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이변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챈 엘린은 곧바로 레버쿠젠 기사단을 소집했다.
그녀의 부름에 응한 레버쿠젠 기사단이 상황을 파악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올 때가 왔군요.”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칼을 갈 시간은 충분히 되서.”
엘린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태평한 소리들 하시는 거 아니에요? 죽음을 코앞에 둔 전투일지 모르는데?”
레버쿠젠 기사단도 웃음을 터트렸다.
“죽어도 진작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주군을 잃은 기사들은 살 가치가 없죠.”
“그런 저희가 죽음 따위가 무서울 리 없죠.”
엘린이 돌연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레버쿠젠 기사들을 꾸짖었다.
“다들 정신 나갔어요?”
“…?”
“지금 당신들 주인은 제 할아버지, 홀란 레버쿠젠이 아니라 저예요. 그런데 주군을 잃었다니요?”
레버쿠젠 기사단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살며시 미소 지은 엘린이 그들에게 부탁했다.
“또 주군을 잃은 기사단으로 남고 싶지 않으시죠?”
“….”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절 도와주세요. 아직 어리고 미숙한 당신들의 주인을 보좌해주세요.”
레버쿠젠 기사단의 눈이 커졌다.
“….”
잠시 침묵한 그들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항상 할아버지의 그늘에 갇혀 있던 소녀.
그 소녀가 어느 사이엔가 훌쩍 커서 레버쿠젠의 안주인이 되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버쿠젠 기사들은 깨달았다.
‘아아….’
‘새 시대, 새바람이 불고 있다.
‘그 시대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적어도 쉬어서는 안 되겠구나.’
레버쿠젠 기사단 전원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예스 마이 제너럴(Yes my general). 죽음마저 이겨내며 당신을 보좌하겠습니다.”
엘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믿고 있겠습니다. 나의 기사들이여.”
이 말과 함께 곧바로 전투에 임할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갑옷을 입고 칼을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이번 전쟁 내내 두 다리 대신 전장을 달려줄 말들을 끌고 왔다.
그 간소한 준비가 끝나자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나의 기사야. 이제부터 나는 다른 동족들과 함께 라 하르칸을 막을 것이다.]
엘린이 눈빛을 빛냈다.
“저는 라 하르칸을 따르는 괴물들을 상대하겠습니다.”
[…각자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구나. 부디 몸조심하거라.]
엘린이 웃었다.
“저는 존재께서 지켜주시는 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는 걱정마시고 존재의 싸움에 부디 집중하소서.”
고개를 끄덕인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온 거대한 울림이 레버쿠젠 기사단의 머리칼을 휘날리게 만들었다.
잠시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린이 칼을 뽑아들었다.
“전원 전투 준비.”
엘린이 눈빛을 번뜩이며 선언했다.
“이번 전쟁은 우리, 레버쿠젠이 주도한다. 모든 기사단은 내 뒤를 따르도록.”
전쟁의 시작.
그 중심에 선 기사단의 약소한 출정석이었다.
* * *
윌렛이 두 주먹을 꽉 끌어모았다.
‘저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적이 코앞에 있었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괴물.
그 괴물 수백, 수천 마리가 새하얀 설원을 뒤덮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 성의 주인.
레버쿠젠의 성주가 성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돌격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방어를 하는 것이 수성의 기본 원칙임을 생각하면 레버쿠젠의 성주는 그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그 탓에 윌렛이 고함을 쳐 엘린을 말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보다 먼저 성문 밖으로 나온 엘린이 소리쳤다.
“모두 돌격-!”
엘린의 명령에 레버쿠젠 기사단이 각자의 창과 칼을 치켜들었다.
“레버쿠젠에 무한한 영광을-!”
짐승의 포효같은 외침을 한 차례 내뱉은 레버쿠젠 기사단이 전장을 향해 돌격했다.
그 광경에 윌렛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성벽을 내리쳤다.
“무슨 저런 바보 같은-!”
패기와 용기만으로 안 되는 것이 전쟁이거늘.
생각과 함께 윌렛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성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성문은….’
그때 윌렛의 시야로 누군가 들어왔다.
“카셀?”
윌렛이 눈을 치켜뜨고서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속에서 활짝 열린 성문을 가로막고 선 카셀이 중얼거렸다.
“다들 느끼겠지만 여기가 이번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오.”
이 말과 함께 카셀이 제 뒤에선 바이에른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위험하다 싶으면 얼른 뒤로 빠지시오. 체면의 문제가 아니니깐.”
바이에른 기사단이 웃음을 터트렸다.
“뒤로 빼면 갈 데는 있고?”
