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아더는 생각했다.
‘흐음… 위험하네, 이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상황은 기울어져 있었다.
마침내 검기를 발현한 테이큰.
아직 생생한 네크로맨서.
테이큰 한 명만 하더라도 승산이 보이지 않는데 저 둘이 한꺼번에 덤벼온다면, 사실상 이 대결은 패배였다.
그 탓에 전세를 역전시키려면 칼이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이기는 건 아니더라도… 시간을 끌 방법이 필요해. 윌렛 어르신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지.’
그렇게 고심하며 미간을 모을 때였다.
네크로맨서와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저기 네크로맨서 씨?”
“왜? 항복하려고?”
“아뇨. 항복 대신 제안을 좀 할까 하는데요.”
네크로맨서가 혀를 찬다.
“지금 상황에서 제안을 한다고? 상황판단이 안 되나?”
“일단 들어나 보시는 게 어때요?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예요.”
네크로맨서가 대답하는 대신, 테이큰을 바라본다.
테이큰이 기다렸다는 듯 검기가 둘린 대검을 치켜든다.
후욱….
단순히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휘몰아치는 돌풍이 심상치 않았다.
모든 칼잡이들의 소망이라 불리는 검기.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다 알려진 절기가 마침내 발현된 것이다.
아더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여유롭게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거 흰 수염 님이 주신 카드인데요.”
“…?”
“만약 물러나 주시면, 이 카드를 드리겠습니다. 네크로맨서 님은 흰 수염 님을 만나 뵙고 싶다 하셨으니깐.”
설명에 네크로맨서가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아더의 손에 들린 카드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벌린다.
“잠깐 테이큰!”
“닥쳐라.”
“아니야, 아니라고!! 멈추게! 잠깐만 멈추게!”
외침에 테이큰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두른다.
네크로맨서의 목이 댕강 썰렸다.
하지만 귀신같이 살아난 네크로맨서가 재빨리 입을 연다.
“그 검도 멈추게! 나 이제 목숨 하나밖에 없다고! 다음에 죽으면 진짜로 죽는다 말이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상관있지! 내가 죽으면, 주인님에게 뭐라 설명할 건가?”
테이큰이 입을 다문다.
동시에 피어오르던 서늘한 기운이 약간이지만 수그러든다.
기회를 준 것을 확인한 네크로맨서가 급히 시선을 돌린다.
“지, 진짜였다고? 흰 수염 님을 만나 뵈었다는 게?”
“네. 말씀드렸잖아요. 흰 수염 님을 만나 뵌 적 있다고.”
“…자네. 흑마법사였나?”
“아뇨? 전 용병인데요.”
네크로맨서가 입을 다문다.
믿기 힘들지만, 아더의 저 대답은 사실이었다.
저 용병에게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즉 흑마법과 무관하단 소리였다.
‘그런데… 어찌 흰 수염 님의 카드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살아 있는 신화라 불리는 흰 수염.
그는 하늘섬 소속으로, 대륙의 패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전설적인 흑마법사였고, 모든 뒷세계 흑마법사의 존경과 공포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아더의 손에 들린 저 카드는, 그 흑마법사의 비호를 받는다는 일종의 패였다.
저 패를 가진 자를 건든다는 건, 하늘섬과 흰 수염을 건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
그래서 네크로맨서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다. 만난 건 둘째치고 저 카드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고민에 빠져 있던 네크로맨서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물러나지.”
“뭐?”
“물러나자고. 이건 상정 밖의 변수다. 아무리 멍청한 네 놈이라도 흰 수염 님은 알지 않으냐?”
“….”
“저 미친놈은 그분의 비호를 받고 있다.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일단 물러나야 해.”
이 말에 테이큰이 네크로맨서를 바라본다.
감정이 깃들지 않은 그 시선에, 네크로맨서가 움찔 놀란다.
“차, 참아! 참으라고! 이성을 찾아 테이큰!”
외침에 테이큰이 비릿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간다.
네크로맨서가 다급히 그 앞을 가로막는다.
“자네 미쳤나!”
“아니.”
“그런데 지금 저 용병이랑 싸우겠다고?”
“그래.”
네크로맨서가 한탄한다.
“자네라 할지라도 흰 수염 님 앞에서는 미물일 뿐이야. 어쩌면 이일을 대가로 100년 동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실험을 당할지 모른다고.”
테이큰이 단언한다.
“그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지. 하지만 지금 내 운명은 저 녀석과 싸움을 원한다.”
이야기를 엿듣던 아더가 감탄한다.
‘와… 테이큰 씨는 진짜 전사네.’
그사이 네크로맨서를 지나친 테이큰이 검을 치켜든다.
“난 여태 그 운명에 따라 살아왔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 일로 인해 내가 죽는다면, 거기까지가 내 삶이겠지.”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에 아더도 검을 들었다.
“협상 결렬인가요.”
“처음부터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이 말과 함께 아더와 테이큰이 다시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한다.
지켜보던 네크로맨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문을 외웠다.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내 손으로 테이큰을 공격해야 하다니.’
그렇게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테이큰이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그 일격에 맞서 아더도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난데없는 폭발이 공장을 뒤덮는다.
쾅!
테이큰이 뒤로 물러난다.
동시에 시선을 돌린 아더가 눈을 치켜뜬다.
“어? 윌렛 어르신?”
