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251화 (251/265)

제251화

환한 달빛이 전장을 지배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버쿠젠의 기사들은 전율에 떨었다.

“탄생했다.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그 고귀한 경지를 이룬 자는 놀랍게도 새로운 레버쿠젠의 주인.

엘린 레버쿠젠이었다.

소드마스터를 잃어버린 칼의 가문에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탄생한 것이다.

그 사실에 레버쿠젠 기사들은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홀란 레버쿠젠. 위대한 기사의 영혼께서 축복을 내려주신 것이다.”

한 평생 가문을 위해 힘써온 한 칼잡이의 이름을 떠올린 그들은 곧 검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한계에 달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소리쳤다.

“전군은 들어라-!”

“…!”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탄생했다! 그 이름은 엘린 레버쿠젠!”

기사들의 외침에 성벽 위에서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던 병사들이 놀랬다.

“뭐? 가주님께서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달성하셨다고?”

그리고 그 놀람은 곧 희망이 되었다.

이 불리한 전세를 어쩌면 뒤집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그 간신히 피어오른 작은 불씨를, 기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칼잡이가 외로이 서 있다! 우리 레버쿠젠이 그 칼잡이를 지원해야 한다!”

이 말과 함께 기사들이 말의 고삐를 휘어잡았다.

휘이잉-!

한계에 달한 말들이 거칠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 다시 한 번 달리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질주 속에서 기사들도 남아있는 힘을 모조리 쏟아붓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기사들의 칼질 한 번에 악마들의 목 수십 개가 달아났다.

그 선전 속에서 레버쿠젠의 수비대도 힘을 냈다.

“기사들이 다시 전황을 어지럽혀주고 있다!”

“저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빼앗긴 성벽을 되찾아야 한다!”

“몸을 던져서라도 악마들을 밀어내라! 우리의 보금자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거친 함성과 함께 수비대가 다시 악마들과 격돌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수비대의 기세에 악마들이 당황해 비명을 내질렀다.

[끼, 끼엑!?]

거의 다죽어가는 먹잇감의 마지막 발악은 생각보다 거칠고 드세었다.

그 탓에 악마들의 기세가 한 풀 꺽이며 진영 자체가 한 발자국 밀려났을 때였다.

거대한 마나의 폭풍에 휩싸여 있던 엘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존재가 지상으로 강림했다.

[…무슨 기운인가 하였더니 너로구나 용의 기사야.]

드래곤을 잡아먹는다 알려진 괴물.

라 하르칸이었다.

[기어코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무기를 너조차도 가지게 되었구나. 내게 가슴이 파훼쳐진 그 드래곤의 심장을 먹은 것이냐?]

엘린이 대답하는 대신 검을 들었다.

그 순간 라 하르칸의 세 개의 눈동자가 치켜떠졌다.

파악-!

날카로운 무언가가 쇄도하며, 라 하르칸의 비늘에 금이 갔다.

조금 전까지 뒤엉켜 싸우던 드래곤들조차 어찌하지 못한 비늘이 부서진 것이다.

그 사실에 라 하르칸이 헛웃음을 터트린 그 때, 엘린이 입을 열었다.

“먹은 게 아니라 받은 것이다.”

이 말과 함께 엘린의 몸을 감싼 마나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만 받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은총은 이 전장을 뒤덮을 것이다.”

엘린의 선언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부풀어 오르던 마나가 폭발했다.

그 순간 레버쿠젠 기사들이 눈을 치켜떴다.

“…!”

알 수 없는 기운이 어느사이엔가 기사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탓에 기사들이 당황했지만 곧 이성을 찾고서 중얼거렸다.

'이건… 가주님의 마나?’

놀랍게도 그들의 몸을 감싼 기운의 정체는 엘린 레버쿠젠.

그들의 주인으로 모시는 칼잡이의 마나였다.

여태 수많은 칼잡이들에 관한 비화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마나를 전달하는 것은 그들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허나 그들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나쁘지 않군. 힘이 넘쳐난다.”

엘린이 건네준 마나가 한계에 달한 육체를 보조한다.

그 덕에 기사들은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에 도달했다.

“지금 이 기적이 어떤 이유로 비롯되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다한다.”

기사들이 검을 치켜든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악마들이 두 눈을 부릅 뜨고 물러섰다.

[끼엑?]

두려움을 모르는 악마들이지만 그들의 생존본능이 경고했다.

지금 눈앞의 인간들은 위험하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 경고에도 악마들은 쉬이 물러설 수 없었다.

