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지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개소리.”
이 말에 천년을 산 하이엘프.
하이네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갑자기 개소리라니요?”
“당신이 조금 전에 말한 이야기요. 그걸 저보고 지금 믿으라는 거예요?”
지니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천사가 내려왔느니, 그 천사가 제국을 세웠다느니…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자고 저와 대화하고 싶다 한 거예요?”
하이네스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제가 한 이야기들을 못 믿으시는 거군요.”
“믿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흠. 하지만 지니.”
하이네스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제 이야기를 부정하기에는 당신이 모시는 사람부터가 천사지 않나요?”
이 말에 반박하려던 지니의 입이 움찔 떨렸다.
“…….”
생각해보니 자신이 모시는 사람.
아더 바이에른은 놀랍게도 천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하이네스가 한 이야기가 마냥 거짓이 아니란 소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천사라니… 지금 나보고 이 이야기를 믿으라고?’
하늘에서 거주하는 인간.
천사.
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지금 하이네스는 그 천사가 대륙에서 제일로 큰 나라.
제국을 세웠다 주장하고 있었다.
상식이 든 인간이라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허나 아더 바이에른의 존재 탓에 천사라는 존재를 영 허구로 치부하기에도 뭣했다.
그 탓에 지니가 대답을 망설일 때였다.
하이네스가 차를 호로록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역사는 진실을 가르쳐주지만 인간들은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죠. 그들이 가진 편협한 가치관이 그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죠.”
지니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간신히 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당신 말이 사실이라 쳐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해주는 거죠?”
하이네스가 빙그레 웃었다.
“천년 전 사라진 엘프 왕국.”
“……?”
“그 왕국이 사라진 것에 이 두 천사가 연관되어있기 때문이죠.”
지니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하이네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지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지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이네스의 시선.
정확히는 동공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의 동공이 비어 있으니 그것만큼 기괴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하이네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마저 들으면 당신은 진실을 마주할 거예요.”
하이네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면 알게 되겠죠. 당신이 지금 누굴 돕고 있는지 말이에요. 그때 가서 당신의 선택을 들려주세요. 최후의 엘프 지니.”
* * *
카셀이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뭐지?’
소드마스터가 된 후로 인간을 상대로 긴장감을 느껴 본 적 없는 그였다.
그도 그럴 게 소드마스터란 경지는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육체의 극의다.
필멸자의 굴레를 넘어 초월자의 경지에 다다른 자들.
그랬기에 필멸자에 굴레에 갇힌 인간을 상대로 두려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헌데 갑작스레 악마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한 사내를 향해 카셀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저 사내가 나와 같은 경지에 다다른 소드마스터라는 것.’
생각과 함께 카셀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소드마스터에 경지에 이른 자가 왜 악마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다 말인가?
설마 저 소드마스터는 이 사태의 범인이라 지목된 칸 마드리드와 협력하는 사이일까?
고민하던 카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칸 마드리드와 한패요?”
이 말에 느긋한 시선으로 카셀을 훔쳐보던 회색 머리칼의 사내.
할리버가 대답했다.
“한패? 흠… 한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게 무슨 뜻이오?”
“일단 그의 명령에 따르고 있지만 그의 부하는 아니거든. 그러니깐… 음….”
“…?”
“에라이. 모르겠군. 그냥 한 패라 봐줘. 뭔가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귀찮군. 설명할 자신도 없고.”
할리버의 억지에 카셀이 당황했다.
“…그럼 대체 왜 이곳에 온 것이요? 아무런 목적….”
카셀의 말이 끊겼다.
“…!”
그와 동시에 깜짝 놀란 카셀이 뒤로 물러섰다.
어느 사이엔가 칼의 손잡이 가져다 댄 사내.
그와 동시에 느껴져 온 기백이 절로 걸음을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뭐지 이 기분은?’
고작 칼을 가져다 댄 것만으로 자신을 물러서게 만들다니?
하지만 카셀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검강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 속의 고리가 거칠게 공명했다.
