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레오 마드리드.
동시에 칸 마드리드.
지금은 제국의 황제라 불리는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뻥 뚫린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이 제국의 수도라는 걸 고려하면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제국의 수도는 짙은 어둠에 잠겨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 칸 마드리드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온신경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립고도 애틋한.
그리고 부셔버리고 싶은 옛 빛에.
그 때 누군가 제단을 향해 다가왔다.
레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확인했다.
“엘프들의 왕이 어쩐 일인가?”
레오의 질문에 엘프들의 왕.
지금은 어둠을 숭배하는 신도가 된 하이네스 하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침입자가 있습니다.”
“칩입자?”
“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몰라도 벌써 황궁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레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흠… 우리 아들이 생각보다 빨리 왔군? 텔레포트 마법이라도 쓴 건가? 아무리 천사의 날개라도 제국의 수도와 북부는 거리가 있는데.”
잠시 고민한 레오가 대답했다.
“혹시 내 아들 말고 다른 사람도 있나?”
“한 명은 베스케넨과 대적 중. 다른 한명은 아더 바이에른과 함께 있습니다.”
“그럼 다른 한 명을 좀 맡아줄 수 있나?”
레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물겨운 부자상봉에 외부인이 끼어들면 안 되니깐… 자네가 대신해 낯선 손님을 맞이해주게.”
다크 엘프.
하이네스가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사라졌다.
다시 혼자 남게 된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한 줄기 빛이 뻥 뚫린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레오는 그 빛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왔다….”
말을 흐린 그가 해맑게 웃었다.
“이제 다 왔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제국의 황궁.
사람들은 그곳을 두고 도시 안의 또 다른 도시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게 제국의 황궁의 크기는 다른 왕국이나 나라의 궁궐은 물론이고 웬만한 영지 하나의 크기를 자랑할정도로 넓었기 때문이다.
질 낮은 농담으로 제국 황궁에 출근하는 사람들도 제국 황궁을 다 돌아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에 발을 들인 아더는 생각했다.
‘으스스하네.’
비정상적으로 넓은 부지.
하늘을 가리는 건물들과 텅 빈 공간은 이곳이 집이라기 보다는 감옥이라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었다.
‘괜히 제국의 황궁을 철창 없는 감옥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구나.’
이런 곳에 집으로 두고 살면 어떤 기분일까?
곰곰이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몇 년은 고사하고 몇 일만 살아도 숨이 콱 막혀 죽어버릴 것이다.
그때 지니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진짜 흰 수염이에요?”
[그럼 진짜 흰 수염이지.]
“아니… 진짜 흰 수염 씨가 왜 공자님 권총에 있어요?”
[여러 사정이 있는데 설명하긴 귀찮군.]
“대단한 흑마법사라 들었는데 갑자기 막 공자님 몸 빼앗는 거 아니에요?”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했지. 내가 뭐하러 이런 꼴로 있겠나?]
비스트에 깃든 흰 수염과 나누는 대화였는데 생각보다 그 주제가 재미났다.
그 탓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직도 의심하는 거예요, 지니? 흰 수염 씨, 개과천선했다니깐요.”
지니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니 그래도… 흰 수염이란 사람은 워낙 악인이잖아요? 혹시 또 모를 일이니깐….”
“요즘 부쩍 걱정이 늘었네요.”
“이런 상황에서 걱정이 안 늘면 이상한 거죠.”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흰 수염이 다시 입을 열며 중얼거렸다.
[흠… 아더.]
“네?”
[조금 전에 자네도 들었겠지만 자네 아버지가 하늘섬을 수배한 모양이야.]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신기한 일이네요. 하늘섬은 흰 수염 씨의 말만 듣는 거 아니었어요?”
[그놈들이? 아니. 그 범죄자 놈들은 내 말도 안 들었어.]
“흰 수염 씨 말도 안 들었다고요?”
[그래. 어찌나 사고를 많이 치는지… 만약 내가 그 놈들보다 월등히 강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조직이 와해됐을 거야.]
아더의 눈이 커졌다.
“흰 수염 씨 힘으로 조직을 억누르고 있었단 이야기에요?”
[그런 셈이지. 뭐, 이건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깐….]
“……?”
[조금 전에 마주친 그 해골과의 대화에서 내가 고민을 해봤거든. 하늘섬이란 조직을 왜 만들었는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왜 해요?”
