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아더는 쉬지 않고 달리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꽤 깊은 곳이구나.’
처음 있던 곳에서 꽤나 멀리 벗어났는데도,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감을 곤두세웠으니, 제 감각이 틀릴 리는 없고 그만큼 지금 있는 이 굴이 깊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행히 방향은 틀리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귓가에 느껴지는 숨결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숨결의 주인이 카셀이건 라 하르칸이건,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 지금 가는 방향은 확실히 맞았다.
‘흠… 어차피 고민해봐야 알길도 없으니, 일단 달리고 봐야 하나?’
턱을 쓰다듬던 아더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요소를 따지기 보다는 지금은 상황에 집중하는 게 나아보였다.
그렇게 다시 달리는 데 집중하려는 순간, 가슴팍이 짜르르 진동했다.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니 총구를 빼꼼 내민 비스트가 보였다.
[…자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비스트에 깃든 혼령.
대륙 최악의 흑마법사 흰수염이었다.
아더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오 흰수염 씨! 중요한 때에 잠에서 깨셨네요?”
[그 오랜만의 단잠을 자네가 다 망쳐버렸어.]
“에구… 죄송해요. 드래곤과 싸우느라 그랬어요. 꽤 시끄러웠죠?”
아더의 말에 흰수염이 잠시 침묵하다, 질문했다.
[…드래곤과 싸워?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로 결심이라도 했나?]
“아, 그게 아니라 드래곤이 제 지인분들을 노려서요.”
[…드래곤이 인간을 노려? 그게 더 말이 안 되는데? 현재 대다수 드래곤들은 동면에 들어가서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흠… 설명해 드릴까요?”
흰수염이 혀를 찼다.
[설명까지 해야 하는 걸 보니, 또 뭔가 거창한 일에 휘말린 모양이군.]
“그렇게 까지 거창하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하니 더 불안하군. 일단 말해보게. 상황이나 듣고서 이야기를 나누지.]
흰수염의 말에 아더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던 흰수염은 이내 경악을 토해냈다.
[…뭐?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그 놈과 지금 싸우고 있다고?]
“네. 그래서 말인데 흰수염 씨.”
[…?]
“그 괴물의 정체, 혹시 뭔지 알고 계세요? 박학다식한 흰수염 씨라면 뭔가 정보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
아더의 말에 흰수염이 고민하다 대답했다.
[…알기야 하지.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그 놈과는 마주친 적도 있으니깐.]
아더의 눈이 커졌다.
“어? 그 괴물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요?”
[그래. 그 때는… 드래곤이라 부르기 민망한 모습이었어. 괴물도 아니었지. 상처입고 쓰러져 거의 다죽어가는 도마뱀이었으니깐.]
흰수염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 하르칸이 다 죽어가는 도마뱀이었다고?’
세상을 진동시키는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던 그 괴물이?
아더는 납득하지 못하고 다시 질문했다.
“이상한데요 흰수염 씨? 제가 본 그 괴물은 다죽어가는 도마뱀이 아니라 괴물 그 자체였는데?”
흰수염이 강하게 부정했다.
[적어도 내가 본 그 놈은 괴물이 아니었어.]
“흠…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유야 있지.]
“그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되나요?”
아더의 말에 흰수염이 잠시 텀을 두고서 대답했다.
[내가 죽였거든.]
“…?”
[마주치자 마자 덤비길래, 모가지를 꺽어놨지. 확실히 죽였으니, 착각은 아닐 거야.]
아더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흰수염 씨가… 라 하르칸을 죽였다고요?”
[그래.]
“그럼….”
조금 전 마주친 그 괴물은 뭐라 말인가?
그 때 귓가로 느껴지는 숨결이 강한 바람이 되어 아더를 덮쳤다.
“…!”
깜짝 놀란 아더가 상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어둠에 휩싸여있던 통로 끝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을 같이 발견한 흰수염이 중얼거렸다.
[흠? 뭔가 이상한데 저 빛?]
아더가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이상하다고요 저 빛이?”
[…그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저건 빛이 아니라 마력의 덩어리야.]
“마력의 덩어리요?”
[그 이상은 직접 봐야 알겠어. 그러니 멈추지 말고 어서 달리게나.]
흰수염의 재촉에 아더가 고민하다 일단 그러기로 했다.
라 하르칸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저 빛과 느껴지는 숨결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게 더급했다.