실험에 의한 탄생한 그들의 머리에는 [도망]이라는 명령어가 기입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악마들은 되려 괴성을 지르며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무모한 돌진을 기사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쉬익-!

검이 움직인 순간 악마들이 반토막났다.

그들의 피와 살점을 흠뻑 뒤집어 쓴 기사들이 광기에 차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전투다! 악마들의 목을 베라! 레버쿠젠의 용들이여!”

그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돌격이 시작되고 악마들이 우후죽순 쓰러져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힘을 내어 소리쳤다.

“기사들이 지원한다! 모두 악마들을 몰아붙여라!”

레버쿠젠의 수비대가 창을 꼬나쥐었다.

창이 없으면 방패를 들었다.

방패마저 없으면 몸으로 들이밀었다.

그 무모한 돌진에 악마들이 당황하며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물러섬은 곧 전장의 흐름을 바꾸었다.

악마가 아닌 인간의 편으로.

그 속에서 엘린이 검을 살며시 부여잡았다.

휘잉…

낮은 울림이 검끝에서 울려퍼진다.

그 기분좋은 떨림에 엘린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가장 위험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몸상태며 기분이며 최고조로 올라가 있었다.

검을 잡은 뒤로 이런 느낌을 한번도 받아본적 없던 그녀는 그 쾌락을 마다하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저 괴물을 죽일 수 있다.’

확신에 가까운 예지.

눈빛을 번뜩인 엘린이 라 하르칸을 향해 뛰쳐오르려 할 때였다.

하늘이 갈라지며 무언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물러서니 피투성이가 된 여섯 마리의 드래곤이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속삭였다.

[…앞장서라 용의 기사야. 우리들이 너와 함께 하겠다.]

눈을 치켜든 엘린이 잠시 넋을 잃었다.

그리고 뒤늦은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발목을 잡으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건방지구나. 하지만 너이기에 용서한다. 자 내 등뒤에 올라타라.]

붉은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자세를 낮추었다.

그 순간 순식간에 허공에 떠오른 드래곤들이 라 하르칸을 막아섰다.

그 속에서 마침내 라 하르칸과 똑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마주치게 된 엘린이 중얼거렸다.

“마지막이다. 이 괴물아.”

이 말과 함께 엘린이 달빛을 폭발시켰다.

“너를 죽이고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살아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거라.”

* * *

두 칼잡이가 검이 교차했다.

챙-!

한쪽은 피투성이, 한쪽은 놀람과 경악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두 칼잡이의 검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챙-!

피투성이가 된 칼잡이의 검이 원을 그린다.

그 원에 반대편에 위치해 있던 칼잡이의 검이 가로막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칼잡이가 피투성이가 된 칼잡이의 검을 쳐냈다.

그리고 곧바로 날카로운 일격을 피투성이가 된 칼잡이의 목을 향해 날렸다.

허나 분명히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던 일격이 이번에도 가로 막혔다.

입술을 깨문 칼잡이, 할리버가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피투성이의 칼잡이.

소드마스터 카셀에게 조금 전부터 제 검이 닿지 않고 있었다.

그의 상태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체인걸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검에 가슴팍이 뚫리기 전에는 제 검도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그 검을 보는 걸 넘어 막아내고 있었다.

이는 기적을 넘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탓에 할리버가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무슨 수술을 부린 것이냐 소드마스터 카셀!”

이 말과 함께 할리버의 검이 빨라졌다.

그 속도는 눈으로 쫓을 수 없는 것이었고, 공기를 넘어 공간 자체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셀은 그 말도 안 되는 일격을 하나씩 막아내어갔다.

머리로 찔러오는 일격은 튕겨내고, 가슴팍으로 들어오는 일격은 흘려냈다.

그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검법에 모든 일격이 막혔다.

그 탓에 할리버는 다시 한 번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내 검을 막아내는 것이냐!”

카셀이 할리버의 검에서 시선을 때지 않으며 말했다.

“…무슨 짓이 아니오.”

“무슨 짓이 아니라고?”

“그렇소.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말을 흐린 카셀이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일격이… 보이기 시작했소. 단지 그뿐이오.”

할리버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꼴로 내 검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죽음에 이르러 없던 재능이라도 개화한 것인가?”

카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슴 팍에 뚫린 상처로부터 흘러내리는 피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 덕에 눈앞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호흡이 점점 가파오르고 있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그대로 끝이다. 딴 곳에서 시선을 돌려서는 안 돼.’

잡념도 생각도 무의미하다.

