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23화 (23/32)

23. 만남

김인수가 최재철의 모습으로 웬디의 차원 세포에서 사흘간 자리를 비우고 있었을 때, 지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정확히는 퇴사 절차를 밟느라 어제 하루를 꼬박 소비했으니, 그가 지나간 뉴스를 확인하게 된 건 나흘째의 일이었다.

눈에 띄는 기사는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역시 WF에 대한 기사였다.

[WF, 새 차원 균열을 10개 확보]

[경기도 지역에 무더기로 차원 균열이 발견… 모두 WF 소유가 되어.]

[WF, 차원 균열 대량 발견으로 인해 다시 주가를 회복해…….]

“후.”

김인수는 그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흘 만에 차원 균열이 10개라니. 그것도 전부 경기도 지역? 아무리 그래도 심했다. 이 정도면 거의 세계 멸망의 전주격인 대사건이다.

만약 그 차원 균열들이 자연적으로 열린 거였다면 말이다.

“그럴 리 없지.”

그 정도로 차원 질서가 무너졌더라면 이미 지구 전체가 헬필드에 잠식되어 인류 문명은 중세 이전으로 후퇴하고, 어보미네이션 군단과의 결전을 매일매일 벌어야 할 터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서울은, 그리고 세계는 그런 세기말적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WF가 ‘발견’했다는 저 10개의 차원 균열은 자연적으로 열린 게 아니라는 결론에 쉬이 도달할 수 있다.

“그것도 경기도 지역에만 10개라니, 속이 너무 빤하잖아.”

의심을 받는 걸 두려워했다면 좀 더 띄엄띄엄, 적어도 경기도에 하나, 강원도에 하나인 식으로 차원 균열을 열었을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경기도에만 10개의 차원 균열이 열렸다는 건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우니까.

그러나 WF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 의해 10개나 되는 차원 균열을 잃었다. 방어에 나설 어벤저도 부족했을 테고, 지방에까지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꺼려졌을 테니 어쩔 수 없이 경기도에 차원 균열을 좌르르륵 연 것이다.

WF가 위험 부담을 감수할 정도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만큼은 가히 용비어천가 수준의 인터넷 기사들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떨어져 나간 투자자들을 끌어 모으고 다시 회사운영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WF는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이건 이용할 수 있겠군.”

불쾌하고 짜증나는 기사이긴 했지만 이 정도 짓을 벌였으면 어딘가에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WF를 무너뜨리고 진씨 일가를 모조리 파멸로 몰아넣는 게 목적인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적들의 무리수를 충분히 반가워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인수는 오늘자 기사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방송을 탔다.

처음에는 인터넷에 짧은 동영상 클립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이 기사화되었다. WF에서는 별 규제를 걸지 않은 듯 영상은 일파만파 퍼져 나가, 저녁쯤에는 아예 TV 뉴스까지 타버렸다.

[차원 균열을 닫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괴한, 에스파다 도 오르덴!]

스포츠 신문 1면에 떡 하니 박혀 있는 문구가 좀 웃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김인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상 속에서는 교묘하게 비슷한 가면을 착용한 다른 남자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인 척하고 있었다.

“뭐지, 저건?”

원조 에스파다 도 오르덴인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설은 몇 개 세울 수 있었다.

가장 먼저, WF 측에서 일부러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세웠다는 것.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가장 납득이 가는 가설이다.

영상까지 구해다 떡하니 올려놓은 데다, 그간 통제해 왔던 언론마저 풀어서 대대적인 선전까지 했다. 이럴 수 있는 세력은 몇 없다.

WF, 혹은 정부.

정부가 이런 장난을 칠 동기가 없으니, 소거법으로 WF라 생각하는 게 온당하다.

그러나 이 가설이 가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이 영상을 찍으면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차원 균열 하나를 또 닫았다. 정확히는 가짜 오르덴이. 이번에 닫은 차원 균열도 WF 소유의 차원 균열이다.

