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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미친놈-109화 (109/265)

제109화

하얼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다고?”

아더가 웃었다.

“만난 적보다는 만난다가 맞네요.”

“만난 적보다는… 만난다가 맞다?”

“네. 만난 적보다는 만난다.”

하얼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건 또 무슨 헛소리지?’

만난 적보다는 만난다가 맞다니.

그럼 저 괴한은 미래에서 왔다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하얼빈인 고개를 저었다.

‘저 헛소리뿐만이 아니라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는군.’

선잠이 든 사이, 웬 괴한이 나타나 도르문트 병사들을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가문의 마법사들까지 당했는지 로브 자락을 두른 이들도 언뜻 보였다.

하얼빈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안 경이 내게 후방을 조사하라고 맡긴 지 고작 하루 만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

말을 흐린 하얼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살이 에일 것같은 폭우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괴한의 흐리멍텅한 얼굴이 보였다.

거친 장대비에도 씻겨나가지 않은 핏자국이 그 얼굴과 합쳐지니 악마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진짜 악마일지도 모르겠군. 날 현혹시키려는 사악한 악마.’

생각과 함께 하얼빈이 가볍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후웅-!

그 순간 그의 검을 타고 새파란 검기가 치솟아 올랐다.

고결한 칼잡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그 검기에 주변의 온도가 달라졌다.

지켜보던 아더가 웃음을 터트렸다.

“검기… 그랬죠. 당신은 천재였죠.”

이 말과 함께 아더의 마검에서도 검기가 치솟아 올랐다.

깜짝 놀란 하얼빈이 입을 벌렸다.

“검기… 라고?”

“왜요? 당신만 검기를 뿜어낼 수 있을지 알았어요?”

“…악마가 아니었단 건가?”

“악마요? 갑자기 웬 악마?”

하얼빈이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날 현혹시키려는 악마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었다고?”

그의 말에 아더가 눈을 끔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재밌네요. 악마가 저보고 악마라 하다니.”

그 시원한 웃음과 함께 아더가 뛰어 올랐다.

하얼빈이 움찔 놀라 중얼거렸다.

‘첫 일격부터, 허공에 치솟아 오른다고?’

아무리 경지가 고결한 칼잡이라도 허공에서 방향을 바꿀 수는 없을 텐데?

그 때 아더의 신체가 갑자기 사라졌다.

“…!”

흠칫 몸을 떤 하얼빈이 거의 반사적으로 칼을 뒷편으로 휘둘렀다.

캉-!

검기와 검기끼리 만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불씨가 튀어올랐다.

하얼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혈통 능력자였나?”

“글쎄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테이큰의 능력을 일깨웠다.

그 순간 하얼빈의 신체가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무, 뭐?”

탄성을 터트린 하얼빈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칼을 잡은 뒤로 단 한번도 힘에서 밀려본 적이 없는데, 오늘 처음으로 힘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아더의 마검이 사라졌다.

“…!”

하얼빈이 이번에도 감각에만 의지한 채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이 회피는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호오… 역시 쉽지 않긴 하네요.”

아더의 중얼거림과 함께 하얼빈의 볼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빗물에 씼겨 내려가는 제 피를 바라보며 하얼빈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도대체… 이 칼잡이, 정체가 뭐지?’

아케인에 이렇게나 독특하면서도 고결한 경지를 이룬 자가 있었다고?

그때 아더가 하얼빈과의 대치를 끝내고 폴짝 뛰어올랐다.

“레인 경-!”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도르문트의 군대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수는 대략 150명정도.

아더는 그 면면들을 스윽 훑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안 도르문트는 북부로 향한 모양이죠?”

이 말에 하얼빈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여기에 없으면, 북부에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

“흠… 원래라면 오늘 여기서 죽여버리려 했는데, 아쉽네.”

아더의 말에 하얼빈이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안 도르문트 경을 죽여? 네놈이?”

“네. 그러려고 여기에 왔는데요?”

