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만들 줄 아나? (4)2020.11.08.
제누와즈. 말이 거창하지, 그냥 케이크의 기초가 되는 시트를 말할 뿐이다.
한마디로 밀가루와 설탕, 버터를 넣어 만든 스펀지케이크다. 여기에 바닐라를 넣느냐 초코를 넣느냐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물론 이뿐만 아니라 원하는 건 뭐든 넣을 수 있다. 아무튼, 내가 비록 제빵을 특기로 하진 않고 있지만, 그래도 한식은 말할 것도 없고 양식과 일식 그리고 중식까지 아우르는 전천후 요리사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 정도도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도 어지간한 요리사치고 제누와즈를 만들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당연히 대답은…….
“만들 수 있습니다.”
예스였다. 대답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아니 웬 아침부터 케이크람? 토스트라든가 크루아상이라면 또 몰라도. 하다못해 컵케이크 정도면 이해라도 되지. 아, 혹시 누구 생일인가? 그럼 강 회장 성격에 케이크보단 미역국을 선호할 텐데. 집안에 열 살 미만의 아이가 있다면 또 몰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김진호 셰프가 말했다.
“해봐.”
어, 지금 만들라고 하신 거…… 맞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눈빛으로 물었다. 진짜 만드냐고. 어제저녁 퇴근 전 확인한 오늘 아침 메뉴에도 케이크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크림에 과일 얹을까요?”
하고 많은 케이크 중에 굳이 생크림 케이크를 언급한 것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국인들 입맛에 잘 맞는 케이크가 바로 생크림 케이크였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로 만들 생각으로 물은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말 만드냐는 질문을 에둘러 한 것이었을 뿐. 아무리 아침 식사 준비가 간단하다곤 해도 케이크까지 만들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김진호 셰프는 얄짤 없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만들어봐.”
예상 밖의 얘기에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나오시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어쩌면 날 시험하시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하긴 시험 혹은 내게 뭔가 알려주시려는 거라면, 바쁜 점심때나 저녁때보단 한결 여유가 있는 아침 시간에 하는 게 낫긴 하겠지. 난 머릿속으로 어젯밤 준석이 형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제누와즈를 만들 준비를 서둘렀다. 근데, 오늘 잘하면 뭔가 또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건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주방 한쪽에서 달걀과 백설탕, 물엿 그리고 박력분을 가져오고 냉장고에서 무염 버터와 우유를 꺼내며 물었다.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요?”
“마음대로.”
이로써 확실해졌다. 강 회장댁 가족 중에 누군가가 오늘 생일을 맞이한 거라면 원형 팬의 크기는 못해도 3호는 돼야 할 테니까. 원체 인원수가 많은 대가족이다 보니, 케이크 지름이 21센티는 돼야 누구 한 사람 빼놓지 않고 맛이라도 보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마음대로 하라고 하신다. 그 얘긴 곧 누구의 생일도 아니란 말일 터. 그럼 굳이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작게 만들면 오히려 양 조절이 힘들 테니, 2호 정도가 적당하지 싶었다. 오븐 용기들이 쌓여있는 선반에서 내부지름 15센티짜리 원형 팬을 꺼내곤 재료 계량에 들어갔다. 박력분 100g, 계란 5개, 설탕 100g, 버터 20g, 우유 20g. 거기에 바닐라 오일 2g을 준비했다. 그러곤 박력분을 체쳐두었다. 오븐 예열도 해두었고. 이제 머랭을 칠 차례였다. 큰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다가 스테인리스 믹싱볼에 계란과 설탕, 바닐라 오일을 넣은 후 천천히 데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온도에 신경을 써야 한다. 40도 전후가 딱 적당한데, 이정도가 돼야 표면장력이 약해지면서 공기 포집이 잘되고 안정적인 거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달걀 등이 적당히 데워지자, 얼른 꺼내서 핸드믹서를 들이밀었다. 중속에서 고속으로 저어가며 머랭을 만들면 되는……. 그때였다.