“어차피 여기가 뚫리면 다 죽는데?”
“도망쳐서 살 수 있으면 그러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소, 캡틴?”
카셀이 볼을 긁적였다.
바이에른 기사단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저 괴물 같은 악마놈들이 지능이 없어 보여도 사리 분별까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방이 꽉 막힌 성에서 유일하게 뚫려있는 이 구멍으로 달려올 정도의 지능은 남아 있었다.
그 말은 즉 이 유일한 빈틈이 뚫린 순간 뒤에 있는 성이 함락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성의 함락은 내 뒤에 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랬기에 바이에른 기사단의 말처럼 뒤로 물러서 도망쳐봐야 의미가 없었다.
이곳이 함락되면 북부 어디로 가도 저 괴물들과 마주할 테니.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카셀은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집요하게 이곳만 팔 것이오. 분명 누군가는 죽거나 다칠 수 있소.”
저 설원에 있는 모든 괴물들이 이곳만 보고 달려올 것이다.
그 말은 즉 지금 성문을 틀어막고 있는 이 기사단만으로 저 괴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는 분명 죽거나 다칠 것이다.
카셀은 그 점을 염려해 바이에른 기사단에게 주의를 줬지만 그들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당장 우리 앞에 소드마스터가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오?”
바이에른 기사단이 웃으며 카셀에게 말했다.
“캡틴, 우리는 기사요. 주군과 우리가 인정한 리더를 버리고 등을 보이는 짓은 하지 않소.”
“정 우리가 걱정되면 한 명씩 죽어 나갈 때마다 우리의 이름이나 한번 떠올려주시오.”
“그게 우리를 위한 최고의 위로이자 명예요. 바이에른 기사단의 캡틴, 카셀 브리드 경.”
카셀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캡틴이 맞기나 한지 모르겠군… 내 말은 죽어도 안 듣는데.”
바이에른 기사단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부터 말 잘 듣겠소. 자, 명령 좀 내려보시오. 우리가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오?”
이 말에 카셀이 시선을 돌렸다.
[끼에에에엑-!]
새하얀 설원 위.
그곳을 뒤덮은 괴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헤집고 있는 레버쿠젠 기사단이 보였다.
그 용맹함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실제로 그들의 기세가 괴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덕에 괴물들이 하트에 제대로 된 진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전장의 승부를 확정 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체력적인 문제가 부딪칠 것이다. 그리고 그 체력적인 문제가 부딪칠 때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
그 구멍을 책임지는 것이 바로 자신과 바이에른 기사단.
생각과 함께 카셀이 심호흡을 내뱉으며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나의 선을 제 주위로부터 주욱 그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이에른 기사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웬 선 긋기 놀이오, 캡틴 카셀?”
이 말에 카셀이 선을 긋던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난 이 선 뒤로 단 한 발자국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
“그건 저 괴물도 다르지 않소. 이 선 너머로 단 한마리도 하트로 넘어올 수 없을 것이오.”
“…!”
바이에른 기사단이 눈을 치켜떴다.
그 사이 숨겨왔던 투지를 서서히 끌어올린 카셀이 눈빛을 번뜩였다.
“이 전장의 균형의 추는 내가 담당하겠소. 자네들은 그 추가 무너지지 않게 잘 지탱해주시오.”
이 말에 정신을 차린 바이에른 기사단이 대답했다.
“명을 받았소. 캡틴 카셀.”
카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뒤를 부탁하오, 바이에른 기사단.”
이 말과 함께 카셀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레버쿠젠 기사단에게 휘둘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악마들이 어느 사이엔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끼엑?]
악마들이 턱을 긁적이며 제 앞을 가로 막고 선 카셀을 바라보았다.
그 어딘가 기괴한 동작에 카셀이 가벼운 심호흡을 내쉬며 말했다.
“…와라 괴물들아.”
이 말과 함께 카셀의 검에서 천천히 빛이 일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보름달과 같이 옅은 달빛이었다.
그 달빛을 검에 두른 카셀이 중얼거렸다.
“이 앞으로 단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할 줄 알아라. 너희는 오늘 모두 여기서 죽는다.”
카셀의 경고에 악마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한 박자 늦은 웃음을 터트렸다.
[키케케케켁-!]
그 비웃음과 함께 악마들이 카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카셀의 검도 움직였다.
촤악-!
흩뿌려지는 피와 함께 전장에 피 냄새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윌렛이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전쟁이란 말인가?”
상식도 전술도 없는 살육전.
그러한 싸움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살육전을 직접 눈앞에서 본 그는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라! 우리의 뒤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다!”
