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2화 (2/32)

2. 복수의 시작

복수.

그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김인수에게 있어서는 진가규였다.

그의 가족들을 죽이고 그마저도 다른 세계로 날려 버린 장본인.

하지만 아무리 대마법사인 김인수라고 한들 지금 당장 WF 본사로 달려가서 진가규를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진가규는 10년 전에 이미 차원 균열을 열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진가규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김인수는 모른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김인수는 오늘이 지구 시간으로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인지조차 모른다. 그가 이계에서 관측한 데이터로는 이계와 지구의 시간 흐름은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다소의 오차는 있을 수 있었다. 확실하게 해야 했다.

들끓어 오르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다른 세계에서 10년을 살다 오기는 했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이 충분히 수상해 보인다는 건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일단 경찰에 신고당해 신원을 조회당하는 상황은 피해야 했으니, 평범한 복장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옷을 살 돈이 없었다. 동대문에라도 가서 아무거나 집어 입는다면 모를까.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과연 동대문이 남아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하려고 해도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최소한의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첫 계약으로 전 재산을 바쳤기 때문에, 그에게는 지구의 돈이 없었다. 원은 물론이고 달러나 위안이나 파운드도.

김인수는 어느 정도 환금성이 있는 귀금속을 들고 오기는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귀금속을 환전하기 위해서는 신원이 필요했다.

김인수는 10년이나 이 세계에서 모습을 감춘 인간이다. 당연히 행방불명 처리가 되어 있을 터였다. 어쩌면 사망 처리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섣불리 귀금속을 처분할 수는 없었다.

“참…….”

주머니에는 황금과 보석이 가득한데 서울에서는 실질적으로 무일푼이라니. 이 정도쯤 되니 차라리 헛웃음이 나왔다.

“하는 수 없군.”

그는 그의 오른팔에 걸린 세 개의 팔찌 중 하나에 손을 대었다. 그 고대 유물의 이름은 반지 운반자의 팔찌. 그의 목숨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구해준 이 팔찌는 그를 본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그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그이지만, 팔찌의 능력이 켜져 있는 동안은 그를 보고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할 터였다. 일종의 인식 장애를 일으키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일정 이상의 능력을 가진 차원 능력자나 마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그런 차원 능력자나 마수가 접근하면 그가 알아채지 못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별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CCTV 같은 거로군.”

저쪽 세계에도 영상을 기록하는 장비 같은 건 있었고, 이 팔찌의 능력은 그 장비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지구의 디지털 매체에도 통할지는 실험해 봐야 알 수 있게 될 터였다.

그 상태로 그는 바로 PC방으로 향했다.

어쨌든 지금 가장 효율적으로 정보를 얻기 위한 방법은 역시 인터넷이었다. 이 상황에서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살 수는 없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없는 10년 새 PC방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졌으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PC방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망하지 않은 채 영업 중이었다.

“자리 하나 줘요.”

“여기요.”

아르바이트는 김인수를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채,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단순한 투명화 마법이나 기척을 지우는 기술과 인식 장애가 다른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르바이트는 김인수를 보고 ‘그냥 손님’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터였다. 나중에 김인수의 얼굴이나 복장을 기억해 내려 해도 떠올리지 못하고 곧 왜 기억해 내야 하는지도 잊어버릴 것이다.

자리를 받은 그는 바로 CCTV 화면부터 확인했다. 카운터에 몸을 슥 내미는 그를 PC방 아르바이트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CCTV에는 그의 모습이 아예 비치지 않았다. 팔찌의 능력은 지구의 디지털 장비에도 통용되는 모양이었다.

‘한시름 놨군.’

영상이라도 찍혀서 인터넷에 나돌면 그로서도 골치 아플 수 있었으니, 이 능력을 확인해 두는 건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PC방 요금은 그냥 아르바이트 주머니에 금화나 한 장 찔러 넣어주기로 마음먹었다. PC방료 치고는 좀 세지만, 그가 나간 후 계산이 빌 테니 아르바이트가 곤혹스러워 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그에 대한 위자료 정도면 대강 계산이 맞으리라.

