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네크로맨서 씨?”
“…카르페!”
“아, 카르페 씨? 혹시 지금 예니카를 배신 하겠다는 말인가요?”
카르페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가 왜 공주님을 배신해?”
“그럼 왜 예니카를 막아달라는 거에요?”
“…공주님이 스스로를 해치려 하니깐!”
“…?”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그 사이 한숨을 푹하고 내어쉰 카르페가 힐끔,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이 방긋 웃어며 물었다.
“자리 비켜 드릴까요?”
카르페가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비밀을 지켜줄 수 있소?”
“물론이죠. 비밀을 발설 할 생각이었으면 당신을 여기로 초대하지도 않았죠.”
“…큼.”
코끝을 찡그린 카르페가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공주님은 피의 성배에다 제 목숨을 바칠 생각 중이야.”
“목숨이요?”
“뱀파이어 일족의 걸린 저주. 그 저주를 풀어내기 위해 말이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주를 푸는 거하고, 예니카 목숨 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어떤 마법이건 주술이건 저주건. 그에 걸맞는 대가가 필요해.”
“…….”
“그렇다면 천 년이나 뱀파이어 일족을 옭아맨 저주를 풀려면 뭐가 필요할까?”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예니카 헤이즐, 그녀의 목숨이 필요하다?”
“그것 뿐이면 다행이게?”
“…?”
“천 년이야 천 년. 아이가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기까지 50년. 마을이 도시가 되고 나라가 되어서 멸망하기 까지 500년.”
“…….”
“그런데 뱀파이어 일족에 걸린 저주는 무려 천 년. 겨우 한 인간의 목숨 가지고 그 주박을 풀 수 있을 것 같애?”
아더의 눈이 커졌다.
“어… 그럼 뱀파이어 일족 전체의 목숨이라도 바치나요?”
“비슷해.”
“…?”
“단지 뱀파이어 일족이 아니라, 검은 십자가를 노리는 이들의 목숨을 바치려는 거지만.”
옆에 있던 레온이 놀라 질문했다.
“거, 검은 십자가를 노리는 이들의 목숨을 바친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죠?”
카르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 그대로요. 공주님은 지금 북부로 모여드는 모든 이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으려 하오.”
아더가 옅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 말은….”
“맞아.”
카르페가 참담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북부로 간 모든 이들이, 성배의 제물이야. 공주님을 포함해서 말이지.”
* * *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예니카… 생각보다 더 대담한 여자였네?’
설마 북부로 모여든 수많은 용병들을 제물 삼아 저주를 풀어낼 생각이라니.
그때 카르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 그런 식으로 저주를 풀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 질문했다.
“왜 소용이 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를 노리는 모든 놈들을 제물 삼아 저주를 풀었다 쳐. 그럼 뱀파이어 일족이 대륙에서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겠나?”
“…!”
“저주를 푼다 해도 또다시 어둠 속에 숨어 살아가야겠지. 어쩌면 이번 일로 더 비참해질지 모르고.”
카르페의 설명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네요. 흠… 하지만 예니카를 막는 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더의 질문에 카르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이쪽은 별 기대는 안 했어. 그냥 이안만 막아주거나 죽여줘.”
“흐음… 그런데 카르페 씨.”
“왜?”
“검은 십자가에 유능한 사람 많지 않아요? 그걸 왜 저희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아더의 질문에 카르페가 얼굴을 구겼다.
“후우…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올지 몰랐다. 그런데 올 수밖에 없었어. 그 테이큰이 지금 부상을 입었거든.”
아더의 눈이 커졌다.
“불사신인 테이큰 씨가요?”
“정확히는 잠든 상태지.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어차피 공주님이 계신 신전으로 가는 길에 테이큰이 있으니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알겠어요. 그런데 카르페 씨?”
“또 왜?”
아더가 방긋 웃었다.
“바보도 아니고 왜 도르문트 군대를 건든 거예요? 그들이 누군지 몰랐던 거예요?”
아더의 질문에 옆에 있던 지니가 흠칫 놀랬다.
‘자, 자기도 건드려 놓고!’
하지만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그 사이 카르페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건들 수밖에 없었어. 그놈들이 우리 혈족을 죽였거든.”
“혈족이요? 뱀파이어?”
“그래. 무려 공주님의 피를 몇 방울씩이나 받은 아주 귀한 혈족을 도르문트 군대가 사지를 찢어놨지 뭐야?”
