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아른거린다.
운철검.
레오 바이에른의 유품이자 운석으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아더는 오랜만에 보는 운철검을 잠시 지켜보다,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후웅.
공기가 베였다.
한순간이지만 주변을 감싸던 어둠도 갈라졌다.
그 변화에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할 수 있어.’
막막하기만 하던 흰 수염의 저주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그 사실에 아더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검을 내리그었다.
후웅.
이번에도 처음과 똑같이 위에서 아래.
육체의 떨림도 호흡도, 운철검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졌다.
그 변화에 이번에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부족해. 이게 아니야.’
고개를 저은 아더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이 내리그었다.
후웅.
한 칼잡이의 고독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이 공간에 들어와 좋은 점이 있다면 육체적인 생리 현상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어.’
그 탓일까.
육체의 피로 또 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수십 번, 수백 번 검을 휘둘러도 근육은커녕 호흡마저 일정했으니.
그 덕에 아더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후웅-!
처음에는 몇 번을 휘둘렀는지 그 횟수를 셌지만 1000번을 넘어간 순간 관둬버렸다.
어차피 이 어둠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일격이 필요했다.
그 때까지, 몇 번의 검을 더 휘둘러야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평생 휘둘러야 할지도 모르지.’
물론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더는 자신이 있었다.
완벽을 넘어, 흑마법사의 사악한 주술을 베어낼 일격을 손에 넣을 자신이.
‘검만큼은 단 한 번도 날 배신한 적이 없어.’
그 확신과 함께 다시 검을 휘둘렀다.
후웅.
고독한 수련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 * *
아더는 생각했다.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 일주일? 1년?
어쩌면 10년이 지났을지도 몰랐다.
시간이란 개념이 무뎌졌으니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었고, 그 탓에 체감상 느껴지는 시간은 엄청나게 길었다.
‘아버지는 말했어. 이곳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다고.’
그 시간의 다름이 어떻게 다른지는 안타깝게도 듣지 못했다.
이곳의 하루가, 바깥 세계의 1년이 될 수도 있었고 이곳에서의 1년이, 바깥 세계의 하루가 될 수도 있었다.
후자라면 다행이지만, 전자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이유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 두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면 검을 휘두르는 의미가 없었다.
그 탓일까.
처음으로 칼끝이 흔들렸다.
후웅-!
일정하던 일격에도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그 변화를 지켜보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이런 가정이 필요 없어.”
지금 중요한 건 칼과 나.
그 다음에 이런 고민을 해도 늦지 않았다.
생각을 끝마친 아더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후웅.
잃어버렸던 박자가 다시 돌아왔다.
운철검의 빛도 다시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변화에 살며시 아더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후웅.
다시 검을 휘두른다.
모든 고민과 잡념을 검에 담아.
* * *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 과정에서 아더는 잡념과 상념을 버렸다.
지금의 이 순간에 있어 그런 것들은 불필요했다.
오로지 모든 정신을 칼끝에 집중한다.
위에서 아래로, 어둠을 베어내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이 무식하고, 반복적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지 혹자는 의문을 제기할지 몰랐다.
그만큼 제3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무식한 행위기는 했으니.
하지만 아더는 달랐다.
후웅.
처음 100번의 내리친 끝에 리듬과 호흡을 찾았다.
후웅.
처음 1000번의 내리친 끝에 육체의 중심과 박자를 잡았다.
후웅.
그 뒤는 횟수를 세지 않았기에 몇 번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처음과 비교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정교하고 날카로운 일격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더는 부족함을 느꼈다.
‘누군가 말했어.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마나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도 필요하다고.’
그 정신적인 성장은 검과 하나가 되는 것.
그 경지를 칼잡이들은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 불렀다.
‘과연 내가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여태 수 없이 검을 휘둘러왔지만, 검과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사람과 검이 하나가 된다 말인가?
그 탓에 상념에 빠져들 뻔 한 아더였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후웅.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지나야 할 단계이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건 불가능을 따는 게 아니라 평소처럼 검에 모든 정신을 쏟아 붓는 것이다.
결론을 내린 아더가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후웅.
검이 어둠을 가른다.
그 변화와 함께 두터운 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 * *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더는 이제 생각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생각 할 거리도, 고민도 이제 다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 덕에 아더의 정신은 어둠을 가르는 운철검에 온전히 집중되었다.
후웅.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보다는 제 두 손에 쥔 운철검이 더욱 익숙하게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것보다 칼을 휘두르는 게 더 편안하다 느낄 정도.
그 변화와 함께 아더의 손에 쥔 운철검에 조금씩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웅.
하지만 아더는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생각이란 것을 멈추고, 칼과 하나가 된 지금.
그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칼에 집중한 것이다.
그 사이 운철검을 감싼 빛은 더욱 커져갔다.
후웅.
그 빛이 커짐에 따라 어둠이 갈라지는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주변의 어둠은 깊고 끈적했다.
운철검에서 터져 나온 빛에 의해 사라진 부분을 금방 주위의 어둠이 메꾸어 버렸으니.
그러나 아더의 검도 멈추지 않았다.
후웅.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어둠을 베어나갔다.
그 덕에 어둠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사라졌다.
문득 정신을 차린 아더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는 안 돼.’
이 공간을 베어내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더 큰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끝마친 아더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후웅.
이번에도 어둠이 베였다.
허나 만족하지 않은 아더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신검합일이란 건 칼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니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커다란 전율이 일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 어떤 고결한 칼잡이도, 칼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칼을 다루어야 할, 칼잡이가 왜 칼과 하나가 돼야 해?’
칼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
그런 칼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가 살인도구가 된다는 의미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더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알 것 같네. 소드마스터가 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칼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칼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검합일… 칼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 였던 거였어.’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나는 이 칼을 완벽히 복종시켰는가?’
