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피의 성배.
오래전 도르문트가 수집한 유물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향하던 와중이었다.
가문의 흑마법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안 님. 아무래도 추적을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와 함께 흑마법사가 기발한 제안을 해왔다.
‘잘만 하면 이 추적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지금.
이안은 광신도들의 본거지에 아주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설원 한가운데 지어진 거대한 지하도시를 바라보던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광신도들 주제에, 기술력이 제법이군.”
흥미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뱀파이어들로 이루어진 종교라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설마 지하 한복판에 저런 거대한 도시를 지을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니.
그때 그의 부관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경.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이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원래 계획은 광신도들의 본거지를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가한 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이는 거였다.
하지만 이 지하도시를 보니 마음이 흔들린 이안이었다.
뱀파이어라는 귀한 혈통에, 설원 지하에 이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
솔직히 말해 매우 탐이 났다.
그래서 이안은 저들을 [약탈] 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획을 바꾼다.”
“……?”
“건물은 부수되, 광신도들은 가급적 죽이지 말도록.”
그의 말에 부관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에게 일러, 웬만해서는 ‘노예’들을 죽이지 말라 일러두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부관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선을 돌린 이안이 지하도시를 바라볼 때였다.
그의 그림자로부터 무언가 스르륵, 올라왔다.
도르문트의 12귀(鬼) 중 하나인 원숭이였다.
“이안 님… 굳이 저들을 노예로 만드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원숭이의 질문에 이안이 대답했다.
“좋은 게 보이니, 갖고 싶고 그래서 빼앗으려 드는 데 뭐 문제 있소?”
원숭이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약탈과 수탈은 도르문트를 상징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별로 좋지 못합니다.”
“이유는?”
“제 저주에 걸렸던 그 괴물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원숭이의 말에 이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죽였다 호언장담하지 않았소?”
“…죽였다 생각했는데, 누군가 그 죽음을 멈췄고 또 다른 누군가가 살려냈습니다.”
“변명치고 이야기가 길군.”
“…죄송합니다. 죽음을 멈춘 것은 그 네크로맨서의 소행이라 짐작되는데, 설마 살려내기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원숭이의 이야기에 이안이 떠올렸다.
‘그 괴물이 살아있다라….’
자신의 검에 맞서 단 한치의 밀림도 없던 칼잡이, 아니 전사.
그자와 맞붙으면서 이안은 오랜만에 긴장감이라는 걸 느껴 볼 수 있었다.
‘상급의 정령까지 다루게 된 뒤로, 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그런데 이런 변방의 무명 전사에게 그 감정을 느끼니 참으로 신선하고 새로웠다.
그 탓에 이안은 욕심을 내기로 했다.
“그 괴물마저도 거두어들이면 그만 아닌가?’
“…예?”
“성질이 사나운 짐승도 결국엔 길들이는 법인데, 괴물이라고 길들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지?”
도르문트의 흑마법사, 원숭이가 당황해 대답했다.
“하, 하지만 이안 님… 그런 전사가 누군가의 말을 들을 것 같지는….”
“길들이게.”
“예?”
“이런 게 자네 임무지 않소? 그러니 핑계를 대지 말고 그 괴물을 길들일 방법이나 연구해 내게 가져오시오.”
원숭이가 눈을 끔뻑이다, 한숨을 퍽 내쉬었다.
‘이런 고집마저 케인 도르문트 각하와 빼닮다니.’
하지만 이안 도르문트의 명령은, 곧 케인 도르문트의 명령.
도르문트에 제 모든 것을 다 바친 원숭이는 곧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이안이 다시 지하도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얼빈이란 걸출한 기사를 잃었으니, 그 괴물을 대신해 가져오면 되겠군.”
그뿐만이 아닌 이 지하도시의 모든 것을 챙겨갈 생각이었다.
성배도, 뱀파이어도, 이 지하도시를 지은 기술력도.
먼 곳까지 걸음 한만큼 그 값을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몸을 돌려 명령했다.
“전군 준비해라. 지금부터 약탈을 시작한다.”
* * *
교회 바깥을 빠져나온 아더가 제일 먼저 들은 것은 비명이었다.
“으아악-!”
“살려줘!”
“어, 엄마---!”
도시 외곽부터 시작된 비명이 점차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던 아더는 곧 몸을 돌려 폴짝 뛰어올랐다.
그렇게 조금 전까지 있던 교회의 꼭대기 층까지 올라온 아더가 탄성을 흘렀다.
“와… 이게 무슨 일이지?”
저 멀리서 도르문트 군대가 보였다.
그들이 도시 안으로 침입해 들어와 마을 주민들을 납치하고 있었다.