“오… 도르문트답네요.”
아더의 대답에 카르페는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평소라면 이런 감정의 동요를 안 보였겠지만,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황 탓일까.
심신이 약해진 카르페가 필요 없는 말까지 쏟아냈다.
“후우… 나도 썩 좋은 놈은 아닌데, 그 도르문트 놈들은 진짜 악마야!”
“도대체 뭘 했길래 그래요?”
“우리 혈족들이 모인 여관이 있었거든? 그 여관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더군!”
“…?”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얼마나 경악했는지 넌 모를 거야!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어… 테이큰은 보자마자 흥분해서 마을을 쓸어버렸으니깐.”
카르페의 설명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옆에 있던 지니와 레온은 입을 벌려 경악했다.
그때 정신을 차린 카르페가 그런 세 사람의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자네들 표정이 왜 그래?”
“…아니에요 카르페 씨.”
“…?”
“그래서 도르문트 군대와 싸운 거예요?”
“어… 그래 맞아. 그래서 싸웠지. 그런데 놈들도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더군.”
“무슨 오해요?”
카르페가 거칠게 소리쳤다.
“아니! 우리 보고 자기네 군대를 왜 습격했냐면서 따지고 들더라니깐!”
“…….”
“자기네들이 우리 혈족을 죽여 놓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꼴을 보니 열이 오르더군! 후우… 던! 자네가 생각해도 안 그런가!?”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그렇긴 하죠? 도르문트가 나쁜 놈들이긴 해요.”
“네가 공감해주니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구만.”
“…다행이네요. 카르페 씨.”
“그런데 너는 도르문트와 왜 척을 졌어?”
“비슷한 이유에요.”
카르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렇고, 보상을 뭐로 받을 거야?”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흠… 잘 모르겠네요. 고민 좀 더 해봐도 돼요?”
“상관은 없는데, 이안 쪽은 확실히 막아줘야 해.”
“그건 걱정 마세요.”
그 대화를 끝으로 정신을 차린 레온이 황급히 박수를 쳤다.
“자, 자자-! 잠시 분위기를 환기하죠!”
“…….”
“그럼 저희가 할 일은, 예니카를 죽이려는 이안을 막거나 죽인다. 이렇게 정리가 된 거죠?’
카르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정리하자고.”
“검은 십자가의 지원도 있겠죠?”
“물론. 이안을 막는 데 우리도 가세할 거야.”
그때 내달리던 기차가 멈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페가 손짓했다.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하지. [신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하니깐.”
* * *
아케인 북쪽에 위치한 마지막 마을인 북끝 마을.
그 마을을 본 순간 아더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게 새하얗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마을에는 그 어떤 다른 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잠시 감상하는 사이, 카르페가 말했다.
“우리 목적지는 북끝 마을이 아니니, 조용히 지나치자고.”
이 말과 함께 카르페가 마을을 지나쳐, 설원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던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흠… 신전이 설원 한복판에 있는 건가?”
그의 말에 아더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언제 본 모습으로 돌아온 거예요?”
“응? 아아… 아까 기차에서 내릴 때 변신이 풀렸네.”
“그때 옷도 갈아입은 거예요?”
“그렇지. 그런데 좀 어땠나? 예니카 양 같았어?”
레온이 질문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음… 외모는 거의 똑같던데요?”
“그래? 흠… 아 맞다 아더 바이에른?”
“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거지만, 절대로… 절대로!”
두 눈을 치켜뜬 레온이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절대로… 자네가 한 짓을 말하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 ‘그 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정확히는 '일들'이지. 그러니깐 검은 십자가한테도, 도르문트한테도 입조심 해야해!”
아더가 걱정 말라는 듯, 레온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레온. 걱정마세요.”
“…자네가 그리 확언하니 되려 불안하군.”
그때 카르페가 걸음을 멈췄다.
“도착했네.”
이 말에 아더와 레온의 시선이 돌아갔다.
둘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벌판인데요?”
“도착했다고 했지, 이곳이라고는 안 했어.”
이 말과 함께 카르페가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새하얀 설원이 갈라지고,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 역시 네크로맨서.”
카르페가 걸음을 옮겨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아더와 레온, 마지막으로 지니가 그 뒤를 따랐다.
“…….”
통로는 좁고 어두웠다.
