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소고기뭇국 (2)2020.12.11.
과연 김진호 셰프의 말대로였다. 전반적인 요리 밑준비와 함께 국까지 끓이는 건……. 빡셌다. 그것도 엄청. 그에 비해 준석이 형은 전채요리인 죽을 끓이고 청포묵 무침과 함께 샐러드를 만드는데도 전혀 쫓기는 모습이 아니다. 고윤수 주방장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언제나처럼 메인 요리를 하고 있는 김진호 셰프야 말할 것도 없었고. 겉절이와 함께 나물을 무치고 몇 가지 밑반찬을 만드는 안성댁과 혜순이 누나도 능숙하기만 하다. 그런 주방 식구들의 페이스에 간신히 맞춰 채소를 다듬고 고등어를 손질하고 난 후, 소고기뭇국을 끓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기 오기 전에 몇 번이고 혼자서 주방을 책임진 적도 있는데, 참나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지. 손이 다 떨릴 지경이다. 후아, 정신 차려라 서진영!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호프집에서 일했을 땐 하루 종일 통닭만 80마리 튀긴 적도 있잖아? 그뿐인가? 일 년 전이었던가? 안산의 외곽 건설현장에 있던 함바집에선 매끼마다 150인분이나 되는 인부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사람이 바로 나다. 그땐 진짜 새벽부터 저녁까지 단 한시도 주방에서 벗어나 보지 않을 정도다. 그래, 이 정돈 까짓 별거 아니잖아? 기껏해야 음식 밑재료 다듬으면서 국 하나 더 끓이는 거뿐인데.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며 일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준석이 형이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걸 보면서 나 역시 슬쩍 웃어주었다.
“여기요, 형.”
“어, 그래. 여긴 이제 됐으니까, 얼른 국부터 끓여라.”
“알겠어요.”
오늘부로 전채 쪽으로 옮겨간 형도 나름 긴장하고 있을 텐데, 나부터 신경 써주는 눈치라 고맙기만 하다. 난 얼른 국을 끓이기 위해 서둘렀다. 그전에 확인해보니 시간은 충분했다. 주방 식구들이 출근하기 전에 진한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앗, 스앗, 스앗……. 선홍색의 소고기 양지를 써는 칼날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고기를 잘라내고 있었다.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린 고기를 스테인리스 밧드에 옮겨 담곤 조심스럽게 핏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뒤, 무와 대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한 사람 허벅지만 한 무가 단단한 게 맛있어 보인다. 겨울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무가 한창 맛있어지기 시작하는 계절. 어떻게 보면 오늘 끓여내는 소고기뭇국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선 ‘겨울’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놈의 무 참……. 꼬리가 길다. 흠, 가을무의 꼬리가 길면 겨울이 길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내주에 김장을 담는다고 했던가. 거침없는 칼질로 반 통으로 갈라보니 역시 심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걸 또 적당히 가른 후 나박나박 썰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마 위에 도톰한 무 조각들이 쌓였다. 하나 집어 먹어보니 아삭한 것이 단맛이 느껴진다. 역시 이 시기의 무는 맛있다. 좋아. 무는 이 정도면 됐고. 이제 파를 썰 타이밍이다. 파는 어슷 썰었다. 대파는 하얀 줄기 부분이 시원한 맛을 낸다는 것을 상기하며 혹시라도 심지가 딱딱하게 박힌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만. 대파란 놈은 꽃이 피기 시작하면 쫑대가 올라와서 심지가 생기고 나무줄기처럼 딱딱하게 씹히는 것도 있고 또 때론 오히려 속이 텅 빈 것도 있어서 좋은 말로라도 맛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당연하겠지만, 재벌집 주방에서 그런 파를 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송송송송. 파 써는 소리가 귓가로 빨려들 듯 들려온다. 대신 어느샌가 주방 곳곳에서 들리던 다른 이들의 움직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집중했다는 거겠지. 잘돼 가고 있는 거 같아 흐뭇해졌다. 이대로만 하자. 속으로 되뇌며 칼을 놀렸다. 시간으로 따지면 5분이나 지났을까, 도마 위엔 먹음직스럽게 썰린 파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파리 쪽도 적당히 섞여 있어 시각적으로나 식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디 보자, 냄비는 잘 달궈졌나? 손으로 살짝 튕기듯 물방울을 뿌리자……. 치이이익. 적당하네. 그렇게 달궈둔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넣고 달달 볶는다. 