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무역상인 하진은 긴 하품을 쏟아냈다.
“크하함… 이거 나른하구만.”
드넓은 평야.
환하게 내리쬐는 햇살.
마차 위에 앉아 그 그림 같은 풍경들을 바라보며, 말을 몰고 있자니 절로 몸이 나른해졌다.
허나 아무리 잘 닦인 도로라 해도, 졸음운전을 해서는 안 되는 일.
하진은 억지로 잠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위대한 칼, 위대한 장미! 아아-! 제국의 심장, 도르문트가 진격하니~”
지난 몇 년 끝에 제국의 숙원이라 불리던 정복전쟁을 모두 끝마친 장미 가문 도르문트.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였는데, 어느 주점을 가나 이 노래가 들려 올 정도로 제법 인기가 좋았다.
그렇게 하진이 도르문트 노래를 흥얼거리며 잠기운을 몰아 낼 때,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하진이 허둥지둥, 우비를 꺼내들었다.
그 사이 갑자기 쏟아진 비에 놀란 말들이 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휘이잉-!
“진정해라 요놈들아! 그냥 비야!”
고삐를 쥐어당기자, 금세 말들은 얌전해졌다.
한숨을 푹하고 내어 쉰 하진이 투덜거렸다.
“아니 마른하늘에 웬 비가 쏟아져… 응?”
하진이 눈을 끔뻑였다.
도로 한 가운데, 웬 사내가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도로 한가운데서 왜 저러고 있어?’
하진은 잠시 당황하다,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거기서 뭐하시는 거요!”
그의 외침에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맞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라 중얼거렸다.
“와… 사람이다.”
* * *
지하도시에서 빠져나온 아더가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드넓은 평야였다.
‘지하도시는 아케인에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처음 방문했을 때, b구역으로 들어가 아케인 지하에 위치한 줄알 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평야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던 아더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흠… 일단 아케인으로 가야겠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제국의 수도가 아케인의 거리를 생각하면 열차를 타야 했다.
‘걸어서 간다고 쳤을 때 세달은 족히 걸리니깐.’
그렇게 아케인으로 돌아기로 결정을 내린 아더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머릿속으로 문득 든 의문이 움직이려던 발을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케인이 어디 쪽이지?’
잠시 머리를 긁적인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노움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과 함께 아더가 지니의 혈통을 일으켰다.
허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잠시 눈을 끔뻑인 아더가 다시 한 번 지니의 혈통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당황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뭐지? 왜 정령들이 소환이 안 되는 거지?”
그 때 소나기가 쏟아졌다.
쏴악-!
오래만에 보는 그 빗줄기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와… 비다.’
그 검은 공간에 너무 오래 갇혀 있던 탓일까.
쏟아지는 빗줄기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그렇게 멍하니 쏟아지는 폭우를 맞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뭐하시는 거요!”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마차를 끌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눈을 치켜뜬 아더가 중얼거렸다.
“와… 사람이다.”
그 사이 중년 사내가 재차 소리쳤다.
“거기서 뭐하고 있냐니깐!”
그의 질문에 아더가 대답 하려다 흠칫 어깨를 떨었다.
‘사람하고 대화를 어떻게 하더라?’
너무 오랫동안 그 검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탓일까.
사람과 대화하는 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아더가 적당히 소리쳤다.
“비 맞고 있는데요?”
“그러니깐 비를 왜 맞냐고!”
“음…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아더의 대답에 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너무 오랜만이라서 비를 맞는다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하진의 시선이 가늘어질 때였다.
이번에는 아더가 소리쳐 물었다.
“혹시 이쪽이 아케인으로 가는 방향이 맞는 건가요 선생님!”
아더의 말에 하진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이쪽으로 가는 건… 맞소만.”
“아하.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아더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진이 찝찝한 마음을 털어내고서 소리쳤다.
“가는 길이 아케인이면 잠시 마차에 타겠소!?”
그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오. 태워주시는 건가요?”
“그렇게 처량하게 걸어가는 데, 어떻게 모른 척 하겠소?”
아더가 환히 미소지었다.
“태워주시면 감사하죠. 그런데 사례로 드릴 게 없는데요?”
“잠깐 태워주는 걸로 사레는 무슨. 일단 올라오기나 하게.”
하진의 말에 아더가 몸을 돌려 마차로 다가왔다.
자리를 내준 하진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뭐야? 왜 이렇게 잘 생겼어?’
그 잘생김이 어느 정도였냐면, 그가 본 남자 중에서 최고로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탓에 하진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어,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되나?’
그런데 그 부잣집 도련님이 왜 길 한가운데서 비를 맞고 있지?
그 사이 마른 수건을 받고서 물기를 털어내던 아더가 씩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제 이름은 아더에요.”
“…하진이네.”
“네 하진 씨. 만나서 반가워요.”
하진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아케인에 가는 데 왜 말도 없이 걷고 있어?”
“아, 제가 어디에 갇혀 있었거든요.”
“…갇혀 있어?”
“네. 하진 씨는 아케인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하진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마차를 끄는 걸 보면 딱 봐도 무역상인 아니겠나?’
“오호. 그렇군요. 뭘 파시는 데요?”
“대마.”
아더의 눈이 커졌다.
“대마요?”
“…왜 그리 놀라? 아케인에 대마파는 상인이 한 둘이 아닌데.”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아케인에 대마를 파는 상인이 한 둘이 아니라고? 그새 약쟁이들이 늘었나?’
그 때 아더의 눈치를 보던 하진이 슬며시 질문했다.
“그런데 진짜 자네 갇혀 있었던 거야?’