자리를 받아 컴퓨터 앞에 앉은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2025년 5월 15일.”

그가 다른 세계에서 보낸 10년 동안, 지구에서도 10년이 지나 있었다. 그만큼 많은 것이 바뀌어 있으리라.

복잡한 심경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운영체제도 달라지고 브라우저도 바뀌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떠듬떠듬 정보를 조금씩 검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검색한 것은 당연히 진가규였다.

10년 전에 부사장이었던 그 남자는 지금 WF의 회장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WF는 진가규의 리더십으로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왔다. 김인수는 불쾌해하면서도 뭐 하나 건질 게 없을까 기사를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그 기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는 ‘차원 균열’이었다. 그 단어를 본 김인수는 움찔 놀랐지만, 그는 홀리기라도 한 듯 뉴스를 읽어 제치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김인수의 이가 갈렸다. 기사의 내용이 그럴 만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WF가 급성장한 이유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는 산업적으로 유용해서 말입니다. 21세기의 석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자력에 이은 제4의 에너지 혁명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8년 전에 쏟아져 나온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를 폐기 처분하기 위해 소각로에 넣었는데, 그 시체가 엄청난 열을 발생시키더군요. 처음에는 그 부작용을 염려해 산업용으로 전용하는 걸 금지시켰습니다만, 이제는 법이 개정되어서 사기업에서도 연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 WF에서도 어보미네이션의 부산물로 돌아가는 발전소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WF 측의 인터뷰 내용이다. 김인수는 어보미네이션이 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것이 차원 균열을 통해 쏟아져 나온 차원 마수를 지칭한다는 건 문맥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전력 사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공기업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WF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로비가 이룬 성과일 터였다.

물론 김인수가 이를 간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 기사에서 지구에 차원 균열이 열린 것은 8년 전이라 기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에 지구에서 차원 균열을 보았다. 아니, 본 것일 뿐이면 아무렇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인수는 진가규의 연구실에서 그의 부하들에 의해 차원 균열 너머로 던져졌었다!

[2017년 1월 13일, 금요일.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수천의 괴물이 차원 균열을 통해 튀어나왔다. 대한민국 육군은 용감히 싸웠고, 주한 미군은 결국 지상에 튀어나온 괴물들의 격멸에 성공했다.

하지만 차원 균열은 아직 열린 채였고, 미국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묵살하고 인류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핵미사일 발사를 승인했다. 차원 균열 안으로 핵미사일은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 5월 15일.

차원 균열은 아직 열린 채이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업 중인 인터넷 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차원 균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의 서두를 장식하는 글귀였다.

그가 끌려갔었던 차원 균열의 위치는 파주. 그리고 8년 전에 지구에 재앙을 일으켰다는 차원 균열의 위치도 파주. 마지막으로 WF가 파주의 차원 균열에서 나온 어보미네이션 시체로 발전기를 돌려 큰 수익을 거두었다는 이 뉴스.

차원 균열로 인해 한국은, 아니 이 행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이 재앙으로 말미암아 한국 10대 기업에 꼽히지도 않던 WF가 지금은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섰다.

진가규 본인이 모든 것을 의도하고 이 세계에 재앙을 초래했다는 건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인수가 이 영상을 보고 이를 갈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존재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결론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차원 균열은 한국에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자원이 없던 이 나라에 자원의 화수분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니,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번영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자원 고갈의 불안에 시달리던 지구인 모두에게 차원 균열은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랄하네.”

30분가량의 다큐멘터리 영상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코멘트를 들은 김인수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세계에서 차원 붕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던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저절로 욕이 터져 나오는 논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다큐멘터리 제작 스폰서 리스트에 WF가 떡하니 올라와 있는 걸 보며, 김인수는 차라리 전율했다.