“누가 핸드믹서를 쓰라고 했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핸드믹서를 안 쓰면 어쩌란 거지? 설마? 난 황당한 눈빛이 되어 김진호 셰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언제 왔는지 준석이 형은 물론이고 안성댁이 와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윤수 주방장까지 한쪽에 서서 뒷짐을 진 채 보고 계셨다. 절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주방 식구들이 일은 안 하고 날 바라보는 이 상황……. 뭐지? 방금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오며 부담이 백 배쯤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 탓에 어깨가 결리며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제길. 긴장 때문에 몸이 굳는 모양인데…….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어떻게든 긴장을 완화 시키려 애쓰고 있을 때였다.
“준석아, 휘퍼 가져다줘라.”
“예, 셰프!”
준석이 형이 잽싸게 움직여 가져다준 거품기를 받아들곤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아, 미치겠네. 오랜만인데, 잘할 수 있을까? 설마하니 머랭을 직접 손으로 치게 될 줄은 몰랐네. 소매부터 걷고 스테인리스 믹싱볼을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휘퍼 그립을 가볍게 쥐었고. 탁! 탁! 탁! 탁……!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머랭을 치기 시작했다. 말할 것도 없이 핸드믹서와는 달리 거품이 좀처럼 올라오질 않는다. 돌겠네, 진짜! 이거 왜 안 올라오는 거야? 조급한 마음에 속도를 높이려고 했을 때, 한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 아새끼, 뭐 그리 급하네? 공기가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힘으로 돌린다고 거품이 일어나갔어?”
움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리며 제 속도를 되찾았다. 맞다. 고윤수 주방장님 말씀대로 정확한 수순으로 휘핑을 하지 않으면 거품은 올라오지 않을 테다. 요리라는 게 어찌 보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만 수순에서 어긋나도 망치기 일쑤니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곤 그립을 꽉 움켜잡았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다가 그립을 쥔 손에 들어간 힘이 적당하다 싶을 정도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휘퍼를 내저었다. 탁……탁……탁……탁……! 후우! 손목이 풀려서 그런가, 스냅이 느껴진다. 덕분에 머랭도 잘되어가는 느낌……. 오오,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속으로 만족해하면서 몰두했다. 탁……탁……탁……탁탁탁탁! 점차 빨라지는 손목 스냅. 그와 함께 휘퍼 역시 힘차게 돌아가며 스테인리스 믹싱볼을 때려대고 있었다. 거품이 거칠게 생겨나며 머랭이 일어나는 게 눈에 보이자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한껏 올라왔던 거품이 더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휘퍼를 쳐대면 쳐댈수록 오히려 거품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어, 이거 왜 이래? 입술을 깨물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손목은 굳어지고, 오히려 휘핑은 잘되지 않고 있었…….
“그만.”
옆에서 들려온 김진호 셰프의 목소리에도 난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준석이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동시에 내 손에서 휘퍼를 빼앗듯 빼내 갔고. 힘없이 휘퍼를 내주며 돌아보니, 김진호 셰프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안성댁은 나물을 무치려는지 채소들을 그러모아 볼에 담고 있었고, 혜순이 누나만이 힐끔거리며 날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고윤수 주방장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돌아서고 계셨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속이 답답해지며 뭔가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기회가 없다뿐이지, 누군가 내게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그만큼 노력했고, 실력도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멍하니 내가 치다 만 머랭을 쳐다보고 있을 때, 김진호 셰프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진영. 내일부터 한 시간씩 일찍 나와서 머랭 쳐.”
“……!”
난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이미 등을 돌린 채 주방 안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김진호 셰프를. *** 두 사람은 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서 마주 앉아 있었다.
“기래, 뭐가 좀 보이네?”
고윤수 주방장의 질문에 김진호 셰프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로선…… 후우, 잘 모르겠습니다.”
김진호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고윤수 주방장이 서진영에게 무얼 보고 있는지. 또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지. 아니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고윤수 주방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거주 문제도 그렇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숙소에서 머무르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사실상 스승처럼 믿고 따르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지만, 내일모레면 칠순인데도 여전히 일밖에 모르는 고윤수 주방장이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할 때가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과 같은 경우, 고윤수 주방장은 득도한 고승처럼 숙제 아닌 숙제를 내주곤 언제까지고 답을 주지 않는다.
“안 보이면 하는 수 없는 기지.”
