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어둠에 휩싸인 대궐.
그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권좌.
그 자리에 앉아있던 한 사내가 여유적적한 웃음을 터트렸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아.”
이 말에 아더가 대답하는 대신 비스트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울려퍼진 총성에 사내, 레오 바이에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탄알의 흔적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 혀를 찼다.
“첫 만남치고 과격하구나. 감히 아비의 머리에 총을 쏘다니?”
아더가 손에 든 비스트를 휘리릭 돌리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다워야죠.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에요? 수도가 왜 이꼴이에요?”
“마음에 안 드냐? 난 항상 밝던 이 도시가 어두워져서 썩 좋은데.”
“아버지 취향 한 번 참 고약하시네요. 어두컴컴한 걸 좋아하다니. 생긴 것답지 않게 너무 음침하신 거 아니에요?”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본 사이에 독설가가 되어버렸군?”
“상황이 사람을 만들더라고요.”
“그건 맞지. 모든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단지 그 변화를 만드는 게 주어진 상황이라는 게 애석할 뿐.”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에 따라 아더가 칼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댈 때였다.
돌연 몸을 돌린 레오가 제안했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느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이야기요?”
“어차피 날 죽이러 왔는데 조금쯤 시간을 내주어도 괜찮지 않겠느냐?”
아더가 갸웃거리던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조금의 시간도 아버지한테 쓸 수 없어요.”
“이유는?”
“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아버지를 죽여야 해요.”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날 죽이면 이 전쟁이 멈출 거다?”
“아닌가요?”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답이지. 틀린 부분을 바로 잡아주자면 내가 죽더라도 이 전쟁은 멈추지 않아.”
아더가 눈길을 좁혔다.
“또 이상한 수를 쓴 거예요?”
“그런 게 아니야. 지금 북부로 가 있는 라 하르칸은 이제 나조차도 멈출 수 없어.”
“…!”
아더의 좁혀진 눈길이 파르르 떨렸다.
‘그 괴물을 아버지를 죽인다 해도 멈출 수 없다고?’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죽이면 그쪽의 상황을 멈출 것을 예견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으니.
그 사이 레오가 설명을 이었다.
“그 가엾은 드래곤은 지금 분노에 사로잡혀 있어. 천 년이나 심장을 빼앗긴 고통에 대한 분노. 그 아픔은 아무리 주인인 나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지.”
정신을 차린 아더가 비릿하게 웃었다.
“일단 주인이란 소리네요? 그럼 죽이고 봐야죠.”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비스트를 재장전할 때였다.
예상치 못한 제안을 레오 바이에른이 해왔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그쪽의 전쟁 상황을 멈춰주마.”
아더의 신체가 움찔 떨렸다.
“…이야기를 들으면 전쟁을 멈춰준다고요?”
“전쟁만 멈춰주랴? 지금의 이 상황 자체를 없애주마. 수도는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고 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기다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테지.”
아더가 당황했다.
대체 저게 무슨 헛소리지?
그 사이 점차 걸음을 옮긴 레오가 아더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 모든 상황이 단지 내 이야기만 들어주면 이루어진단다, 아들아. 게다가 너도 궁금하지 않으냐?”
“…….”
“대체 왜 아버지가 이런 꼴일까? 지금의 상황이 뭘까? 이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에 대한 해답도 내 이야기에 있다.”
그렇게 지척까지 다가온 레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더의 귓가에 옅은 숨결을 불어넣었다.
달짝지근한 숨결만큼이나 달콤한 속삭임이 계속 이어졌다.
이야기를 들어라,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된다.
너의 현명한 판단으로 모두를 구할 수 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속삭임은 너무 매혹적이었다.
그 탓에 아더의 눈동자가 흔들린 순간, 레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 아들아. 이제 내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섰느냐? 너의 그 판단….”
레오의 말이 끊겼다.
그와 동시에 잘린 얼굴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파악-!
한 박자 늦게 터진 피분수가 아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셨다.
그 속에서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어라? 죽네요?”
“….”
“마주칠 때마다 비스트의 탄알을 벗어나서 불사신인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네요.”
이 말에 바닥을 구르던 레오의 얼굴이 멈췄다.
그 순간 놀랍게도 레오의 두 눈이 정확히 아더의 얼굴로 향했다.
“이 후레자식이… 감히 아버지의 목을 잘라?”
“말했잖아요. 아버지가 아버지 같아야 아버지 대접을 해주지.”
“허… 이 놈 봐라. 이건 완전 천하의 패륜아가 따로 없군.”
혀를 찬 레오의 얼굴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후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하의 바보도 여기 있었군. 이야기만 들으면 상황이 해결되는 데 이걸 거절해?”
아더가 웃었다.
“바보는 아버지 아니에요? 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요?”
“…….”
“하실 말씀은 다 하신 거죠?”
레오가 뒤늦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군. 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이상하긴 해.”
이 말과 함께 레오의 신체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놀라며 재빨리 중얼거렸다.
‘흰 수염 씨? 저거 마법이에요?’
[…….]
‘흰 수염 씨? 제 말 안 들리세요? 혹시 또 잠드신 거예요?’
재촉에도 흰 수염은 대답이 없었다.
아더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진짜 잠꾸러기네? 그 짧은 사이에 또 잠드셨다고?’
마법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흰 수염에게 아버지가 목이 잘리고도 조잘거리는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입맛을 쩝 다신 아더가 질문했다.
“바이에른 혈통 중에 목을 붙이는 능력도 있던가요?”
레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능력은 없지. 이건… 그래. 단순한 눈속임이다. 쉬운 말로 하면 마법이라고도 볼 수 있지.”
역시 마법인가.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가슴팍의 고리를 은밀히 진동시켰다.
우웅-!
