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짐
사실 오늘 출근하라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들 이렇게 임시 사무실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여 있어도 달리 할 일은 없는데 말이죠.”
현오준이 툴툴거렸다.
“길드의 정식 등록에도 시간이 걸려서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현오준의 말이 맞았다. 현오준 길드는 아직 법적으로는 그냥 개인들의 사적인 모임에 불과했으므로, 중소 길드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직은 받을 수가 없었다.
웬디의 차원 세포에서 발견한 다이아 스틸 노천 광산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매입처와 거래를 하려고 해도 길드가 정식으로 등록되어야 뭐라도 할 수 있었다.
현재로써는 블랙마켓이라도 이용하지 않는 이상 그 다이아 스틸 원석을 지구의 화폐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럼 길드장님은 왜 출근해계시죠?”
오연화가 샐쭉이 눈을 뜨며 현오준을 노려보았다.
“선생님을 독점하려고 하셔봤자 의미 없어요! 어제는 그냥 먼저 가드렸지만, 오늘은 그렇게 안 될 걸요?”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최재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마성의 어벤저?”
오연화의 말을 들은 현오준이 껄껄 웃었다.
“확실히 열흘 만에 이렇게 네 명을 모두 꼬셔 버린 걸 생각하면 마성이라고 못할 것도 없어 보이는군요.”
지금의 이 인간관계를 설계한 건 그 자신인 주제에 현오준은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꼬셨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불쾌한데, 그 말을 들은 이지희와 구문효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최재철에게 시선을 못 맞추는 것도 묘하게 기분 나빴다.
‘지희는 몰라도 네가 왜!’
최재철은 그런 시선을 구문효에게 던졌다.
“뭐, 기왕 모인 김에 다 같이 훈련이나 하죠.”
현오준이 화제를 바꾸는 김에 그런 말을 던져왔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일신의 무력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면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이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필수 불가결한 면도 있었다. 어쨌든 최후의 최후에는 마지막 수단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어벤저 스킬이라는 특수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재들이고, 다섯 명이나 되는 ‘집단’의 무력은 개인의 무력보다는 훨씬 의의가 있다.
“그럼 오늘은 드디어 제가 최재철 씨와 대련을 해보게 되는군요.”
현오준이 가슴 뛰는 듯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 직접 주먹을 맞대는 건 TA에 입사할 당시의 실전 면접 이후 처음이었다.
“가능하면 웬디의 차원 세포로 가서 하는 게 효율 자체는 좋겠지만,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금은 어쩔 수 없군요.”
지금 그들이 웬디의 차원 세포가 위치한 틈새 차원으로 갔다간 온몸이 발가벗겨지고 알몸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의복은 틈새 차원이 거부할 테니 말이다.
“뭐, 효율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최재철이 현오준의 말을 받았다.
“일단 시작하죠.”
최재철의 눈이 빛났다.
*
“에고고, 아야.”
현오준이 노인이라도 된 듯 엄살이 잔뜩 묻어나는 신음 소릴 내었다.
“저한테 원한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유독 제게는 거칠게 대하시는 것 같군요.”
사실 현오준의 말은 틀렸다. 현오준에게만 유독 거칠게 대한 건 아니니까.
최재철이 현오준에게 한 건 간단했다.
구문효에게 한 걸 똑같이 했다.
다만 구문효는 신체 강화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할 때 최재철의 ‘안마’를 받았지만, 현오준은 이미 완성 단계에 달한 능력에 보너스를 조금 얹어준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구문효처럼 눈에 띄는 성장이 몇 시간 만에 뚝딱 일궈지지는 않았다.
뭐, 단순히 재능만 놓고 보자면 구문효 쪽이 한층 더 빛나는 것인 탓도 없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오준은 다소 일방적으로 보였던 이 대련에서 본인이 뭔가를 얻었음을 자각하고 있을 거고, 최재철이 어떤 의도로 움직였는지도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낑낑대는 건 농담 비슷한 거였다.
다만 최재철이 ‘안마’하는 광경을 처음 본 여성들, 그러니까 이지희와 오연화는 다소 압도된 듯 쉽게 입을 열지는 못했다.
‘흠, 역시 여자애들을 이렇게 다루지는 못하지.’