속 시원히 말해주면 좋으련만……. 괜스레 서진영이 괘씸해졌다. 그 탓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마디 하고 말았다.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집안이 받쳐주지도 않습니다. 진영이가 착실한 성격이란 건 알지만, 그것만으론 성공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나마도 많이 참은 거다. 아무리 고윤수 주방장이 싸고돌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해도 듣기에 따라선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이다. 당사자 문제가 아니라지만, 고윤수 주방장으로선 화를 낼 수도 있는 노릇. 새로 산 장난감을 보고 비웃는 거와 비슷하달까. 물론 사람을 두고 장난감 운운하는 악취미는 김진호에게도 없었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걸 알면서 이처럼 도발 아닌 도발을 하는 까닭은 어쩌면 고윤수 주방장이 화라도 내주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윤수 주방장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왜? 내래 볼 수 있는 걸 니래 못 보니까 심사가 배배 꼬이네?”
“…….”
“쯧쯧. 눈으로만 보려고 하니 기러디. 꼭 봐야겠다면 말이디, 여기! 여기로 보라우.”
가슴을 가볍게 치며 웃고 있는 고윤수 주방장을 김진호는 말없이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의미를 몰라 고윤수 주방장이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김진호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내일 녀석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응?”
고윤수 주방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생각 밖이어서.
“니랑 나랑 다 빠지고, 서진영이까지 없으면 주방이 돌아가갔네?”
“토요일이라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파티에는 강 회장님께서도 참석하실 테고요. 그리고 대부분의 식구들도 다들 외출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준석이 실력이면 점심때까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저녁은 돌아와서 제가 보면 되고요.”
잠시 김진호를 바라보던 고윤수 주방이 웃어 보였다.
“기럼 그렇게 하라우.”
그러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아, 진짜 돌겠네.”
벌써 사흘째다. 이제 계란만 봐도 토할 것 같다. 후, 이거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냐? 그제 분명히 머랭을 성공했더랬다. 그런데도 김진호 셰프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해서, 이제 머랭은 그만 쳐도 되냐고 물었더니 감정이라곤 1도 안 들어간 말투로 계속 치란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치냐고? 그거라도 얘기해주면 덧나나? 고윤수 주방장님께서 좀 나서서 한마디 해주시면 좋겠는데. 웬걸? 소리 없이 웃기만 하실 뿐. 뿐만 아니라 요 며칠은 뭐하나 가르쳐주지도 않으신다.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어이, 서진영이! 머랭 치냐?”
해가 뜰 무렵 준석이 형이 주방 문을 열고 들어오며 건들건들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것도 환하게 웃는 낯으로.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지? 와나, 진짜 형이고 뭐고 확 들이받을까 보다.
“아, 씨. 저 놀리는 거죠?”
“응.”
헐. 황당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휘퍼를 내젓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날 낄낄거리며 보던 형은 가방에서 보온 물통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준석이 형이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형수님이 보내셨어요?”
“자식이.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그래, 인마. 네 형수가 요즘 너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주방 나온다는 얘기 듣더니 어디 가서 약 지어 왔더라.”
“헤에. 역시 형수님 밖에……. 앗! 지금 건드리면 어떡해요. 거, 거품 죽……었네. 하아, 미친다 진짜.”
“다시 치면 되지, 뭘 또 그렇게 풀이 죽어선…….”
“아 뭐에요. 한참 거품 올라오고 있는데, 머리를 치고 그래.”
“아따 사내자식이 말 많네.”
준석이 형은 키득거리면서도 보온 물통을 열어 잔에 부은 뒤 내밀었다.
“녹용이랑 이런저런 약재를 넣었다던데. 뭐, 들어도 난 도통 모르겠고. 아무튼, 식전에 먹으랜다. 아, 일어나자마자 한잔하고.”
어차피 망한 거, 잠시 쉬었다가 하기로 마음먹곤 치다 만 머랭을 멀찍이 밀어버렸다. 그러곤 형이 내미는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는데…….
“햐. 냄새 좋다.”
“그래? 난 쓰던데?”
“참네. 애예요? 한약을 맛으로 먹게? 그리고 제가 약향이 좋다고 했지, 맛있다고 했나요?”
“크크큭. 그게 다 형수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노라.”
형을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이 멘다. 이유? 별다른 거 없었다. 그저 고마워서. 형수님도, 형도…….
“……잘 먹겠다고 전해주세요.”
“어쭈? 말로 때우려고?”