차라리 정부라면 국토 방위와 국민 안전을 위해 차원 균열을 닫는다는 가설이 통하지만 WF는 오래된 차원 균열을 TA에 팔고 다니는 회사다. 그들에게 있어 차원 균열은 어디까지나 ‘자산’이다.

이걸 그냥 영상 하나 찍는다고 닫는다? 회사라는 조직의 목적이 이윤 추구라는 걸 생각하면 주식회사인 WF가 고를 수가 없는 선택지였다.

문제는 또 있다. 이 영상이 내포한 메시지였다.

[나는 차원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라 한다. 차원 균열은 차원 질서를 어지럽히기에 닫았다. 그동안 닫힌 차원 균열도 내가 닫은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차원 균열을 닫을 것이다.]

영상 안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목소리까지 진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과 똑같았다.

비록 김인수가 직접 찍은 영상과 달리 WF가 차원 균열을 열고 다닌다는 정보는 누락했지만, 차원 균열은 차원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이므로 닫아야 한다는 논지는 유지되었다.

그간 차원 균열이 무해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여론에 전파하기 위해 WF가 사용한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냥 광고만 찍어서 내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업 영화는 이제는 거의 찍지도 않는 시대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이 다큐멘터리를 학생들한테 의무적으로 틀어줘야 한다.

거기까지 로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 김인수는 쉽게 상상해 낼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홍보해 놓은 WF의 입장에서는 차원 균열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이제까지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지워놓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자산인 차원 균열을 하나 닫아가면서 이렇게 자극적인 방식으로 차원 균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앞뒤가 맞질 않았다.

“모순투성이로군.”

김인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그는 더욱 설득력이 있는 가설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모순이라는 건 WF 전체가 같은 의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가정하기에 나오는 단어였다. 하지만 WF라는 회사 전체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게 아니다. 회사라는 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고, 그들이 내부에서 서로 파벌로 갈려 대립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파벌 중 하나가 갈려 나와 이런 ‘반역 행위’를 저질렀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앞뒤는 맞아든다.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굳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이름을 꺼낸 건 진짜 오르덴을 끌어내어 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함정일 수도 있었지만, 세상에 어디 리스크 없는 일이 있겠는가.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썼다.

*

“확신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유곽희의 짓일 겁니다.”

추경준이 말했다. 그는 WF의 A급 어벤저였고, 차원 균열을 연다는 WF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작전을 맡아 하던 존재였다. 그도 실무자인 터라 사내 정치에 대해 자세한 걸 알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있기는 했다.

“유곽희?”

“진가충의 처이지요.”

진가충의 처. 그렇다면 진씨 일가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사이는 대단히 나쁘고, 별거한 지도 꽤 되었습니다. 사실 사내에서 특별한 직위는 없지만 꽤나 여러 곳에 입김을 불어넣고 다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되나?”

“그녀는 전 사장 유연학의 딸이기도 합니다. 유연학 파벌의 어벤저들은 그녀 말이면 껌벅 죽지요. 유연학 본인은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꽤나 높아서 대놓고 진가충과 대립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곽희는 다릅니다.”

“자네도 유연학 파벌이었나?”

“굳이 구분 짓자면 그렇게 되겠군요. 뭐, 전 제 일에 열심이었을 뿐입니다만.”

그 일이라는 게 차원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그걸 또 지적할 필요는 없다.

“이번 일이 유곽희 짓이라고 판단하는 다른 근거는 없나?”

“유연학은 다릅니다만, 유곽희는 WF보다 WFF의 이익을 중시합니다. 더 정확히는 아버지인 유연학을 챙기죠.”

진가충이 휠체어를 타고 칩거를 해버린 지금, WFF의 실권은 사장 대행인 유연학에게 돌아가 있다. 실권이라 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책임 또한 돌아가 있는 게 좋지 않다.

“유연학이 사장 대행을 하고 있는 지금, WF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WFF의 책임을 덜기 위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존재를 대외에 밝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

적이 명확해지면 내부의 결속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존재를 밝힘으로써, 확실히 내부의 책임자를 경질하는 것보다는 적을 잡아 죽이는 데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유곽희는 그런 효과를 노린 것 같다는 게 추경준의 의견이었다.

