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1)2021.01.06.
이번에야말로 제대로였다. 굉장한 음악이 매우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스튜디오 한쪽 벽이 갈라지며……. 저건 대체 어떻게 만든 거람? 어쨌든, 쫘악 벌어진 틈으로 류승렬이 걸어 나왔다. 그러곤 매우 편한 모습으로 소파 쪽으로 걸어오더니,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 집 거실에 온 사람 같았다.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 말하는 본새도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류승렬입니다.”
고개를 까닥거리는 그를 보다가 한진석이 킥킥거렸다. 흠, 아까까지만 해도 근처에는커녕 말 한마디 섞으려 하지 않더니 방송 들어오니까 완전 달라지네. 역시 프로는 프로라는 건가?
“왜 웃어요?”
내가 묻자, 한진석이 받아친다.
“아뇨 그냥. 류승렬 씨가 인사하시는 게 백분 토론이나 9시 뉴스 같아서.”
픽하고 웃었다. 그런 날 류승렬이 살짝 째려보더니 별거 아니란 듯 대꾸했다.
“그렇다고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럴 수도 없잖아요?”
“응? 크큭큭큭큭. 뭐야? 그건…… 선거 때 정치인 같아요.”
참네. 이게 웃긴가? 진짜 이상한 사람들일세. 난 어이가 없어서 시선을 돌리다가 스텝들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신현정 피디도 웃긴지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얼씨구? 진짜 황당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으음……. 과연 프로들이란 거네. 아무튼, 촬영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첫방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이런저런 설명 등 한진석이 앞으로 프로그램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말하느라 초반 10분을 순식간에 날려 먹었다. 거기에 나랑 류승렬 소개하고 그와 인사를 비롯해 잡스러운 만담까지 나눈 걸 포함하면 거의 20분가량 된다. 물론 편집에서 어느 정도는 걸러내겠지만……. 야, 진짜 날로 먹는구나.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얘기들이 오가는 중이었지만, 아직까진 한 번도 컷이 없다. 이 말은 곧 신현정 피디가 만족하고 있다는 거다. 뭐, 그럼 다행인 거지만.
“아우, 진짜 오늘 처음 뵀는데, 딱 TV 아니 극장에서 뵙던 대로네요. 오늘 방송 증말 기대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게스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속에 담긴 사연과 함께 요리를 맛보는…… 아니,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자아, 서 셰프와 함께하는---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전격 출발! 합니다!”
한진석, 참 멘트 한번 찰지게 친다. 감탄하고 있을 때, 그가 류승렬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머릿속에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떠올랐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의 대화에 조금도 끼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호감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람에게 가슴을 향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얘기대로라면 류승렬은 내게 호감이라곤 1도 없다는 게 된다. 봐라. 가슴은커녕 아예 등까지 돌리고 앉아서 한진석과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하아, 이래서는 진짜 보릿자루인데. 인상이 써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무시당해서? 그건 또 아니다. 문제는 이게 그대로 TV로 방영된다는 거다. 그럼 당연히 수아랑 수연이 누나는 말할 것도 없고 외숙모도 보실 거고. 쯧, 민망한 건 둘째치고 괜한 걱정을 안기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아한테 큰소리나 치지 말걸.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내 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한진석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내내 마치 토크쇼처럼 류승렬과 마주 앉아 그의 얘기를 듣고 때로 웃고 툭툭 치듯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류승렬을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던 사람은 어딜 갔나 모르겠다.
“크큭. 그러니까, 친구 따라서 연극반에 놀러 갔다가 딱 붙잡혔다는 거네요?”
“그런 셈이죠. 한번 해보라고 해서 했는데, 목소리 좋다고 막 붙잡고 늘어지잖아요.”
나참, 류승렬도 그렇다. 카메라 밖에선 성질이 그렇게 더러운데, 지금은 마치 철없는, 그래서 조금은 까칠한 사춘기 반항아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거기에 살짝 달콤한 느낌으로 미소를 섞어가면서.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게 무슨 작품이었죠?”
“아, 햄릿이요.”
“설마?”
“맞아요. 그거.”
“크크큭.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진짜 문제죠, 문제.”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MC인 한진석의 주도하에 얘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나라고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방송이라곤 오늘이 처음이라서인지 좀처럼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끼어들기엔 촬영 시작 전 류승렬과 있었던 일들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신경 써서 귀담아들으려 노력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그런 거니까. 그의 얘기를 듣고 그에 맞춰 음식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러는 동안에도 류승렬의 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전 뭐 별거 없어요. 남들은 데뷔하기 전 꽤 드라마틱한 사연들도 있었던 모양인데…….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외동이라서 외로운 것만 빼면 남부럽지 않게 컸죠. 아, 그렇다고 우리 집이 부자라는 건 아니고요. 진짜 소시민이에요, 소시민. 이미 아실 만한 분은 다 아시는데, 저희 아버지 국내 기업에 다니시는 과장이시고요. 어머닌 주부죠. 학교요? 간신히 인서울? 흐흐흐. 이미 관뒀어요. 아, 묻지 마세요. 부끄럽게.”
