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8화 (8/265)

제8화

“제가 이겼네요. 대부님. 그러니깐 약속을 지켜주세요.”

넋을 놓고 있던 홀란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피를 뚝뚝 흘리는 중인 아더가 보였다.

놀란 홀란이 황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상처를…. 아니, 아프지 않으냐?”

아더가 눈을 끔뻑인다.

그 후 꿰뚫린 제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프긴 하네요. 어머니가 보시면 엄청 화를 내실 것 같기도 하고….”

말을 흐리는 아더의 모습에 홀란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비명을 질러도 모자랄 판에, 요넬에게 혼날 것을 걱정한다고?’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판단이었다.

그 탓에 그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지만, 이 아이의 정신세계는 정상인들과 비교해서 어딘가 매우 어긋나 있었다.

허나 깊이 고민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아더의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상념을 접은 홀란이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리로 와 보거라. 상처나 일단 좀 보자꾸나.”

이 말과 함께 홀란이 지혈을 시작했다.

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처를 강하게 압박하는데도 아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모습에 홀란의 눈길에 다시 한번 이채가 담겼을 때였다.

아더의 상처를 지혈하던 그의 어깨가 크게 떨린다.

‘…빗맞았어?’

중얼거림과 함께 다시 살펴보았다.

허나 착각이 아니었다.

목검이 꿰뚫린 부위가 매우 정교했다.

어깨의 연골과 뼈는 건드리지 않은 채로 살집만 헤집혀 있었다.

그 탓에 놀란 홀란이 중얼거렸다.

‘이런 확률이 얼마나 있지? 뼈는 다치지 않은 채 살만 헤집는 상처를입을 확률이?’

의도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처.

하지만 이런 상처를 15살의 아이가 의도할 수 있다고?

생각과 함께 홀란이 자신도 모르게 눈꼬리를 파르르 떨 때였다.

아더가 다시 입을 연다.

“저…. 대부님?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해요.”

“…무슨 약속 말이냐?”

“제 비밀이요. 대련에서도 이겼으니 꼭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홀란의 떨리던 눈꼬리가 진정된다.

그 사이 엘린과의 대련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아더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홀란을 바라본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홀란이 중얼거린다.

“…미치겠군.”

“예?”

“아니다. 일단… 그래. 비밀은 지켜주마. 네 어미에게는 오늘 일을 포함해 절대로 이 사실을 말하지 않으마.”

아더가 환히 웃었다.

“감사합니다, 대부님!”

“감사는 무슨… 그런 의미에서, 무엇을 바라느냐?”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라는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전에 약속하지 않았느냐? 대련에서 이긴다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준다고. 설마 잊은 것이냐?”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어… 아뇨.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않기는.

잊어버렸구만.

중얼거림과 함께 홀란은 왠지 모르게 아더의 대화법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못마땅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아더가 운을 띄웠다.

“가능한 선이라면, 어디까지인가요?”

“제국의 북부 사령관이자, 레버쿠젠 가문의 후작. 그리고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을 짊어진 홀란 레버쿠젠. 이 이름이 들어줄 수 있는 선까지다.”

“오…. 엄청나네요.”

“대단한 기회이기도 하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대부님은 정말 제 대부님이신가요?”

“…?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예요. 대부님은 정말 제 대부님이신가요?”

물음에 홀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

그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체, 아더의 시선을 피했다.

허나 아더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고, 결국 백기를 든 홀란이 대답한다.

“자격은 없다.”

“그렇군요.”

“하지만 네 소원을 들어주기에는 충분하지.”

“그래요? 하지만…. 자격이 없는 대부님을 어떻게 믿죠? 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일을 부탁하고 싶은데.”

홀란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대답한다.

“기사의 맹세 정도면 되겠느냐?”

“…네?”

“지고하신 황제 폐하만이 내 맹세를 바꿀 수 있다. 그 맹세에 대고 약조하마. 이 정도면, 믿음이 가느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기사의 맹세…. 진짜 오랜만에 듣네.’

기사들이 약속을 할 때면, 언급하는 말이었는데 옛날에는 이 맹세를 언급하고, 지키지 않으면 죽임까지 당했다고 전해졌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눈앞의 사내는 소드 마스터다.

모든 기사의 목표이자 이정표이기도 한 그의 맹세는 그 무게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지금 상황에서 들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알겠습니다, 대부님. 그럼 제 소원을 말해도 될까요?”

홀란이 팔짱을 낀다.

그 무언의 허락에 아더가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한다.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홀란이 놀라 소리친다.

“뭐? 가문의 배신자들을 처단해 달라고?”

* * *

요넬은 제 남편과 찍은 사진을 어루만지며 떠올렸다.

원치 않은 공작가의 주인으로서주인이란 이름으로 보낸 10년이란 세월이었다.

‘불행한 시간이었지…. 지옥이나 다름없을 만큼.’

그녀는 권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의 주인 자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었다.

허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의 유언.

그 사랑하는 남자의 핏줄을 이은 아더와 아이린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온갖 암투와 계략이 오가는 귀족들의 사회는 만만치 않았다.

그 탓에 해가 지날수록, 공작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금은 저물어 가는 태양이라고 표현될 정도였다.