‘저 숨결의 주인공이 라 하르칸이면, 죽었다 살아난 게 문제가 아니니깐.’
그렇게 상념을 잊은 아더가 달리는 속도를 높혔다.
순식간에 빛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그 상태에서 아더가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진실이와 비스트를 꽉 움켜잡았을 때였다.
갑자기 통로의 크기가 넓어지며, 어둠이 사라졌다.
그 이변에 아더의 눈이 커진 순간, 흰수염이 탄성을 터트렸다.
[…드래곤의 무덤?]
그 탄성과 함꼐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오셨습니까 천사님.]
라 하르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상의 울림이였다.
* * *
아더는 눈을 치켜뜬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시체?’
조금 전까지 어둠 뿐인 통로와는 빛이 있는 곳은 거대한 광장이었다.
그리고 그 광장에 가득 쌓인 것은 사체(死體).
그것도 아주 거대한 무언가의 사체였다.
아더는 그 광경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설마 저건….”
아더의 말을 흰수염이 받았다.
[드래곤의 사체군.]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저게 모두… 드래곤의 시체란 건가요?”
광장 안에 가득 쌓인 드래곤의 사체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족히 수십 마리.
드래곤의 개체수가 아주 희소하다는 걸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드래곤이 여기에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대륙에 있는 모든 드래곤이 여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그 사실에 아더가 약간의 놀람을 느낄 때였다.
귓가로부터 낯선 울림이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천사님.]
“…!”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사체위에 떠있는 빛 한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봤던 빛이다.’
눈빛을 빛낸 아더가 대답했다.
“천사는 아니에요. 정확히는 천사의 혈통이에요.”
이 말에 빛으로부터 낮은 하울링이 들려왔다.
[재밌는 말이로군요. 인간의 말로 치면 농담이라는 겁니까?]
“오…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네요. 그런데 이건 농담이 아니에요. 진담이란 거죠.”
[그건 진담이 아닙니다. 당신은 틀림없는 천사입니다. 천사의 혈통 같은 게 아니지요.”
확신에 찬 빛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보고 나를 천사라 확신하는 거지?’
지금은 날개를 펼치지도 않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 아더의 시선에 낯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카셀!”
빛이 떠올라 있는 사체 위.
회색 머리칼의 사내가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다급히 걸음을 옮긴 아더가 쓰러진 카셀의 코끝 위에다 손을 가져다 됐다.
‘살아있어!’
아주 가늘지만 확실한 숨결이 느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어쉰 아더가 카셀의 위에 떠있는 빛을 향해 질문했다.
“당신이 도와주신 건가요?”
[도와주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카셀이 스스로 이곳을 찾아왔다고요?”
[그는 드래곤이 키운 기사. 그런 기사가 드래곤의 품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빛의 말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말하는 당신이 드래곤이란 소린가요?”
빛이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정확히는 죽은 드래곤이 모여 만들어진 사념체입니다.”
“사념체요?”
[전하고자 하는 뜻을 남기기 위해 남겨진 혼령… 그 정도로 이해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천사시여.]
이 말에 흰수염이 속삭였다.
[저 말은 사실이야. 지금 자네한테 말을 거는 건 드래곤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일종의 유언이라네.]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여기 올 줄 어떻게 알고 유언을 남겨요?”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마법의 주종이라 불리는 드래곤쯤 되면 미래도 보지 않겠나?]
흰수염의 말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럴 싸한데?’
드래곤은 기적을 부르는 생물이다.
그런 드래곤에게 있어 미래라는 미지의 영역을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 지 몰랐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아더가 빛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빛님?”
빛이 천천히 대답했다.
[원하는 거라기 보다는 꼭 보여드릴 장면이 있습니다.]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꼭 보여줘야 할 장면이요? 그게 뭔데….”
그 순간 허공에 떠오른 빛이 예고없이 폭발했다.
“…!”
깜짝 놀란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그 빛에 눈을 감은 사이, 중후한 울림이 귓가를 광광 울려되었다.
[지금부터 진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천사님. 부디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지 마시길.]
이 말과 함께 세상이 뒤바뀌었다.
* * *
라 하르칸.
그는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대륙이 빛과 어둠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을 때, 탄생한 그는 곧 드래곤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자신이 왜 드래곤이 된지는 몰랐다.
그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드래곤이 된 상태였다.
