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황제의 명령으로 전쟁에 나선 지 1년.
1년 만에 돌아온 수도를 바라보며 케인 도르문트 백작은 생각했다.
고작 1년 만에 수도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그것이 떠도는 가십거리건, 기형적으로 발달한 이 도시의 정책이건.
고작 1년 사이에 너무 많이 바뀌어 버린 듯했다.
그리고 절대로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도 바뀐 듯했다.
케인은 제 집사의 보고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
“수십 년 전부터 심어 놓은 우리의 세작들이 전부 내쫓기고 죽임을 당했다. 그걸 말하고 싶은 건가?”
그의 질문에 도르문트의 대집사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케인의 사나운 시선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
“…나가게. 그리고 이안을 불러오게.”
“예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대집사가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게 된 케인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 툭.
일정한 간격으로 두들겼다.
그 두들김이 계속될수록, 그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도 더욱더 깊어졌다.
그렇게 침묵이 깃든 방 안에서 낮은 숨소리만이 들려올 때였다.
케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홀란 레버쿠젠. 그 늙은이가 역시 문제인가.”
이 말과 함께 케인은 이곳으로 오기 전 보고 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북부의 사자.
혹은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남자.
그가 바이에른 가문에 다녀간 뒤,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과정에서 몇몇 이들이 도르문트의 세작이라 실토했으며 홀란 레버쿠젠이 그 일을 직접 주도했다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 탓에 케인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 수밖에 없었다.
‘여우 같으니라고.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엔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 말인가.’
홀란 레버쿠젠과 바이에른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예상했던 케인이었다.
허나 그날이 이렇게나 빨리, 그리고 이렇게 과감하게 이루어질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에 뿌리 뽑힌 세작들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잠입시킨 자들이었다.
홀란의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이토록 빨리 찾아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찾아낸 거지? 흔적이며 출생이며, 모든 걸 지웠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로 만들어 놨는데.’
고민하던 케인은 눈을 감는다.
난데없이 터진 문제들.
그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상황.
이 기이한 상황을 음미하던 그는 중얼거렸다.
‘문제가 닥쳤지만,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했군. 드디어 이해가 가.’
아더 바이에른의 집사 세비스찬.
제일로 중요한 세작인 그가 왜 정체를 들켜 병신이 되어버렸는지 인제야 납득이 갔다.
‘홀란 레버쿠젠. 그 인간이 직접 움직였다면, 말이 안 되지는 않군. 그가 세비스찬의 정체를 알아내고서 그렇게 만든 거야.’
생각이 정리된 듯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미 벌어진 일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일을 어떻게 수습하냐가 중요하겠군.’
케인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때마침 방문 너머로 제 첫째 아들.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제 허락에 방 안으로 들어온 이안이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케인은 그런 제 아들을 향해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 칸 마드리드 님을 만나 뵙고 오너라.”
“…2황자님을 말씀이십니까?”
“가서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드리고, 원래대로 메꾸어 놓겠다 말씀드리거라.”
이안이 망설이다 질문한다.
“공작가로 가신다 들었습니다. 저도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다. 너 대신 제인을 데려갈 테니. 지금 급한 건 바이에른 쪽이 아니라 칸 마드리 님에게 이 오해를 푸는 거다.”
이안이 허리를 숙인다.
“지금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든든한 장남의 모습에 케인의 깊이 파인 주름이 그나마 펴진다.
그 속에서 한 번 더 상황을 점검한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뤄 봐야 좋을 게 없겠지···.”
말을 흐린 그는 곧바로 방 안을 나섰다.
“가서 정리를 한 번 해야겠어. 다 죽여 놓은 싹이 새로이 꽃을 피우지 않게.”
* * *
무거운 침묵이 바이에른 저택을 감쌌다.
당당하게 바이에른 가의 정문으로 들어온 한 사내.
케인 도르문트 덕이었다.
허나 그 무거운 분위기에서도 케인 도르문트는 매우 당당했다.
그는 응접실에서 느긋이 차를 들이켜며 기다렸고, 그 모습을 집사를 통해 보고 받은 요넬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양심이 없는 줄은 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생각이 없는 자인 줄은 또 몰랐구나.”
