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무지 부담스럽습니다만. (2) (46/204)

#46. 무지 부담스럽습니다만. (2)2021.01.15.

주방장님께선 그 사실을 어찌 알았음메? 그렇게 물을 뻔했다. 미리 프로그램된 장치를 작동하듯 재빨리 올라가 입을 틀어막은 손이 아니었더라만.

“니래 왜 말을 못 하니? 벙어리네? 아니면 죄라도 진 거이네?”

화가 나신 듯하다. 그것도 많이. 솔직히 말해서, 여기 와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숨길 건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고, 돌이켜봐도 부끄러울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럴 마음도 없었고. 아니, 아주 쪼끔은 있었던가.

“이직을 권하시길래,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기래?”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흔들리긴 했습니다.”

픽하고 웃으신다. 다 알고 계시다는 듯.

“사람인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거이디. 아, 천금을 들이미는데 마음이 동하디 않으면 기거이 사람이네? 야야, 기런 인간이랑은 상종도 하디 말라우.”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어쩌면 날 좋게 봐주셔서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을 테고. 어느 쪽이든 감사할 따름이다. 한편으론 죄송하기도 했고.

“됐다. 니래 타박이나 하자고 예까지 온 거이 아니니까. 기래서 그 여우가 또 뭐라든?”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빚이 어쩌고 하는 말도 했었지만, 그건 싹 무시해버렸다. 김진숙 회장도 농담 삼아 던진 말일 테고, 나로서도 그냥 우스갯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기럼 다행이고.”

“……예.”

기어들어 가다시피 대답하자, 주방장님에 턱을 쓰다듬으며 날 빤히 쳐다보셨다.

“표정이 왜 그러네? 간나새끼, 니래 다 좋은데 간이 그리 작아서 어디다 쓰갓니?”

“…….”

“조심하라우.”

“……?”

“김진숙이래 만만한 아가 아니야. 속에 들어앉은 구렁이가 열 마리는 될 기다. 알간?”

“그, 그렇습니까?”

“괜히 헛짓거리하려 들거든 꼭 말하라우. 내래 기땐 그 손모가질 썰어 주갓어.”

흠칫. 주방장님이 저리 말씀하시니, 괜히 오한이 든다. 하아, 진짜. 저 연세에 저런 카리스마라니.

“……알겠습니다.”

“명심하라우.”

“예!”

대답과 함께 머리를 크게 끄덕여 보이자, 그제야 주방장님은 만족하셨는지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이제 끝인가? 어떻게 아셨는지는 몰라도 내게 경고 아닌 경고를 해주러 오신 모양인데.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만큼 날 아끼신다는 얘기일 테니까.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 혹은 소망이 그렇다는 얘기다. 진짜 이러다가 수제자로 받아주시는 거 아닐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니래 와 실실 쪼개니? 허파도 부실한 거니?”

“예?”

“젊은 아새끼래 큰일이다, 야. 귓구멍까지 막혀 가지고. 쯧쯧.”

혀를 차시는 주방장님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민망해져서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모레, 날이 밝는 대로 아우라지 좀 다녀오라. 직접 다녀올까 했는데, 내래 하필 일본에 갔다 오게 돼서 말이야.”

자, 잠깐. 지금 뭐라 하신……. 어딜 갔다 오라고?

“아, 아우라……요?”

입에 익지 않은 말에 마을 더듬고 말았다. 다녀오라 말라 하는 거로 봐선 장소가 분명한데, 그래서 거기가 어디냐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주방장님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토해내셨다.

“허. 아우라지도 모르네?”

“…….”

“기래. 기럴 수도 있디. 입 있고 두 다리 멀쩡하니 뭐이가 문제겠니. 암튼, 날래 다녀오라우.”

“……예.”

어딘지도 몰랐지만, 일단 대답은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또 준석이 형만 고생하게 생겼구나 싶었다. 그렇긴 해도, 겨우 하루 이틀이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싶기도 했고. 것보다는 지금이 문제. 그러니까 내 코가 석 자였다. 그 뒤로 쭈욱 설명이 이어졌지만, 솔직히 뭔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주방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시 말해 달라 청해, 종이에 아우라지인지 우라질인지로 가는 길을 꼼꼼히 적었다.

“아침에 나가서, 슬슬 가면 해지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이야.”

……꽃벼루, 골금, 절골, 사실동? 강원도란 건 알겠는데, 정말 한국 맞아? 머릿속이 한껏 엉켜서 아까부터 아질아질한 걸 간신히 참고 있을 때였다.

