은 아닌지, 골프채를 찾진 않는다.
“최 실장.”
“예, 회장님.”
김명기 부장과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정자세로 서 있던 비서실장인 최훈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몇 프로라고 했지?”
방송 쪽 일이라곤 해도 시청률쯤 알아내는 데는 큰 어려움은 없다. 애당초 시청률이 대외비도 아니고, 언제 돈 대주는 광고주가 될지 모르는 대기업을 상대로 별것도 아닌 거로 얼굴 붉힐 방송국도 아니니까. 다만, 일개 예능 프로에 불과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대해 이상할 만치 높은 회장의 관심이 문제일 뿐. 김명기 부장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보고를 하지 말 걸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 실장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십칠 프로까지 솟았습니다.”
“막판에?”
뭔가 끓는 듯한 음성으로 묻는 진 회장의 질문에도 최 실장은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네.”
“……그 예고 나갈 때겠지?”
“그, 그렇습니다.”
으득. 이가는 소리가 들리자, 김명기 부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런 그의 귓가로 진 회장의 음성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그래서 삼한이랑 C 마트가 광고를 넣는 동안 우린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네.”
“허! 그러니까…… 재주는 우리 KS가 부렸는데, 돈은 그 연놈들이 다 해 먹은 거네?”
KS 대외홍보부 부장으로서 이 문제에 관해서 일차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김명기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룹 회장의 브레인으로서 총체적인 관리를 책임지는 비서실장 최훈 역시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여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더 진 회장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쾅! 다시금 책상을 부실 듯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 뒤에 진 회장의 엄명이 떨어졌다.
“뭣들 해! 얼른 김동하 국장한테 연락하지 않고!”
KS 대외홍보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