류승렬은 거침없는 행동만큼이나 소탈한 성격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진석의 질문에 그닥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순순히 얘기하고 있었다. 말주변이 좋다고 말하기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못 하는 편도 아니라서 꽤 매끄럽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아니면, 그냥 설정인가? 어찌 되었든, 이쯤에서 나도 좀 얘기를 하긴 해야 할 텐데. 벌써 20분째 아무런 말도 못했……. 따라라라, 라라……. 그렇지. 날 진창에 빠뜨렸으면, 슬슬 뭘 좀 던져줄 때도 됐잖아? 그게 설사 지푸라기라도 지금 내가 좀 위태위태하거든? - 류승렬은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를 따라서 연극반에 들어갔다. 그 후 재미 삼아 몇 차롄가 무대에 올랐고. 여기까진 이미 류승렬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 그래서 그다음은? 내가 류승렬과 한진석과의 대화를 듣는 척하며 나레이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흠칫! 이어지는 얘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한진석이 날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뒷목의 솜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만큼 나레이션이 해주는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 시작이 그랬기 때문인지 애당초 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였지만, 자신을 연극반으로 이끈 친구의 죽음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몇 달간 고민했고, 그제야 비로소 연기에 진지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기 어려웠고, 그 대신 연기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 후로 그는 일종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다. 입맛이 쓰다. 것도 많이. 내 처지도 그다지 좋은 건 아니지만, 류승렬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류승렬도 친구 따라서 연기를 시작한 셈인데, 그런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병으로 죽었다면 당시 그가 느꼈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통했겠지. 그리고 두려웠을 것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에 대해서. 죽은 친구와 절친했을수록. 정말 있어선 안 되는 일이지만, 강형식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상상만으로도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생에게.
“힘들었겠네.”
나도 모르게 툭 내뱉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창 얘기 중이던 류승렬이 말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빛.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운 그 눈동자를 외면하지 못하고 난 옅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류승렬은 멈칫하며 뭔가 말할 거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한진석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있다 싶었는지 그저 말없이 지켜만 보던 그였지만, 몇 분이 지나는 동안에도 별일 없자 실망한 눈초리였다. 나? 당연히 할 말이 없다. 그저 안타까울 뿐. 그러니까 류승렬의 성격이 저렇게 된 건 다 그때 그일……. 따라라라라, 라라……. - 그건 아니다. 아, 그래? 그럼 원래 타고 난 모양이네. 그런 성격에 잘도 친구를 사귀었나 보다. 후우, 그러고 보니 강형식도 그렇지. 그 자식 성격도 보통은 아니니까. 정말 나나 되니까 친구로 지내는 거지. 아니, 나레이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정말 학을 뗐을 성격이다. 물론 그건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하면 일종의 방어기제였을 뿐이지만. 근데, 류승렬은 성격 자체가 원래부터 저렇게 비뚤어진 듯 혹은 거친 듯하다. 그런 주제에 함께 연극반에 따라 들어갈 정도로 절친한 친구가 죽었으니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그 심정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레이션의 얘기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대부분이 류승렬이 그 친구라는 사람과 어떻게 학창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두 사람이 점심때마다 만들어 먹었다는 요리……라고 하기에도 초라한, 그러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음식이 있었다. - ……그가 그렇게 갑작스레 떠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류승렬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랜 시간 류승렬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자신의 마음에서. 류승렬과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니니, 같은 마음일 수는 없을 터다. 그런데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너무나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던 부모님이 떠올라서였을 거다. 그래서 이해한다. 이제 남은 건 빈자리뿐이지만, 그래서 더욱 그리운 사람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 류승렬은 몇 번이나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길 수십 번. 이제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아니 가슴으로만 남겨뒀을 뿐이다. 함께 만들어 먹었던 도시락을. 후우.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세상엔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요리가 있고, 그중에 무엇이 더 특별한가를 두고 말들이 많지만, 류승렬에게 있어서 특별한 음식은 오직 한가지일 뿐일 테니. 뭐, 나레이션이 제법 긴 시간에 걸쳐 류승렬과 그 친구와의 사연을 말해준 것도 다 그 때문이리라. 음식이 특별한 건, 그 안에 깃든 추억이 더없이 소중한 까닭일 테니.
“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진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며 쇠 된 소리를 낸다. 아마 지금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거다. 그저 눈으로 이 타이밍에 왜 일어나? 하고 묻고 있을 뿐이었다.
“재료…… 챙기려고요.”
“아! 그럼?”
그렇지. 이미 정했거든. 뭘 만들지. 그러기 위해선 챙겨야 할 재료가……. 가만 있어 보자. 쌀, 물, 햄, 김치, 달걀, 기름.