최재철은 다소 쓴웃음 섞인 표정으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어느 사회든 성 역할이란 건 나눠져 있게 마련이고, 그런 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취급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차별과 구별은 다른 것이고, 어린애와 노인을 젊은 남성 다루듯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성별의 구분이 거의 없다시피 한 어벤저들도 그런 일반적인 인식은 똑같이 갖고 있었다. 거칠고 척박한 이계에서도 그랬으니, 성 역할이 더욱 엄격하게 구분된 지구에서는 오죽할까.
그런데 여기에서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이지희가 일어났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그녀의 눈동자는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뭐? 언니, 왜 그래?”
오연화가 놀라 이지희의 손을 잡았다. 이지희는 오연화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앉으려 들지도 않았다.
“저도 대련을 하고 싶습니다.”
“이게 안 아픈 건 아닙니다만, 이지희 씨.”
그렇게 말한 건 현오준이었다. 이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도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녀의 말에 최재철은 약간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후.”
짧게 웃은 그는 이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덤벼.”
이지희가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쾅, 하고 그녀의 디딤발이 콘크리트 바닥을 깨뜨렸다. 뒤돌려 차기. 그녀의 오른발 뒤꿈치가 최재철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최재철은 허리를 뒤로 젖혀 그 일격을 피했다.
우뚝. 최재철의 가슴 위를 스치고 지나가야 할 이지희의 발이 멈췄다. 물리법칙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 발은 그대로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최재철의 몸을 반으로 가를 것만 같은 기세로 내려쳐진 그 일격은 빗나갔다. 최재철은 뒤로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갔다. 아름답게 뻗어 오른 이지희의 허벅지 안쪽에 최재철의 펀치가 작렬했다.
“큭!”
이지희의 입에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고통과 펀치의 위력으로 인해 킥의 방향이 바뀌었다. 오른쪽 반신을 무방비 상태로 내어놓은 이지희에게 세 발의 펀치가 추가로 작렬했다. 퍽, 퍽, 퍽! 그 공격에 이지희의 등이, 허리가, 다리가 꺾였다.
“흠.”
아플 것이다. 그야 맞았으니까, 안 아플 리는 없었다.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한다고 해도, 격투라는 모양새를 취하는 이상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인류가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이뤄졌던 갑옷과 무기의 싸움은 결국 무기가 이겼다. 어벤저 스킬이라 한들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으로 신체의 표면을 단단하게 한들, 그 강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최재철도 차원력을 감아 치는 이상, 맞은 이지희가 아무리 방어를 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재철은 일부러 아직 트롤 고문관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는 이지희에게 물었다.
“계속할래?”
“부탁합니다!”
놀랐다. 이렇게 바로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래도 널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
최재철은 말했다.
“좋아, 계속해서 간다!!”
“네!!”
고통으로 미간이 찡그려져 있는 주제에 대답만은 기운이 넘친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강해지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배움에 대한 욕구. 스승으로서 이걸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최재철의 입가에 희열이 맺혔다.
*
“스승님은 거짓말쟁이에요.”
그 말은 이지희의 입에서 나왔다.
“별로 효과 없다고 하시더니.”
대련을 마친 후, 이지희의 몸에서는 차원력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확실히 대련을 하기 전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 대련 한 번으로 인해 이룬 성장이 차원 세포에서 보낸 사흘간보다 더 클 정도였다.
“미안하다, 그래.”
최재철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널 과소평가했었던 것 같다. 네가 이 정도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지.”
“제가 보통 여자애라면 그랬겠죠.”
이지희가 이상한 자부심에 가득 차 말했다.
“하지만 전 아이돌이었으니까!”
정말 이상한 자부심이었다.
“아이돌이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 정도 고통은 몸매 관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지희는 단언했다.
“…아…….”
최재철은 할 말을 잃었다. 그야 몸매 관리란 걸 해본 적이 없는 그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었다. 아무튼 그게 남자한테 쳐맞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니, 앞으로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질 않았다.
“어쨌든 훌륭했다.”
최재철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이 화제를 계속 끌고 가봐야 좋을 게 없었다.
“차원력을 공방에 나누어 쓰는 데 많이 익숙해졌구나. 이제는 신체 강화 능력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모양새야. 신체 강화를 하다가 뇌전으로 흘리는 현상도 줄어들었고. 제대로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지.”
“오랜만에 칭찬받으니까 쑥스럽네요.”
이지희는 헤실거리며 웃었다. 방금 전까지 죽일 기세로 공격을 해오던 여자애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들 정도로 영 딴판인 모습이다.
“그럼 이제 길드원 모두가 최재철 씨의 ‘안마’를 받아본 셈이 되는 건가요?”