[자네한테도 중요한 이야기야. 그러니깐 들어봐.]
이 말과 함께 흰 수염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하늘섬이란 조직을 만들 이유가 뭐가 있나? 혼자서 잘먹고 잘 살아 천년이라는 수명을 누렸는데. 그런데 굳이 왜 악질적인 범죄자들을 끌어모아 이런 조직을 만들었을까?]
흰 수염의 말에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오… 듣고 보니 그러네?’
흰 수염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대륙 최악의 흑마법사로 무려 천년이나 군림해온 마법사다.
그런 그가 굳이 조직, 그것도 하늘섬이란 조직을 만들어 운영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하늘섬이란 조직을 만들 이유가 없지.’
하다못해 그 하늘섬으로 큰일을 도모했다면 이야기 달라지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흰 수염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늘섬은 그저 역사 속에 가려진 그림자였다.
그 어떤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어떤 때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역사의 뒤편에 숨어 세상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 탓에 아더도 서서히 의문을 느끼는 그때 흰 수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와서 보니 목적도 의지도 없었어. 그저 내 머릿속엔 이 조직을 유지하고 운영해야 한다. 이 생각밖에 없었던 거지.]
아더가 시선을 좁히며 질문했다.
“누가 흰 수염를 세뇌라도 시킨 건가요?”
[자네 날 뭘로 보는가? 나 흰 수염이야. 내가 세뇌를 시켰으면 시켰지, 걸릴 인간은 결코 아니지.]
“그럼 왜 하늘섬이란 조직을 유지하신 거예요?”
흰 수염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누가 부탁을 했어.]
“부탁이요?”
[그래. 내게 흑마법을 가르쳐준 사람… 정확히는.]
아더의 눈이 커졌다.
[악마. 그 존재가 내게 부탁을 했어. 천년이란 시간을 선물로 줄 테니 하늘섬이란 조직을 만들어 달라고.]
아더가 다급히 질문했다.
“그럼 그 존재가….”
[예측이지만 그렇군.]
흰 수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자네 아버….]
흰 수염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그와 동시에 아더의 걸음도 멈추었다.
“…….”
일렁이는 어둠 너머.
무언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더가 진실이의 손잡이를 살며시 잡으며 질문했다.
“거기 숨어있는 분. 나오시는 게 어때요?”
이 말에 어둠이 갈라지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지켜보던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어라? 귀쟁이?”
옆에 있던 지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귀쟁이라니요!”
“어… 지니 말한 거 아니에요.”
“그 단어 자체가 저를 비하하는 거라고요.”
아더가 입맛을 쩝 다시는 사이 어둠을 가르며 걸어 나온 엘프.
하이네스가 중얼거렸다.
“마중을 나왔습니다, 천사시여.”
이 말에 아더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중을 나왔다는 건 곱게 보내주신다는 건가요?”
하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앞을 쭉 걸어가시면 됩니다.”
“좋네요. 그럼 좀 비켜주시겠어요?”
“비켜는 드리겠지만 옆에 있는 분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지니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움직임을 느낀 아더가 살며시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거 곤란한데요. 이 사람은 제 일행이라.”
“일행분은 제가 모시고 있겠습니다.”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아무 짓도 안 합니다. 그저 황제와 천사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가벼운 담소를 나눌 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을 믿으라고요? 귀쟁… 이가 아니라 엘프분들이 다 착하고 예쁜 건 아는데 당신은 지금 적이잖아요?”
이 말에 비스트가 옅게 진동했다.
[믿어도 되네 아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흰 수염 씨?”
[저 엘프는 나와 마찬가지로 천년을 산 하이엘프. 동시에 엘프들의 왕이라 불렀던 여자.]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흰 수염이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하이네스 하란. 그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
이 말에 하이네스가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흰 수염?”
[오랜만이군 하이네스.]
“…당신의 목소리가 왜 그 권총에서 들리는 겁니까?”
[왜긴 왜야. 지금의 내가 이 권총이니깐 그렇지.]
하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같은 흑마법사가… 고작 그런 권총이 되었단 겁니까?”
[고작 그런 권총이라니? 이래 봬도 제법 매서운 놈인데.]
“…….”