“아, 네.”
“누구한테?”
“흑마법사한테요.”
“…흑마법사?”
“네. 웬 흑마법사가 갑자기 열차를 습격했지 뭐에요? 덕분에 괴상한 저주에 갇혀 방금 막 탈출한 참이에요.”
아더의 말에 하진이 눈을 끔뻑였다.
흑마법사가 아케인의 열차를 공격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뭐지 이 놈?’
설마 요즘 젊은이들 식, 농담인가?
그런데 표정을 보니, 또 농담 같지는 않았다.
그 탓에 하진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 할 때, 갑작스러운 총성이 울려퍼졌다.
탕-!
깜짝 놀란 하진과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도로를 점검하고 있는 일당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하진과 똑같은 마차를 일렬로 세워놓고, 검문을 하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은 자들한테는 놀랍게도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옆에 있던 하진이 탄식을 터트렸다.
“하… 운도 더럽게 없군. 하필 수색경찰분들의 검문에 걸리다니.”
아더의 눈이 커졌다.
“수색경찰이요?”
“그래. 자네도 얼른 상납비 준비하게.”
“…상납비라니요?”
“없다는 소리 하지말고 얼른 준비하게! 수색경찰분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 잘못하면 감옥에 가!”
하진의 재촉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케인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색경찰이 검문을 하는 것도 신기한데, 상납비를 거둬들이다니?
그 때 도로를 점검하고 있던 일당의 무리가 다가왔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아더의 입이 벌어졌다.
‘오… 뭐야? 저분들 해적 아니야?’
착각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 떴지만 아니었다.
수색경찰들의 가슴 팍에 새겨진 마크는 놀랍게도 아케인의 뒷거리를 양분하던 세력 중 한 곳인 [해적]의 마크였다.
‘…뭐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해적 분들 출세라도 했나?’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다가온 수색경찰이 강압적인 말투로 권유했다.
“수사 중이요. 협조해주시오.”
그들의 말에 하진이 비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이고! 당연하죠! 뭐든 수색하십시오!”
그 미소에 수색경찰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하진은 당연하다는 듯 은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수색경찰이 씩 미소짓더니, 이번에는 아더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저도 줘야 하나요?”
아더의 질문에 옆에 있던 하진이 놀라 소리쳤다.
“자, 자네 뭐라는 거야! 아케인의 치안을 위해 힘쓰시는 분들인데 얼른 드려야지!”
하진의 말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던 수색경찰이 다시 아더를 바라봤다.
허나 그 집요한 시선에도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하진이 대신 돈을 건네주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수색경찰 여러분! 이 친구가 아케인에 처음 와서….”
하진의 말에 수색경찰 스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무리 초행이라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니깐 주의하시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은혜를 배풀어주셔서!”
하진의 너스레에 수색경찰들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흠… 아무리 봐도 해적분들인데, 어떻게 아케인의 수색경찰이 된 거지?”
그 때 옆에 있던 하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자네! 미쳤나! 왜 수사에 협조를 하지 않는 게야!”
그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 수사 협조가 돈을 주는 거였나요?”
“당연하지! 수사에 협조하는 데 돈을 안주면 감옥으로 끌려가는데!”
하진의 말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그건 수사에 협조하는 게 아니라, 뇌물을 받치는 거 아닌가?
아더의 상식으로는 그랬지만, 워낙 진지한 하진의 표정을 보니 질문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는 한 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케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뒷거리 출신 해적이 아케인의 수색경찰이 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아더는 참지 못하고 결국 질문했다.
“하진, 뭐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아더의 질문에 심술이 나 있던 하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1실버나 내놓고 질문하게.”
“…아 지금, 돈이 없는데 나중에 드리면 안 될까요?”
“나중에 줄 수는 있는 거고?”
“물론이죠. 1실버가 아니라 금화로 드릴게요.”
하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진짜 여러 의미에서 독특하구만?”
“그런 소리를 종종 듣곤 하죠. 그래서 말인데….”
말을 흐린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지금이 제국력으로 몇 년도에요?”
아더의 질문에 하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자네 어디 갇혀 있기라도 했나? 하 거참….”
말을 흐린 하진이 품속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아케인에서 가장 유명한 잡지사에서 발행한 신문이었다.
“읽어보게. 지금이 몇 년도인지.”
* * *
하진은 힐끔 아더를 훔쳐보았다.
신문을 읽기 시작한 뒤로부터, 표정이 사라진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보였다.
‘…아니, 진짜 어디 갇혀 있기라도 했나? 뭘 저렇게 놀란 표정이야?’
그 탓에 괜히 이 자를 태웠나 후회가 들었다.
수색경찰을 앞에 두고 상납비를 내지 않지 않나, 흑마법사에게 갇혀 있다는 해괴한 소리를 하지 않나.
‘얼굴은 멀쩡히 생겼는데, 정신 나간 미친놈도 아니고… 후우.’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불안감을 털어냈다.
어차피 이제 아케인은 코앞이었다.
이제 이 사내와 작별이고 더 이상 이상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차에 모는 데 집중한 하진이 여전히 신문에서 눈을 때지 못하는 아더를 향해 말했다.
“이제 아케인에 도착이야. 내려야 해.”
하진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아더가 대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꾸벅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그 모습에 하진이 짧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수고하게.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또 보지.”
그렇게 먼저 아더를 내려준 하진이 먼저 아케인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늦은 건 아닌데, 빨리 온 것도 아니었네.”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아케인의 성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서 휘날리는 깃발은 장미문양.
놀랍게도 [도르문트]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이 미쳤구나. 아니면 내가 다시 미친놈이 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