그 속에서 카셀이 거칠어진 호흡을 숨기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위험해… 저 사내 너무나도 위험하다.’
사내는 칼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물러서게 했던 섬뜩한 감각은 놀랍게도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카셀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할 때, 할리버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감이 예리하군… 몸이 날이 서 있어. 소드마스터의 육체임을 감안해도 말이야.”
카셀이 두려움을 숨기며 질문했다.
“당신… 정체가 뭐요?”
“소드마스터.”
“…?”
“그것도 꽤 오래된 소드마스터지… 한 800년 됐나? 어느 순간부터 나이를 세는 걸 잊어버려서 정확히는 모르겠군.”
카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소드마스터…? 그런데 800년을 살았다고?’
어떻게 인간이 800년을 산단 말인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라 할지라도 육신의 수명은 이겨낼 수 없을 텐데.
그때 할리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니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하나 가르쳐주지….”
말을 흐린 그가 천천히 검을 돌렸다.
그 작은 동작에 따라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소드마스터에 이른 자들을 보통 초월자라 부르지… 그럼 그 뜻이 무엇일까? 단순히 극의의 경지에 오른 자들?”
카셀도 검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능, 감각, 생존 신호.
모든 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저 검이 위험하다 경고하고 있었다.
“아니… 틀렸어. 초월자의 진정한 의미란 죽음을 초월한 자들. 즉 필멸자와 달리 영원한 영생을 부여받은 자들을 뜻하네.”
카셀이 온 힘을 끌어올렸다.
긴 전투로 인해 쌓인 피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저 검에 집중되었다.
그 속에서 할리버가 웃었다.
“그런 내가 800년을 사는 게 이상한 일은 전혀 아니지. 안 그런가?”
카셀이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거짓말 마시오. 수많은 소드마스터가 있었지만 800년을 산 소드마스터는 지금껏 없었소.”
할리버가 다시 한번 웃었다.
조금 전보다 큰 웃음이었다.
“그래서 문제인 거야.”
이 말과 함께 할리버가 검을 치켜들었다.
“소드마스터가 되었는데 영생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건, 그들 모두가 가짜란 소리거든.”
치켜 올라간 검이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어졌다.
그 순간 카셀은 눈을 치켜뜬 채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사악-!
허공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갈라졌다.
카셀은 허공을 물드는 핏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베였다?’
베인 감각도 없는데 가슴팍에서 피 분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카셀은 고통을 느끼기보다는 경악했다.
그 사이 카셀의 가슴팍을 베어낸 할리버가 씩 미소지었다.
“역시 좋은 감각이야. 최근에 본 놈들 중에서 최고로 꼽을 만큼.”
이 말에 카셀이 피가 흘러내리는 가슴을 지혈하며 이를 악물었다.
‘큰일이다!’
설마 이런 괴물 같은 칼잡이가 상대 진형에 있을 줄이야.
전혀 예상 밖의 변수에 카셀은 직감했다.
‘이 자가 전쟁의 판도를 뒤흔든다.’
아니, 이번에 벌어진 모든 사건을 쥐고 흔들 수 있었다.
그만큼 눈앞의 사내, 할리버의 강함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 속에서 할리버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자… 소드마스터 카셀. 증명해보게.”
이 말과 함께 그의 검이 다시 내려찍어졌다.
그 순간 터져 나온 차가운 달빛이 카셀을 넘어 주변을 물들었다.
그 속에서 할리버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자네가 과연 진짜 소드마스터인지. 세계 최강인 내게 그 자질을 보여주게.”
* * *
전황을 살피던 윌렛은 느꼈다.
‘…비등하다.’
언제 무너져 안 이상한 전쟁.
그 전쟁의 전력이 놀랍게도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 자체가… 기적. 이 말로밖에 설명을 못 하겠군.’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그 괴물은 하트를 지키는 일곱 마리의 드래곤들이 막아주고 있다.
