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가슴팍에서 거친 통증 느껴진 순간, 흰 수염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여기는… 어디지?’
잠시 눈을 끔뻑인 흰 수염이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새하얀 공간이 보였다.
세상이 어찌 이렇게 새하얀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때 가슴팍에서 다시 한번 극심한 격통이 느껴졌다.
“…커헉.”
흰 수염이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다.
흘러내리는 피를 따라 고개를 숙이니 붉은빛 마검이 제 가슴팍을 꿰뚫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흰 수염이 흠칫 몸을 떤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후우… 이제야 끝났네요. 많이 힘들었어요, 흰 수염 씨.”
흰 수염이 중얼거렸다.
“아더… 바이에른?”
“네 아더 바이에른이요. 정신이 좀 돌아오셨나 봐요?’
흰 수염이 동공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다.
아더 바이에른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미쳐버린 자신.
그런 자신과 맞서 싸우는 아더 바이에른.
치열한 격전 끝에 가슴팍이 꿰뚫리는 장면까지.
모든 기억을 떠올린 흰 수염이 탄식을 터트렸다.
‘졌구나… 내가 졌어. 이 내가 저 핏덩이한테 져버린 거야.’
대륙 최악의 흑마법사라 자신이 고작 한 인간에게 죽음을 맞이하다니.
흰 수염은 너무 억울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죽는다고? 고작, 이런 거에 죽는다고?”
오열하는 그의 모습에 아더가 중얼거렸다.
“뭘 그렇게 억울해해요, 흰 수염 씨.”
“……?”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그건 천 년이나 산 흑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죠.”
이 말과 함께 아더가 흰 수염의 가슴팍을 찌르고 있던 마검을 뽑아들었다.
잠시 휘청인 흰 수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아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억울하세요?”
“억울하다…. 너무 억울해.”
“말씀해보세요.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흰 수염이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그저 나는 죽기 싫었을 뿐이야….”
그 고해성사를 아더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물론 들어주기만 했을 뿐, 이해하지는 못했다.
‘머리는 새하얗게 샜지만, 그냥 어린아이네.’
다가올 죽음이 싫다고 누군가의 생명을 밥 먹듯이 빼앗았다니.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 한 나라를 지워버리다니.
흰 수염, 그의 나이가 천 살을 훌쩍 넘길지 몰라도 가진 사고방식은 제 스승의 목을 조르던 그때 그 어린아이 시절에 멈춰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래서 흰 수염 씨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도?’
어린아이가 거대한 힘을 쥐고 있으니, 모두에게 공포를 샀을 것이다.
그리고 공포는 흑마법사의 힘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남길 말씀, 유언은 있나요?’
아더의 말에 흰 수염이 숨이 점차 가라앉는다.
“…유언?”
“네. 유언.”
“…누구한테 전해줄 거지?”
“전해드려야 할 사람이 있나요?”
흰 수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없군. 나의 스승과 부모는 천년 전에 죽었으니 말이야.”
“그럼 저만 간직하고 있을게요. 말씀해보세요.”
“그래… 유언이라.”
말을 흐린 흰 수염이 중얼거렸다.
“나는 흰 수염이네.”
그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죠, 흰 수염 씨죠.”
“그리고 최악의 흑마법사지.”
“……?”
“갈 때 가더라도, 날 이렇게 만든 자네한테는 복수해야겠네. 아더 바이에른.”
아더의 눈이 커졌다.
“복수요? 그 꼴로요 흰 수염 씨?’
아더의 말에 흰 수염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든 순간, 새하얀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쿠크크크-!
그 이변에 아더의 시선이 가늘어졌을 때였다.
사라졌던 흰 수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남은 생명을 바쳐 시전 한, 마지막 마법이네 아더 바이에른….]
그의 말에 아더가 소리쳤다.
“마지막 마법이요? 대체 이번에 또 뭘 하려고 그래요?”
[별거 아니야…. 자네를 좀 가둬 놓을 생각이거든.]
“……?”
말을 흐린 흰 수염이 중얼거렸다.
[자네도 한 번 느껴봐…. 천 년이란 세월을… 혼자서 살아온 이 외로움과 공포를….]
어딘가 심상치 않은 그 말에 아더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래야겠어요!?”
그 외침에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뭘 바랜 건가….]
“…….”
[죽음이 다가왔다 하여… 내가 변할 줄 알았나? 아니.]
그 순간 백색 공간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난 흰 수염이네 최악의 흑마법사. 그렇게 살아왔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네.]
그 어둠 속에서 흰 수염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죽인 대가네. 평생 이곳에 갇혀 썩어 문드러지게 아더 바이에른.]
* * *
흰 수염의 저주에 갇힌 지 체감상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아더는 앉은 자세로 허공을 빙그르르, 돌며 생각했다.
“이거 큰일 났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거라고는 제 몸뚱이와 낮은 호흡뿐이었다.
그 어디를 가도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고, 빠져나갈 방법도 없어 보였다.
‘일주일 동안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도 못 빠져나갔으니깐.’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공간을 들어온 뒤부터 배가 고프지 않게 되었다는 거였다.
‘배가 고픈 것뿐만이 아니라 목도 안 말라.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갇혀서 그런 건가?’
자연적인 생리 현상이 멈추니 잠도 안 자게 되었다.
그 덕에 아더는 체감상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거의 뜬 눈으로 지내고 있었다.
‘흠… 항상 잠을 안 자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데, 썩 기분은 좋지 않네.’