현오준이 말했다. 틀림없이 알고 한 소리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오연화를 향했다. 오연화는 움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니, 무리할 필요 없어.”
최재철이 먼저 말했다.
“이런 건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게다가… 차이가 좁혀졌다고는 한들 넌 여전히 이 길드의 최강자야.”
최재철의 위로가 섞인 발언에 오연화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선생님은 제외하고 말이죠?”
“응? 어… 응. 나야, 뭐, 하하.”
거짓말까지 할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아서, 최재철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됐어요, 뭐. 전 제가 잘 하는 걸 하도록 할게요. 좀 변명 같긴 하지만 전 아이돌이 아니라 ‘보통 여자애’니까요.”
오연화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최재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차원력을 꽂아 넣어 개통시키는 것인들, 역시 이지희에게도 주먹을 지르는데 심로가 꽤나 컸다.
그런데 이지희보다도 작고 귀여운 오연화에게 주먹을 휘둘러보라. 동영상으로 찍어놓으면 바로 신고당해서 재판정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최재철, 사형.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지.’
최재철은 픽 웃었다. 망상 치곤 너무 나간 것 같았다.
“뭐, 더 이상 숨길 것도 아니겠지.”
“네?”
최재철이 문득 한 혼잣말에 오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표정은 매우 귀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철은 일단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연화야, 염동력 특훈을 하도록 하자.”
이거라면 동영상으로 찍어놔도 신고는 당하지 않을 터였다.
“염동력 특훈이요?”
“그래.”
놀란 토끼 눈을 뜬 오연화에게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가 방금 말했잖아? 네가 잘 하는 걸 열심히 하겠다고.”
“열심히 하겠다곤 안 했는데요.”
확실히 오연화는 ‘열심히’라는 수식어는 붙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염동력 특훈이라니……. 선생님, 염동력 사용하실 수 있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모르는 걸 가르치겠니?”
“그럼… 설마……!”
오연화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최재철은 주먹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서 허공에 휙 던졌다. 다섯 개였다. 그 다섯 개의 동전이 최재철의 염동력으로 허공에서 춤추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채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절 속이셨어요!”
오연화는 분통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숨겼지. 절단 능력에 신체 강화 능력, 염동력까지 사용할 수 있는 신입 사원은 너무 수상하지 않니?”
“그래도 그렇지!”
계속해서 화를 내는 오연화에게 최재철은 넌지시 물었다.
“그럼 나한테 안 배울래?”
“배울래요!”
열망이 가득 찬 눈동자로 오연화는 외쳤다.
“좋아. 끝났을 때 동전이 더 많은 쪽이 승리!”
최재철은 오연화 쪽으로 다섯 개의 동전을 던졌다.
“앗!”
오연화는 놀랐지만 즉각 반응했다. 괜찮은 반응성이었다.
오연화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다섯 개의 집중점을 활용해 동전들을 모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게 그녀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최재철도 집중점을 던져 염동력으로 동전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동전 다섯 개가 모두 허공에 딱 멈췄다.
“염동력 줄다리기. 염동력 능력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수련법이지! 염동력자가 두 명 이상 있어야 한다는 게 사소한 단점이지만, 능력 개발에는 특효약이야!!”
“으이익!”
마음 편하게 설명을 하는 최재철과 달리, 오연화의 이마에는 핏줄이 돋았다.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최재철은 다섯 개의 동전을 향해 똑같은 염동력을 작용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오연화가 다섯 개의 집중점에 균일한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동전 중 몇 개는 잃고 말 것이다.
팅!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집중점이 다섯 개로 불어난 지 얼마 안 된 오연화다. 원래 갖고 있던 집중점과 새로 불어난 집중점 사이에는 숙련도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두 개의 동전이 최재철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이이이익!!”
여기에서 오연화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놓쳐 버린 동전에 집중점을 낭비하는 대신, 아직 놓치지 않은 동전에 집중력을 더한 것이다. 선택과 집중.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좋은 판단이로구나, 연화야, 훌륭해!!”
문제는 최재철도 같은 걸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연화가 집중점을 두 개 할당한 동전에 최재철도 똑같이 두 개의 집중점을 할당해 다시 균형이 유지시켰다.
“저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멍한 표정으로 구문효가 현오준에게 물었다.
“염동력 대결입니다.”
“네? 하지만…….”
“네, 저분도 다중 능력자란 의미죠.”