“거 가면, 쇠쟁이 하나 있을 거이야. 가한테서 칼 한 자루 받아오라.”

쇠쟁이? 아, 진짜 미치겠네? 번역기라도 필요한가. 대충 듣기론 대장장이를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거면 됩니까?”

아까부터 잘 못 알아듣는 거 같아서, 조금 민망하기도 해서 그렇게 물었는데 주방장님이 날 힐끗 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렇디. 기거면 되디.”

그렇게 말씀하시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제 볼일 다 끝났다는 듯 방을 나서려 하셨다. 그러다가 문을 앞에 두고 한마디 보태셨다.

“근데, 니래 궁금하네?”

“예? 뭐, 뭐가 말입니까?”

“김진숙 말이야.”

아, 그거……. 궁금하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물을 엄두까진 나지 않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주방장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기렇게 볼 것 없다, 야. 늙은이 귀도 어두운데, 대신 들어줄 아새끼들도 좀 있어야 할 거 아니갓니?”

대답은 필요 없었던지, 주방장님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방을 떠나셨다. 멍하니 서서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털썩! 무너지듯 침대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꼭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이랄까. 안 그래도 촬영하느라 피곤했는데, 전화 몇 통과 함께 느닷없는 주방장님의 방문에 무너져 버렸다. 씻기도 귀찮아서 그대로 몸을 뉘고 눈을 감았다. 꾹꾹 눌러뒀던 피곤이 벌떡 일어나 온몸을 확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몰려드는 수마에 삼켜졌다. ***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바람도 불어왔고. 창문을 열어놓고 잤나? 겨울이 코앞인데 미쳤네. 감기라도 들었다가는 큰일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뜨려는 찰나였다. 스윽.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이 스르륵 떠졌다.

“깼니?”

어? 놀랐다. 그럴 수밖에.

“어, 엄마?”

꿈에서조차 그리운 그 이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엄마는……. 옅게 웃으셨다. 그 웃음 뒤로 쏟아져 내라는 햇살 때문이 아니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삼켰다. 아니까. 현실이 아니란 걸. 언제 깰지 모르는 꿈이란 것을.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봐야 한다. 엄마 얼굴을. 느끼고 싶었다. 그 품속이 얼마나 따스한지. 베고 있던 무릎에서 몸을 돌려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토록……. 따스했구나. 그래. 알고는 있다. 여기가 꿈속이란 걸. 그럼 어때서?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면……. 말로는 표현할 방도조차 없는 감정들. 원망과 후회, 그리고 그리움이 한데 엉켜서 머리 아니 온몸을 휘감았다. 고개를 쳐들자, 엄마가 손을 뻗어 볼을 쓰다듬는다. 뺨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은 품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르다.

“우리 아들. 잘 생기기도 했지.”

“…….”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엄마. 그 손길이 너무나 생생해서……. 슬펐다. 아니, 기쁘다. 목이 메어왔지만,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난다. 꿈속이라도 좋다.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이렇게 손길을 느낄 수 있다니. 이렇게…….

“어, 엄마.”

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라곤 그거라곤 없다는 듯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다가 다시 한번 미소지으셨다.

“우리 아들, 잘 컸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삼키고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앞으로도 잘 살아야 해?”

“응.”

“엄마랑 약속.”

“으……응.”

“그래. 그래야 우리 착한 아들이지.”

“……응.”

그것이 마지막 대답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두 눈에 비쳐들었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나들이를 갔던 한강 공원. 잔디가 푸르게 펼쳐져 있는 들판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엄마의 신형은 사라져 있었고,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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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 깨어났다. 입가엔 슬프지만, 따뜻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여전히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 왜인지는 모른다. 꿈이란 대체 뭘까? 꾸고 싶다고 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꾸게 될는지 예측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기쁠 수밖에 없다. 깨어났을 때만 해도 그렇고. 하지만, 거기까지다. 잠에서 깨어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아니 기쁘지만, 그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슬프냐고?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저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슬픈 게 아니라……. 아프다. 어디가 어떻게……가 아닌 그냥 아프다. 그런 걸 테지.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다 같은 걸 테다. 평범한 일상 속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없다는 것. 함께한 시간들은 고스란히 남았는데, 사람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몇 마디로 축약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미치도록 보고 싶다. 이런 기분이었을 테지. 그도. 류승렬도.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그는 아직도 그 감정 속에서, 아니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터다. 다른 이들에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사람과의 추억은, 그렇게 류승렬에게만은 남아서 여전히 그를 가둬두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벗어나고 싶을 만치 괴롭기만 할까?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오히려 그 반대겠지. 하루하루 흘러가다 어느 날 돌아보면 뭉텅뭉텅 사라져버린 기억들만큼이나 잊고 싶지 않겠지. 그 시간들을. 내가 그렇듯이.