잠시 고민한 아더는 손아귀에 쥔 운철검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운철검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화악-!
터져나온 빛이 주변의 어둠을 잡아먹는다.
아더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그 빛에 반항이라도 하듯 일렁거렸다.
허나 운철검에서 터져 나온 빛이 더 강했다.
그 변화 속에서 어둠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파지직…!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그 두근거림과 함께 곳에와 수백 번 수천 번을 휘두르며 익힌 감각들이 떠올랐다.
검을 들어 올리는 과정, 호흡, 정신.
그걸 넘어 제 손아귀에 쥔 운철검의 감촉까지.
그것들이 한데 모여, 다른 누군가의 검이 아닌 ‘아더 바이에른’의 검이 마침내 탄생했다.
‘그렇구나… 검을 완벽히 통제하면 얻게 되는 일격.’
다른 누군가의 검도 아닌, 아더 바이에른의 일격이라 부를 수 있는 검.
그것이 바로 소드 마스터로 가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은 순간, 운철검에서 터져 나온 빛이 검기를 넘어 무언가를 형성한다.
파아앗-!
검강(劍罡).
오로지 검의 끝에 다다른 자들만이 다룰 수 있는 절기.
베어낼 수 없는 것도 베어내 버린다면 모든 칼잡이들이 소망하는 그 최후의 일격을 검에 두른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베어낼 수 있어.”
그 확신과 함께 아더가 검을 치켜든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이곳에 와 수만 번 내리 아더 바이에른의 일격을 검에 담았다.
그 순간.
와자자창-!
어둠이 빛에 잡아먹히며 거친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세계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의 입이 벌어진 그 때, 누군가 속삭였다.
[잘했다 아더.]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제 손에 쥐어져 있던 운철검이 어느 사이엔가 뒤편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아더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쭉 지켜봐주고 있었군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콰앙-!
천 년을 산 흑마법사 흰 수염.
그의 저주가 마침내 깨진 것이다.
* * *
감고 있던 눈을 뜬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흘러나온 탄성과 함께 줄곧 보아왔던 어둠이 아니라 낯선 주변이 시야에 담겼다.
무너진 폐허.
비처오는 햇살.
잠시 고민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여기는 제단이잖아?”
그럼 돌아온 건가?
잠시 고민한 아더가 제 몸을 더듬었다.
잘잡힌 근육과 완성된 골격이 느껴졌다.
그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촉에 아더가 탄성을 흘렀다.
“와… 드디어 돌아왔어.”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길게 숨을 들이셨다, 내쉬었다.
청량한 공기가 페부로 들어온 순간, 아더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뭔가 신기하네.’
너무 오랫동안 그 검은 공간에 갇혀 있어서 그런 걸까.
아직도 자신이 돌아온 것도, 살아있는 것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 어딘가 어긋난 괴리감 속에서 아더가 잠시 넋을 잃었을 때였다.
제단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썩은 시체가 되어버린 흰 수염이었다.
“오?”
그의 상징인 흰 수염만이 유일하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흰 수염 씨가 있는 걸 보니 진짜로 돌아왔네.”
걸음을 옮긴 아더가 흰 수염에로 다가가 툭,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 순간 흰 수염의 신체가 먼지가 되어 휘날렸다.
“…가셨네요, 흰 수염 씨.”
한 차례 묵념한 아더가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뻥 뚫린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보였다.
아더는 고민하다, 뱀파이어 로드 혈통을 일으켰다.
파앗-!
자리에서 뛰어오른 아더가, 그대로 허공을 날아 제단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멸망한 도시 하나가 보였다.
낡고 부서진 건물들 사이를 이름모를 식물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물줄기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아더가 중얼거렸다.
“지하도시구나… 흠. 그런데 시간이 꽤 많이 지난 것 같은데?”
건물 곳곳에 이끼와 이름 모를 풀들이 자란 걸 보니, 하루 이틀이 지난 게 아닌 듯싶었다.
그 탓에 고민에 빠진 아더가 잠시 발을 구를 때, 저 멀리 부러진 마검이 외로이 서 있는 게 문득 시야에 담겼다.
“아….”
탄식을 흘린 아더가 걸음을 옮겨 부러진 마검을 붙잡았다.
한 차례 옅게 떨린 마검이 조금 전 흰 수염처럼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 광경에 아더가 중얼거렸다.
“날 기다려준 거였구나.”
아더는 손잡이 밖에 남지 않은 마검을 눈가를 닦았다.
물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입맛을 쩝 다신 아더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마검아. 아무래도 널 위해 흘려줄 눈물은 없나 보다.”
어깨를 으쓱인 아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검의 짝꿍인 비스트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흠… 운석의 충돌하면서,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렸나?’
충분히 그럴 듯 했다.
흰 수염이 시전한 그 마법은 재앙 그 자체였으니.
결국 포기 한 아더가 마검의 손잡이를 땅에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검의 묘를 만들어준 아더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수고 많았어. 이제 편히 쉬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더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한 번 빠져나가 볼까.”
지하도시에도 천장이 뚫린 것을 보니, 이대로 날아오르면 될 듯 싶었다.
그 속에서 아더는 아버지, 레오 바이에른을 떠올렸다.
‘이곳에서도 시간은 흐른단다 아더. 자칫 잘못하면, 네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는 못 만날 수 있어.’
그 조언을 되새기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흠… 조금 걱정되긴 하네. 늦지 않았을까?”
흰 수염의 저주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얼마나 검을 휘둘렀는지 모르지만,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했다.
그 탓에 아더는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고민 할 때가 아니라, 움직여야 해.’
결정을 내린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목적지는 아케인.
그리운 그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