차원 균열은 다른 차원과 연결된 세계의 균열로, 오래 방치하면 당연히 차원이 기울어진다. 차원 균열이 열린지 8년밖에 지나지 않아 지구의 인류는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인수는 곧장 화산, 지진, 해일의 검색어로 다시 검색했다.

10년 전에 비해 빈도가 부쩍 늘어나고, 또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진 자연재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이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각 포털 사이트에 우선 검색되는 건 차원 균열의 유용성을 주창하는 목소리였지, 외국의 자연재해에는 지구인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아니지.’

김인수는 자신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리고 아버지가 자살로 위장되어 살해당했을 때의 일을 반추했다. WF는 10년 전에도 언론을 마음대로 다루던 회사였다. 지금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지금의 WF는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기업이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으니, 전 지구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봐도 별 이상하지는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욕설을 중얼거리던 김인수는 정보 검색을 계속했다. 자신이 있던 세계의 차원 균열과 지구의 차원 균열이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든,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든 반드시 정보는 필요했다.

수 시간에 걸쳐 면밀한 검색 후에, 그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가 아는 차원 균열과 지구에 열린 차원 균열은 완전히 같다. 즉, 그가 다른 세계에서 얻은 차원 균열에 대한 지식을 지구의 차원 균열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김인수는 PC방의 낡은 의자에 몸을 푹 파묻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차원 균열을 이용하는 법을 안다. 비록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 또한 차원 균열에서 힘과 이득을 얻고 세력을 규합해 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진가규에게 바로 복수를 하러 가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정보가 부족했다.

차원 균열이 있다는 건 차원 능력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아무리 김인수가 대마법사라 한들, 지구에도 대마법사가 있고 진가규에게 매수되어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라지만 가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은 힘들다. 가치 있는 걸 얻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는 건 만고의 진리이다.

역시 진가규에 대한 복수는 뒤로 미루자. 힘과 금력과 인맥을 얻은 뒤에, 정확한 정보를 얻고 완벽히 찍어 누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행해도 늦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복수해야 할 대상은 진가규뿐만은 아니었다.

“개인 정보 같은 게 인터넷에 떠 있으려나?”

혼잣말과 함께 그는 진가규 다음으로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을 검색창에 치고 엔터키를 눌렀다.

“빙… 고.”

그의 입가가 비릿하게 일그러졌다.

“이사는 안 갔군.”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페이스북은 유튜브와 마찬가지로 성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원수도 페이스북에다 온갖 허세에 가득 찬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적에게 스스로의 정보를 노출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하기야,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쉽게 타인의 원한을 사려 들지도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 녀석은, 이 새끼는 생각이란 게 있는 놈이 아니었다.

김인수는 모니터에 손가락을 짚었다.

“첫 타자는 너로 정했다.”

그의 손끝은 처음 검색한 녀석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기범.

가장 직접적으로 김인수의 동생, 김인규에게 상해를 가한 원수의 이름. 그리고 김인수 일가의 모든 불행에 단초를 제공한 인물.

이놈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했다.

*

10년.

긴 세월이다. 인간 하나가 바뀌어버리기에는 충분한 세월.

분명 괴로웠던 학창 시절이 추억으로 바뀌어 반짝반짝 빛났던 것처럼 보이게도 만들 수 있고, 서로 매일 이를 갈며 지냈던 사이도 ‘오랜만에 본다, 잘 지냈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세월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복수는 식을수록 맛있는 요리라더군.”

김인수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10년이면 충분히 식고도 남지.”

저벅저벅. 김인수는 걸었다. 상대는 두려움에 찬 눈초리로 김인수를 올려다보았다.

그 이름은 박기범. 김인수의 동생인 김인규를 괴롭힌 집단의 주범이었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훌륭한 단독주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겠지만, 상당히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집안이라도 자손의 인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인 듯, 박기범은 참 훌륭한 개새끼였다.

“미친 새끼…….”

김인수를 향해 욕설이 날아들었다. 욕설을 날린 대가는 칼이었다.

퍽.

“끄아아아아아악!”