“후환이 두렵지 않나?”

“후환이요?”

아더가 빙그레 웃었다.

“후환이 두려우면 이 따위 짓을 하겠어요? 안 그래요 하얼빈?”

아더의 대답에 하얼빈이 입을 다물었다.

“…….”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하얼빈이 제 검을 다시 움켜잡았다.

그 순간.

파아아앗-!

조금 전보다 고결한 검기가, 그의 검을 타고 치솟아 올랐다.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그 날카로운 예기에 아더의 시선이 가늘어졌을 때, 하얼빈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너 같은 칼잡이를 보면 일대일 승부를 했겠지만….”

말을 흐린 하얼빈이 검을 치켜세웠다.

“너는 위험하군. 그러니 용서해라. 지금부터 기사 하얼빈이 아니라 도르문트의 군인 하얼빈으로서 널 상대하겠다.”

* * *

아더는 하얼빈을 본 순간 그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날 죽음으로 몰아간 칼잡이.’

지금과 달리 미래의 그는 이렇게 말이 많지 않았다.

과묵했으며, 표정이 없었고 말보다는 칼로서 말하는 자였다.

그래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케인과 이안이 제 가슴팍에 검을 꽂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하얼빈 레인.

도르문트의 수많은 기사 중에서도 단연코 천재라 불리는 '무색의 기사'의 검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천재라 불리던 기사를 다시 만나 검을 교환했다.

캉-!

분명 묵직하고 날카로웠지만, 그때와는 뭔가 달랐다.

‘10년이란 시간의 공백 때문인가?’

던져진 질문에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10년이란 시간은, 마법사에게도 크지만 기사에게도 더 없이 큰 시간이다.

그래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이안을 놓친 건 아쉽지만… 하얼빈을 죽일 수 있다면 나쁘지 않네.’

어차피 이안은 북부로 가서 다시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얼빈 레인은 의도치 않은 소득이다.

도르문트의 천재라 불리던 칼잡이이자, 무색의 기사라 불리며 그 어떤 전선에도 가장 앞장섰던 남자.

동시에 가장 많은 바이에른 가신들을 죽인 남자를 죽일 기회를 얻었으니.

‘그의 칼날에만… 바이에른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을까.’

10명? 100명?

어쩌면 천명이 넘을지도 몰랐다.

도르문트에 맞서, 반기를 들었던 바이에른의 직할령 시민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그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죽일 이유가 차고 넘치는 남자. 오늘 이자리에서 반드시 없애야 해.’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칼을 휘리릭 고쳐잡았다.

후우웅-!

검에 둘린 검기가 그에 따라 빛의 원을 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얼빈은 힐끔 시선을 돌렸다.

‘350명 중… 남은 숫자가 겨우 170명이라 말인가.’

생각과 함께 하얼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짧은 사이에… 저 남자의 칼에 180명의 목숨이 사라졌다고?’

분노가 느껴지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학살을 벌이고도, 저 칼잡이는 만족하지 못한 채 다시 싸우려 든다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니 이쯤 되면 더이상 이유나 근거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자는 칼을 잡은 자로서의 도리는 물론이고 인간성도 버렸다.

그 탓에 하얼빈은 더는 아더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전군 준비.”

하얼빈의 명령과 함께 도르문트 군대의 창과 칼날이 다시 치켜세워졌다.

“지금부터,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을 사냥한다.”

이 말과 함께 하얼빈이 눈빛을 빛냈다.

“일열 장전-!”

하얼빈의 외침과 함께 총구가 아더에게 겨누어졌다.

“오?”

아더의 탄성과 함께 겨누어진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나왔다.

하지만 공간도약을 사용한 아더는 일찌감치 그 사격을 피한 뒤였다.

“…!”

도르문트 군인들 몇명이 그 이변에 입을 벌렸다.

그 사이 허공에 나타난 아더가 정렬한 군대 속으로 파고들려는 순간, 하얼빈이 검이 쇄도했다.