이내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붉기만 하던 고기가 서서히 짙은 갈색을 띠어가는 게 보였고. 너무 많이 익히면 육즙이 다 빠져나가니까, 겉만 익도록 볶는 건 당연한 얘기. 고기가 어느 정도 익었을 때 아까 썰어놓은 무를 넣는다. 촤아아악! 하며 수증기가 확 올라온다. 무 역시 끓일 거기 때문에 완전히 익힐 필요가 없다. 겉만 살짝 익을 정도면 충분하다. 이쯤 됐으면 이제 육수를 넣을 차례. 맹물로 끓여도 됐겠지만, 이왕이면 깊은 맛이 나도록 멸치와 다시마로 맛을 낸 육수를 넣은 후 뚜껑을 덮고 한참 동안 푹 끓인다. 무가 충분히 익어야 국물이 시원해지기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잠시 후 달각거리며 냄비 뚜껑이 들썩였다. 뚜껑을 열자, 국물이 부글거리며 넘치기 직전에 가라앉는 게 보인다. 이제부터 관건은 국물 위로 떠오른 거품을 걷어내는 것. 단지 지저분하다는 이유에서 그러는 건 아니고, 국물이 맑아질수록 텁텁한 맛을 없앨 수 있고 육즙과 함께 어우러진 무의 시원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물에서 고기 지방과 함께 잡다한 내용물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진 거품을 일일이 걷어냈다. 이정도면 됐나? 어느새 이마엔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혹시라도 다 끓인 국물에 땀이라도 빠뜨릴까 싶어서 한걸음 물러나며 토시로 이마의 땀들을 훔쳤다. 그러면서 여기와 처음 끓인 국을 바라본다. 흐뭇하다. 냄새도 좋고, 아마 맛도 좋을 것이다. 하기야 저 정도 육질의 소고기와 엄선된 무로 고아내듯 푹 끓인 국물이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여기까지 끓였으면 이제 다 된 거나 마찬가지. 국간장을 넣고 기본 간을 한 후 다진 마늘을 넣은 후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서 썰어놓은 파와 후추를 조금 뿌리면 되는데……. 따라라라라, 라라……. 흠, 이젠 아주 그냥 하루에 한 번씩 들려오는구나. 처량한 느낌이 살짝 드는 BGM과 함께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진짜 인간X극장의 아나운서가 아닐까 싶은 목소리다. -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때라, 한 그릇의 따스한 국은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몸을 데워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나운서 특유의 나긋나긋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정겹게만 들리는 건 뭘까. 지난번처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오늘처럼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은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었고. - 사실 강 회장은 요즘 들어 입맛이 떨어진 상태다. 뭘 먹어도 입이 기쁘질 않고 딱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다. 음, 슬슬 불안해지는데? 뭔가 밑밥 까는 듯한 느낌. 언제 멕일지 모른다는 의심에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 그래서 그런가 강 회장은 요새 들어 자꾸만 자극적인 음식이 당긴다. 하지만, 워낙 무뚝뚝한 성격인지라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주는 대로 먹는 중이다. 아, 그러셔? 그래서 어쩌라고? 난 말 없이 국자로 소고기뭇국을 저으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이제 와서 소고기뭇국을 끓이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지난번에 느닷없이 국밥 타령을 한 것처럼 갑자기 다른 음식을 만들라고 하면, 농담이 아니라 국을 솥단지째로 엎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음식을 달리 권할 거면 하기 전에 말하라고! 이미 반 이상, 아니 거의 다 만든 음식인 데다 이제 와서 바꾸기엔 다시 만들기엔 시간이 모자란다니까. 아니, 것보다도 레시피 자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니 김진호 셰프를 설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따라라라라, 라라……. - 그래도 강 회장은 워낙 무뚝뚝해서 그냥 주는 대로 먹는 중이다. 아씨, 그럼 오늘도 그냥 주는 대로 드시든가! 눈을 살짝 찡그리자, 저만치서 준석이 형이 내 표정을 보곤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레이션은 계속됐다. - 이러다가 강 회장이 입맛을 잃고 건강이라도 해치면 참 큰일이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였다.
“왜 그래? 뭐가 잘 안 돼?”
준석이 형이 다른 사람들 모르게 나직하게 물어왔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맛이 안 나?”
내 손에서 국자를 빼앗듯 낚아채 말릴 틈도 없이 국물을 떠먹는 준석이 형.
“캬하! 좋네.”
“괜찮아요?”