지금 성문 바깥으로 나가 싸우는 기사단들의 저 무식한 행위가 이 살육전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그 증거로 기사단의 칼에 유린 되는 괴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끼에에엑!]
제대로 된 진영도 갖추지 못한 채 성을 향해 돌격하는 괴물들이 혼동을 일으키며 기사단을 쫓아갔다.
덕분에 놈들에게 포위당한 하트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패기와 용기만으로 이루어진 무모한 돌발행동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위해 나간 것이구나.’
제 목숨을 담보로 한 채.
생각을 끝마친 윌렛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문득 떠오른 의문과 함께 윌렛이 고개를 돌렸다.
성벽 위에서 어쩔 몰라하는 연합군의 병사들이 보였다.
그런 그들을 잠시 유심히 지켜본 윌렛이 주먹을 꽉 쥐었다.
“…현역이었다면 나도 나가 싸우겠지만 지금의 내 역할은 이거겠군.”
눈빛을 빛낸 윌렛이 성벽 가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천천히 시야를 확장시켜 전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번 전쟁의 지휘는… 아무래도 내가 해야겠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
하지만 해내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생각과 함께 윌렛이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 *
아더가 다급히 중얼거렸다.
‘흰 수염 씨? 흰 수염 씨? 아직도 잠들어 있어요?’
그 다급함이 어느 정도인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허나 애가 탈 정도로 부르짖은 사람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 탓에 아더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진짜 필요할 때는 안 나타나는 사람이네. 이런 순간에도 잠을 자시다니.’
자신이 잘못되면 흰 수염이 깃들어 있는 비스트도 위험해질지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도 잠이 오시나?
아더가 그런 흰 수염을 원망하며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들쳐업은 레오 바이에른의 뒤통수가 보였다.
‘아니. 지금은 칸 마드리드인가?’
그의 얼굴은 놀랍게도 자신이 아는 그, 칸 마드리드로 바뀌어 있었다.
케인 도르문트와 더불어 바이에른을 박살 낸 원흉.
그랬기에 반드시 죽여야 하는 원수의 얼굴로 말이다.
‘…그럼 칸 마드리드와 아버지는 동일인물인가?’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칸 마드리드와 레오 바이에른.
둘 중 한명은 다른 사람의 가짜 얼굴을 뒤집어 쓰고 있단 소리였다.
‘그 중에서 칸 마드리드가 아버지의 얼굴을 뒤집어 쓰고 있을 확률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곰곰이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가정은 필요 없었다.
황실의 기괴한 혈통 능력 때문에 사지가 속박당한 상황.
이대로라면 신체를 해부당한 건 육체를 빼앗기건 영혼이 축출당하건.
그 어떤 위협을 가해도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그 탓에 아더가 모든 잡념을 집어던지고 일단 이 능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 할 때였다.
칸 마드리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아더가 거대한 제단을 발견했다.
“…아들. 보이느냐?”
레오, 칸 마드리드의 말에 아더가 대답했다.
“절 제물로 바칠 제단이요?”
“제물? 내가 왜 널 제물로 바쳐?”
“그럼 육체를 빼앗을 건가요?”
“내가 육체가 없는 네크로맨서도 아닌데 굳이 왜?”
아더가 시선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럼 절 왜 이 제단으로 데리고 온 거예요?”
칸 마드리드가 빙그레 웃었다.
“말했지 않으냐.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이 말과 함께 칸 마드리드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제단 앞에 섰다.
그리고 들쳐 업은 아더를 천천히 그 제단 위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어디서 등장했는지 모를 의자 하나를 끌고온 칸 마드리드가 대자로 뻗은 아더 앞에 놓으며 중얼거렸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집중해서 잘 듣거라. 너에게도 나에게도… 꼭 필요한 이야기니깐.”
아더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비아냥거렸다.
“그런 이야기면 제 몸 좀 원래대로 돌려 놓아주시죠?”
“그건 안 되지. 우리 예절이라고는 모르는 아들이 언제 또 아비의 미간에 권총을 겨눌지 모르는 일 아니냐?”
이 말과 함께 칸 마드리드가 돌연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옛날에 두 명의 천사가 있었다.”
아더의 눈이 커졌다.
“두 명의… 천사요?”
“그래. 신의 부름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였지.”
칸 마드리드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아더의 신체가 움찔 떨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괴할 정도로 새빨간 피눈물이 그의 턱선을 타고 한 방울 떨어진 순간, 제단에 있던 두 사람은 옛 추억에 젖어 들었다.
“두 천사는 신의 명령을 받아 지상에 내려왔지. 인간들을 구원하라는… 아주 거룩하고도 신성한 임무를.”
숨겨져 있던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