[그것보다 자네도 그 황제란 작자에게 붙은 건가? 하늘 아래 두 명의 왕이 있을 수는 없을 텐데.]
하이네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는 황제지만 황제가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고작 그런 모습이 되었다지만….”
말을 흐린 하이네스가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흰 수염. 언제든 세상의 이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니깐요.”
흰 수염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내 가치를 인정받아서 기분이 좋군.]
“당신과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허나 지금은….”
말을 흐린 하이네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친 아더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약속을 안 깨신다 하지만 지니를 여기에 둘 수 없어요.”
하이네스가 대답했다.
“힘을 써서라도 그럼 묶어두겠습니다.”
“좋아요 바라던 바네요. 그게 가장 쉽고 빠른 대화수단이죠.”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비스트를 장전하려 할 때였다.
옆에 있던 지니가 그런 아더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지니?”
“공자님. 남을게요.”
아더의 눈이 커졌다.
“위험해질 텐데요?”
“여기에 왔으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그리고….”
말을 흐린 지니가 웃었다.
“시간 없다고 황자님도 그 위험한 곳에 남았는데 저도 당연히 그래야하지 않겠어요?”
아더가 할 말을 잃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 후 한 박자 늦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위험하면 소리쳐요. 언제든 달려올 테니깐.”
“당연히 그래야죠. 공자님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아더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하이네스를 지나쳐 어둠에 휩싸인 황궁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던 하이네스가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똑같은 귀를 가진 여자가 쉼호흡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엘프를 만날 줄 몰랐네요.”
지니의 말에 하이네스가 옅게 웃었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설마 이곳에서 제 백성(百姓)을 만날 줄이야.”
* * *
거대한 마천루 위.
그곳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던 카셀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아직도 여기 있나?”
이 말에 카셀이 지고 있던 팔짱을 풀고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시장님.”
“거의 하루종일을 여기에 서 있군. 소드마스터는 무릎 관절도 안 아프나?”
“오래 서 있다 해서 무릎 관절이 아프면 소드마스터라 불릴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윌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 카셀의 옆에 나란히 서며 질문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그 질문에 카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겨야 하는 싸움이지 않습니까?”
“근성 용기 각오. 이런 걸 묻는 게 아니야.”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묻는 거네. 자네는 그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지 않나?”
이 말에 카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고민 한 뒤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까?”
“여기까지와서 희망고문을 당할 생각은 없네.”
“…0에 수렴합니다.”
“…?”
“저희가 이번 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윌렛의 눈이 커졌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은 잠시 당황을 숨기지 못하다 간신히 대답했다.
“…차라리 희망고문을 당하는 게 나을 뻔 했군.”
“죄송합니다.”
“사과 안해도 되네. 그런데 정말 이길 확률이 전무하다고?”
이 말에 카셀이 시선을 돌렸다.
화악-!
하트의 상공을 지키는 7마리의 드래곤.
그리고 레버쿠젠의 군대와 바이에른 기사단.
그것도 모자라 아케인의 용병들까지보였다.
일전에 치렀던 싸움의 전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질적인 상승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카셀은 그럼에도 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없다고 생각했다.
“…놈들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입니다.”
이 말에 윌렛의 표정에 근심이 어렸다.
“괴물은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저희보다 병력의 수도 개개인의 전력도 강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승리를 생각한다는 건… 말 그대로 희망고문에 가깝죠.”
윌렛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리는 패배가 예견된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거군?”
“그건 아닙니다.”
“…?”
“아더. 그 친구가 계획대로 적의 수장의 목을 베어낸다면….”
말을 흐린 카셀이 눈빛을 번뜩였다.
“0에 수렴하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유일한 길입니다.”
윌렛이 그 모습을 훔쳐보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더. 그 아이가 또 옳은 판단을 한 모양이군.”
“그런 셈이죠. 대단한 친구입니다.”
이 말과 함께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카셀의 신체가 움찔 떨렸다.
갑작스러운 그 격렬한 떨림에 윌렛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질문했다.
“갑자기 왜 그러나? 무슨 일….”
“왔습니다.”
“뭐?”
카셀의 목소리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적의 군대가 왔습니다. 저 수평선 너머에.”
윌렛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카셀이 고개를 돌리며 거칠게 소리쳤다.
“시장님. 지금 즉시 달려가 모두에게 전해주십시오! 결전의 순간이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