현오준은 다소 예상을 했었던 것 같다.
이전 세계의 최재철이 어떤 능력까지 공개했는지는 모르지만, 다중 능력자 정도가 아니라면 크게 두각을 드러내기 힘들었을 테니 어느 정도는 능력을 보였을 테고 현오준이 그걸 알고 있었더라면 이번 세계의 최재철의 능력도 적어도 단일 능력은 아니란 걸 예상은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구문효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금붕어처럼.
“뭐 스승님이니까. 염동력 정도는 사용하실 수도 있죠.”
그 와중에 이지희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그런 소릴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잘 하고 있어, 연화야. 잘 하고 있어…….”
염동력 대결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
“어쨌든 스승님이 거짓말쟁이라는 건 잘 알았어요.”
오연화와의 염동력 대결을 마치자마자 이지희가 최재철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에게 염동력을 가르쳐 주실 건가요?”
그 눈동자는 기대와 열망으로 가득 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분노나 배신감 같은 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최재철이 다중 능력자임을 숨긴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태도다.
그런 그녀에게 최재철은 이런 대답을 들려주는 걸 매우 유감스럽게 여겨야 했다.
“염동력은 신체 강화 능력과는 달리 고유 능력이라서 아무나 배울 수 없어. 첫 각성 때 염동력 계열의 파워를 얻어야 배울 수 있지.”
보통은.
최재철은 그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걸 덧붙였다간 보통이 아닌 방법으로 가르쳐달라고 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네 고유 능력인 뇌전 능력으로 염동력 비슷하게 따라할 수는 있지.”
최재철은 허공에 쇳조각 몇 개를 던진 후, 그걸 자력으로 끌어당겨 다시 손아귀 위로 되돌리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그걸 본 이지희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잠깐만요, 선생님! 뇌전 능력도 고유 능력 아닌가요?”
오연화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학생에게 질문을 들은 이상, 선생으로서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맞아.”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뇌전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는 건가요?”
“그게 내 고유 능력이라서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완전한 진실인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양한 고유 능력을 습득할 수 있다……. 즉, 선생님은 천재인 건가요?”
“천재라는 단어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천재는 너지, 연화야.”
갑작스러운 칭찬에 오연화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그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요!”
뒤늦게 깨닫고 그렇게 항의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반짝이는 눈동자의 이지희가 오연화와 최재철의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얼른 가르쳐 주세요. 방금 보여주신 거!”
“지희는 욕심쟁이구나.”
최재철은 껄껄 웃었다.
*
오늘의 훈련을 모두 소화한 이지희와 오연화는 돌려보냈다. 둘 다 조금 더 훈련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차원력을 지나치게 낭비하면 안 된다는 말에 결국 수긍했다.
구문효는 그 두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도로 길드 사무실로 복귀했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는 아직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부터는 남자의 시간이로군요.”
현오준이 말했다. 그 말에 구문효가 움찔 놀랐다. 뭔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제 두 분이서 절… 절 어쩌실 셈이죠?!”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최재철은 우선 그의 오해를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별거 아니야. 그저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서. …제정신으로 말이야.”
“제정신이라뇨? 전 항상 제정신인데…….”
“아니, 넌 항상 취해 있었지.”
최재철은 딱 잘라 말했다.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말이야.”
구문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반대로 말하자면 취해 있을 때는 여동생 이야기밖에 안 하지만요.”
현오준이 한 마디 거들었다.
“당신하고 술을 같이 마시는 입장이라도 되어보십시오, 구문효 씨.”
“그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구문효의 목소리가 드물게도 냉기를 띠었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다.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기에 최재철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구문효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피해자 본인이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 하지만 그 피해자가 무참히 살해당해 이미 이 세상에 없고, 그 가해자는 편히 살아가고 있다면 어때?”
그 꼴을 그냥 두고 못 보는 사람은 틀림없이 있다.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본 채 한참을 있던 구문효는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후에도 한동안이나 최재철을 응시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넌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구문효는 답이 나오기까지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했다.
다소 비겁한 방식이지만, 여기선 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구문효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벤저가 된 계기는 궁지에 몰려 계약마와 계약해 버렸기 때문이야.”
최재철 본인, 그러니까 김인수가 아닌 진짜 최재철은 그 계약으로 인해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약마와 계약했죠.”
현오준이 한 마디 보탰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라서 제대로 계약할 수 있었다.