‘…미래, 아더와 아이린을 위해서라도 더는 공작가를 기울게 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이 아이들에게 가문을 물려주려면.’

그래서 요넬은 최선을 다해 귀족이 되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오늘.

그 노력의 결실이 조금이지만 드러났다.

공작가의 오랜 전통인 사냥 대회를, 아주 성공리에 끝마친 것이다.

‘첫 사격은 물론이고…. 그 뒤의 과정도 나름 매끄러웠어. 아무런 사고 없이.’

생각과 함께 요넬이 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의 연회로 공작가의 인식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건재하다는 것 정도는 보여 주었을 것이다.

‘첫걸음에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바꿔나가야 해.’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가, 오랜 연회로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을 때였다.

다음 날이 되고, 제 집무실로 찾아온 홀란 레버쿠젠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겨, 경?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요넬이 벌벌 떨며 질문한다.

“지금 이 사람들이…. 전부 간첩 혹은 배신자란 소리입니까?”

홀란이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모르겠지만…. 몇몇 이들은 출생지가 의심스럽더군. 충분히 조사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오.”

요넬이 다시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 끝에는 홀란이 건네준 서류 한 장이 있었다.

서류에는 공작가의 충신이라 부를 만한 이들의 이름과 이들의 출생지 그 전에 몸담았던 가문.

그 외 잡다한 기타 상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정보들을 확인하던 요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도르문트…의 사람들이 제 가문에 이렇게나 많다니….”

“어느 가문이나, 첩자가 있긴 마련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조금 많기는 하더군.”

찹찹한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린 홀란이 조언했다.

“지금 당장 이들을 쳐내지 말고, 시간을 들여 한 사람씩 내보내시오. 정확한 증거와 정황들이 있으니 빠져나갈 구멍만 주지 않으면 될 것이오.”

“….”

“힘든 건 알지만, 거쳐 가야 할 길이오, 요넬. 레오 바이에른…. 그가 남겨준 가문을 지키려면 말이오.”

남편의 이름에 요넬이 눈이 붉어진다.

만약 홀란이 아니었다면, 대번에 눈물을 터트렸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탓에 요넬 스스로도 추태라는 걸 알았다.

가문에 첩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가주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걸 의미했으니.

‘하지만…. 딱 하루만… 딱 하루만…더 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렸으면….’

불과 어젯밤이었다.

공작가의 가주로서 다시 나아가자고, 결심한 날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이러한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할 때였다.

그런 요넬을 바라보며 홀란이 불쑥 선언했다.

“그 힘든 길을 괜찮다면 내가 함께 가고 싶소.”

“…!”

“공자 각하. 아니 요넬.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하오. 저 북부의 야만인들과 오랜 분쟁 탓에, 친우의 가문을 돌보지 못했군.”

대답에 요넬이 입을 벌린다.

붉어진 눈시울은 감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오라버니?”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겠소? 지금 당장 전폭적인 지지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가문에 뿌리내린 쥐새끼들을 잡는 데는 도움을 주겠소.”

“…하지만 그랬다가는.”

요넬이 망설이며 대답한다.

“레버쿠젠 가문의 오랜 전통이 깨지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북부를 지키는 레버쿠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치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대답에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제국의 아카데미.

그 아카데미의 정원을 거니는 친우와 그 친우의 여자친구였던 요넬 바이에른.

그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던 홀란은 중얼거렸다.

‘맞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움직이면, 가문의 오랜 전통을 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친한 친우의 가문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것 또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홀란은 아더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안 그래도 공작가에 침투한 첩자들의 꼬리를 밝혀내기 직전이었고 남은 것은 그 숫자와 정확한 명단이었다.

그런데, 아더가 그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긁어줘 버렸다.

‘미처 찾지 못한 첩자 놈들의 이름…. 그걸 말해 준 거지.’

그 탓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첩자들의 정체와 증거.

그 두 가지 모두 손아귀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고, 그 결심은 매우 굳건했다.

다만.

‘…아더. 그 아이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또 그 검술의 정체가 뭔지 마음에 걸리는군.’

중얼거림과 함께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고서 아더 바이에른이란 이름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아더 바이에른 보다, 요넬을 납득시키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아더 바이에른의 비밀을 캐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머릿속을 정리한 홀란이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했다.

“전통은 중요하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리와 맹세지. 난 아더 바이에른과 아이린 바이에른의 대부가 될 것을 레오 바이에른, 그 아이들의 아버지와 약속했소.”

홀란이 방긋 미소 짓는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내가 대부임을 전혀 모르더군. 그래서 뒤늦게나마 대부 노릇을 좀 하려 하오. 나중에 다시 만난 내 친구에게 타박을 듣지 않기 위해.”

설명에 요넬이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홀란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홀란 오라버니….”

“감사하기는… 그래서 말인데 요넬.”

“예… 말씀하세요.”

“내 작은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소?”

요넬이 우는 것을 멈추고 대답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선에서 들어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들어드릴게요.”

대답에 홀란이 눈빛을 빛낸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하겠소.”

홀란이 진중한 목소리로 제안한다.

“아더 바이에른. 그 아이를 내가 데려가서 키워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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