어느새 나레이션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머릿속엔 남아있었다. 류승렬이 그 시절 그 친구와 함께 해 먹었다는 음식이. 난 그걸 재현해낼 생각이었다. 생각대로 된다면 그리 어렵진 않을 터였다.
“오오! 서 셰프! 재료 선반 쪽으로 가나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재료는 뭐든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상관없는 건가요?”
신현정 피디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이젠 척하면 척이라 한진석은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렇다는군요. 양은 상관없습니다. 아, 그래도 이왕이면 양보단 역시 맛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쿡방에 나왔는데 배만 불러서 가게 될 테니까요.”
뒤쪽에서 한진석이 열심히 멘트를 치고 있었다. 선반과 냉장고를 오가며 재료를 골라 담으며 류승렬을 흘깃 보자, 그는 그저 말없이 묘한 눈길로 열심히 날 뒤쫓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진석의 입은 쉬지 않았다.
“쌀까진 이해합니다만, 저 햄은 뭐죠? 수제 햄도 아니고, 그냥 슈퍼마켓에 가면 살 수 있는 싸구……큼…… 아, 실망입니다! 실망이에요!”
요즘처럼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정도 햄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를 통해 들어오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통조림 햄. 그걸 손에 들며 슬쩍 바라보자, 류승렬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헛 참. 이것만으로도 눈치를 챈 건가? 이래서 무서운 거다. 사람의 감이란. 아니면 그만큼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틀어박혀 있다는 거겠지. 그저 햄을 집는다는 행동만으로도 특별하게 다가올 만큼. 류승렬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진석은 그저 한탄 어린 외침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서 셰프님, 그러지 마시고요! 부디 저에게 세계 삼대 진미에 지지 않을 엄청난 맛을 보여주세요! 제발! 제바아아알!”
두 손까지 모으고 연신 절하듯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달밤에 정화수 떠놓고 무슨 기도라도 올리는 듯하다. 내가 무슨 아기 점지해주는 삼신할머니도 아니고. 한데, 신현정 피디……. 참 대단하다. 한진석은 놓친, 류승렬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챘는지 분주히 움직이며 나와 류승렬에게 각각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니다. 아마 여러 각도로 찍어서 나중에 극적인 연출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꽤 실력파인가 보네. 그저 고아하기만 한 미인인 줄 알았더니만. 생긴 것만 봐서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보지 않았을 것처럼 생겨 가지고. 그녀의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길로 나와 류승렬 사이를 오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녀는 스텝들을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원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한마디로 스튜디오 안과는 달리 밖은 소리 없는 전쟁터였고, 신현정 피디는 오로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때론 냉혹하게 또 때론 뜨겁게 군사를 부려 전장을 조율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장수였다.
“아! 서 세프님, 비닐장갑은 왜 끼나요? 대체 뭘 꺼내려는 거죠? 고기인가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한진석의 오해가 한층 깊어진다.
“아하! 그렇군요. 스테이크라도 할 생각인 거죠? 흐흐흐. 이왕이면 안심으로 해주세요. 근데, 여기 당연히 투 플러스겠죠?”
하지만, 내가 다가간 곳에는 김치냉장고만이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통을 꺼내 배추김치를 포기째 꺼내 들었을 때였다.
“으헉! 뭐, 뭡니까! 김치는 왜? 아, 진짜! 이러 깁니까!”
한진석은 진심으로 실망했는지, 화난 목소리였다. 물론 연기일 터다. 그에 비해 류승렬은 연기가 아닌 듯했다.
“지금 이게 무슨……!”
화가 난 듯 살짝 붉어져 있는 그의 얼굴.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신현정 피디의 섬세한 컨트롤에 따라 카메라들이 일제히 그의 표정을 잡아내고 있었다. 하아, 신현정 피디가 프로 중의 프로라는 건 알겠고. 문제는 나인데……. 촬영 끝나고 한 대 맞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쯧,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라도 저런 반응일 테니. 그저 단순히 두 사람이 싸 온 도시락을 비벼 만든 것에 불과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알 수는 없을 터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음식이란 얘기. 그래서 류승렬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을 테고. 하지만, 이미 내가 집고 있는 식자재들은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다시 맛보고 싶어 했던, 그럼에도 그동안 재현해내지 못한 비빔밥을 말이다.
“으득.”
끙. 이까지 간다. 정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데. 그 증거로 류승렬은 뒤를 돌아보며 신현정 피디를 향해 강렬한, 아니 매서운 눈빛을 쏘아내는 중이었다. 흠, 신현정 피디도 잔인한 구석이 있네. 저걸 또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고 있다. 뭐냐고, 여기. 진짜 사바나라도 되는 거야? 속으로 혀를 차면서 선반으로 다가섰다. 그때쯤, 다시 시선을 돌려, 날 노려보던 류승렬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올리브유를 집었다가 내려놓고는, 마가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그의 표정이 일변하는가 싶더니 입에서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저건……!”
류승렬은 지금 자신이 왜 일어났는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의 얼굴은 이내 허무함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