챙-!!

검기와 검기끼리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더가 타오르는 검기를 맞대며 질문했다.

“제가 이쪽으로 도약 할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저격수, 총잡이부터 죽이는 건 실전에서 가장 기본 수칙아니던가?”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맞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 일격을 막아낸 당신을 보니… 흠. 진짜 죽여놔야겠네요, 당신.”

이 말과 함께 아더가 하얼빈의 검을 쳐냈다.

휘리리릭-!

그와 동시에 길이가 늘어난 마검이 다시 도르문트 군대를 향해 쇄도했다.

캉-!

방패를 든 도르문트 병사들이 그 일격을 막았다.

아니 막은 것이라 착각했다.

“으아아악-!”

그 무엇도 자를 수 있다 알려진 검기 앞에서는 제아무리 튼튼한 방패라 할지라도 양피지 쪼가리에 불과했다.

반으로 쪼개진 방패 사이로 쇄도한 마검이 도르문트 병사들 몇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모습에 표정을 일그러트린 하얼빈이 소리쳤다.

“…그만두지 못하나!”

외침과 함께 하얼빈이 검을 내리쳤다.

어느 사이엔가 돌아온 아더의 검이 그 일격을 받아 냈다.

캉-!

검기와 검끼리 충돌한 여파로, 작은 먼지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었다.

그 기이한 현상 속에서 어둠과 장대비를 가르는 두 개의 빛줄기가 쉼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 장면을 잠시 넋을 놓고 지켜보던 도르문트 병사 중 한명이 중얼거렸다.

“저, 저 틈에 어떻게 끼어들어?”

이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의했다.

검이 나타나면 검의 주인이 사라지고, 검의 주인이 나타나면 검이 사라졌다.

캉캉캉캉-!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얼빈이 아닌 괴한을 제대로 조준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 탓에 150명에 달하는 도르문트 군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투를 지켜만 볼 때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크윽….”

깜짝 놀란 몇 명 병사들이 고개를 돌리니, 피에 흠뻑 젖은 마법사가 손짓하고 있었다.

“고, 괜찮으십니까 마법사님!”

“…닥치고 일단 내 몸부터 일으켜봐!”

그의 말에 병사들이 허둥지둥, 마법사의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자리에 앉은 마법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기 저놈 로브를 뒤지면 포션 하나가 나올 거야. 그걸 나한테 가져와.”

이 말에 병사 중 한명이 시체를 뒤져 새빨간 포션 하나를 가져왔다.

마법사는 그 포션을 제 전신을 흩뿌린 뒤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젠장… 진짜 죽다 살아왔군. 그 괴물 지금 뭐하고있어?”

“하, 하얼빈 경과 대치 중입니다!”

“하얼빈 경이랑? 누가 이기고 있지?”

“…그게.”

“비등한가?”

“…제 눈에는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마법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르문트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6서클 기사랑 동등한 대결을 펼치다니.

원래라면 믿어서는 안 되지만, 직접 체험한 그 괴한의 실력을 보니 영 말이 안 되지는 않았다.

‘그런 놈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지? 아니 그런 실력을 가진 놈이 왜 여기를 습격한 거야?’

마법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저 괴한의 범행 동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죽이건 생포하건, 이 이상 저놈이 날뛰지 못하게 막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마법사는 눈빛을 빛냈다.

“모두 잘 들어라.”

이 말에 마법사를 바라보던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지금부터 딱 한 번. 내가 저놈에게서 빈틈을 만들거다.”

마법사의 눈이 빛났다.

“그때 있는 걸 전부 퍼부어. 그래… [대포]를 쏴버려. 저 괴물에게.”

병사들이 당황해 질문했다.

“이, 인간한테 대포를 쏴라는… 말씀이십니까?”

“왜 안 되지?”

마법사의 질문에 병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시선을 돌린 마법사가 아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런 놈을 잡으라고 있는 게 대포인데, 잔말 말고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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