그 탓에 아더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도르문트 군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항상 도망치기만 하던 남자.
이안 도르문트가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니.
“이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절 먼저 찾아오다니.”
이 말과 함께 세상이 일순간 뒤집혔다.
이안을 생각하니, 잠잠하던 제 정신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미쳐버리면 곤란한데….’
적어도 미칠 거라면 이안 앞에서 미치고 싶었다.
그 탓에 올라온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히기 위해 급히 심호흡을 내쉴 때였다.
뒤늦게 교회를 빠져나온 카르페가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난리야!”
그의 외침에 아더가 마지막 남은 흥분을 떨쳐내며 대답했다.
“카르페 씨? 도르문트 군대가 찾아왔는데요?”
“도, 도르문트?”
“네. 설마 의도하신 건 아니죠?”
아더의 질문에 카르페가 인상을 왈칵 구겼다.
“야이 미친놈아! 이걸 의도했겠냐!! 젠장! 어디서 내 마법이 틀어진 거지? 보니깐 역추적해서 온 것 같은데….”
카르페의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다시 폴짝 뛰어올라 지상으로 내려왔다.
때마침 나온 지니와 레온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소란을 보니 아무래도 이안… 그자가 여길 온 모양이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후우…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치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아더가 방긋 웃었다.
“전 좋은데요? 찾아갈 수고를 덜었잖아요.”
“…바로 그자에게 갈 건가?”
“네. 귀하신 몸이 기껏 찾아왔는데, 마중 나가야죠.”
아더의 대답에 레온이 잠시 고민하다 제안했다.
“나랑 같이 가지. 다른 건 모르겠고, 곁에 있는 흑마법사가 마음에 걸려.”
“흠… 도르문트의 흑마법사면, '원숭이' 밖에 없지 않나요?”
“맞아. 도르문트를 지금 이 자리에 올린 13명의 귀신 중 한 명인 원숭이. 아무래도 그가 여기에 온 것 같아.”
레온의 설명에 아더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도르문트 귀신… 그자들도 여기 와있을 줄이야.’
도르문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13명의 가신들.
하나 그 누구도 그 실체와 본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여, 13귀라 불리는 그림자들이었다.
‘예전… 미쳐있던 시절의 나하고 많이 부딪친 사람들인데, 그자들까지 여기 와있을 줄이야.’
생각과 함께 아더가 미소 지었다.
이미 만족 할 만한 선물을 받았는데, 그 안에 또 다른 선물이 숨겨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카르페가 새빨개진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미친… 아니 던.”
“네 카르페 씨.”
“이안 그놈을 죽이러 갈 거지?”
“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카르페가 망설이다,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아더에게 건넸다.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저기 뒤쪽에 있는 신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증표야.”
“신전… 이요?”
“그래. 현재 공주님이 계신 곳이기도 하지.”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카르페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놈들이 이곳까지 쳐들어온 이상, 가장 먼저 노려질 건 공주님이야.”
“흠… 하지만 전 예니카를 지킬 생각이 없는데요?”
“지켜달라는 게 아니야. 약속대로 이안, 그자를 막아달라는 거지.”
아더가 탄성을 흘렀다.
“이안이 향할 곳은 예니카가 있는 곳뿐이다?”
“맞아. 그리고 테이큰이 없는 지금, 그자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자네뿐이고.”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목걸이 고마워요 카르페.”
아더의 대답에 카르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나는 신도들을 구해야 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카르페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지니가 손을 들었다.
“같이 가죠, 아저씨.”
“…왜? 귀쟁이 넌 저쪽으로 가야지.”
“저쪽엔 제가 있어도 딱히 할 일이 없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쪽보다는 이쪽 일이 취향에 맞고.”
지니의 말에 카르페가 아더를 바라봤다.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지니. 그럼 나중에 보죠.”
지니가 두 귀를 쫑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몸조심하세요.”
“지니도요.”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나눈 지니와 카르페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저희도 가볼까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안의 위치부터 찾는 게 어떤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원숭이가 붙어 있으니 곤란하군… 놈이 있는 한 섣부르게 추적할 수 없는데.”
근심 어린 레온의 말에 아더가 방긋 웃었다.
“아 그건 걱정마세요, 이안. 좋은 방법이 있으니깐.”
“응? 좋은 방법?”
“네. 그러니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아더의 말에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뭐지?’
저렇게 자신감에 차 말하니, 신뢰감이 솟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 레온이었다.
허나 이미 앞장서 아더가 걸어가 버려 더는 망설일 수가 없었다.
‘흠… 그래. 이제 와서 무슨 사고가 일어난들 문제가 있겠어?’