“자네가 보기에 유곽희는 차원 질서를 위해 처형해야 할 존재인가?”

사실 김인수는 진씨 일가를 하나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추경준에게 그렇게 물었다.

두 가지 의도였다. 그가 아직도 유연학에게는 충성할 의지를 남겨두고 있는지에 대해 떠보기 위해. 그리고 혹시나 아직 그에게서 끌어내지 못한 정보를 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글쎄요, 저는 간혹 생각하고는 합니다.”

김인수의 의도를 파악한 건지, 아닌 건지 추경준은 다소 애매하게 입을 열었다.

“유곽희라는 여자가 WF에 원한을 가진 게 아닌 건지 말입니다.”

“원한?”

의외의 말에 김인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물론 강철가면에 가려져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겠지만, 추경준은 그의 되물음에 약간 긴장하는 빛을 보였다.

“유곽희가 유연학 파벌을 움직여 일으킨 일들은 대부분 WF의 손해로 이어졌습니다. 대신 유연학의 WFF의 이득으로 이어지긴 했습니다만, WF 그룹 전체의 피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요. 진가충과 유곽희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습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하다. 유곽희라는 여자가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은 이상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유연학 본인에게 있어서는 손해라는 걸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WFF가 아무리 이득을 본다 한들, 사내 정치에서는 유연학을 안 좋은 위치로 돌아가게 만들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다.

그건 이미 유연학을 위한 행동이 될 수 없었다. 두 가지 가설, 유곽희가 무서울 정도로 멍청하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든지.

“사실상 유연학에게 이득을 안겨다 주는 건 핑계거리고, WF에 타격을 주는 게 진정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추경준도 김인수와 같은 생각인지, 그런 분석을 내놓았다.

“뭐, 그 탓에 진가염 사장에 의해 축출되기도 했고 말입니다.”

“진가염… 진가규의 장남인가.”

“그렇습니다.”

진가충 본인은 WF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WFF의 부사장으로 있다가 최근에야 사장으로 올라왔지만, 진가염은 진작 본사인 WF의 사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진가규 회장의 제1후계자로 발탁되었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지표였다.

“그런데 축출되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유연학파의 어벤저들을 WFA라는 회사로 분리해서 TA에 팔아버렸습니다.”

“TA에?”

“어벤저를 해고하는 건 다른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벤저 확보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회사를 만들어서 한꺼번에 퇴출시키는 방식을 사용한 거죠.”

“자네도 유연학파의 어벤저 아니었나?”

“저는 유곽희의 작전에 참여하지 않아서 살아남았습니다만, 어쨌든 사내에서의 입지는 많이 축소되었지요.”

추경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가염 사장도 별 흠 잡을 데 없는 유연학 사장을 직접 축출하는 건 부담이 많이 되었는지 다소 복잡한 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서 결국 성공한 셈이 되었지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등장으로 차원 균열이 닫히면서 그 책임을 지울 인간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눈엣가시였던 유연학을 축출했다. 그런 시나리오였다.

“진가충의 사장 부임은 그 마무리 한 수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진가충 본인이 칩거하고 다시 유연학이 실권을 잡는 상정하지 않았던 변수가 일어난 상황이죠.”

김인수가 직접 조상평 일파를 이끌고 차원 균열을 닫는 바람에 진가충이 투자자들의 분노를 피해 칩거해야 할 상황이 찾아오고 말았다. 확실히 이런 외부 요인은 아무리 진가염이 잘나도 예측하기는 힘들 터였다.

“살아남은 유연학 파벌 어벤저들을 이끌고 유곽희가 술수를 한 번쯤 더 부려보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추경준은 유곽희를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고 자신의 논리를 마무리했다.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다소 이야기가 복잡해진 것처럼 느꼈다. 사실 진씨 일가라면 누구든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지만, 유곽희라는 인물이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곽희는 어떤 인물이지?”

