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500년을 산 네크로맨서.
베스케넨.
그가 무릎을 꿇은 채 뼈뿐인 턱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지금 제국 시민들의 상태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빼앗긴 빈 껍데기일 뿐. 그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그 껍데기에 영혼을 찾아주는 겁니다.”
앞에 있던 레온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 영혼을 찾아주는 방법은?”
“…제국의 황제가 죽어야 합니다.”
이 말에 레온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베스케넨이 턱을 덜덜 떨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가 영혼을 축출하고 황제가 그 영혼을 가져갔습니다. 그가 영혼을 어디에 쓰려는지 모르지만 일단 시민들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를 죽여야 합니다.”
정신을 차린 레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형님이지만 정말 사고뭉치군… 죽일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이 말과 함께 레온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딘가 고민에 빠진 듯한 그 모습에 베스케넨이 한숨을 돌리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은 500년을 산 네크로맨서.
천 년을 산 흰 수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륙의 산증인이자 역사에 가려진 그림자였다.
그런 자신에게 힘과 무력으로 무릎을 꿇릴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었다.
'같은 하늘 섬 조직… 아니 그들조차 무릎은 꿇릴 수 없다. 그 흰 수염을 제외하면.'
그런데 그 흰 수염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눈앞에 있는 새파란 애송이가 해냈다.
저 애송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자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 녀석의 말 자체를 거역할 수가 없어. 마치 영혼이 빼앗겨 버린 느낌이다.'
그 탓에 베스케넨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500년을 살면서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머리를 굴려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상이 도래했는데?'
흰 수염의 아래에 있을 때는 역사의 그림자로만 살아야 했다.
무슨 일을 하건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고 숨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하늘섬의 주인은 달랐다.
그는 마침내 하늘섬을 역사의 바깥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 일은 베스케넨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일이었다.
'세상이 엉망이 되고 시체가 늘어나면… 결국 내 원대한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육신을 버리고 네크로맨서이자 언데드가 된 이유는 가장 고결한 영혼이 되는 것.
'수많은 서책에서 말한다.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고결한 영혼이 필요하다고.'
흰 수염은 지상에서 영생을 꿈꿨다.
하지만 베스케넨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영생을 꿈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로 승천해야 하고 그 유일한 방법은 고결한 영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결한 영혼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남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베스케넨은 500년 동안 타인의 영혼을 빼앗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늘에 숨어 빼앗는 영혼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금 더 맑은 영혼, 깨끗한 영혼, 많은 영혼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그늘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허나 흰 수염의 권위와 힘이 무서워 여태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흰 수염이 죽고 새로운 하늘섬의 주인이 새로운 기회를 줬다. 절대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돼.'
생각과 함께 베스케넨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생존 욕구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영혼의 일부분이 뼈뿐인 몸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왔다.
스으윽…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지금 자신은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통제권까지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흰 수염이 와도 반전을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일단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후일을 도모하면 돼.'
살아남아야 기회도 있는 법이다.
500년이란 긴 세월을 살면서 그 지혜를 터득한 베스케넨이 조용히 현장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침묵하던 레온이 중얼거렸다.
“제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국민의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
“…?”
“그것이 제국이 통치권을 보장받는 대가이며 이 나라의 존속이유다. 이게 내가 황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이지.”
베스케넨이 텅빈 안광을 끔뻑였다.
갑자기 저게 무슨 개소리지?
그 때 빠져나가던 영혼의 일부가 갑자기 속박이라도 걸린냥 멈추어버렸다.
“…!”
그 이변에 베스케넨의 입이 벌어질 때 레온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넌 시민 한두 명도 아니고 제국 시민 전체를 건드렸다. 그런 너에게 어떤 형벌을 줘야 할까?”
베스케넨이 발작하며 소리쳤다.
“이 개자식!! 대체 정체가 뭐냐! 어떻게 내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마저도 간섭할 수 있는 거야!!”
레온이 천천히 대답했다.
“말했을 텐데 나는 선지자.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 사람이라고.”
“닥쳐라! 그딴 말도 안 되는 말…!”
“좀 더 쉽게 설명해주지. 제국이 세워진 것은 천년 전. 대륙이 피와 전쟁으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곳곳에 악령과 악귀가 넘쳐났지.”
레온의 설명에 베스케넨이 소리치려다 멈칫했다.
어느 사이엔가 눈앞의 남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저게… 뭐지?”
어떻게 인간의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게 사라질 수 있지?
무표정이건 웃는 얼굴이건 눈물을 흘리건 감정이라는 건 사라질 수가 없는데?
그 사이 레온이 설명을 이었다.
“그 괴물들 사이에서 인간은 말라 죽어갔다.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족을 잃어야 했어.”
베스케넨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지금 나한테 역사 교육….”
“그런 인간들을 구원한 게 바로 제국이다.”
“…?”
“악령과 악귀들로부터 인간들을 모아 악령과 악귀들을 몰아내고 이 땅 위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게 바로 제국. 그 제국을 통치하는 마드리드 일가다.”
레온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럼 여기서 문제. 마드리드 일가는 어떻게 인간들을 규합시켰을까? 궁금하지 않나?”
이 말과 함께 베스케넨의 육체가 조여졌다.
콰직.
뼈로 이루어진 그의 육체에서 흰 가루가 휘날렸다.
너무 끔찍한 고통에 베스케넨은 입도 열지 못했다.
그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인 레온이 중얼거렸다.
“마드리드 일가의 혈통은 '지배'기 때문이다.”
“…!”
“모든 인간에 대한 지배. 그것이 바로 이 저주받은 핏줄의 능력이다.”
베스케넨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다고?”
“그래서 저주받은 능력이지.”
