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하트 위에 내려앉은 일곱 마리의 드래곤을 바라보던 하트의 시민들이 중얼거렸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전설 속의 드래곤이 무려 일곱 마리나 등장하지 않았는가?
드래곤이 공상의 산물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드래곤이 사라진 시대다.
천년 전 드래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 아니란 소리다.
그 탓에 하트의 시민들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며 드래곤들을 지켜볼 때였다.
붉은 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하트를 지키는 인간들. 너희들은 레버쿠젠의 가신이지만, 나의 가디언이기도 하다.]
이 말에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은 채 드래곤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움찔 놀랬다.
그 사이 붉은 빛 드래곤이 나직이 읊조렸다.
[가디언은 날 지키는 존재지만, 반대로 내가 너희를 지켜야 하기도 하지. 지금껏 많이 애써주었구나.]
이 말과 함께 병사들의 몸에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
깜짝 놀란 병사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들은 갑자기 빛이 나는 제 몸에 어쩔줄 몰라하다, 뒤늦게 상태를 깨닫고 경악했다.
“상, 상처가 치료됐어?”
그뿐만이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쌓인 피로도 사라졌다.
처음 겪어보는 신비로운 마법에 병사들의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드래곤의 마법?”
그 속에서 푸른 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에 멍하니 드래곤을 지켜보던 엘린이 화들짝 놀랬다.
허나 그보다 먼저 움직인 드래곤의 날개였다.
펄럭-!
단순한 움직임이었지만, 워낙 큰 날개 탓에 작은 돌풍이 일었다.
그리고 그 돌풍이 엘린을 감싼 걸 넘어 하트의 하늘 위로 올라갔다.
화악-!
먹구름으로 가득하던 하늘이 돌풍에 의해 점점 맑아졌다.
그 속에서 몇 달간 보지 못했던 환한 햇살이 하트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 따스함에 엘린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린 그때, 푸른 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속삭였다.
[레버쿠젠. 나의 기사야.]
이 말에 엘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제가 당신의 기사라고요?”
[그래. 레버쿠젠은 대대로 드래곤을 지키는 기사. 그리고 너는 현 레버쿠젠을 이끄는 당주.]
푸른 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날 지키는 기사를 만난 건 천년 이후로 처음이구나. 반갑구나, 나의 기사야.]
푸른 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의 말에 엘린이 어쩔 줄 몰라했다.
뭔가 이해가 가면서도 잘 이해 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어색했다.
그 사이 회색빛 드래곤이 카셀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아이.]
이 말에 카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래곤을 키워내고 드래곤의 손에 자란 인간. 그 인간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은 운명. 또는 인연이로구나.]
카셀이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참아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존재시여.”
[아니다. 오히려 이쪽이 감사해야지. 널 키워낸 우리의 혈족에게 무한한 감사를 해야겠구나.]
회색빛 드래곤의 말에 카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우울해졌다.
다시 만나게 된 드래곤.
라 하르칸 따위의 괴물이 아닌 진짜 이 땅의 지배자를 만나게 되니 그리운 한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고 싶습니다. 파라하 드 카셀’
자신에게 카셀이란 이름을 지어준 부모를 잠시 떠올릴 때였다.
검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거칠게 소리쳤다.
[감동의 재회는 여기까지!]
그 외침과 함께 검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운명은 크게 바뀌었으니!]
이 말에 카셀이 정신을 차리고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존재시여? 갑자기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니?”
검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북쪽을 바라보며 짧게 설명했다.
[악마와 천사.]
그 목소리에 깃든 것은 옅은 두려움이었다.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두 존재가 조금 전에 만났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당장 북쪽으로 가야 한다.]
카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 짧은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천사… 내가 아는 천사라면 한 사람뿐이다.’
아더 바이에른.
자신을 구원해준 미치광이 천사.
표정을 굳힌 카셀이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전원 준비! 지금 당장 북쪽으로 향한다!”
* * *
홀란 레버쿠젠의 부관.
알마레즈가 숨을 토해냈다.
“헉-!”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흙과 먼지로 뒤덮여 있던 몸에서 부스러기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허나 알마레즈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가 울부짖었다.
“가주-! 가주님!”
그 외침과 함께 그가 부산스레 시선을 돌릴 때였다.
붉은빛 피로 된 점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치켜뜬 그가 그 점막을 한동안 바라보다 뒤늦게 입을 벌렸다.
“가, 가주?”
눈을 감은 홀란 레버쿠젠이 놀랍게도 그 점막 안에 들어 있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그가 네발로 기어 점막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홀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점막이 사라졌다.
그 광경에 알마레즈가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이 점막이… 가주를 지키고 있었어?’
동시에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칼의 사내.
하늘을 가르며 등장한 드래곤.
그 드래곤의 주둥이에서 터져나온 거대한 에너지 파까지.
‘…그래 맞다. 라 하르칸. 그 괴물이 우리에게 드래곤 브레스를 쐈어.’
세상을 멸할 수 있다, 알려진 드래곤의 마법.
그랬기에 보통 상황이었다면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난 살아있다. 그 말은….’
누군가 그 브레스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었단 소리다.
생각과 함께 알라메즈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널브러진 레버쿠젠의 병사들 속에서 우뚝 선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
다른 이들과 달리 두 발로 선 사내는 피투성이였다.
등 뒤에 달린 새하얀 두 날개는 물론이고 검은 머리칼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온몸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광경을 숨을 죽여 지켜보던 알메레즈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더… 바이에른?”