“이 자식, 이거. 그동안 많이 늘었네. 국물이 진짜 끝내준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국이라는 게 쉽다면 쉬운 요리지만, 레시피와는 별개로 맛을 내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법. 겉보기엔 덜렁거리는 듯 보이지만, 음식에 관해선 나름 철저한 준석이 형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나왔으면 일단 안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최종적으론 김진호 셰프의 마음에 들어야 하겠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김진호 셰프가 고개라도 내젓는다면, 오늘 아침엔 국 없이 식사가 나가는 수도 있었다. 그런 참사가 벌어지면 당연히 안 되는……. 따라라라, 라라……. 아, 나레이션만 아니면 진짜 마음이 가뿐할 텐데. 이놈의 나레이션이 자꾸만 초를 치고 있다. 하지만, 나레이션은 내가 인상을 구기든 말든 계속해서 얘기할 뿐이었다. -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메뉴를 바꾸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알긴 아네. 그럼 어쩌란 건데? - 나이 때문인지 입맛이 급격히 떨어진 강 회장에겐 시원한 국물도 좋지만, 지금은 오히려 얼큰한 국물이 좋을 것이다. 얼큰……이라. 설마?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고기뭇국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귀로, 아니 머릿속으로 나레이션이 말했다. - 고춧가루 팍팍 친 소고기뭇국은 강 회장의 입맛을 돋우는데 충분할 터다.
고, 고춧가루? 지금 고춧가루라고 한 거 맞아? 난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사이 BGM도 사라지고 나레이션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와, 진짜. 나레이션……. 사람 진짜 곤란하게 만드는 데는 뭐 있다니까. 미치겠네. 대체 날 더러 어쩌란 건지. 어느 주방이나 정해진 레시피라는 게 있다. 물론 때에 따라선 유동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메뉴에 대한 레시피는 주방을 책임지는 셰프의 몫이었고, 이곳에선 당연히 고윤수 주방장님의 레시피에 따라 음식이 만들어진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진호 셰프조차 레시피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거다. 그렇긴 한데……. 아, 어쩌지? 나레이션의 말대로라면, 강 회장은 지금 입맛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 자극적인 음식이 나이 든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성인들한테는 좋지 않다는 거야 상식이지만, 입맛이 없을 땐 오히려 그편이 나을 수도 있다. 떨어진 입맛을 찾을 수만 있다면, 때로는 자극도 필요하다는 얘기. 별미가 괜히 별미가 아닌 것이다. 조선의 왕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다는 영조가 늙어 입맛이 떨어졌을 때 고추장의 힘을 빌려 입맛을 되찾곤 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나레이션이 한 얘기는 꽤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대로 방치해서 계속해서 강 회장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하게 되는 게 더 안 좋다고나 할까. 그렇긴 한데, 왜 또 소고기뭇국일까. 강 회장이 국밥 쪽을 좋아하나? 아, 지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그러곤 김진호 셰프에게 다가가 쭈뼛거렸다.
“얀마, 어디 가?”
뒤에서 준석이 형이 속삭이듯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형한테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다른 주방에 비해선 넓다고 해도, 그래봐야 주방인지라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아 김진호 셰프 앞에 당도했다. 아씨, 말해도 되나?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김진호 셰프가 날 바라본다. ‘한창 바쁜데 무슨 일이지?’하는 눈빛으로. 머뭇거리던 나는 한차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얘기했다. 이젠 될 대로 되란 심정이었다.
“고, 고춧가루 좀 넣어도 될까요?”
순간 주방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만 하는 김진호 셰프. 뜨악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는 준석이 형.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차는 안성댁까지. 심지어 순하디순한 혜순이 누나까지 잔뜩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망했다. 겨우 오늘에서야 인정받고 국자를 잡았는데……. 이러다가 국자로 두드려 맞는 거 아닌지 몰라. 하아, 돌겠네 진짜. 김진호 셰프가 아무 말도 없는 게 더 불안하다. 하기야 어이없기도 할 테지. 군대로 치면 이제 막 전입해 온 신병이 총기가 마음에 안 드니까 다른 총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진짜 그랬다간 하루 종일 군장 메고 연병장을 도는 건 약과고 자칫하면 군기교육대에 갈 상황이란 거다. 난 속으로 어리석은 짓을 해버렸단 후회 반, 날 꼬드겨 지옥으로 밀어 넣은 나레이션을 하는 욕 반. 완전 엉망이 돼버린 머리통을 쥐어뜯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을 때 마침내 김진호 셰프가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