“후우.”

설거지를 마치고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면서 한숨을 내쉬자, 준석이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아니긴. 얼굴이 그렇게 어두운데.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진짜 아무것도 아녜요.”

“방송 때문에 그래?”

“그런 건 아니……라니까요.”

“자식이. 촬영 잘했다며?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걱정은요?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래?”

준석이 형이 힐끔거리면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자니, 걱정을 끼친 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래서였을 거다. 화제도 돌릴 겸, 궁금하기도 해서 물었다.

“형수님은 잘 계시죠?”

“응? 와이프? 잘 있지. 근데 그건 왜?”

“출산일이 언제죠?”

아이고. 우리 형님. 손가락을 꼽고 계신다. 나도 남자지만, 이럴 때 보면 남자라는 생물은 정말 대책 없달까.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리다가 준석이 형이 얘기했다.

“분명 들었는데. 4월에 임신했다고 했으니까, 2월인가? 3월인가? 그쯤이지 아마?”

“딸이에요?”

“글쎄. 난 그러면 좋겠는데. 몰라.”

“왜요? 요즘은 다 알려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근데, 와이프가 모르고 낳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

역시 형수님답다고나 할까. 현명하시다니까. 진짜 우리 형님은 전생에 나라까진 아니라도 사람 몇천 명쯤은 살리신 게 분명하다.

“예쁘겠어요.”

“그러겠지.”

“기쁘겠죠?”

“그렇겠지?”

“근데, 가만 그럼 난 삼촌이 되는 건가? 히히히.”

“난 아빠. 흐흐흐.”

그렇게 웃고 있는데, 저만치서 안성댁이 한마디 쏜다.

“아이고, 이 화상들아. 지금 그럴 때야? 조금 있으면 회장님 들어오신다는데?”

두 명의 남자가 입이 헤벌쭉해져서 웃고 있는 게 이상하기도 하겠다. 그래도 어쩌냐고.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인데.

“아! 국이 다 됐나? 형님, 국물 맛 좀 봐주실래요?”

“어! 그럴까? 음……. 캬하! 좋다! 좋아.”

엄지 척까지 해 보이곤 돌아서면서도 손가락으로 냄비 속, 국을 가리키는 준석이 형이었다. *** 저녁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가족들이 한데 모인 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시작됐다. 일찌감치 떠났다던 강 회장이 빗길에 차가 막혔는지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강형식은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식사하는 내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가족들과 한마디 말도 나누진 않았지만, 그거야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니 별스러울 것도 없었다. 것보다는 가끔씩 강 회장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서 물어보고, 또 그에 대해 대답하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수저를 놀리는 모습은 예전이라면 상상치도 못할 일일 터. 이런 말을 쓰는 게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야, 피곤해 보인다. 먼저 들어가.”

“예? 아직 식사도 다 안 끝났는데요?”

참네, 그럼 설거지는 누가 하라고?

“너 내일 심부름도 간다며?”

“그냥 놀러 가는 거나 다름없는데요, 뭐.”

“그래도 가. 가서 좀 쉬어. 얼굴이 핼쑥하다, 야.”

에이, 설마 그러려고.

“아녜요. 설거지도 해야 하고…….”

“내, 내가…… 할게.”

“누나……?”

갑자기 들려온 혜순이 누나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부른 호칭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건지, 누나는 두 볼이 발개져서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다. 근데, 입가에 미소짓고 있는 거 맞지?

“응. 너 어제 힘들었잖아. 주방 정리랑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아, 그래도 그게…….”

“야이, 밥통아. 맨날 그러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힘도 없이 흐느적거리는 게 자꾸 발에 채여서 방해만 되니까 얼른 꺼져!”

발길질까지 해가며 날 내쫓는 준석이 형. 어떻게든 안 맞겠다고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좁은 주방 통로를 피해 물러나는 나였다. 혜순이 누나는 그게 또 웃긴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안성댁이 한마디 할 줄 알았더니, 역시나 한마디 내뱉는데.

“밖에서 들으면 어쩌려고들 그래? 그만들 하지 못해? 그리고 넌…… 가려거든 얼른 가. 보고 있으면 속 시끄러우니까. 하루 종일 뭔 생각을 하는지, 멍해서는…….”