만약 카르페의 마법으로 피워낸 불꽃이 아니었다면 사방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 어둠을 뚫고 한참을 걸어 나갔을 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레온과 아더가 눈을 치켜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어….”
“흠….”
입을 벌린 두 사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거… 사람인가?”
“사람인 것 같은데요?”
둘의 말에 카르페가 횃불을 벽에 걸쳤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꽃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지니가 깜짝 놀라 두 귀를 파르르 떨었다.
“도, 도살자… 테이큰?”
그녀의 말에 카르페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살자는 무슨… 지금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지.”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저게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2m가 훌쩍 넘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두 눈을 감지도 않고 부릅떠 있었는데 모습만 놓고 보면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봉인 당한 것 같았다.
‘상처도 없어 보이는데… 어디가 다쳤길래 테이큰 씨가 저 꼴이지?’
그 때 카르페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흑마법사의 저주에 당했어.”
“저주요?”
“도르문트… 그런 명문가에 흑마법사가 있더군. 놈이 테이큰의 심장에 저주를 걸었어.”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저주를 걸었는데요?”
“심장이 천천히 멎어가는 저주.”
“…?”
“보통 인간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저주를 테이큰에게 걸었어. 하지만 테이큰은 불사신이지.”
카르페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덕분에 테이큰은 매 순간 죽어가는 중이야.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서, 얼려 놓은 거고.”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상당히 까다로운 저주에 걸리셨네.’
그래서 아마 카르페가 레온과 접촉해 도움을 요청해 온 모양이었다.
‘테이큰이라는 괴물이 멀쩡했다면, 굳이 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지.’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음 속에 갇힌 테이큰의 붉은 두 눈동자가 희번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아더가 질문했다.
“깨어날 방법은 없어요?”
“지금으로써는 없어. 하지만 곧 일어나기는 할 걸세. 테이큰은 불사신. 고작 저주 따위에 죽지 않아. 문제는 그 불사신의 육체가 저주를 이겨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지.”
“흠… 즉, 테이큰 씨의 노력에 따라 달렸다?”
“정확히는 테이큰의 혈통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카르페의 대답에 아더의 눈이 살짝 치켜떠졌다.
그 사이 카르페가 다시 손짓했다.
“자자. 감상 그만하고 다시 움직이자고. 오늘 부지런히 움직여야, [신전]에 도착할 테니깐.”
그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아더가 폴짝 뛰어올랐다.
단 한번의 도약으로 테이큰의 머리 위에 착지한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깜짝 놀란 카르페가 황급히 소리쳤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아더가 방긋 웃었다.
“테이큰 씨 한테 힘을 좀 줘볼까 해서요.”
“히, 힘을 줘? 네가?”
“네. 그래서 말인데 이 얼음 좀 깨도 되죠?”
아더의 말에 카르페의 입이 벌어졌다.
“안 돼 미친놈아!!! 그 얼음을 깨면 테이큰이 폭… !”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마검을 꺼내든 아더가 테이큰을 가둔 얼음에 꽂아 넣었다.
짝-!
파고든 칼끝에 의해 단단한 얼음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 틈으로 아더가 제 손바닥을 찢어 피를 뚝뚝 흘려보냈다.
‘지금 흘려보내는 피.’
정확히는 트롤이라 불리는 괴물의 혈통을 담은 제 피였다.
예상이지만, 이 피를 먹으면 테이큰이 일어날 것이다.
‘테이큰 씨 정도면 아주 훌륭한 지원군이지.’
분노한 테이큰이 도르문트 군대만 막아줘도 한결 수월하게 이안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테이큰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제 피를 지켜볼 때였다.
아래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니와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저건 또 뭐 하는 짓일까요?”
“저도 모르겠군요.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그사이 흘러내린 핏방울이 마침내 테이큰의 입술을 적셨다.
방긋 미소 지은 아더가 질문했다.
“테이큰 씨 정신이 좀 드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 탓에 작은 광장 안에 기묘한 침묵이 깃들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카르페가 뒤늦게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저 미친놈이! 얼음을 깨면, 테이큰이 폭주… !”
허나 그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쾅-!
테이큰을 가두고 있던 얼음이 돌연, 산산조각났기 때문이었다.
입을 벌린 카르페가 경악했고, 지니와 레온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그 사이 테이큰의 머리 위에 내려온 아더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친 테이큰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오랜만이군, 미친놈.”
아더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테이큰 씨. 호되게 당하셨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