“가장 먼저 드는 인상을 말씀드리자면, 미녀죠. 마력적인 미모의 소유자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유연학 파벌의 어벤저들의 대다수는 물론 유연학의 인품에 반해서 파벌에 들어온 것입니다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놈들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추경준은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를 적대시하는 파벌에서는 흔히 마녀라고도 합니다. 사내에서의 입지나 이런저런 유리한 점을 따지자면 당연히 진가충 파벌로 남아 있어야 할 어벤저들이 유곽희를 직접 한 번 만나보고는 이점이나 권력이랑은 상관없이 유연학 파벌로 휙 넘어가는 걸 보고 있자면 그렇게도 생각할 만합니다만.”

추경준의 말에서 김인수는 다소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바로 확인했다.

“그녀는 어벤저인가?”

“어벤저로는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반인이지요.”

“대답이 애매하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녀는 상당한 미녀이기는 합니다만, 사진으로 볼 때 그녀가 인간을 초월할 정도로 예쁘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네도 그녀와 직접 만나봤나?”

“예, 굉장한 미녀더군요. 사진과 달리.”

“과연, 알겠네.”

어벤저들이 하필 직접 만났을 때 그녀에게 넘어갔다는 말에서 미루어볼 때, 그녀는 매료 계열의 어벤저 스킬이라도 익힌 모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추경준은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고.

추경준 정도의 실력자이기에 유곽희의 스킬에 저항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그녀의 파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진가염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가설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그녀를 만날 땐 유혹 스킬에 대해 대책을 세워두는 게 좋겠군.’

김인수는 그녀를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터였다. 죽일 건지, 아니면 이용할 가치가 있는 건지 직접 보고 가늠해 볼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추경준은 김인수에게 그럭저럭 유용한 정보를 하나 준 셈이었다.

“그래, 알겠네. 도움이 됐네.”

김인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는 추경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어보미네이션 공장’에 대해서 알고 있나?”

“어보미네이션 시체 가공 공장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혹시나 추경준이 현오준의 입으로 들었던 ‘어보미네이션 공장’에 대해 알고 있는지 떠보려고 했지만,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면 ‘이번 세계’에는 그런 공장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고, 추경준도 모르는 또 다른 극비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수고하게.”

추경준은 혼자서 차원 균열을 닫을 수 있을 만한 힘을 갖출 때까지 수행 중이었다. 그런 그의 수행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릴 테니까.

*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모습을 한 채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는 조상평과 그 일당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조상평 일당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돕느라 WF에 수배도 되었을 거고,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렸다.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백억 정도 가치가 되는 보석함을 주고 오긴 했지만, 아마 돈으로만 해결하기는 힘들었으리라. 잘 도망 다니고 있는지 좀 걱정이기는 했다.

사흘 전까지는 멀쩡한 걸 확인했지만, 그가 TA에서의 차원 균열 돌입 작전을 수행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사흘 동안 무사할지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지금도 그들의 목은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첫 인상이야 어쨌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협력자들이다. 그들의 용태를 살피러 한 번은 들러볼 생각이었다.

물론 오직 그 목적만으로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WF 소속이었다고는 하지만 B급 어벤저인 그들이 사내의 극비 정보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방금 전까지 추경준에게서 얻은 정보에 대해 교차 분석을 해볼 셈이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대충이라도 알면 아는 대로 교차 분석을 할 수 있다. 정보의 신뢰도를 확보하기엔 도움이 될 것이다.

*

김인수가 찾아갔을 때, 조상평 일당은 벽에다 철가면을 걸어두고 그 철가면을 향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상평이 선창을 하면 다른 이들이 열심히 따라 외치며 절을 한다.

“…….”

그 광경을 본 김인수는 뭐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몇 초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그는 이들이 자신에게 종교적 신앙과도 같은 것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종교적 제의 같은 걸 올려 버리다니.

아무리 이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김인수라 한들 이들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절을 하면서 하는 외침을 들어보니 뭔가 고마운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릴 때는 딱히 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아도 그것 또한 신 덕분이라고 억지로 갖다 대는 경향이 있다.