고기 썰리는 소리와 함께 희생양의 비명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헉, 후욱, 컥…….”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다가 숨을 고르는 희생양을 바라보며 김인수는 말했다.

“왜? 더 짖어봐. 너 잘 짖는 놈이었잖아.”

김인수는 희생양의 머리 가죽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뭐라 그랬더라? 10년이나 지나서 잘 기억이 안 나는군.”

“이래야 되냐…….”

“뭐?”

“10년이나 지난 일 갖고, 이렇게 굴어야 되겠냐고!”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 찬, 울음 섞인 외침에 김인수는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억울하냐?”

김인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박기범의 머리 가죽을 잡은 채 벽에다 한 번 세게 쾅 찧었다.

“그래, 10년 전의 일이 기억나는군. 왜 내 동생을 골랐냐는 말에 넌 이렇게 이빨을 털었었지. ‘그냥 눈이 마주쳐서, 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마.”

“끅, 흑…….”

“그냥 지나가다 니네 집이 보여서 들른 거야. 너 재수 똥 밟았네.”

김인수는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김인수에게 이마에서 피를 쏟으면서 박기범이 다시 한 번 울분에 찬 외침을 토해내었다.

“나, 나는……. 나는 네 동생 장례식에도 갔었다고!”

“어, 그래.”

쾅! 다시 한 번 상대의 머리를 벽에다 처박으며.

“왜 왔냐? 왜 그런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갔어? 왜 내 동생 장례식 명부에다 이름 적고 갔냐? 잊어버리지도 못하게, 어? 박기범이, 부조금은 10원짜리 넣고 갔더라? 밥은 또 오지게 잘 처먹더라. 미성년 새끼가 소주까지 까는 게 아직도 기억나네, 야.”

“내, 내가 걜 죽인 건 아니잖아!”

울먹거리며.

“그래, 뭐, 니가 죽인 건 아니지. 동생은 자살했으니까.”

김인수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난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쾅! 또다시 박기범의 얼굴이 벽에 처박혔다.

“그냥 오늘부터 계속 네가 나랑 눈이 마주칠 거 같아.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말이야.”

김인수는 텅 빈 눈동자로 말을 잃어버린 놈, 박기범의 머리를 놓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박기범이 격분해서 짖기 시작했다.

“개새끼야! 미친 새끼야!! 너 이 새끼,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내, 내가 고소할 거야!!”

“그러냐?”

김인수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데 폭행당했다고 말하려면 증거가, 상처가 있어야 되지 않냐?”

“어?”

다음 순간, 박기범의 찢어진 이마에서 줄줄 흐르던 피가 멈췄다. 칼에 맞아 너덜거리던 허벅지의 상처도 간곳없었다. 마치 김인수에게 폭행당하기 전 상태로, 시계를 되돌린 듯 돌아가 버린 모습에 박기범은 자신이 마법에라도 걸린 건지 의심해야 했다.

그런 박기범의 머리채를 붙잡고, 김인수는 껄껄 웃으며 벽에다 그 얼굴을 쳐발랐다. 순간적으로 사라졌던 고통은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지나친 고통에 마비되었던 신경조차도 되살아나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김인수는 그걸 잘 안다. 자신도 당했던 고문이었으니까.

이 악취미적인 현상은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트롤 고문관의 반지라는 아티팩트를 매개로 일어난다. 오로지 무한한 고문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 반지는 끼고 있는 사람이 입힌 상해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손톱을 뽑아버리고 이 반지를 쓰면 손톱이 다시 생긴다.

치유 능력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반지의 대상이 제3자에게 입은 상해는 없앨 수 없고, 상해를 입고 죽어버린 대상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물론 이런 걸 박기범에게 일일이 설명해 줄 김인수는 아니었다.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을 계속했다. 퍽, 퍽, 퍽, 퍽, 퍽. 박기범의 피로 박기범네 집의 벽을 피 칠갑으로 만든 후, 김인수는 문득 손을 멈췄다.

“내가 너무 심했군. 그럼 여기까지 할까?”

