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2)2021.01.08.
대본은 여기까지였다. 사실상 나한테 주어진 대사란 것도 거의 없는 편이었고. 하지만 이제부턴 좀 다르다. 프로그램의 전반부가 토크쇼라면, 후반부는 막말로 쿡방. 그것도 감동과 울음이 함께하는. 과연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그런 연출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상관없다. 내가 할 일이란……. 그저 류승렬이 먹고 싶어서 하는, 아니 이제는 그마저도 포기해 그저 머릿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면 그뿐. 그렇긴 한데……. 너무 쳐다보는 거 아냐? 아까처럼 눈에서 불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 따라다니는 류승렬의 눈.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치는 게 부담스럽기만 하다. 근데, 저기……. 피디님. 어지간히 좀 하시죠? 지금 류승렬만 카메라에 담을 게 아니라 한진석한테 신호라도 해줘서 상황을 좀 더 부드럽게, 응? 추억이라도 좀 끄집어내고 하면서……. 그래야 하지 않냐고요. 예? 이 프로, 모토가 힐링이라면서요? 아무튼, 류승렬 때문에 왠지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다. 조금은 정신을 차린 건지, 더 이상 서 있지 않고 앉기는 했는데……. 어깨가 미미하게 떨린다. 그 이유야 뻔한 거고. 눈치 없는 한진석은 상황파악이 아직 안 되는지, 아니면 눈치 없는 척하는지는 몰라도 나름 열심히 멘트를 치고 있다.
“서 셰프! 밥을 안치나요?”
어느새 한진석의 말이 짧아져 있었다. 셰프님에서 셰프로. 뭐,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이젠, 뭘 만드시는지 말해 주실 때도 됐지 않습니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살짝 가라앉은 톤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마른 듯 갈라지는 목소리였고. 그렇다는 건 한진석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고,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거겠지. 하기야, 류승렬이 아까 벌떡 일어나면 소리까지 질렀는데, 베테랑 MC로 소문난 한진석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 증거로 그는 카메라를 피해 신현정 피디에게 입을 벙긋거렸다.
‘이쯤 해서 말해주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도 상황이 변한 걸 눈치챈 게 분명하다. 나 역시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신현정 피디와 잠시간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카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신현정 피디가 고개를 내젓는 게 보였다. 난 한진석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런 그를 일별한 채 나는 밥솥에 쌀을 담그고 물까지 맞췄다. 당연한 얘기지만, 말이 밥솥이지 진짜 솥이란 건 아니다. 맛이야 그쪽이 더 좋겠지만, 나레이션의 얘기대로라면 이쪽이 낫다. 삑! 전기밥솥을 터치하자, 낭랑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 백미 취사를 시작합니다. 이 소린 언제나 사람을 군침 돌게 한다.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한국 사람은 밥 짓는 냄새, 아니 소리에 이처럼 저절로 반응하는 모양이다. 이제, 밥은 안쳤고. 탁! 탁! 탁! 기름기 잘잘 흐르는 햄을 도마 위에 놓고 칼로 자르고 있으니, 한진석이 때를 놓치지 않고 멘트를 친다.
“큼. 뭐, 뭡니까? 설마 부대찌개인가요?”
당연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거다. 나름 즉석에서 애드립을 친 거겠지. 아니, 애당초 초반부를 지나 여기까지 오면 대본 자체가 없으니 저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글쎄요.”
“치, 치사합니다! 근데, 피디님. 저랑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약속? 뭔 약속?
“제 사회적 체면과 고급진 입맛에 걸맞은 엄청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저 재료들로는 아무리 봐도 제 혀를 만족시킬 요리를 만들 수 없을 거 같은데요!”
급기야 오버하는 한진석. 나 같으면 한 달은 족히 이불킥을 할 만한 행동. 아니, 지금 당장 손발이 오그라들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미끄러지듯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는 거로도 모자라,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잡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꼭 울부짖는 짐승처럼.