고대에는 번개가 치면 제우스, 파도가 치면 포세이돈인 식으로 좀 나눠 생각했다는 것 같은데 인류의 종교가 대부분 유일신 종교로 바뀌면서 이런 경향도 생겼다.

그래서 김인수는 그들에게 뭔가를 해준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멋대로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WF의 현상금 사냥꾼들을 상대로 도망 다니느라 바빠야 할 그들이 한가하게 철가면을 만들어 벽에 걸고 절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었던 것 같다.

며칠 전에 준 보석함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 때문일지는 지금부터 그들의 입으로 말하게 될 터였다.

“앗,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시여!!”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모습을 한 김인수를 발견하자마자, 조상평이 가장 먼저 맨발로 달려와 김인수를 향해 절을 했다. 아까 철가면에다 대고 하던 절과 똑같은 절이었다. 다른 이들도 조르르 따라 나와 조상평의 뒤에서 똑같은 자세로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

김인수가 말하자 그들은 동작을 딱 멈췄다. 말은 잘 듣는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위대하신 에스파다 도 오르덴께 감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조상평은 절하는 건 그만뒀지만 머리는 여전히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르덴께서 굽어 살펴주신 덕분에 저희는 더 이상 쫓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모두 오르덴의 은복입니다. 어찌 감사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쫓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습니다, 오르덴이시여. 바로 어제의 일입니다. 유곽희가 찾아와 차원 균열이 닫힌 것에 대한 배상금을 탕감해 주고 WF의 수배도 풀어주었습니다.”

조상평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그 대가는 오로지 한 가지, 에스파다 도 오르덴께 자신에 대해 잘 말해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께서 저희께 하사하신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조상평은 또 고개를 조아렸다. 꾸벅꾸벅 잘도 조아린다. 김인수는 굳이 그걸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조상평이 말한 내용에 집중해야 했다.

유곽희가 이들에게 은혜를 입히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만나면 잘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차원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이좋게 지내보자는 제스처겠지.’

김인수는 이계에서도 별로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경계와 의심이 몸에 배었다. 그러므로 그는 2차적인 생각을 한다.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고.’

유곽희는 WF 쪽 인사다. 추경준의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시 적이다. 함정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온당하다.

“유곽희가 내게 연락처 따위를 남기지는 않았는가?”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건 의외였다.

연락처를 남겼다면 김인수는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이다. 그를 적대시하는 세력으로서는 그 정체를 우선 알아보고 싶을 것이다. 다른 실마리가 없는 상황에서 그 방법으로 가장 좋은 건 역시 대면하는 것이다.

적당히 그의 추종자에게 은혜를 입히고 연락처를 남기는 것은 얕은 수지만 동시에 잘 먹히는 수이기도 하다. WF 측에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수작이었다.

그런데 연락처조차 남기지 않고 그냥 떠나다니.

‘유곽희라는 여자가 그냥 멍청할 여자일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졌군.’

멍청한 여자가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도박사다. 혹시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자신들의 호의를 함정으로 오해할까 봐 일부러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럼 유곽희가 조상평 일당에게 입힌 은혜는 정말 순수하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호의를 사기 위한 것임이 된다.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도 낮았다. 조상평 일당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협조함으로써 WF에 입힌 피해액은 수천억 원 규모에 도달한다. 그런데 그냥 호의 좀 얻자고 그걸 탕감한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여기서 추경준의 이야기를 좀 떠올려 보면, WF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 무리수를 던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해도 유곽희의 행보에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생긴다. 이번 일에는 WFF와 유연학이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최소한도의 변명거리도 없는 행동이다. 위험성이 너무 높다. 만약 이 일이 공론화된다면 그녀 본인은 물론 유연학까지 싸잡혀서 WF 내에서 실각되도 할 말이 없다.

‘뭐 하는 여자야?’

김인수는 철가면 아래에서 조상평에게 들리지 않도록 혀를 찼다.