김인수는 이마가 찢어지고 콧대가 부러져 엉망진창이 된 박기범의 얼굴을 측은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억, 윽, 크억, 억.”

박기범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에 김인수에 대한 적개심은 허물어져 있었고, 베풀어진 자비심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이 그 심장을 틀어잡고 있을 뿐이었다.

김인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여기까지 하자.”

그가 손가락을 한 번 딱, 하고 퉁기자 박기범의 상처는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물론 이것도 트롤 고문관 반지의 힘이다. 김인수는 뚜벅뚜벅 걸어서 박기범의 집에서 퇴장했다.

그가 문을 열고, 쾅 닫고, 10초가 지났다. 박기범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쾅.

그의 현관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하고 박기범의 몸이 마치 고압 전류에라도 감전된 듯 흔들렸다.

“복수는 식을수록 맛있는 요리라더군.”

처음에는 박기범도 영문을 몰랐다. 그를 바라보며 이빨을 드러내어 웃는 김인수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10년이면 충분히 식고도 남지.”

저벅저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김인수를 보며, 박기범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퍽, 칼이 내려쳐졌다. 똑같은 부위였다.

끄아아아악!

그는 비명을 내질렀다. 몇 분 전과 똑같이. 그리고 앞으로 무슨 말이 이어질지 그도 안다. 그의 비명이 잦아들 때쯤, 김인수가 말했다.

“왜? 더 짖어봐. 너 잘 짖는 놈이었잖아.”

벼락과도 같은 전율이 박기범을 덮쳤다.

‘그냥 오늘부터 계속 네가 나랑 눈이 마주칠 거 같아.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말이야.’

몇 분 전에 김인수가 남긴 말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처음부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거다. 고통이 다시 박기범을 사로잡는다. 처음부터, 다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사, 살려, 도움!”

도움을 청해야 해. 그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나치게 늦은 판단이었지만, 어쨌든 뒤늦게나마 떠올린 게 다행이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조작을 실패하며 휴대폰의 잠금을 풀고,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경찰, 연결되지 않았다. 119, 연결되지 않았다. 트위터,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았다. 페이스북, 데이터 통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집 안 공간은 집 밖의 공간과 분리되어 있었다. 차원 단절. 당연히 김인수가 한 짓이다. 이 공간에 일종의 결계를 쳐놓았다. 그의 오른팔에 매달린 팔찌, 인롱의 팔찌라는 아티팩트를 매개로 발생시킨 현상이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그런 걸 알 리 없는 박기범은 휴대폰을 두들기다시피 하다가 내던져 버리고는 짜증과 분노에 휩싸여 외쳤다. 씩씩대던 그는 헉, 하고 문득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김인수가 그를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싱글싱글.

그 표정을 본 순간, 그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어, 엄마! 아빠아!”

어린 아이가 부모를 찾듯, 박기범은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김인수는 픽 웃었다.

“너희 부모님은 세계 일주 여행 갔다면서? 한 달 동안은 안 들어오신다고? 부잣집은 좋겠어.”

박기범의 페이스북에 그 자신이 올린 내용이다. 그러나 박기범 본인은 그 사실조차 잊고 순수한 공포에 사로잡혀 실성한 채 소리 질렀다.

“아윽, 어어어어! 우어어어어어!!”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힘을 원하나.]

제3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김인수는 놀랐다.

[힘을 원하나.]

다시 한 번 들렸다. 김인수뿐만 아니라, 박기범도 반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목소리만이 갑자기 들렸다. 분명히 인간이 아닌 존재의 목소리.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의 목소리였다. 성대를 통해 흘러나온 육성이 아니라, 뇌리에 직접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사실 한국어조차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될 터였다.

“히, 힘…….”

박기범이 더듬거렸다.

[힘을 원하나.]

마치 기계로 돌린 듯한, 똑같은 목소리와 템포, 어조로 이뤄진 반복되는 메시지. 김인수는 그 메시지의 정체를 알고 있다. 김인수도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던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 듣는 자를 현혹하고, 무작정 믿게 만드는 마법. 박기범에게는 이 목소리가 마치 구세주의 목소리와도 같이 들릴 터였다.