이 난장판에서 아더 바이에른이 어떤 사고를 일으키든 이제 두려울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끝마친 레온이 아더의 뒤를 따랐다.
* * *
도르문트 중사.
슈렉은 기분 나쁜 웃음을 터트렸다.
“되도록 죽이지 말되, 반항하는 자들은 목을 쳐도 된다.”
상관의 명령과 함께 시작된 약탈.
그는 근질거리는 손맛을 참지 못해 곧바로 한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무, 뭐야 네놈은!”
“뭐긴 뭐야 네놈들의 새로운 주인님이시다!”
그가 도르문트의 군대에 입영하게 된 계기는 도르문트가 제일 잔인하기 때문이었다.
적대 부족 나라 가문.
일단 한 번 적으로 인지하면 도르문트는 손속의 자비가 없었다.
약탈, 방화, 강간.
그 무엇이건 굴복시킨 적에게 최고의 아픔을 선사했다.
어릴 때부터, 기형적인 정신병을 앓고 있던 슈렉에게는 이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 또한 그런 것들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 탓에 슈렉은 오랜만에 시작한 약탈에 행복감이 젖어 소리쳤다.
‘도르문트 최고! 이안 도르문트 님 만세!’
그는 다른 병사들과 달리 약탈과 강간보다는, 사로잡은 포로들을 괴롭히는 걸 선호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짓는 포로들의 보는 건 약탈과 강간보다 더 짜릿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제, 제발… 딸아이만 살려주시오. 딸아이만 제발!”
단란한 가정집.
인자해 보이는 부모에 귀여운 얼굴의 딸아이.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을 꾸린 가족을 제 발아래 꿇린 슈렉이 웃었다.
“딸아이만 살려줘?”
“그, 그렇소! 딸아이만 제발!”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의 말에 슈렉이 10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소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딸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자의 표정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이, 이보시오! 왜 그러시오! 딸아이만 살려달라니깐!”
슈렉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딸아이만 살려달라니깐, 딸만 죽이고 싶어졌어.”
“…뭐?”
“아니 그렇잖아. 하지 말라는 걸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데.”
슈렉의 말에 딸아이의 아버지가 입을 벌렸다.
‘저, 저런 미친놈이!’
표정을 왈칵 구긴 딸아이의 아버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모습에 슈렉이 희열에 몸을 떨었다.
‘아아 최고야… 최고. 괴로움에 찬 저 표정.’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슈렉이 다시 가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장 효과적인 건 가족의 딸이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두 부모가 발작을 일으켰다.
“으아아앙 아빠!”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참지 못해 슈렉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중년 사내를 제압한 슈렉이 웃었다.
“이제 시작인데, 뭘 조급해해?”
중년 사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큭! 차라리 날 죽여라!”
“죽이긴 뭘 죽여. 너 표정 보려고, 지금 이러는 건데.”
“…뭐?”
“너 그런 표정 보려고 이 짓거리 하는 거라고. 못 알아들었어?”
중년 사내가 입을 벌려 경악했다.
‘이런 미친… 어디서 이런 악마 같은 놈이 갑자기….’
그 표정에 슈렉이 흥분해 콧김을 뿡뿡 내뿜었다.
‘여기서 딸 아이를 죽여버리면 과연 무슨 표정을 보여줄까?’
생각과 함께 슈렉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을 때였다.
탁-!
굳게 잠가 놓았던 문이 벌컥 열렸다.
깜작 놀란 슈렉이 고개를 돌리니, 흐리멍텅한 인상의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슈렉이 눈을 끔뻑이며 질문했다.
“…너 뭐야?”
사내가 주변을 기웃거리다 대답했다.
“저요? 사람인데요?”
“…….”
잠시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슈렉이 당황해 질문했다.
“그, 그게 아니라, 너 정체가 뭐냐고.”
슈렉의 말에 청년이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런 의미였어요?”
“…그런 의미지.”
“제 이름은 던, 아케인의 용병이죠.”
슈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병? 광신도가 아니라?”
“네.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슈렉… 이야.”
“아 슈렉 씨였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슈렉 씨.”
이 말과 함께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다가온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
얼떨결에 그 손을 마주 잡은 슈렉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뭐지 이놈은?
갑자기 나타나서 악수를 신청한다고?
그사이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사내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금부터 제가 셋을 셀 거에요. 셋을 셀 동안 이안 도르문트 위치를 알면 말해주세요.”
슈렉의 눈이 커졌다.
“이안 도르문트?”
“네. 말씀하시면 살려드리고….”
말을 흐린 사내가 웃었다.
“안 그럼 죽일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죠, 슈렉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