“이 계약마란 놈들은 차원 균열에서 기어 나오는 놈들인데, 사실 본질적으로는 어보미네이션과 별로 다르지가 않아. 아니, 어보미네이션의 씨앗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
구문효는 아직도 최재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최재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내가 계약을 잘못했더라면 나도 어보미네이션 한 마리가 되어 이성을 잃고 지구의 생명체들을 학살하고 있었겠지. 아니, 내가 학살당했을 가능성이 더 컸으려나.”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구문효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너도 한두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테지. 인터넷 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음모론에 대해서 말이야. 사실 그 음모론들 중에서는 사실인 게 더 적어. 99%가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야 저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구문효는 스스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믿습니까? 증거도 없는데…….”
그렇다. 증거는 없다. WF가 모두 폐기했다.
“증인들은 넘쳐나지.”
하지만 증인은 많다. 목격자는 많다. 지금도 인터넷이나 헌터 네트워크에 드문드문 목격담이 올라올 정도로.
“그 증인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나 그 증인들이 거짓증언을 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단순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치기 어린 생각으로 괴담을 풀어놓듯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실제 목격자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것이 진짜 증인들의 증언마저도 거짓말인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필요한 건 ‘믿을 만한’ 증인이었다.
“내가 증인이라면 믿겠어?”
그래서 최재철이 내세운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최재철은 구문효의 사부다. 구문효 본인이 스스로 본인이 사부라 인정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구문효의 입이 닫혔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구문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그럼… 그럼, 연화는… 제 여동생은…….”
“그거야 모르지.”
구문효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최재철은 싹둑 잘랐다.
어쩌면 구문효는 이미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여동생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에 대해. 아무리 증거를 철저히 폐기하더라도 정황 증거라는 건 남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사건 현장에 남은 육편과 혈흔 중에 여동생의 DNA만 검출되지 않았다든가. 그녀가 남긴 소지품 주변에 거대한 육식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발톱 자국이 남았다든가.
그런 아주 사소한 정황 증거로 진실을 깨닫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 구문효일 가능성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진실은 구문효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모든 정황 증거가 맞아들어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들, 그 참혹한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무른 존재이다.
그렇기에 구문효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리라.
진실이란 그렇게도 폭력적이다. 술이 없으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은 압도적인 설득력으로 사람을 압박한다.
하지만 최재철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문효야.”
구문효의 여동생, 연화가 같은 이름을 가진 그 구연화가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해 주변의 동급생들을 참살하고 포식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건 결코 중요한 일의 축에 들 수 없다.
“네? 그게 중요하지 않다면 대체 뭐가…….”
“잘 들어. 난 네게 이렇게 물었어.”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게…….”
“그래,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도 있다는 뜻이야.”
구연화가 가해자인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계약마란 놈들은 궁지에 빠진 존재에게만 말을 걸게 되어 있다. 가해자가 궁지에 몰린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여기서 그 가능성을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그렇다. 구연화는 피해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계약마에 의해 이성을 빼앗기고 존재를 파괴당한 상태에서 그녀는 피해자인 채로 끝났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계약마가 변이한 어보미네이션이 한 일이다.
적어도 그 어떤 확률을 따져도 구연화가 가해자일 수는 없었다.
“차원 균열이 없었던 때의 지구에는 계약마란 놈들도 없었어. 그러나 지금은 차원 균열도 계약마도 존재하지.”“그건 자연재해 같은 겁니다.”
구문효는 최재철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 차원 균열은 자연재해 같은 거지.”
최재철은 그 시각마저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원 균열을 인위적으로 열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면? 그래도 그게 자연재해일까?”
구문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그런 게…….”
지나친 충격으로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 힘든지 구문효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저… 제게 왜 이런 걸 알려주시는 겁니까? 절 이용하시겠다면 이용당해 드리겠습니다. 사부님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들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그만…….”
“안 돼.”
울먹거리는 구문효의 말을 최재철은 차갑게 잘라내었다.
“생각하는 걸 포기하지 마. 난 널 일개 병사로 대할 생각이 없어. 넌 내 제자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제자지. 그런 제자를 나더러 버리는 패로 쓰라고?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가 지금 한 말은 네 스승에 대한 모욕이야.”
“하지만! 저는……!!”
“다시 한 번 묻겠다, 구문효.”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문효는 여전히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울먹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제자의 추태를 최재철은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다가, 문득 외쳤다.
“들어와라!”