지금 해야 할 건 눈앞의 사내를 쓰러트리는 것.

그리고 뒤에 있는 제 주군을 지키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이었다.

생각을 끝마친 카셀이 다시 검을 움직였다.

휘익-!

산들바람과도 같은 일격이 할리버에게 쏟아졌다.

세계 최고, 혹은 최강이라 불리는 칼잡이에게 닿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일격이었다.

그랬기에 할리버는 그 일격을 가볍게 튕겨냈다.

팅-!

카셀의 검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검은 튕겨 나가기만 했을 뿐 진로가 바뀌지는 않았다.

우직하게 뻗어나간 검이 할리버의 턱을 노렸다.

눈을 치켜뜬 할리버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후웅-!

허공이 베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입을 벌린 할리버가 그 소리에 반응하며 중얼거렸다.

'피하지 못했으면… 베였어?’

이런 연약한 일격이, 500년간 최강으로 군림해온 자신에게 닿았단 말인가?

순간 두려움에 휩싸인 할리버가 검을 크게 내질렀다.

촤악-!

눈을 치켜뜬 카셀이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할리버의 검이 카셀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살이 헤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이 카셀의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성마저는 흔들지 못했다.

'방심했다. 허나 아직은 괜찮아.’

왼쪽 어깨를 내어주었을 뿐.

검을 휘두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지금의 카셀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카셀의 오른손이 움직이자 쥐고 있던 검도 덩달아 움직였다.

그 순간 한 번도 닿지 못한 할리버의 육체에 카셀의 검이 닿았다.

파앗-!

아주 작은 핏줄기가 튀었다.

할리버가 다급히 몸을 뺀 덕이었다.

경악한 할리버가 물러섰지만, 그 거리만큼 카셀이 다가와 다시 한번 검을 내질렀다.

챙-!

할리버의 검이 움직여 그 검을 막아냈다.

힘겨루기는 승산이 없단 판단한 카셀이 그 검을 교묘히 틀어냈다.

그리고 확장된 시야로 찾아낸 작은 빈틈 사이로 검을 찔러넣었다.

촤악-!

이번에는 할리버의 옷깃만을 스쳤다.

입술을 깨문 카셀이 조급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조금더 확실한 일격이 필요해.’

몸 상태는 물론이고 카셀이란 인간의 삶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제편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 짧은 틈 사이에 할리버란 거인이자 벽을 무너트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다리는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고 왼팔은 잘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태로 검을 휘두르는 것도 사실인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 속에서 할리버란 칼잡이에게 제 검을 닿게 할 가능성은 냉정하게 말해 0에 수렴했다.

그 탓에 카셀의 마음 속에서 점차 의심과 불안이 솟아올랐다.

지금 이 대결에서 패배할 것이란 불안감.

제 주인을 끝내 지켜내지 못할 것이란 의심.

그 불온한 감정들이 카셀을 몸과 마음을 여과없이 흔들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곧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펼치고 있는 검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려는 순간이었다.

“카셀-!”

뒤에 있던 제 주군이 거칠게 소리쳤다.

“믿고 있어요! 그러니 쓰러지지 마요!”

그 간절한 외침에 불안과 의심이 거두어졌다.

“당신이 쓰러지면 모든 게 끝나요! 이 성도 전쟁도 그리고 저도! 그러니깐….”

말을 흐린 아이린이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살아서… 살아서 내게 돌아와줘요. 그리고 함께 같이 살아가줘요… 카셀.”

침묵하던 카셀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제게 항상 무리한 걸 부탁하는군요.’

승산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승리를 부탁하더니, 이번에는 살아서 돌아와달라니.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카셀은 그 부탁에 제 목표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살고 싶다.’

조금 전까지는 죽음을 각오하고서 눈앞의 할리버를 쓰러트리려 했다.

그런데 아이린의 말때문에 그 죽음을 각오한 전투가 살고자 하는 전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작은 차이가 카셀의 검을 또 다시 바뀌게 만들었다.

챙-!

눈을 치켜뜬 할리버가 뒷걸음질쳤다.

그 속에서 카셀이 제 검을 고쳐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 친구가 자신에게 그랬다.

어떤 일이건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그 사실을 떠올린 카셀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 순간 카셀의 시야가 달라졌다.

“….”

죽음에 이른 칼잡이가 생존을 갈구한 순간 벽을 뛰어 넘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벽을.

그 속에서 카셀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이것인가.”

칼의 끝.

그 누구도 들어서지 못한 무(武)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