‘아무래도 직접 봐야 할 것 같군.’

그냥 멍청한 여자인 건지, 아니면 대범한 도박사인 건지 직접 보지 않으면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멍청한 여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김인수는 더욱 확실한 정보를 원했다.

“그 여자와는 이 방에서 만났나?”

“예, 오르덴 님.”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비전.”

장소의 기억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김인수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

“오, 오오오!!”

김인수가 능력을 사용하자 그 자리에 있던 조상평 일당이 일제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외경의 뜻을 보이는 것이리라. 김인수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장소의 기억을 읽어내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아마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과 제 목적은 일치합니다.]

이 자리에 있던 유곽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불타는 눈동자로. 복수의 의지를 담은,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이다.

“후.”

김인수는 짧게 웃었다. 이것만 보면 아무래도 가능성이 낮은 쪽이 진실인 것처럼 보인다.

추경준에게 아직 유연학과 유곽희에 대한 충성이 남아 있다는 의혹은 이제 조금쯤 벗겨줘도 될 법했다. 그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니까.

아버지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복수에 미친 이 여자가 노리는 대상은 틀림없이 WF였다. 적어도 그녀의 눈동자는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마저도 연기라면 연기 대상 급이겠군.’

유곽희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혹시 여기서 비전 능력을 사용할까 봐 연기를 했다는 가설은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까지도 유곽희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직접 접촉해 볼 필요는 느꼈다.

“조상평, 그리고 그 일당.”

“예, 옙!!”

“나에 대한 경배는 됐으니까 수양과 수행에 힘쓰도록. 내 힘이 될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해져 보이게나.”

“알겠습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님!!”

이들이 보여준 충성심이라면 아마도 진심으로 노력할 것이다. 종교적 열정은 때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걸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만 있다면 간혹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고는 한다. 적어도 중세 유럽인들을 암흑시대에서 르네상스로 끌어 올려줄 정도는 된다.

대답에 만족한 김인수는 그 자리를 떴다.

*

진현우였던 존재는 점점 더 진현우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안심하고 쉴 장소를 손에 넣은 그는 좀 더 효율적으로 자신의 체력과 능력을 관리할 수 있었고, 그런 만큼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설 수 있었다.

“오늘 얻은 기억은…….”

그는 진현우의 침대에 누워 오늘의 전리품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전리품이란 물론 진현우의 기억을 가리킨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로군, 하.”

솔직히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어졌다.

진현우 소년의 첫사랑이 시작된 날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시간을 꽤 오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중의 기억은 꽤 끊어져 있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현우 소년이 첫 사랑의 여자와 만나게 된 계기와 그날 바로 그녀에게 반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진현우 소년의 생일날이었다.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이었다. 사실상 진현우 소년의 생일은 핑계고, 그의 할아버지인 진가규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 목적인 인간들이었다.

아직 유년기였지만 눈치만큼은 빨랐던 진현우 소년은 그것을 잘 알았기에 불퉁한 표정으로 삐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어른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해도 버릇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부모조차 말이다.

할아버지와 동석할 때 그는 말 그대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물론 그의 할아버지가 그를 매우 귀여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진현우 소년은 할아버지 눈치만 보면 됐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첫 사랑의 소녀와 만난다.

유곽희.

지금은 그의 새어머니인 여자였다.

당시에는 이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소년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감정 따윈 없는 듯 인형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름.”

소년이 그 자리에서 한 첫 마디가 그거였다. 그러니까 그날의 생일파티를 통틀어서 말이다.

“유곽희.”

소녀도 그렇게만 답했다. 이 자리는 소년의 생일 축하 파티고, 호스트인 그에게 축하의 말을 한 마디라도 던지는 게 예의였지만, 소녀는 그런 건 다 무시했다.

소년은 그런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너, 내 꺼 해라.”

“뭐?”

그때, 처음 소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소년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호, 그래. 현우야,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느냐?”

줄곧 소년의 등 뒤에 서 있던 그의 할아버지, 진가규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 아이는 이제부터 네 거다.”