레온이 주먹을 그러모았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눈물이라 볼 수 없는 핏물이 그의 얼굴을 넘어 상반신을 푹 적셨다.
그와 동시에 베스케넨의 육체가 찌그러지고 찌그러져 작은 공이 되었다.
그 끔찍한 상태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된 베스케넨을 잠시 바라본 레온이 빙그레 웃었다.
“남의 영혼과 육체를 지배한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능력이야?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도 마음을 주지도 못하는데.”
베스케넨은 대답하지 못했다.
육신을 넘어 그의 영혼마저도 작은 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허무한 결말을 500년 된 네크로맨서가 맞이했을 때였다.
레온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
머리를 넘어 육체를 뒤흔드는 현기증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한참을 숨을 헐떡이던 레온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레온이 식은땀을 닦으며 떠올렸다.
몇십 년 전.
자신을 찾아온 한 남자가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레온. 황가의 혈통에 의지하지 말거라. 그 힘은 결국 너의 수명을 좀먹게 될 것이다.]
그 기억을 떠올린 레온이 눈을 감았다.
'황가의 혈통을 발동되는 조건은 수명… 그리고 나는 몇십 년째 이 힘을 쓰고 있다.'
그 결과 최근 황가의 혈통을 일으킬 때마다 죽음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겠지….’
예감으로는 길어봐야 1년.
짧으면 몇 달.
그게 자신에게 남은 수명일 것이다.
결말이 정해졌다는 사실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낀 레온이었지만 곧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포기 할 수도, 죽을 수도 없다.'
몇십 년을 참고서 여기까지 왔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건 끝을 봐야 했다.
그렇게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킨 레온이 어둠으로 향했다.
“…….”
그 걸음은 느릿하면서도 매우 애처로웠다.
마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노인처럼.
* * *
엘린이 고개를 들었다.
“….”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요하면서도 낮은 시선을 잠시 엘린이 말없이 지켜보던 때,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돌연 중얼거렸다.
[나의 기사야.]
정신을 차린 엘린이 대답했다.
“네? 존재시여?”
[너와 함께 한 시간은 즐거웠다.]
“…?”
[너의 사랑 이야기. 세상 이야기. 내면의 이야기. 모든 게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니 미리 감사 인사를 해두마.]
엘린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존재시여? 곧 떠날 사람인 것처럼?”
푸른 빛 드래곤이 웃었다.
마치 고양이가 그르릉, 우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모든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그런데 나는 다른 것들에 비해 너무 오래 살았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란 소리지.]
엘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한 사람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홀란 레버쿠젠.
저번 전쟁에서 잃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엘린이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죽음을 각오하신 겁니까?”
[아니.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다.]
“…제가 용납 못합니다.”
엘린이 눈을 치켜떴다.
“어떻게 해서건… 모두를 지킬 겁니다. 존재건 이 성이건. 여기 있는 모두를.”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웃었다.
[든든하구나. 역시 나의 기사다워.]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 마십시오.”
[미안하구나. 약속하마.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으마.]
사과를 한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잠시 고민하다 제안했다.
[실수를 했으니 그에 마땅한 보상을 줘야겠지. 안 그러느냐?]
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괜찮습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아니. 이건 내 의지다. 네가 날 지켜준다 했으니 그만한 무언가를 줘야지.]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널 지키겠다 나의 기사야.]
엘린이 눈을 끔뻑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번 전쟁의 결과가 어떻건… 나는 널 지켜주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엘린이 침묵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보상인 겁니까?”
[그럼. 든든하지 않으냐?]
“너무 든든해서 웃음이 나오네요. 좋습니다. 그 보상 받아들이죠.”
엘린이 생글생글 웃었다.
“드래곤의 보호를 받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존재시여.”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서로를 지키게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기사가 된 거로군요.”
[좋은 어감이구나. 자… 그럼.]
말을 흐린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전장으로 나아가자꾸나.]
엘린의 눈이 커졌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적이 왔다 기사야.]
“……!”
드래곤의 말에 엘린의 몸이 한 차례 거칠게 떨렸다.
그 사이 다시 고개를 북쪽으로 돌린 드래곤이 눈길을 좁혔다.
[놈들이 이 성스러운 성을 향해 오고 있어. 이제 싸움에 임할 시간이다.]
이 말과 함께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였을 때였다.
…후웅-!
거대한 상공.
그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라 하르칸이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서 날 죽일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다.]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이 제 가슴팍과 날개에 진 흉터를 바라보았다.
거친 검격의 흔적.
무한한 재생력을 가진 제 육체도 미처 회복시키지 못한 끔찍한 부상의 흔적이었다.
[인간들의 검강. 소드마스터의 힘. 그것이야 말로 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지.]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무기가 없다면?]
그 불길한 웃음과 함께 라 하르칸의 육체가 뒤흔들렸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날 죽일 수 없다. 설령 신이 온다 할지라도 말이지.]
격앙된 감정 속에서 나오는 그 거친 떨림에 라 하르칸이 전율을 감추지 못할 때였다.
그의 머리 위에 타고 있던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거 그만 흔들리시오. 멀미가 날 것 같으니깐.”
이 말에 라 하르칸이 웃음을 멈춘 뒤 대답했다.
[멀미? 너 정도의 인간이 그런 걸 느낀다고?]
“그럼 나는 뭐 사람 아니오? 옛날 사람이라 자동차도 못 타고 다니는데….”
사내의 말에 라 하르칸이 침묵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군? 내가 배려라는 걸 몰라서.]
“괜찮소. 당신에게 그런 거 까지는 바란 게 아니니깐 조금만 진동을 멈춰주시오.”
라 하르칸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 소드마스터 살해자 할리버.]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소드마스터를 살해하는 칼잡이.
두 이질적인 존재가 나눈 짧은 담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