“아아! 진정 들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 혀 속에 있는 수만 개의 미뢰가 분노하는 소리가!”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류승렬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제 분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혹은 허무한 건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추억 속에 빠져 있는 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류승렬은 겉으로만 봐서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멍하니 날, 아니 내 손에 들린 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요리를 이어갔다.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방송으로 보게 되면, 지금의 내 태도는 꽤 담담하게 비칠 터였다. 실제로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그냥 개폼이나 잡아보겠다고 그러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이유? 간단하다. 나는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배우가 연기로 감정을 표출한다면, 난 요리로 감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맛을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 거다. 치이이이익. 프라이팬에 올려진 햄들이 기름조차 두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익어간다. 통조림 햄.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음식일 테고, 또 누군가에겐 사치일 수도 있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이게 사실 웃기는 일이다. 미국에선 싸구려 음식으로 인식되어 빈곤층이나 어쩔 수 없이 사 먹는 햄인데, 어떻게 된 게 한국에선 엄청 비싸다. 듣기로는 미국에서 수입하는 게 아니라 한국 기업에서 직접 만들면서 조금 다르게 만든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싸다는 건 분명하다. 물론 못 사 먹을 정도는 아니고. 단지 소시지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류승렬이 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었을 테다. 한창때의 남자애들에게 햄이란 그런 존재니까. 치이익. 다 익은 햄들을 접시에 덜어놓곤, 다음으로 넘어갔다. 서걱서걱. 김치를 도마에 올려 칼로 썩둥썩둥 썰면서 류승렬을 힐긋 바라보았다. 올곧게 나를 향한 눈길. 그 눈빛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샌가 어깨의 떨림도 사라졌다. 대신 돌처럼 굳은 모습이다. 그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류승렬은 분명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무얼 만들고 있는지. 양념에 버무려진 배춧잎들 사이로 칼날을 깊게 넣으며 말했다.
“고등학생 때는 진짜 밥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죠.”
서걱서걱. 김치를 마저 썰고 웍에 집어넣었다. 류승렬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외면했다. 왜 그러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시절엔 돌도 씹어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저도 생각나네요. 1교시 끝나자마자 도시락 까먹고 점심때는 빵에, 컵라면에, 소시지까지. 그런데도 하교할 때쯤엔 배가 등에 붙은 것처럼 엄청 허기졌었죠.”
“꽤 잘았나 보네요. 빵에…….”
“에에에이! 여기서 그런 말을 왜 합니까? 안티 없다는 게 제 유일한 자랑인데….”
웃으라고 한 얘기지만, 스튜디오 안 누구도 웃지 않았다. 류승렬은 말할 것도 없고, 스텝들조차. 아마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모르겠지만, 여기 분위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도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그 시절을 지나왔으니까. 초라한 기억일지라도, 추억은 남는 법이다.
“그땐 볶은 김치가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뭐, 지금도 맛있긴 하지만, 진짜 김치 볶은 거만 있어도 밥 한 공기는 뚝딱이었죠.”
외숙모가 정성스럽게 볶아 싸주셨던 반찬. 볶음 김치를 떠올리며 말하자, 한진석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맞아요.”
그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저렇게 웃는 건……. 나름 애쓰는 걸 테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것도 아니면, 나중에 더욱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인가? 만일 계산이 아니라 그저 생각 없이 그러는 거면, 진짜 타고난 건데…….
“역시 한국 사람한텐 김치란 거겠죠.”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른다. 김치 좀 볶는 게 대수냐고. 맞다. 별거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나마 햄을 구울 때까지만 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류승렬이 지금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고. 햄이야 류승렬이 싸 왔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감정이 있겠냐만, 김치는……. 어찌 보면 트리거인 셈이다. 그의 감정을 건드리는. 따지고 보면 볶음 김치라는 건 무지 단순한 요리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저 웍……. 원래대로라면 프라이팬이겠지만. 그것도 기름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프라이팬. 거기에 넣고 기름을 잔뜩 두르고 볶으면 끝인 요리. 누구는 설탕을 뿌리네 다른 뭔가를 첨가하네 한다지만, 결국 볶음 김치는 볶음 김치인 것이다. 먹을 게 부족하던 시절, 혹은 소득이 영 마뜩잖던 가정에서 손쉽게 한 끼의 식사에 더없이 훌륭한 반찬이 되어준 게 바로 볶음 김치. 겨울을 나는 동안 시어 버린 김치가 단지 기름에 튀기듯 볶는다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입맛을 돋우는 요리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게 지금 열심히 손목에 스냅까지 주며 흔들고 있는 웍 속에 담겨 있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이. 김치에 버무려진 양념과 배추에서 나왔을 물들이 고춧가루를 머금은 채 뜨거운 웍 표면과 만나 지글지글 끓어오르며 흰 수증기로 뿜어낸다. 거기에……. 손을 뻗어 벽돌 반 토막만 한 종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상자의 포장을 뜯고, 그 안에서 상표가 인쇄된 은박을 벗겨내는 순간 샛노란 빛을 띤 기름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로 자르자, 소리 없이 떨어져나온다. 그렇게 떼어낸 마가린 한 덩이를 들어 올렸다. 움찔. 순간, 류승렬의 어깨가 흔들리는 게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눈동자도 잘게 떨리고 있다. 내 손을 떠난 마가란 덩어리가 웍 속으로 빠져들고,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녹으며 김치와 한데 섞여드는 순간이었다.