그렇게 몸을 가지게 된 그는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먹을 게… 먹을 게 필요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을 먹어도 살이 찢어질 것 같은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을 방황하던 그는 어린 헤츨링을 마주했다.
자신과 똑같은 드래곤의 피를 가진 새끼.
허나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갓 태어난 생명체.
그 어린 새끼 드래곤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충동에 못이겨 어린 헤츨링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던 굶주림이 사라졌다.
[오…오오!]
처음으로 굶주림으로 해방된 라 하르칸은 눈물을 흘렸다.
제 동족의 새끼를 잡아먹었다는 죄책감보다는 굶주림에서 해방되었던 사실에 더욱 감격한 그였다.
허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굶주림이 찾아왔다.
라 하르칸은 결국 참지 못하고 또 다른 헤츨링을 잡아먹었다.
그렇게 한 마리 두 마리.
굶주림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헤츨링을 잡아먹던 그는 어느사이엔가 깨달았다.
자신의 동족의 새끼를 잡아먹는 그 숫자가 열을 넘어간다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성체가 된 드래곤들이 찾아왔다.
[사악한 괴물아.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라 하르칸을 죽이기 위해 드래곤의 권능인 드래곤 브레스와 용언을 썼다.
라 하르칸도 죽고 싶지 않았기에 드래곤의 권능을 써서, 그들과 맞서 싸웠다.
그 치열한 다툼 속에서 라 하르칸은 점점 괴물이 되어갔다.
제 앞을 가로막은 드래곤들의 심장을 파먹고, 그들의 피로 몸을 적시니 놀라운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두개 였던 눈동자가 세 개로 늘어났고, 꼬리도 하나 더 생겨났다.
그뿐만이 아닌 그 드래곤보다도 강력한 권능도 지니게 되었다.
허나 긴 싸움은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한 드래곤이 된 라 하르칸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수 십마리의 드래곤들에게 둘러싸인 라 하르칸은 심장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족을 잡아먹고 힘을 키운 이 심장은 세상을 지키는 보석이 될 것이다.]
드래곤의 상징이라 불리는 드래곤 하트를 빼앗긴 라 하르칸은 도망쳤다.
대륙의 끝.
어쩌면 그 너머로 숨어들었다.
그 와중에도 느껴지는 지독한 허기는 그의 정신을 미쳐버리게 했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 생존의 욕구가 더 강렬했다.
살고 싶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다시 그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렇게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던 그는 한 마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게 무슨 괴물이꼬? 참으로 기괴하게 생겼구나.’
흰수염을 가진 그 마법사는 인간임에도 드래곤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라 하르칸은 그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껴 발버둥쳤지만 결국 그의 손에 목이 분질러지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실험체로 쓰고 싶지만 너를 잘못 건들이면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이 망할 것 같구나.’
그렇게 흰수염을 가진 마법사의 손에 마지막 생명까지 빼앗긴 라 하르칸은 차가운 북부 대륙에서 죽어갔다.
그 시간은 길었고 고독했다.
드래곤을 잡아먹고 키운 힘은, 그를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 탓일까.
이미 끝이 다가왔음을 눈치챘음에도, 생존의 욕구는 더욱 강해졌다.
[…죽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살아서 이 세상을 즐기고 싶었다.
이 굶주림을 채워줄 드래곤들의 피와 심장을 더 먹어치우고 싶었다.
그 갈증과 생존의 욕구 속에서, 그의 눈이 감기려 할 때였다.
북부 설풍을 뚫고 한 인간이 등장했다.
‘드디어 찾았구나.’
고개를 든 라 하르칸의 눈이 치켜떠졌다.
그 인간의 등 뒤에는 놀랍게도 날개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검은 날개가.
그 검은 날개를 가진 인간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질문했다.
‘날 따르면 그 목숨을 구해주마. 사악한 드래곤아. 계약을 맺을 것이냐?’
라 하르칸이 턱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너는…누구지?]
검은 날개를 가진 인간이 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름은 칸 마드리드.’
이 말과 함께 검은 날개를 가진 인간의 손길이 라 하르칸의 주둥이를 쓰다듬었다.
자연스레 고개를 든 라 하르칸은 인간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세상 모든 것을 거머쥘 남자다. 나랑 함꼐 하면 내게 세상을 주마.’
광기에 찬 눈동자.
그 눈동자가 달콤한 유혹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