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소고기뭇국 (1)2020.12.09.
“여어, 브라더.”
숙소 앞 길가에 있는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강형식이 손을 흔들고 있다. 잘 생긴 데다가 팔다리도 길어서 그런가, 별거 아닌 행동임에도 뭔가 있어 보인다. 음, 왠지 억울한 느낌인데.
“전부터 궁금하던 건데, 담배를 꼬나물고서도 용케 발음이 새지 않는 비결이 뭐냐?”
괜스레 빈정이 상해서 살짝 비꼬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녀석은 1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호쾌하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글쎄, 그냥 되던데?”
아아, 그러셔? 쳇. 녀석의 옆, 벤치의 빈자리에 엉덩이를 던지듯 앉았다. 그러자 강형식이 맥주를 내민다.
“뭐야? 지난번에 마시던 게 아닌데?”
“아아, 바이콧.”
염병. 재벌 3세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뭐, 어떤 면에서 기특하기도 하다만. 근데 이거 병따개도 없이 어쩌라고?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녀석이 일회용 라이터를 건네준다. 그걸 받아 맥주를 딴 후 일단 한 모금 마셨다.
“후아!”
목 넘김이 나쁘지 않다. 농담이 아니라 피곤이 싹 가시는 느낌이랄까.
“CF 찍냐? 맥주 엄청 맛있게 마시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살 것 같다.”
“참네. 누가 들으면 죽다 살아난 줄 알겠다.”
“오늘 장난 아니었거든.”
“뭔진 모르겠지만, 그 기분만은 알 것 같네.”
녀석도 맥주를 병째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어느새 껐는지 담배는 사라져 있었고.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확실히 이하연이랑은 다르네. 남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성격이 그런 건지.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은 없다만. 난 강형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쩔까? 지금 바로 김진숙 회장의 명함을 줘? 아니면 상황을 봐가면서 그에게 필요한 시점에서…… 아아, 이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꼭 내가 판단할 필요가 있을까? 나레이션이 있잖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쭈욱 고민해오던 것이었고, 이렇다 할 답을 내지 못하던 문제이기도 했다. 왜 하필 나인가? 아니 그전에 나레이션은 왜 들려오는 걸까? 어떻게 보면 진짜 뜬금없잖아?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한, 정확히 얘기하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듣게 된 나레이션. 그것도 오로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 아, 이젠 BGM만 들려도 나레이션을 기대하게 되는 이 뭣 같은 상황.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지금의 상황을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치자면,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저 저 녀석 아닌가. 굳이 이런저런 생각할 것 없이 애초에 나레이션이 강형식을 소개할 때 주인공이라고 말했으니까. 이점에 대해선 딱히 반론할 여지도 없고, 불만도 없다. 다만, 저 녀석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왜 나를 통해서 찍고 앉았냐는 거다. 물론 그 덕분에 강형식과 친해지기도 했고, 이하연과의 인연을 맺게 되고 또 오늘만 해도 신현정에게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놈의 국밥 타령 덕에 결과적으로 주방장님께 눈도장을 찍기도 했으니까. 그렇긴 한데, 과연 이 모든 게 순수하게 날 위해서였나? 당연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난 순진하지 않다. 전부, 저 녀석을 돕기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이용당하는 것인가? 확실히 이 질문에 대해선 아니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결과적으로는 강형식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맞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날 강형식을 돕기 위한 도구로써 선택했다면, 나 역시도 나레이션을 강형식은 말할 것도 없고 더불어 나까지 함께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면 그만이란 것이 내가 내린 판단이었다.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란 건데…….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강형식이 주인공이란 걸 전제조건으로 얘기하자면, 명함을 건네는 시기를 굳이 내가 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정말 녀석에게 명함이 필요하게 된다면 나레이션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때가 되어서도 내가 안 주겠다고 버티면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 종알댈 거다. 아마 이런 식이 아닐까? ‘강형식은 지금 유통 쪽 라인을 뚫는 일이 시급하다. 한데, 다행히도 C 마트 김진숙 회장의 명함을 서진영이 가지고 있다.’ 따위로 떠들어대겠지.