이 말과 함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아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마레즈도 같이 어깨를 떨었다.
그 속에서 무언가 툭툭.
먼지로 뒤덮인 설원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알마레즈는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한참이나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더 바이에른이… 울고 있어?’
생각과 함께 알마레즈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그 사이 설원 위로 떨어지는 눈물의 개수는 더욱 많아졌다.
“…….”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천사가 소리 없이 오열한다.
그 거룩하면서도 비참한 광경에 알마레즈는 생각했다.
‘불쌍하구나.’
세계 최고의 칼잡이.
아더 바이에른.
그런 그가 이치에 맞지 않지만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그런 진실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죽어 있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사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
세상 그 어떤 아들이 이런 일을 겪고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알마레즈도 한 때, 누군가의 아들이었기에 그 감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섣부른 위로도 참견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아더 바이에른의 오열이 끝나기를 기다릴 때였다.
하늘이 갈라지며 무언가 등장했다.
“…!”
깜짝 놀란 알마레즈가 주춤 물러섰다.
그 사이 하늘 위에서 내려온 일곱 마리의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천사.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 말과 함께 일곱 마리의 드래곤이 아더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알마레즈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 사내에게 다가가지 마라!”
이 말과 함께 알마레즈가 칼을 뽑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알마레즈 아저씨!! 아니에요! 같은 편이에요!”
눈을 치켜뜬 알마레즈가 입을 벌렸다.
“아… 가씨?”
설원 너머.
놀랍게도 엘린 레버쿠젠이 말을 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닌 바이에른 기사단의 깃발과 레버쿠젠의 깃발도 흐릿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알마레즈가 탄성을 터트리며 자리에 주저앉았을 때, 드래곤들이 속삭였다.
[가엾은 천사야… 괜찮으냐?]
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더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일곱 마리의 드래곤이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드래곤들의 고요한 시선에 아더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물었다.
“…당신들은 적인가요?”
이 말에 드래곤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같은 편이다.]
[공동의 적을 둔 같은 편.]
[그러니 안심해라. 미래는 몰라도 지금의 너는 우리가 지켜주마.]
드래곤들의 이야기에 아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동의 적….’
그 말은 지금 눈앞의 드래곤들의 적도 제 아버지.
레오 바이에른이란 건가?
아더는 잠시 말없이 그 사실을 되내었다.
그 속에서 조금 전 보았던 광경들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는 아버지.
카셀의 영혼을 찢어버리며 웃고 있는 아버지.
요넬과 아이린.
그리고 자신을 보고 도구라 부르던 아버지.
그 모든 장면들이 한데 얽히고설켜 아더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아더는 강하게 부정했다.
‘아닐 거야… 아버지는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자신이 아는 아버지는 그럴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잔상으로만 보았던 아버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들도 연기를 한 거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아버지는 바이에른의 혈통에 집착했다.
그래서 그 혈통을 일깨우기 위해 여태 자신을 구해주며 도와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가?
그 사실에 아더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 어떤 죄도 부모를 죽인 죄만 못한다.
그 어떤 생물도 제 부모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는다.
‘나는 복수를 위해 그 원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더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자신감이 사라졌다.
인생을 걸고 달려나가던 목표가 흔들린 순간 아더 바이에른이란 인간의 정체성도 같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그 속에서 아더의 두 다리가 비틀거렸다.
털썩.
무릎을 꿇은 아더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제 모르겠어….’
말을 흐린 아더가 손에 쥔 칼의 글귀를 바라보았다.
[진실을 목도한 순간, 흔들리지 마라.]
그 글귀를 바라보며 아더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이런 진실이라면 마주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차라리 아버지가 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생각과 함께 아더가 처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공자님-!”
흐리멍텅하던 아더의 눈동자가 그 순간 천천히 움직여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두 귀가 뾰족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엇다.
고생을 꽤나 많이 했는지 예쁘장한 얼굴이 완전히 망가져 있엇다.
그럼에도 아더는 저 여자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지니.’
생각과 함께 아더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아더를 향해 달려오던 지니가 놀라 자지러졌다.
‘무, 뭐야!?’
지금 자신이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아더 바이에른이 놀랍게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어떤 때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미치광이 남자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에 지니가 옅은 두려움을 느꼈다.
‘뭐지? 또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르려는 거지?’
그 탓에 아더를 향해 달려가던 발걸음이 한 박자 늦고 말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웬지 모르겠지만 지금 걸음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연민.
그 중간 사이의 감정을 느끼며 지니가 마침내 아더에게 도달했을 때였다.
아더의 신체가 스르륵 앞으로 넘어졌다.
깜짝 놀란 지니가 그런 아더를 받아들었다.
자연스레 지니의 목가에 얼굴을 묻은 아더가 중얼거렸다.
“지니.”
지니가 목울대를 출렁거리며 대답했다.
“네, 네?”
“…잠시 어깨 좀 빌려도 돼요?”
지니의 눈이 커졌다.
“제 어깨를… 빌린다고요?”
“네… 눈물을 흘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이 말과 함께 아더의 가슴이 들썩였다.
그 감각을 밀착된 상태에서 느끼던 지니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사이 아더가 재차 부탁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잠시만 절 좀 가려주세요.”
지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
대신 말없이 오열하는 아더의 등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쉼 없이 흔들리는 남자의 등에는 무거운 슬픔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공자님이… 아니. 아더 바이에른이….’
놀랍게도 슬퍼하고 있었다.
미치광이 남자가 진짜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