주방장님과 셰프도 안 계신 상황에서 세 사람이 입을 모아 가라고 하니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긴 한데……. 하아, 진짜 여기 뭐냐고. 뭔 사람들이 이렇게 착해빠져서는……. 근데 왜 코끝이 찡하냐고.

“아, 쫌! 그만 좀 차요. 간다고요, 가.”

“이 자식이! 많이 컸네?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놈이!”

아이고. 날 업어 키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그리고 형님요. 제가 형님 처음 만난 게 스무 살 넘어서거든요?

“에이, 나도 몰라. 진짜 갑니다?”

대답은커녕 다들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럼 갈게요.”

그래도 반응이 없길래 멋쩍게 말했다.

“다들 고마워요.”

말해놓고 나서 엄청 부끄러워져서 얼른 탈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한진석 싸인 좀 받아주든가.”

뚝.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봤지만, 안성댁은 시치미 뚝 떼고 반찬 통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백 장이라도 해드리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미한 변화였지만, 알 수 있었다. 기뻐하고 있다. 한진석……. 팬 많네? 수다스럽던 10년 차 MC를 떠올리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앞치마부터 조리복을 벗어 관물대에 걸어두곤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머릿속에선 어제 김진숙 회장과 전화로 나눴던 대화들이 흘러갔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 숙소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녀석이었다.

- 뭐야? 벌써 간 거야?

그건 또 어떻게 안…….

“너 주방이냐?”

- 밥 다 먹고 들러봤지.

“가족들 보면 어쩌려고?”

-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내 친구 만나겠다는데.

미친다, 진짜. 어떻게 내 주변에는 상식적인 인간이 없다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아, 됐고. 그래서 뭐? 술 마시자고?”

- 큭!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피곤한데……. 내일 강원도로 떠나야 하기도 하고. 아니 달리 생각하면 그래서 괜찮은 건가? 가면서 기차랑 버스에서 자면 되겠지.

“거기로 가면 돼?”

코앞에 있는 숙소를 한차례 올려다본 뒤, 돌아섰다. 차고지를 향해서. 하지만,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 아니, 내가 차 몰고 갈게.

“응? 어딜 가려고?”

- 있어.

“나 아직 월급 못 받았는데?”

- 내일모레잖아.

“야이, 그건 어떻게 알…….”

- 크크큭. 넌 인마, 내 손바닥 안이라고. 그리고 오늘 술은 내가 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그래요? 엄청 고맙네. 재벌 3세가 일개 서민한테 술 한잔 가지고 엄청 생색내고 있다. 근데, 그게 또 날 기껍게 한다.

“그래? 그럼 옷 갈아입고…….”

- 됐어. 옷은 무슨. 술이나 한잔 하러 가는 건데.

“그런가?”

- 금방 갈 테니까, 담배라도 한 대……. 아, 너 안 피우지.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 오케이?

“오케이.”

전화를 끊고 나서 근방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았다. 대체 어딜 가자고 하는 건지? 정말 술이나 한잔하자는 건가? 후우, 진짜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뭘 어쩌겠냐? 굳이 나가서까지 술 한잔 사주겠다는 놈인데, 거절하기도 그렇잖아? 에잇, 이렇게 된 바엔 진탕 마셔주겠어.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서, 그래서 녀석보다 먼저 쓰러져 이번에는 날 업게 만들어주지. 나름 계획을 세우고 음흉하게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라이트가 비치는가 싶더니 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걸 보고 있자니,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물론 그때랑은 달리 차는 요란하지 않았다. 검은색 세단. 한 50대 정도 되는 사업가가 타야 어울릴 것 같은 고급차였다. 지이이이잉. 내 앞에 이르러 멈춰선 차는 창문을 열고 있었다.

“뭐해? 안 타고?”

“잠깐 생각 좀 했어.”

“생각? 무슨?”

솔직히 말하긴 왠지 쑥스러워 농을 던졌다.

“오늘 밤 혹시 장기 털리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 왜?”

“염병! 얼굴 다 팔린 사이에 무슨.”

“원래 범죄는 면식범이 가장 많이 일으키는 거 몰라?”

차 문을 열고 보조석에 타며 말하자, 강형식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바꾸자. 내가 운전할게.”

“됐습니다. 남의 유일한 취미까지 넘보지 마세요.”

하긴, 운전만은…… 아니, 그밖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녀석이 나보다 나으니까.

“근데 진짜 어디 가는 거냐?”

“파티.”

순간, 멍해졌다. 뭔 티? 차가 출발해 이미 밖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미끄러져 가는 사이,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녀석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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