김인수는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박기범이 대답하길 기다렸다.

“원해! 힘을! 이런, 이렇게 당하고만은, 힘을 줘!!”

[계약은 성립되었다.]

동시에 변이가 시작되었다.

*

*

김인수는 차원 단절을 끊었다. 이제 더 이상 박기범은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차원을 단절시켜둘 필요가 없는 것도 있지만, 단순히 차원력을 절약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김인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지구에는 차원 균열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 차원 균열은 김인수가 끌려갔던 세계에도 열려 있었다. 차원 균열이 열린 세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김인수는 파악하고 있었고, 그와 같은 일들이 지구에서도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박기범에게 말을 건 것은 최하급 계약마였다. 차원 균열에서 나온 저급한 마수 중 하나이다. 지능은 아주 낮고 실체도 없다. 자기 혼자서는 특별히 특이한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 다가가 힘을 주겠노라고 속삭일 수는 있다. 그리고 대상이 계약을 받아들이면 변이가 시작된다.

짐승으로의 변이가.

이 계약마를 활용하는 방법도 존재했다. 지능이 낮기 때문에 잘 속여먹으면 힘만을 빼먹는 것도 가능하다. 김인수가 처음 그렇게 힘을 얻었다.

하지만 박기범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계약마에게 신체를 빼앗기고 영혼을 사로잡힌 채 짐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짐승은 이제 계약마도 박기범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짐승의 모습은 대단히 역겨웠다. 개가 파충류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 짐승의 이름은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을 정도가 되었다. 리자드독. 직관적이라 괜찮은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박기범이 이렇게 될 가능성은 김인수의 복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박기범이 계약마를 제대로 활용해서 힘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고, 애초에 계약마가 나타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예상 범주 내의 일이 일어났다.

김인수에게는 그뿐인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면 됐다.

“용서하기가 힘들군.”

김인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눈앞에서 울부짖는 박기범이었던 존재를 무시하고, 김인수의 시선이 스윽 돌아갔다.

“샤아아아앗!”

그 순간을 빈틈이라고 생각한 건지, 박기범이었던 짐승이 김인수를 덮쳤다. 김인수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칼을 휘둘렀다. 짐승의 목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떨어져 나간 목에서 지렁이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와 다시 짐승의 목을 이뤘다. 짐승은 샤아아악, 하고 다시 울부짖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김인수는 눈 한 번 꿈쩍이지 않았다.

“몸을 얻어서 좋으냐? 되살아나려고 애를 쓰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게 꽤나 좋은 모양이야?”

김인수는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후회하게 해주마. 못 다한 내 복수는 네가 받아내야 될 거다.”

“캬아아아악!”

다시 달려드는 짐승의 아가리에 김인수는 칼을 밀어 넣었다. 칼 손잡이까지 목구멍으로 삼킨 짐승을 보며 김인수는 눈빛을 번뜩였다. 보통 짐승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죽을 테지만, 이 정도로 죽지 않을 것을 김인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짐승 따위, 이미 수천 번도 상대해 봤다.

짐승은 김인수의 칼을 든 손에 이빨을 들이대려고 들었다. 김인수는 미련 없이 칼을 놓았다.

“자아, 한 번 더 뒈져라.”

김인수의 손끝이 파랗게 빛났다. 그 직후, 날카로운 섬광이 손끝에서 뻗어나가 짐승을 꿰뚫었다. 뇌전이었다. 매개 같은 건 필요 없는 그의 능력 중 하나였다. 칼을 타고 들어간 뇌전에 의해 짐승은 속부터 지져졌을 것이다.

“캬오아아악!”

“앞으로 한 번 남았군.”

울부짖는 짐승을 내려다보며, 김인수는 별 감흥도 없는 듯 말했다.

“죽어라.”