* * *
공장 지부 안으로 들어선 윌렛이 테이큰과 네크로맨서를 노려본다.
그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8명의 사내들이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테이큰과 네크로맨서를 겨냥한다.
뒤로 물러난 테이큰이 그 광경을 바라보다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윌렛… 아직 안 뒤지고 살아 있군.”
윌렛이 팔짱을 끼고서 대꾸한다.
“살아온 날만큼 더 살 생각인데 뭘 불만 있나?”
“크큭… 쥐뿔도 없는 놈이 입을 터는 것도 여전하고.”
“그러는 자네야말로 상황 판단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이 말과 함께 8명의 용병들이 기운을 뿜어낸다.
이를 지켜보던 아더는 눈을 치켜떴다.
‘오… 3명이 5서클. 나머지 두 명은 무려 6서클이네.’
단순 고리만으로 따져 보았을 때, 테이큰보다 강자인 이들이 무려 두 명.
그 탓에 아더는 전황이 완벽히 뒤집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테이큰이 말도 안 되는 혈통을 지녔다 해도, 저 용병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똑같이 알아차린 지니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살았다….”
그렇게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류가 전장에 내려앉았을 때였다.
네크로맨서가 중얼거렸다.
“함정이었군.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 설마 일부러 빈틈을 보인 건가?”
“글쎄. 누가 쳐들어올 줄 알았지만, 설마 자네들이 올 줄은 나도 몰랐어.”
윌렛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검은 십자가]. 악마를 따르는 광신도들이 설마 일개 제약사 사장을 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조심하게. 우리는 신을 따르는 것뿐이야.”
“신은 자네 같은 시체술사를 신도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가 알고 있는 신하고 내가 알고 있는 신하고 다른가 보군. 우리가 믿는 신은 아주 기뻐하던데 말이지.”
이 말과 함께 네크로맨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군. 그것도 완벽하게.’
흰 수염의 비호를 받는 미친놈.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전설적인 용병 윌렛.
기회는 있었지만, 그 기회를 놓쳐버린 지금,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패는 더 이상 없었다.
즉 물러나야 할 때란 소리다.
네크로맨서가 테이큰을 향해 말했다.
“이제 포기하고 이리 오게.”
“….”
“자네가 싸움을 쫓는 야만인이라 해도, 이런 식의 싸움을 원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 말에 테이큰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쿵!
나직이 울려 퍼지는 거친 진동과 함께 검을 내려놓은 테이큰이 몸을 돌린다.
그 후 네크로맨서를 지나쳐, 공장 지부를 빠져나갔다.
테이큰을 주시하던 용병들이 그제야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로 상황이 종결되었을 때였다.
쓸쓸히 공장을 빠져나가는 테이큰의 모습에 아더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기 테이큰 씨?”
“…?”
“재밌었습니다. 당신과의 전투는요.”
외침에 모두가 놀라 시선을 돌린다.
그중 지니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저 미친놈….”
그사이 걸음을 멈춘 테이큰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더를 잠시 바라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내가 죽인다. 그러니 죽지 말고 살아있어라.”
이 말과 함께 테이큰이 사라지고, 윌렛이 아더를 바라본다.
“괜찮나?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네. 오른쪽 눈알이 빠지긴 했지만요.”
윌렛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른쪽 눈알? 멀쩡히 잘 있는데?”
“어? 진짜요?”
대답과 함께 아더가 오른쪽 눈을 매만진다.
‘진짜로 있네? 와… 트롤이란 혈통은 재생력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감탄과 함께 아더가 제 몸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윌렛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신기한 놈이군.’
허나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네크로맨서를 향해 물었다.
“더 할 말 있나?”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걸세. 아무리 자네라 해도, 대가를 치를 거야.”
“미리 알았다면, 이런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개입된 이상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네.”
윌렛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자네는 내 사무소 용병들을 죽이려 했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보호할 것이며 그것이 설령 검은 십자가와 전쟁을 부른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거네.”
확고한 대답에 네크로맨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늙었다 하지만, 한때 이 바닥 전설이라 불렸던 남자라 이건가.’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네크로맨서는 제 발밑에 놓인 눈알을 집어 들어 아더를 향해 집어 던졌다.
“미친놈.”
“….”
“어이 미친놈.”
눈알을 잡은 아더가 대답했다.
“저요?”
“그래 너. 이름이 뭐지? 기억해두마.”
아더가 대답했다.
“던이요.”
“던… 그래. 오래 살아남아서 다시 보자. 그때는 흰 수염 님의 카드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이 말과 함께 네크로맨서가 사라진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흠… 다시 보자는 놈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는데.”
그리고 왜 계속 미친놈이라 부르는 거지?
죽여도 계속 살아나는 저쪽이야말로 미친놈 같은데?
그때 윌렛이 불쑥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자네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르신?”
“말 그대로네.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번 일은… 솔직히 말해 선을 넘었거든.”
윌렛이 한숨을 내쉰다.
“지금 모든 이야기를 듣겠나? 원한다면 설명해주지.”
아더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음… 아뇨. 내일 사무실로 가서 듣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운철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거든요. 벌써 해가 밝아서 빨리 돌아가야 해요. 통금 시간이 6시 까지라.”
윌렛이 눈을 끔뻑인다.
“통금 시간이 있다고? 농담인가?”
“아뇨? 진담인데요.”
대답에 윌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여러 감정이 담긴 기분 좋은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