그 누구도, 소년과 소녀 당사자들마저 감히 진가규의 말에 토를 달수는 없었다.

그렇게 유곽희 소녀는 진현우 소년의 약혼녀가 되었다.

진현우 소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소녀를 손에 넣었다고 기뻐했다.

그의 아버지가 소녀에게 욕망의 시선을 던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렇게 된 거였군.”

진현우였던 존재는 왜 자신의 아버지, 진가충이 자신을 싫어했는지 깨달았다.

아직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해 중간 과정은 띄엄띄엄 넘어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곽희가 진가충의 처가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진가충이 욕망을 이룬 모양이었다.

지금 유곽희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진현우였던 존재는 별 감정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잊고 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 생각 없는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몰랐다.

결국 진짜 대답은 더욱 많은 어보미네이션을 포식하고 확실한 기억을 되찾은 후에나 할 수 있게 되리라.

진현우였던 존재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이미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지금은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

어보미네이션도 꿈을 꾸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진현우였던 존재가 첫 계약 때 얻은 힘으로 진현우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도중이라 한들, 그 본질이 어보미네이션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존재가 지금 꿈을 꾸고 있으니, ‘어보미네이션도 꿈을 꾸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꿈이라는 현상에 대해 학자들은 뇌에서 무작위로 정보를 꺼내와 재생시키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꾸고 있는 꿈 또한, 그의 기억이 무작위로 꺼내어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진현우였던 존재가 오늘 꾼 꿈은 그가 전혀 모르는 장면이었다.

“네 딸이야.”

꿈속의 유곽희가 말했다. 포대에 싸인 아기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내 딸이라고?”

꿈속의 진현우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대꾸했다.

“그래. 네게 이 아이의 이름을 붙일 권리는 없지만 말이야.”

“…….”

“이 아이의 이름은 네 아버지가 붙였어.”

“그 이름이 뭐지?”

“진남.”

“이상한 이름이로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유곽희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 여자의 이 차가운 표정에 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표정이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네 딸이자 네 여동생이기도 하지.”

진현우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꿈속의 그는 진현우 자신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표정은 의외로 좀처럼 보기 힘든 법이다. 거울 따위로 볼 수야 있겠지만, 거울이 보여주는 상은 반전된 상이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 따위는 없었다.

이건 꿈이니까.

꿈이란 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뇌 속의 정보를 무작위로 재생한다고는 하지만 그 정보가 왜곡되는 건 흔한 일이다.

기괴하게 일그러지기도 하고 현실과는 완전히 반대로 재생되기도 한다. 현실이길 바라는 쪽으로 재생되거나, 이것만은 아니었으면 하는 식으로 재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현우는, 진현우였던 존재가 아니라 본체인 진현우는 이 꿈이 진실이길 바랄까, 아니면 이것만은 진실이 아니었으면 할까. 진현우였던 존재는 아직 진현우가 아니기에 모른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 진정 그가 진현우가 되는 순간이리라.

“이 아이는 네게 맡길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꿈속의 유곽희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네가 키워.”

“왜 내가?”

“네 아버지는 얘 얼굴도 보기 싫다고 했거든. 잘못하면 죽이려고 들지도 몰라.”

‘네가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지.’

꿈속의 진현우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넌 날 증오하니까.’

그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꿈속의 진현우는 유곽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도 있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게 됨을 두려워하다니.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꿈속의 진현우는 아무 말 없이 포대에 싸인 아기를 받아들었다.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건 꿈이니까.

진현우였던 존재는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났음을 그는 뒤늦게 눈치챘다. 그걸 눈치챈 것도 품속에 아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꿈에 취해 있었던 거냐며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상실감이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진현우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꿈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그는 모른다. 진현우의 기억은 아직도 완벽하지 않고, 군데군데가 빠져 있으니까.

이 꿈이 사실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는 기억과 능력을 더 많이 되찾아야 했다.

“다시 사냥하러 가야겠군.”

꼭 꿈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는 평소보다 빨리 집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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