“뭐야? 왜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건데? 어디 아픈 거냐? 아니면……. 피곤해서 그래?”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강형식의 음성이 귀를 파고든다. 아, 지금 녀석과 얘기하던 중이었지. 난 강형식을 다시 한차례 바라보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너 혹시…….”
“……?”
“김진숙 회장이라고 알아?”
“그야 알……. 응? 너 무슨 일 있냐?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건데?”
“일은 무슨. 어제 요리 문제로 잠시 뵈었을 뿐이야.”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근데, 너 그분하고 친해?”
“전혀. 나도 오가며 몇 번 뵌 적만 있지, 딱히 친분이 있거나 하진 않아. 듣기론 성격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너도 알잖냐? 내 소문이 어떤지.”
하긴, 재계에서 나름 개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데 김진숙 회장의 눈에 좋게 보였을 리 없지. 그렇다면 역시……. 지금 명함을 주는 건 무리겠군.
“쯧, 너도 참 힘들게 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제껏 본인 스스로 엉망으로 꼬아놓은 인생을 원상 복구하려고 하니 쉬울 턱이 있나.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뭐 어쩌겠어? 다 내 탓인걸.”
그래도 남 탓하지 않고, 그 짐들을 자신이 전부 짊어지려고 하는 건 기특하네.
“그래서, 지금 날 타박하려고 보자고 한 건 아닐 테고. 뭔데?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어쩐다? 명함을 지금 주지 않는 게 낫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있다.
“형식아.”
“응?”
“네 사촌 형 말이야.”
“사촌…… 형?”
“그래, 김윤식 실장.”
“……윤식이 형이 왜?”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 때문이었을까. 강형식이 눈가를 좁히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말했다. 나름 진지하게.
“조심해라.”
“…….”
날 바라보는 강형식.
그런 채로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그가 말했다.
“알았다.”
응? 이유라도 물을 줄 알았더니만. 속으로 증거 하나 없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나로서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다냐?”
황당해서 물어보니, 녀석이 픽하고 웃는다.
“그럼 뭐가 있겠냐?”
“……아니, 뭐. 알아들었으면 됐고.”
“그래서, 나한테 해줄 얘긴 그게 다냐?”
“그,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쉬어라.”
이미 바닥을 드러낸 맥주병을 벤치 옆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며 녀석이 일어났다.
“너도 피곤한 하루였던 거 같은데, 이만 들어가라.”
나 역시 맥주병을 쓰레기통에 넣곤 몸을 일으키자, 강형식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랑 아침 먹었는데…….”
참, 그런 얘기도 있었지. 자식, 그냥 말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랬는데?”
“쯧, 체하는 줄 알았다.”
“용하네. 나 같으면 숟가락 들기 전부터 숨이 막혔을 거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니고. 암튼 막상 해보니까 할 만하더라.”
“그럼?”
씨익하고 웃으며 녀석이 돌아서고 있다. 그러곤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보이곤 그대로 멀어져간다. 자식하곤. 쑥스러운 건가? 저러는 게 녀석답긴 하다만. 피식 웃고는 나 역시 돌아서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사람 몸이란 참 신기하다. 이틀 연짱 혹사를 시켜서 그런지 정말 시체처럼 쓰러져 잤더랬는데, 다음날 해가 뜨기 전도 눈이 떠졌다. 몇 신가 싶어서 머리맡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해보곤 쓰게 웃었다. 새벽 5시는 넘었을 줄 알았더니, 4시가 채 안 됐다. 한 시간 정도는 더 자도 될 거 같긴 한데.
“큭!”
아직 피곤이 안 풀렸는지 몸이 무겁고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이런데도 침대에서 일어나지는 건 또 뭘까. 이래서 습관이란 게 무섭다는 거지. 하도 이 시간에 일어나다 보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달까.
“후, 얼른 가서 머랭이나 쳐야지.”
하루 쉬었다고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든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꿈속에서 주방에 갇힌 채 죽어라 머랭을 쳤던 것도 같고. 괜스레 꿀꿀해져서 혀를 찬 후 화장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머랭을 쳐야 하는 건지. 뭐, 꿈에 나올 정도로 쳐대다 보니 이젠 눈감고도 칠 정도가 됐으니 그닥 손해는 아니다만. 아무튼, 아직 김진호 셰프가 머랭을 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게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한편으론 좀 더 다른 걸 배우고 싶은 욕심도 든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금세 털어버리고 샤워기를 틀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런 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서진영.”