“월급 타면 내복 사주면 되잖아요, 내복!”
“염병! 지금이 쌍팔년도냐? 내복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아, 싫으면 말구요.”
“응? 내 꺼도 사주려고?”
“싫다면서요?”
“빨간 내복은 싫다. 살 거면 검은색. 응응. 남자는 역시 블랙이지.”
“예예. 남자는 블랙이죠.”
그놈의 머랭을 생각하면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생활이 불만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나저나 월급 타면 선물 사줄 사람들이 많네. 생애 첫 월급도 아닌데……. 그래도 상관없잖아? 솔직히 내가 그동안 받은 게 어딘데. 지금도 봐라. 혹시 나 혼자 풀 죽어 있을까 봐서, 꼭두새벽부터 나와서는 후배 앞에서 온갖 재롱은 다 부리고 있는 형을. 그런 형을 보다가 픽하고 웃고는 형수님이 보내주신 약을 마셨다.
“아, 근데 너 내일 시간 되냐?”
“예? 내일요?”
“일요일이잖아. 어차피 하루 종일 퍼질러 잠만 잘 텐데, 내일 우리 집에 와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 어때?”
“미안해요, 형. 내일 선약이 있어서 힘들 거 같아요.”
“어? 그래?”
뜻밖이었던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멋쩍게 웃는다.
“나야 좋지. 간만에 와이프랑 데이트나 해야겠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을 흘리다가 뒤늦게 떠올랐는지 물었다.
“혹시 강형식…… 만나는 거냐?”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무슨 생각인지 다 보인달까. 형식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형으로서는 녀석이 그저 재벌집 망나니쯤으로 보이겠지.
“아뇨. 다른 사람 만나요.”
“그러냐?”
한시름 놨다는 표정. 강형식이 생각보다 꽤 괜찮은 친구란 걸 말해줄까 하다가 관뒀다.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 누가 말해준다고 한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안 움직이면 말짱 꽝이란 거지. 어차피 형도 할 일을 하려는지 주방 안쪽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고. 에휴. 모르겠다. 머랭이나 다시 쳐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응? 아침부터 누가? 난 의아해하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다. 또 보험 들라는 거 아냐?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아직 일곱 시도 안 됐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모르겠다. 일단 받고 보자.
“여보세요?”
수화기 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서진영. 머랭 치고 있었나?
“아……! 그,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게 얼어서 더듬거렸을 때, 수화기 저편에서 김진호 셰프가 말했다.
- 그건 놔두고, 외출 준비해라. 오늘 주방은 준석이가 보고, 넌 나랑 같이 주방장님 모시고 출장 간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 30분 후에 차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
평소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템포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 김진호 셰프였다. 늘 그렇듯, 차갑다는 인상보다는 여유롭다는 느낌이 더 많이 묻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멋지다고 느껴질 뿐. 그렇다곤 해도 오늘 출장을 갈 거면 좀 일찍 좀 말씀해주실 일이지. 어젯밤에라도 말씀해주셨으면……. 아, 갑자기 결정 난 걸 수도 있겠구나. 근데 어디로 출장 가는 거지? 그거라도 좀 얘기해주시면 좋았을 텐데. 하긴, 주방장님이랑 함께 가는 건데 내가 먼저 안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갑작스레 출장이 결정된 건 어디까지나 나 한사람일 뿐. 고윤수 주방장님이야 원래부터 계획을 잡아놓으셨던 일정일 터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고윤수 주방장님이 어련히 말씀해주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난 머랭을 치느라 늘어놓았던 조리기구들과 식자재를 서둘러 치우곤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그러곤 발바닥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뛰어서 주방을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얀마! 갑자기 왜 그래? 응? 너 어디 가는데?”
문을 열면서 준석이 형한테 외쳤다.
“출장이요!”
뒤에서 형이 뭐라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주방 뒷정리를 하느라 5분쯤 잡아먹었으니, 이제 25분 남은 셈. 여기서 숙소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시간이 많다고 볼 수는 없다. 불 앞에 있다 보니 흘러내릴 수밖에 없는 땀들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후 고윤수 주방장님을 모시러 가야 하니까.
“아우, 왜 이렇게 먼 거야?”
평소에는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던 거리가 오늘따라 더럽게 멀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