류승렬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한숨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가린……이었나?”
***
“씨발 새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복부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승렬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그런다고 고통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고1.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시점. 승렬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도무지 몰랐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매점에서 줄을 무시하고 빵을 사는 3학년들에게 말 몇 마디 한 게 이렇게 죽을 만큼 처맞을 일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빙 둘러싼 채 번갈아 가며 마치 축구공이라도 차듯, 그것도 실실 쪼개면서 그를 패고 있는 3학년들을 죽여버릴 듯 노려보았다.
“하이, 새끼! 눈깔 봐라.”
“씨발 놈이. 눈 안 깔아?”
“아직 덜 맞았지?”
여기저기서 웃음과 함께 날아드는 개소리에 승렬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개새끼들! 죽여버릴 거야!”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발을 미친 듯이 움켜잡고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어어, 뭐, 뭐야! 이 새끼! 이거 안 놔!”
당황한 3학년 한 명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승렬의 악다구니에 묻혀버렸다.
“씨발! 씨-바아아알!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어!”
사람을 깔아뭉개고. 그 위에 올라타고. 눈이 확 돌아가서. 미친놈처럼 쉴 새 없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당연히 승렬에게 깔린 채 처맞고 있던 3학년은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와 함께 피가 튀고, 급기야 입술까지 찢어졌지만, 승렬은 놔주지 않았다. 퍽! 퍽! 퍽! 연신 주먹으로 놈을 때릴 뿐. 하지만 다른 3학년들이 지켜만 볼 리가 없었다. 우르르 몰려든 이들의 발길질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에 비해 다른 이들, 즉 1학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2학년들은 그저 지켜만 볼 뿐이었고. 물론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승렬조차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을 뿐. 3학년들에게 한번 찍히면 단순히 한순간의 고통만이 아니라 3년 내내 고달플 수밖에 없을 테니까. 왜냐면 학교를 졸업하면서도 그들은 후배들에게 일종의 지령. 계속 주시하면서 관리할 대상 즉 블랙리스트를 주고 갈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걸로 모자라 다른 학교에도 알릴 것이다. 그러면 전학을 간다고 한들 편안한 생활은 끝이다. 이사라도 가서 아예 놈들의 눈길에서 벗어난 곳으로 진학한다면 또 모를까. 그걸 아는데, 누군들 끼어들…….
“뭐야, 이 새끼는! 이거 놓지 못해?”
뭐지 싶어서 승렬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고개를 쳐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 한 명의 남학생이 꽂혀 들었다.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뭐? 이 새끼가 처 돌았나?”
“씨발 놈이 죽을라고!”
몇 번인가 내지르는 발길질을 곧잘 피하는가 싶더니 남학생은 이내 승렬과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퍽퍽퍽퍽퍽퍽퍽. 연거푸 울리는 소리. 두 명의 학생이 흡사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서, 수많은 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그러면서도 좀처럼 항거할 수 없는 폭거의 현장에 다들 침묵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마치 등껍질을 두른 거북처럼 등을 밖으로 하고 무릎을 당겨 가슴을 보호한 채 자신을 보는 두 개의 눈동자. 승렬의 가슴이 진탕 쳤다.
“얼른 나처럼 해.”
“……?”
“이래야 골병이 안 들……. 크억!”
평생을 갈 거라고 여겼던 친구. 찬승과의 첫 만남이었다. *** 그날 이후로 둘은 늘 함께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3학년들은, 아니 거기에 더해 2학년은 말할 것도 없고 1학년들까지 몇몇 가세해 집요하게 두 사람을 괴롭혔다. 왕따? 그건 두 사람이 당한 거에 비하면 약과였다. 등하굣길에 맞는 건 일상이었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당했다. 몇 차례인가 맞고 나서, 승렬이 왜 끼어든 거냐고 물었을 때 찬승은 대답했었다.
“할 수 있으니까.”