출근한 후 한창 머랭을 치고 있을 때, 주방 문을 열고 들어온 김진호 셰프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출근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인 새벽 6시경이었다. 나야 늘 이 시간에 출근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아직 준석이 형이나 안성댁, 혜순이 누나는 안 나온 상황. 갑작스럽게 들려온 김진호 셰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오셨어요.”
뒤늦게 반응해 인사를 하자, 김진호 셰프는 그 특유의 묵직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늘부터 아침 국은 네가 끓여라.”
처음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또 머랭 가지고 뭐라고 그러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국을 끓이라니. 어라? 국? 지금 국이라고 하셨나?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분명 ‘오늘부터’라고 하신 게 맞지? 그 얘긴 곧, 앞으로도 쭈욱 날 더러 국을 끓이라는 얘기? 아침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얘기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주방 한쪽에서 검은색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있는 김진호 셰프의 등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 나름대로 감격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갑자기 머릿속에선 생각이 많아진다. 국은 여태 준석이 형이 끓여왔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가 형을 밀어낸 꼴이 되고 만다. 아씨, 어쩌지? 곧 출근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준석이 형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걱정돼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을 때였다.
“표정이 왜 그러지?”
어느새 복장을 단정히 한 김진호 셰프가 날 보며 묻고 있었다.
“예? 그, 그게…….”
“준석이 때문에 그러는 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김진호 셰프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거라면 걱정 마라. 네가 아니라도 국자 놓을 때 됐으니까, 그 녀석도.”
“……아! 알겠습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뭐야? 이거 말하자면 계단식 승급? 다행이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갑자기 북받쳤다. 어? 그럼 나……. 이제부턴 제대로 요리할 수 있는 건가? 주방이란 곳이 대체로 다섯 평 남짓이고, 넓어 봐야 스무 평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도 체계란 게 있다. 물론 그것도 몇 명이 일하고, 또 어떤 음식을 주로 하느냐에 따라 갈리긴 하지만, 그래도 비슷비슷한 것도 사실이다. 처음 발을 들일 땐 불은커녕 칼도 못 잡고 온종일 재료 손질만 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고, 그렇게 일 년 남짓 채소에서 흙을 씻어내거나 식기를 닦느라 손에 습진이 생길 무렵 비로소 칼을 잡게 된다. 그때부터 칼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곁눈질로 선배들도 엿보고 집에 가서까지 빠듯한 월급으로 산 과일 등을 상자째로 깎으며 손을 익히는 것이다. 그렇게 칼이 손에 익고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경쾌하게 들릴 무렵 간단한 전채요리나 국으로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나처럼 유학은커녕 요리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사람 얘기긴 하지만. 어쨌든, 감동이다. 아, 당연히 처음이라서가 아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나도 주방장 소리를 듣기도 하니까. 요리사 한두 명이 주방을 이끌어가는 작은 식당이긴 해도. 그렇지만, 여기 와선 처음이었다. 아니, 이렇게 빨리 국자를 쥘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물론 가끔씩 주방이 바쁠 때 국도 끓이고, 디저트도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메인요리에도 손을 대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셰프의 입으로 직접 듣는 지금이랑은 다르다는 거다. 그렇긴 한데……. 그럼 밑준비는 누가 하는 거지? 혹시 신입이라도 들어오는 건가? 감격한 것도 잠시. 조금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뭐하나? 설마 오늘 아침 메뉴 모르는 건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난 방금까지 열심히 치고 있던 머랭 쪽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김진호 셰프가 무감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머랭은 그 정도면 됐으니까, 메뉴 준비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한 사람 더 들이기 전까진 밑준비도 그대로 네가 해야 하니까 일이 배는 힘들 거다.”
괜찮다. 몸이 힘든 거?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언제는 편한 적이 있었나? 것보다는 지금 눈앞에 주어진 기회가 더 소중할 따름이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크게 나온 대답에 내가 흠칫했지만, 김진호 셰프는 별 신경 안 쓴다는 듯 그저 가볍게 한차례 고개만 끄덕이곤 돌아서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