몇 초간의 정적 끝에, 뻘쭘한 표정으로 두 여자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니, 뻘쭘한 표정을 지은 건 이지희뿐이었다. 오연화는 당당했다.
“훔쳐듣고 있던 건 아니에요. 선생님은 저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계셨으니, 저희는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훔쳐듣고 있는 것도 아닌 셈이 되죠!”
물론 최재철은 이 둘이 몰래 다시 돌아와 사무실 문에다 귀를 딱 붙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걸 이 둘의 어벤저 오라를 보고 알아채고 있었다. 그래서 오연화의 말은 맞는 말이긴 했지만 왠지 좀 짜증났다.
“어디까지 들었지?”
“다 아시잖아요?”
“물론 알고 있지.”
후, 하고 최재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은 물론 거의 처음부터다.
사실은 한 사람씩 압박 면접을 할 생각이었지만 이래서야 계획이 흐트러졌다.
최재철은 오연화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말해봐라, 연화야. 이 지구에 차원 균열을 열고 다니는 세력이 있나?”
“그야, 있어요.”
오연화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이 대화에서 그녀는 더 이상 부외자일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그녀와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니까.
“차원 진동기라고 했나요? 그 기계로 인해서 차원 균열이 열리고 어보미네이션이 기어 나오는 걸 직접 목격했죠.”
“사저…….”
멍한 눈초리로 구문효는 오연화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차원 균열에서도 계약마가 기어 나왔겠죠.”
평소 같은 부부 싸움이 참사로 이어지고, 소녀가 고아로 바뀐 그날의 일.
아마도 오연화는 평생 그 날의 꿈을 꿀 것이다.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바뀐다는 걸 못 믿겠다고요? 전 그걸 직접 봤어요. 아빠가, 엄마가 괴물로 변해가는 걸…….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 제가 머리가 이상해진 줄 알았어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이상한 꿈을 꿨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큰 충격을 받은 일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모님이 괴물로 변모하는 걸 봤다’였다. 결국 오연화는 자신을 속이는 데 실패했다.
구문효와는 달리.
“연화야…….”
이지희가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선 채, 오연화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전 모든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드는 걸 깨달았어요.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죠.”
오연화는 이지희의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열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전 S급 어벤저가 되어 커다란 집에서 살게 되었죠. 집에서 게임이나 하면서 노닥거려도 평생 가도 못 쓸 돈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죠.”
평범한 사람에게는 부러운 상황일 것이다. 아니, 평범한 어벤저들에게도 부러운 상황일 것이다. S급 어벤저만의 특권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주 많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하지만 정작 그 S급 어벤저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다. 다음 달 낼 집세가 없어 쫓겨나는 이가 세상에는 많다. 오연화가 그걸 모를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벤저가 되는 게 좋았냐, 아니면 부모님 슬하에서 평범한 소녀로 자라느냐에 대해 묻는다면 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거예요! 전 그냥 평범한 게 좋아요!!”
그녀의 눈꼬리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에 대해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외치고 있었다.
“제게 질문해 주세요, 선생님. 복수하고 싶냐고요?”
최재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연화도 그의 질문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네! 전 복수하고 싶어요!! 제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들의 인생을, 이번에는 제가 빼앗아주고 싶어요!!”
듣고 있던 이지희는 그녀의 열변에 압도당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러나 구문효는 달랐다.
픽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화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복수해야지.”
“난 댁 동생이 아니거든요?! 사저라고 불러요! 높임말 쓰고!!”
“예, 사저.”
구문효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오연화는 그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째서 이 둘이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는지, 아니, 오연화가 구문효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지 최재철은 이해했다. 오연화는 구연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구문효가 자신에게서 여동생을 겹쳐보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을 다른 누군가와 겹쳐보는 건 그 상대가 누구라도 싫은 법이다.
“그런데… 그 차원 균열을 열고 다니는 세력이란 건 누군가요?”
다소 풀린 분위기에 힘입어, 그동안 조용히 있었던 이지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 대한 뉴스는 봤어?”
최재철은 질문과는 다소 관계없어 보이는 말을 했다.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리기까지 했으니,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최재철을 비난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희는 그런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던지 순순히 대답했다.
“네. 차원 질서를 지키기 위해 차원 균열을 닫고 다닌다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사실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 본인인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궁금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WF의 차원 균열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 의해 많이 닫혔지. 아마 10개는 넘게 닫혔을 거야. 기사로만 뜬 게 이 정도니.”