수백 수천의 악마들은 성벽과 병사들이 분투를 하며 버텨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레버쿠젠과 바이에른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서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각개요소 속에 배치된 병력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 이 불리한 전황을 수평으로 만든 것이다.
‘…허나 이들 뿐만이 아니다. 레버쿠젠의 시민들.’
생각과 함께 윌렛이 고개를 돌렸다.
성벽 아래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레버쿠젠의 시민들이 보였다.
“어서 빨리 날라-!”
“발에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라고!”
“식량 물 무기! 필요한 쪽에 얼른 얼른들 지원해!”
전쟁에서 시민들의 존재는 사실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에 가까웠다.
그들은 전쟁을 주도하는 자들이 아닌 전쟁에 끌려다니는 자들.
그랬기에 전쟁을 하는 성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반 시민들은 식량을 축내는 짐덩이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윌렛은 명령을 내려 레버쿠젠의 성.
하트에 머무는 시민들 수천 명을 동원했다.
물론 그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가혹한 명령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그 일을 시키기 위해 시민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전쟁을 하는 와중에 잡다한 일들까지 병사들을 보고시킬 수 없다. 그 공백을 시민들로 매꾼 것이지.’
무기가 부족한 곳이 있으면 무기를 가져다주고, 식량과 물이 부족한 곳이 있으면 식량과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뿐만이 아닌 수성을 돕기 위해 불을 지핀 장작이나 펄펄 끓어 오르는 물을 가져다주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크게 도움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도움이 모이고 모여 수천의 시민들 손에서 일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각과 함께 윌렛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어린 아이부터 시작해 노인까지.
모두가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아직 기적을 논하기 이르지만 이 사실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그래. 이 상태로 조금만 버티고 버텨서….’
아더 바이에른.
지금쯤 제국의 수도에 있을 그 아이가 제 할 일을 다해낸다면.
이 불리한 전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윌렛이 희망을 논할 때였다.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쾅-!
그 번개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지켜보던 윌렛의 눈이 커졌다.
“드래곤?”
한때 푸른 색이었던 비늘이 온통 피칠갑이 된 드래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 광경에 전장에서 레버쿠젠 기사단을 이끌던 엘린이 거칠게 소리쳤다.
“안 돼-!!”
그 동요는 곧 레버쿠젠 기사단에게 이어졌다.
[끼에에엑-!]
괴성을 지른 악마들이 빈틈을 보인 레버쿠젠 기사단에게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한 추격전을 이어가던 레버쿠젠 기사단이 순식간에 악마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리고 그 공백은 곧 레버쿠젠 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어졌다.
“큰일 났습니다-! 악마들이 기어코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남쪽 성벽이 거의 점령 직전입니다!”
“북쪽도 위험합니다! 이대로면 성벽을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나기 시작한 균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 탓에 경악한 윌렛이 다급히 병력을 재정비하려 할 때였다.
찬란한 달빛이 전장을 물들었다.
평소 느끼던 달빛과는 어딘가 다른, 차가운 온도가 느껴지는 달빛에 윌렛의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그 순간 조금 전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던 드래곤처럼.
온몸이 피칠갑이 된 한 사내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그 광경에 윌렛의 입이 벌어졌다.
“카셀… 브리드 경?”
이 말에 카셀의 앞에 선 할리버가 제 검을 어깨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잘 버텼지만, 결국은 여기까지군.”
만족감이 담긴 미소를 입가에 건 할리버가 어깨에 걸친 검을 들어 올렸다.
“재밌었다 소드마스터 카셀. 네 이름은 내 머릿속에 영원히 각인 될 것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카셀이 이를 악물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촤악-!
흩뿌려지는 피와 함께 가슴팍에서 짜릿한 고통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카셀의 신체가 천천히 앞으로 넘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리버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일단 성문은 뚫었고… 다음은 이 성만 점령하면 되는 건가?”
수습할 수 없는 균열.
그 균열이 한 소드마스터의 손에서 생겨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