목이 잘리고도 살아났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죽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만이 다룰 수 있는 검강.
이 절기를 쓴다면 제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과 함께 아더가 다시 전투에 돌입하려 할 때였다.
레오 바이에른이 짐짓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좋게 좋게 말로 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벌을 주어야겠어.”
아더가 웃었다.
“사랑의 매라도 드시게요?”
“사랑의 매뿐이랴? 사랑의 몽둥이도 들어야지.”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동작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육체의 움직임이 멈췄다.
“……?”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뭐지? 왜 갑자기 몸이 안 움직이는 거지?
당황한 아더가 재빨리 팔과 다리에 신호를 보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 탓에 경악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겼다고?’
도대체 어떻게?
아니, 빼앗기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 짧은 틈에 이런 수술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때 어느사이엔가 다가온 레오가 아더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날뛰는 짐승을 잡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함정이 필요하지.”
턱선으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손길에 아더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남자의 손길이 제 얼굴을 쓰다듬는단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한 번 굳어진 몸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아더를 들쳐업은 레오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내 발로 이곳에 찾아온 건 실수였다 아들아. 차라리 날 피해 그 성에 틀어박혔으면 시간이라도 좀 더 벌었을 텐데.”
아더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질문했다.
“이것도… 아버지의 마법인가요?”
“아니. 이건 혈통이다.”
대답과 함께 레오의 얼굴이 뒤바뀌었다.
그 이변에 아더의 눈이 커진 순간 어느사이엔가 레오 바이에른이 아니라 칸 마드리드의 얼굴이 된 남자가 화사하게 웃었다.
“제국 황실혈통의 능력. 가장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힘의 결과지.”
아더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제국 황실에 이런 혈통 능력이… 있다고는 못들었는데요.”
“그럴 수 밖에. 뭐, 이것도 차차 설명해주마.”
이 말과 함께 칸 마드리드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대한 권좌를 지나 그 뒷편에 마련된 아주 비밀스러운 통로를 향하며 중얼거렸다.
“산 제물이 되기 전까지 모든 진실을 알려주도록 하마. 그럼 너도 이 아비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과 함께 레오 바이에른 비밀 통로로 향했다.
그 순간 거대한 대궐은 침묵에 휩싸였다.
“…….”
어둠에 휩싸인 권좌만이 외로이 조금씩 빛이 났다.
그렇게 그 빛이 조금씩 커져 달빛과 맞닿았을 때였다.
한쪽 기둥 너머.
짙은 음영이 일렁거렸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꼴 보기 싫은 얼굴이시군요, 형님.”
이 말과 함께 사내, 레온 마드리드가 어둠이 뿜어져 나오는 지하 통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그래도 제 예상대로 움직여주셔서 다행입니다. 당신의 끝이 머지 않았습니다 형님.”
* * *
거대한 괴수가 울부짖었다.
[천 년을 참아왔다-!]
그 외침과 함께 새하얀 설원 끝에서 검은 반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 년이나 심장을 빼앗긴 채로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지내왔다! 그 아픔과 고통 분노! 그 감정들을 너희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엔 하나였던 반점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그 반점들이 이내 새하얀 설원을 전체를 뒤덮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연합군의 병사들이 중얼거렸다.
“저게… 대체 뭐야?”
인간들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기괴한 괴수들이 팔다리를 절뚝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살아생전 처음 보는 그 기괴한 형태에 연합군의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을 때였다.
뒤늦게 성벽에 올라 라 하르칸과 설원 너머에서 달려오는 괴수.
그들을 발견한 윌렛이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렇군…. 저래서 이들이 이토록 빨리 북부에 도착한 거야.’
착각을 하고 말았다.
저들의 군대가 이쪽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병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을 닮은 괴수.
인간을 잡어 먹는 괴물이 그들의 병사였다.
‘저 괴물들이라면 거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을 자는 것도 추위에 떠는 것도 인간과는 다를 테니깐.’
그리고 한 가지 더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저 괴물들의 숫자가 윌렛, 자신의 예상치를 훨씬 웃돈다는 것이었다.
[끼에에엑!]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는 괴물들이 새하얀 설원을 뒤덮은 걸 넘어 점령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육안으로도 확인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탓에 윌렛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들을 상대로… 이길 생각을 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도 들 때였다.
윌렛의 귓가로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악마 놈들… 질리지도 않고 몰려왔군.”
“그러게나 말이야. 이번에는 또 몇이나 죽여야 끝이 날 지 내기라도 하지 않겠나?”
“나는 인당 30마리 보네.”
“나는 인당 40마리 보지.”
“이긴 쪽이 금화 하나 어떤가?”
“그거 좋군. 대신 둘 다 살아남으면 없던 내기로 하는 게 어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윌렛의 눈이 커졌다.
그 속에서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하트를 향해 달려오는 악마들을 바라보는 레버쿠젠의 군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있다고 해도 일반 병사들이 저런 놈들을 보고 농담을 내뱉는다고?’
상황이 절망적이라 모든 걸 내려놓은 헛소리인가?
아니면 이 절망적인 상황에 단련되고 단련된 용사들의 패기 어린 만담인가?
그 때 성문이 벌컥 열렸다.
“……!”
깜짝 놀란 윌렛이 소리쳤다.
“어떤 미친놈이 성문…!”
저런 괴물들이 코앞에 있는데 성문을 열다니?
역정을 낸 윌렛이 황급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열려진 성문의 선두.
그곳에 선 엘린이 칼을 뽑아들며 중얼거렸다.
“전원 준비.”
이 말과 함께 눈빛을 번뜩인 엘린이 거칠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하트를 위협하는 악마들을 처단한다!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개전을 시작을 알리는 외침.
그 선두에선 것은 다름 아닌 레버쿠젠의 안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