“그전에 닫힌 차원 균열도 그 철가면이 닫은 거라면 그렇게 됐겠죠.”
이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철가면이 닫은 게 맞았지만 최재철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로 인해 WF가 본 손해가 5조원은 넘어. 그런데 WF는 망하지 않았지. 왜일까?”
“그야 새로운 차원 균열을 발견해서 매입, 확보했기 때문이죠.”
그 되물음에 이지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최근 뉴스로도 나온 답이니까. 하지만 이 질문은 어떨까?
“그럼 그 새로운 차원 균열은 어디서 나온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만큼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지희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아예 상관없었던 것 같았던 WF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그들이 하던 이야기와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깨달은 모양이로군. 그래, 사실 새로운 차원 균열을 확보하는 건 꽤 어렵지. 발견되는 즉시 기본적으로는 국가 귀속이 되니까. 기업이 차원 균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업 소속의 인간이 직접 차원 균열을 찾을 필요가 있어. 쉽지 않은 일이지.”
WF 소속의 인간이 한국 전체를 구석구석 감시라도 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차원 균열을 찾는 것은 어렵다. TA라는 라이벌도 있는 데다, 국가의 군인들이 국토 곳곳을 방위하면서 일상적으로나마 수색 작전을 동원하고 있으니까.
이게 쉬운 일이라면 TA가 거액을 주고 WF의 차원 균열을 사들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자신들이 찾아다 확보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라이벌 회사에 거액을 주면서까지 사들이겠는가?
더군다나 애초에 차원 균열은 그렇게 자주 열리는 게 아니다. 한 달에 하나씩만 열려도 그 뒷수습에 국가가 휘청거릴 터이다.
그런데 불과 나흘도 안 되는 새 10개나 되는 차원 균열이 새로 열렸다?
누가 봐도 이상한 속도였다. 전문가들은 이변이라며 헌터 네트워크에서 떠들고 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 전문가들의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언론이 조용했기에 대중적인 여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언론이야 언제나 그렇듯 WF의 개가 되어 ‘WF가 새 차원 균열 10개를 확보했어요!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라고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WF에게 있어서는 간단해. 차원 균열을 자기들이 연다. 그리고 차원 균열을 찾았다고 신고해 버리면 되는 문제야. 그럼 그 차원 균열은 WF의 것이 되지.”
“…….”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건지, 이지희는 그 자리에서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 물론 증거는 없어. 하지만 증인이라면 있지.”
“증인이요?”
“그래, 증인.”
최재철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오연화도, 이지희도, 구문효도, 이번이 두 번째라던 현오준마저도.
지난 세계의 난 이게 아니었나 보지? 아니면 현오준에게 알리지 않았든가.
최재철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그가 지금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그 증인이야.”
철가면을 쓴 그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목소리로 해야 할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
유곽희는 적과 대면하고 있었다. 내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진가염.
진가충의 형이자 진씨 가문의 장남.
실제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겼음에도, 4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 그 눈빛에는 정력적인 활기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외모는 WF 생명 공학의 홍보용 간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보미네이션에서 얻어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을 이룩한 WF의 과학기술은 ‘차원 기술’이라는 웃기는 명칭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차원 기술. 명칭이야 웃기지만 실제로 환갑을 넘긴 노인인 진가염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소매를 걷어 단단한 근육질의 팔을 보이는 장면이 언론에 의해 비춰질 때마다 WF의 주가는 오른다.
젊음에 대한 인류의 갈망은 그리도 애달픈 것이다.
“요즘 좀 나대는 것 같군.”
진가염이 말했다. 다소 ‘저렴’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건 상대가 유곽희이기 때문이다. 진가염은 대외적으로는 그런 말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상류층이자 귀족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 말씀을.”
유곽희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곽희는 이 남자가 두려웠다. 이 남자에 비하자면 진가충은 벌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네 딸이 죽은 것에 대해 원망이라도 품고 있는 건가?”
그렇다. 그녀의 진짜 딸, 그녀의 배로 낳은 진남은 죽었다.
이 남자가 죽였다.
그리고 진남이 죽은 사실은 이 남자와 유곽희 말고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 딸은 죽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유곽희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하.”
진가염은 짧게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비굴하고 멍청한 여자야. 그 아이는 네가 저지른 짓을 덮기 위해 사용했어. 그건 널 위한 거였어.”
그러면서 부드럽고 조용한, 달콤한 말투로 어린아이라도 타이르듯 말했다.