이 말과 함께 요넬이 손짓한다.
“가서 불러오세요. 어디 그 두꺼운 낯짝을 한 번 보게.”
부름과 함께 집사가 나간다.
그리고 잠시 후, 요넬의 집무실로 케인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오랜만이군, 백작.”
“일이 있어, 그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어.”
요넬의 적의 어린 발언에 케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 시선도 못 마주치던 늙은 계집이 대꾸를 한다라···.
‘그렇다면 이쪽도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지.’
터벅터벅 걸어간 케인이 허락도 없이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상식에 어긋난 그 무례함에 요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허나 케인의 무례함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사과는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겨 놓은 세작이 들통났는데.”
“…!”
“양심이 없었더라면, 방문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요넬이 입을 벌린다.
황당함과 분노.
그 밖의 여러 감정들이 요넬의 표정이 일그러트렸다.
그 사이 케인이 끊어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작 각하도 아시겠지만···. 타 가문에 세작을 심어놓는 건 그다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무, 뭐라?”
“그 예로 저는 바이에른 말고도 수많은 가문에 세작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 세작을 골라내는 것도, 가주로서의 능력···. 그리고 들키지 않은 것도 능력이지요."
“…!”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제 능력 부족으로 일어난 일이니 그에 따른 보상을 하겠습니다.”
참지 못한 요넬이 탁자를 내려친다.
그 순간 케인이 기다렸다는 듯 경고한다.
“신중히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
“여기서 제 제안을 거절하면···. 저는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대책을 준비할 겁니다.”
요넬의 눈꼬리가 떨린다.
반대로 케인은 눈빛을 빛냈다.
“그 대책의 수위의 끝은···. 예.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 신중히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끝마친 케인이 느긋이 팔짱을 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요넬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한테 양심이라는 게 있나?”
“글쎄요. 훌륭한 귀족은 양심이 없는 자들이라 하는데, 제가 아무래도 그런 귀족인가 봅니다.”
대답과 함께 케인이 요넬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노골적인 도발에 요넬은 손만 부들부들 떨 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케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성격이 변하기는 했지만···. 뭔가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최근 요넬 바이에른이 제대로 된 가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어느 정도인지 떠보려고 일부러 과격한 발언을 한 케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인 요넬의 모습은 냉정히 말해 기대 이하였다.
변하기는 했지만 급했고, 급하면서도 서툴렀다.
‘아직 경계할 수준은 아니고···. 그럼 홀란 레버쿠젠. 그 늙은이가 전부 일으킨 거라 말인가?’
고민하던 케인은 문득 제 막내아들이 떠올랐다.
아더 바이에른에게 두들겨 맞아 애꾸가 되어버린 빌 도르문트.
그 아더 바이에른이 6개월 전부터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함께 떠올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케인은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이왕 공작가를 방문한 김에 제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의문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바이에른 공작가도 저희에게 빚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뭐라?”
“제 막내아들 빌. 그 아이가 아더 바이에른에게 두들겨 맞아 애꾸가 되었더군요.”
“….”
“아이들끼리의 다툼이라 일단은 넘어갔지만···. 사실 걸고넘어지자면 얼마든지 걸고넘어질 수 있는 부분이죠.”
케인이 비릿하게 웃는다.
“그러니 서로 한 발씩 양보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공작 각하께서는 제 아들이 애꾸가 된 것에 대한 사과를.”
“….”
“그 사과를 각하께서 직접 하실 필요는 없고…. 아더 바이에른, 그 아이에게 직접 받겠습니다. 이 정도면 공작 각하의 체면도 살지 않겠습니까?”
제안과 함께 케인이 느긋이 허리를 기댄다.
어떠한 항변도 받지 않겠다는 그 오만한 태도에 요넬이 침묵한다.
그리고 그 침묵이 케인의 예상보다 길어졌을 때였다.
요넬의 서늘한 목소리가 점령했다.
“도르문트 백작. 당신이 날 모욕하고, 매도하는 건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소.”