어이가 없었다. 할 수 있긴 뭐가. 결국, 같이 이런 꼴이 되고 말았는데. 그런데도 찬승은 원망 한번 하지 않았다. 후회하는 눈빛도 아니었고, 시간이 갈수록 둘의 관계는 단단해져 갔을 뿐이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을 때, 원래부터도 매사 염세적이며 부정적이던 승렬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승은 들꽃 같은 녀석이라고. 집은 가난했고, 한 명 남은 부모인 아버지마저 도박과 술에 절어 사는 개차반이었지만, 그럼에도 찬승은 곧았다. 늘 일찍 일어나 새벽에 운동을 했고, 낡은 집의 뒷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후론 학교 갈 채비를 했다. 스스로 먹을 도시락을 준비한 것도 찬승이었다. 점심시간에 학교 뒤편, 아무도 오지 않는 옥외 화장실 뒤쪽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을 때 보면, 찬승의 도시락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반찬이라곤 볶음 김치뿐이었으니까. 늘 그랬다. 사시사철. 그 흔한 달걀 하나 없었다. 그래서였다. 어느 날엔가부터 승렬의 도시락에 반찬들 양이 늘어났다. 달걀부침은 두 개가 되었고, 햄도 두 배가 됐다. 가끔 다른 반찬들도 있었지만 이 둘만은 빠지지 않았다. 찬승이 좋아하던 것들이었으니까. 네 밥 내 밥 할 것 없이 도시락통에 욱여넣고, 달걀과 햄 그리고 볶은 김치를……. 그 맛을……. 승렬은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몇 번이나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도통 그 맛을 낼 수가 없었는데…….
“마가린……이었나?”
허무한 듯 내뱉는 말. 류승렬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 솔직히 이해하긴 어렵다. 지금 류승렬이 저런 눈빛을 하는 까닭을. 사정이야 알고는 있지만, 그 심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엔 갭이 너무 크다. 하긴, 사람마다 사연이야 다들 있는 법이고, 그 사연들만큼 감정 또한 다를 수밖에. 일찌감치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던 한진석은 이제 입을 다물고 있다. 그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준비해둔 철제 도시락을 조리대 위에 올렸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없는 것 없이 다 준비해뒀다고 하더니, 진짜였나 보다. 성인 몇 사람이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크기의 도시락. 네모진 철제 도시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류승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지만, 우선은 무시했다. 그러곤 도시락통에 밥과 햄 그리고 볶은 김치와 달걀 후라이를 넣었다. 딸깍. 뚜껑을 덮고 도시락째 들어 올렸을 때, 류승렬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어째서일까? 저 단순한 행동이 이상할 만치 가슴을 흔든다. 덜걱덜걱. 동시에 도시락을 흔드는 내 손길도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한참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식탁으로 향했고, 그 행동 자체가 마치 미끼라도 되듯 류승렬은 천천히 다가왔다. 한진석이 슬쩍 내민 숟가락을 꽉 움켜쥔 채로. 탁. 내가 도시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 류승렬은 말없이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가 입매가 일그러졌다. 콧잔등도 일그러졌다. 눈매가 화가 난 듯 틀어졌고, 자꾸만 코를 마시는 소리를 냈다. 서서히 들어 올려진 손은 조금씩 조금씩 도시락으로 다가가 어느 틈에 뚜껑을 잡았다. 뚜껑을 열자, 공기가 빠지며 뿌아아악 하는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드러난 도시락 안.
“크웁!”
울음을 참는 소리가 분명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덜덜 떨면서 다가간 손이 채 밥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숟가락을 떨구고 말았다.
“끄으윽……!”
식탁을 두 손으로 짚은 채 어깨를 들썩이는 류승렬이었다.
“흐……끄으으으윽!”
대체 뭘 견디려는 걸까. 이를 악물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그였지만, 몸은 아니 감정은 정직했다. 오열이 터졌다. 눈가가 붉어지다 못해 시뻘게지더니 눈물이 번졌고, 이내 그것은 방울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흐흐흐흐윽……!”
서럽게……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한번 시도했다. 이젠 벌벌 떨고 있는 손으로 숟가락을 집어 들더니, 울면서 밥을 한술 떴다. 그리고 입가로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마침내 숟가락이, 아니 숟가락에 담긴 비빔밥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우욱!”
울음소리가 커지고,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런 가운데도 류승렬은 입을 움직여 밥을 씹었다. 그러곤 채 삼키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밀어 넣는다. 누가 보면 사흘 내리 굶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비빔밥을 미친 듯이 퍼먹고 있다. 어느새 눈물로 얼룩진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