정신이 24시간 깨어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머리가 깨어있으니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은 곧 걱정과 고민으로 이어졌다.
‘여기는 뭘까? 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저주라고 했으니, 사제라도 불러와야 하나?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사제를 부를 수가 있나?
아더는 한숨을 퍽 내쉬었다.
“에이… 진짜 흰 수염 씨,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투덜거린 아더가 몸을 일으켰다.
걸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단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사고를 전환시키려면 몸을 움직여야 할듯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렇게 아더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끝도 없는 어둠을 향해.
* * *
다리가 아프지 않으니,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기를 며칠.
아더는 시간을 세던 일을 그냥 관둬버렸다.
이 곳에서 시간을 세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걱정과 고민이 더욱 늘어났다.
시간을 세지 않으니, 대체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는지 알 수 없었고 요넬과 아이린.
두 사람과 함께 했던 약속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많이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지?’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린.
그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한 요넬.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한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던 아더는 한숨을 퍽 내쉬었다.
‘약속을 못 지키는 아들, 오빠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며칠을 걸었는데도, 이 검은 색 공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흰 수염 씨는 내게 무슨 저주를 건 거야?’
고민하던 아더는 흰 수염의 마지막 유언이자, 협박을 떠올렸다.
[날 죽인 대가네. 평생 그곳에 갇혀 썩어 문드러지게 아더 바이에른.]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썩어 문드러져라…. 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거 자체가 저주인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래 보였다.
입맛을 쩝 다신 아더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풀 수 없는 저주는 이 세상에 없어.’
풀 수 있기에 저주라 불리는 것이고, 해답은 있을 것이다.
아더는 포기하지 않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또 다시 시간이 지나갔다.
* * *
검은색 공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향도 잴 수가 없어서, 아더는 그냥 일직선으로 쭈욱 걸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말하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잡념보다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고민보다는 그 사람들과 했던 추억과 약속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지니와 안나였다.
‘그 두 사람은 무사했을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흰 수염의 마법에 당해 시간을 빼앗겼을 때였다.
‘아마 흰 수염 씨를 죽였으니, 마법이 풀려나기는 했을 텐데…. 흠.’
지니는 몰라도 안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더는 곧 고개를 저었다.
흰 수염과의 첫 만남 때도 안나는 똑같은 마법에 걸렸는데 무사했다.
이번에는 흰 수염을 죽기까지 했으니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자연스레 다음 사람이 떠올랐다.
지금쯤 제국의 수도에 있을 레온 마드리드였다.
‘제국의 수도로 오면, 레온이… 멋진 사람을 소개 시켜준다 했는데.’
황자쯤 되는 그가 소개 시켜주는 멋진 사람이라면 과연 누굴까?
황제라도 소개 시켜주려는 걸까?
‘흠… 말이 안 되지만, 레온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피식 웃음을 터트린 아더가 이번에는 엘린 레버쿠젠을 떠올렸다.
‘엘린 편지 잘 받았으려나….’
대륙에서 가장 신용도 있는 우체국을 이용했으니, 편지는 무사히 도착했을 것이다.
엘린이 그 편지를 받고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던 아더가 입맛을 다셨다.
‘아아… 궁금하네. 직접 눈앞에서 보고 싶어.’
아쉬움을 삼킨 아더가 다음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케인으로 돌아오면 술을 마시자는 윌렛.
치즈이 교수님과 함께 할 조교 생활.
다음에 만날 때는 번개가 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쥴리까지.
그 밖에 이번 생을 살면서 친해졌던 모든 사람.
그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던 아더는 미소지었다.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겠네. 이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렇게 아더는 다시 걸어갔다.
쌓아온 추억을 곱씹으며.
* * *
시간은 흘러간다.
곱씹던 추억들이 동나기 시작한 순간, 아더는 이제 자신이 걷는 건지 뛰는 건지도 잘 구분하지 못했다.
두 다리가 움직이는 관절 소리도 안 들린지 오래였고, 점점 어둠 속에서 파묻히는 것 같았다.
그 깊고 끈적한 감각 속에서 아더는 중얼거렸다.
‘사실 이런 게 죽음 아닐까?’
누군가 그랬던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타인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그런 존재라고.
‘아무랑도 대화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사실 죽은 게 아닐까?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건 죽음이 아니었다.
원수들의 손에 심장이 꿰뚫려 죽는 그 순간.
그 순간과 비교하면 이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어.’
그 사실을 깨닫자 잡념과 고민.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
낮은 숨소리.
생생히 느껴지는 감각.
그 속에서 아더는 생각했다.
‘아직 살아 있어 이렇게.’
그 순간 심신이 편안해졌다.
아마 태어난 뒤로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오로지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아있음을 만끽하던 아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 탓일까.
칠흑 같은 어둠 속이 조금쯤 새하얗게 변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라?”
착각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한 점의 빛이 보였다.
그 순간 잠들어 있던 정신과 육체가 깨어났다.
“빛? 드디어 탈출하는 건가?”
이 말과 함께 그 빛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빛 쪽에서 먼저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
깜짝 놀란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팔로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사이 어둠이 물러나고 흰 수염과 싸웠던 새하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치켜뜬 아더가 탄성을 내지르는 그때,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더.]
들려온 목소리에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움찔 몸을 떨었다.
“…어?”
그 상태 그대로 눈을 끔뻑이던 아더가 입을 벌렸다.
“아… 버지?”
아더의 말에 중년의 사내가 웃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구나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