유곽희의 딸을 ‘사용’했다고 말이다.
유곽희는 위장에서부터 역류해 올라오려는 구역질을 참느라 고역을 치러야 했다.
“물론 그 일에 대해 네 동의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상황이 급박했으니 어쩔 수 없었잖아?”
진가염은 정말로 안타까운 듯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안타까움을 느껴서 저러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진가염은 유곽희를 ‘처벌’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지, 한 번 느껴보라고 저지른 짓이다.
처음 진가염이 그 사실을 유곽희에게 밝혔을 때, 진가염은 지극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유곽희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때의 시선을 유곽희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네가 저지른 짓을 아버지가 알았다면 넌 지금쯤 차원 균열 너머에 던져져 있을 거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감사합니다.”
진가염의 자화자찬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유곽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래. 예의가 바르군.”
진가염은 짧게 웃었다.
“잘 가르친 보람이 있어.”
그 말을 들은 유곽희의 몸이 자동적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응? 하하, 네 몸이 여전히 내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유곽희의 두려움은 진가염에게 유쾌함을 느끼게 한다. 그 두 눈동자가 가학심에 물드는 것을 유곽희는 감히 고개를 들어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적개심은 억누를 수 있어도, 두려움은…….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 주지. 아무도 널 비난하지 않을 거야. 적어도 이번 일로는 말이야. 하지만…….”
진가염은 유곽희의 턱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아주 가벼운, 즐길 만한 체벌을 네게 가하도록 하지.”
*
진가염에게 대를 이을 만한 자식이 없는 이유는 대단히 간단하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아니다.
그의 처들이.
지금까지 진가염과 결혼한 10명의 여인 중, 살아남은 여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진가염과의 결혼식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은 여성들은 모두 죽었다.
세상에 그런 불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진가염과 결혼한 여인들은 하나 같이 비참한 사고에 휘말려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그 뱃속에는 진가염과의 사이에서 잉태된,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있었기에 사건의 참혹함을 한층 더 끌어 올린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며 진가염에게 위로의 말을 아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진가염과 친분이 있는 이들은 지금까지 10번에 걸친 장례식에 참여하여 그를 위로해 왔다.
진실은 어떨까?
당연하지만 10번이나 연속해서 한 사람의 배우자만이 집요할 정도로 사고에 휘말려 사망하는 일은 세상에는 없다. 아니,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그런 예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진가염의 경우는 아니다.
진실은 단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진가염이 죽였다.
희생양들의 사인인 사고사는 위장된 것에 불과하며, 사건을 맡은 경찰들은 사건에 깊이 파고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가 진실을 알릴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고?
그럴 일은 없다.
왜냐하면 진가염에게는 그와 얽힌 사건을 전담하는 경찰이 따로 붙어 있으니까.
그 경찰은 진씨 일가에 의해 완전히 포섭당한 상태다. 지금의 풍족한 생활과 보장된 밝은 미래는 그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렸다. 더군다나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WF의 후원 프로그램으로 외국 유학을 떠나 있었다.
WF는 그 경찰에게 네가 배신하면 네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라고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멋대로 상상할 테니까.
그리고 경찰 상층부는 그 경찰이 포섭당한 사실을 눈감아 주고 있었다.
그 상층부조차 어디까지 포섭당해 있을지 그 경찰은 모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가염의 ‘진실’이 밝혀질 일은 영원히 없을 터였다.
“아니, 고의는 아니야.”
진가염은 말한다.
“사고 같은 거지. 그러니까 그건 사고사가 맞아.”
웃으면서 말한다.
“겨우 10분 정도 목을 졸랐다고 죽을 줄이야. 미처 예상 못했지.”
황홀하게 웃으면서.
“내 애를 뱃속에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 뭐야. 그래서 자제하지 못하고 그만 저질러 버리고 말았지. 참 불행한 사고였어.”
지금 당장, 30분 째 유곽희의 목을 노끈으로 조른 채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역시 넌 목을 졸릴 때 짓는 표정이 가장 아름다워.”
진가염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가 죽여 온 10명의 부인 또한 모두 한 번쯤은 들었을 말일 터였다.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여성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결혼한 게 10번일 뿐, 사귀거나 외도를 했을 여인은 더 많았을 테니 말이다.
그중에 몇 명이 죽었을까. 유곽희는 생각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어벤저 스킬을 활용해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도 모자랄 상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