“…?”
“하지만 내 아들을 건드는 건, 참을 수 없군.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할 거면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시오.”
케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요넬의 대답에 적잖이 놀란 그였다.
‘공작으로서는 부족한 년이지만, 훌륭한 엄마라 이건가.’
생각과 함께 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이 재빨리 돌아갔다.
‘짜증 나는군. 어떻게 하면 저 어리숙한 계집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은 금방 떠올랐다.
보고 받기로 요넬 바이에른은 아직 제 장남이 왜 벙어리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의 출처를 말한다면, 요넬 바이에른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을 끝마친 케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려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어머니. 괜찮아요.”
케인도 요넬도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열린 방문을 통해 걸어들어온 아더 바이에른이 방긋 웃는다.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죠. 확실히···. 빌의 눈을 애꾸로 만든 건 잘못된 일이니깐요.”
대답과 함께 아더가 케인을 바라본다.
케인도 아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람을 숨기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이게 아더 바이에른이라고?’
자신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은 체격.
벙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세련된 발음.
그리고 은연중에 느껴지는 ‘고리’의 기운까지.
케인은 오랜만에 충격이란 걸 받아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그사이 예정에 없던 아더의 난입에 놀란 요넬이 급히 다가왔다.
“아더! 어째서 여기로 온 것이냐!”
요넬의 질문에 아더가 케인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 후 당황과 분노 그리고 걱정이 뒤섞인 표정을 한 요넬을 향해 속삭였다.
“죄송해요, 어머니. 방 앞에서 엿듣다가 저도 모르게 들어오고 말았어요.”
“어서 나가거라! 네가 올 자리가 아니야!”
그녀의 말에 아더가 웃었다.
“맞아요. 제가 올 자리가 아니긴 한데… 혹시 고집을 좀 부려도 될까요?”
이 말에 요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사이 아더가 설명했다.
“제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 물으셨죠? 그 선물 지금 받을게요. 케인 도르문트. 저분과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대답에 요넬이 경악한다.
그리고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아더가 입을 열었다.
“부탁해요, 어머니.”
이 말에 벌어진 요넬의 입이 점차 다물어진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케인이 입을 연다.
“제안을 정정하지요. 사과가 아니라 대화로 하겠습니다.”
“…백작!”
“아더 바이에른과 5분만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만약 수락해주시면, 인수하려던 바이에른 영지의 광물 철산 협상을 물리도록 하지요.”
선언에 요넬이 소리치려다 멈칫한다.
‘뭐? 바이에른 영지의 광물 철산을…포기한다고?’
바이에른 재정을 담당하는 가장 큰 축 중 하나인 광물 철산.
허나 채권 협상 때문에, 지금은 케인 도르문트 손아귀에 넘어갈 지역이기도 했다.
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광물 철산이 넘어가면, 바이에른의 재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지역을 지금 케인이 포기한다 말한 것이다.
‘내가… 저 남자에게 꼼짝 못 하는 건, 그가 이 광산을 비롯해 바이에른의 여러 산업에 손을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쉽사리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아더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전 괜찮아요. 저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기도 하고.”
이 말에 요넬이 불안한 눈빛으로 아더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아더가 방긋 웃어 보였다.
너무나도 환한 미소에 요넬이 눈물을 글썽이다, 결국 고개 끄덕이며 물러났다.
탁!
방문이 닫히고 케인과 아더.
두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부딪친다.
그 속에서 호기심을 참지 못한 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놀랍구나. 그 벙어리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체격만 보면···. 기사라 해도 믿을 덩치로군.”
그의 말에 아더가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가, 요넬이 앉아있던 자리에 대신 걸터앉는다.
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케인의 시선이 가늘어졌을 때였다.
아더가 입을 연다.
“음···. 솔직히 말할게요. 도르문트 백작님.”
“…솔직히 말해?”
“예. 그러니깐 잘 듣고 대답해주세요.”
아더가 방긋 웃는다.
“어떤 방식으로 죽고 싶으세요? 곱게 죽는 건 안 되니깐 이것만 빼고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