*

김인수는 박기범이었던 짐승을 죽였다.

“후.”

짧은 숨을 토해낸 김인수는 칼을 허공에 휘둘러 짐승의 피를 털어내었다. 그리고 꼼꼼하게 날을 점검한 후, 칼을 칼집에 갈무리했다. 마치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듯, 세수를 다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듯,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인 것처럼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타타타타타타.

갑자기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헬기의 로터가 내는 소음이었다.

김인수는 그 소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바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반응은 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에 매달린 팔찌를 움켜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위상 변화.”

몇 초 후,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고 기관단총을 든 특수부대 대원들이 집 안으로 돌입해 김인수를 향해 총구를 내밀었다.

“손들어! 꼼짝 마!!”

김인수는 순순히 손을 들었다. 그걸 본 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손을 드는데요, 대장. 말이 통하는데?”

“이 녀석이 아닌가본데.”

특수 대원들은 김인수에게서 총구를 내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김인수는 얌전히 손을 든 채 사태를 관망했다.

“대장! 저거!!”

대원 중 하나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대원이 든 랜턴이 비춘 것은 김인수가 죽인 짐승의 시체였다.

“나도 봤다. 그래, 믿기는 힘들지만…….”

다른 부하로부터 대장이라 불린 자가 김인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죽였나?”

김인수는 여전히 손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장은 흥미로운 듯 눈알을 굴렸다.

“리자드독이 최하급 어보미네이션이라고는 하지만 민간인 한 명한테 죽을 정도로 만만한 녀석은 아닌데. 당신은 누구요?”

자아, 이제 어떻게 할까. 김인수는 입술을 핥았다.

이 한국에서 김인수라는 인물은 10년간 행방불명되었다. 게다가 그 10년 전의 일을 불편해하는 이들은 많다. 그것도 힘을 가진 자가 상당수였고, 그들이 김인수의 존재를 기꺼워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쉽게 이름을 밝혀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박기범이라 합니다. 이 집 아들이죠.”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구역질이 났지만, 참을 만했다.

김인수가 조금 전에 사용한 위상 변화라는 능력은 자신의 모습을 타인으로 바꾸는 효과를 지녔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사람의 인식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주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매개로, 전혀 다른 능력을 끌어낸 케이스였다. 아티팩트의 기능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이 그가 대마법사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매개를 사용하는 만큼, 단순한 변장과는 달리 목소리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럭저럭 고위의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사용한 결과, 지금 김인수는 박기범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고작 박기범 하나 처리하고 복수를 끝마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복수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김인수는 여전히 행방불명된 채로 놔두고 박기범의 모습으로 움직이는 게 더 나았다.

박기범의 ‘친구’들도 처분해야 하니 말이다.

대장은 김인수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평범한 시민 박기범의 모습이었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차원 균열이 열린 지도 8년이 지나니 별 인간이 다 나타나는군. 하긴 눈앞에 실적이 있으니 무시할 건 또 아닌 것 같고.”

대장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혼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보다 조금 더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요, 여기에 당신밖에 없으니 어보미네이션을 죽인 건 당신이라고 알겠습니다. 시체를 인수하고 싶은데, 보상금 지급은 어떻게 받으시겠습니까?”

김인수가 가 있던 다른 세계에서도 괴물의 시체는 꽤 괜찮은 값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는 대장의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건 예상 범위 내의 질문이었기에 김인수는 생각한 대로의 대답을 던질 수 있었다.

“현금 됩니까?”

김인수의 말에 대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이 시체 가격은 800만 원을 호가해요. 그런 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대장! 그런 말을 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옆에서 대화를 훔쳐 듣던 부하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대장은 곧장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말했다.

“멍청아, 이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을 죽인 거면 어벤저가 될지도 모르잖아. 속여 먹였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그렇게 부하를 혼낸 후, 대장은 곧장 김인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애가 생각이 얕아서.”

“아뇨, 별 말씀을. 그래서 현금 안 됩니까?”

*

김인수가 굳이 현금 지불을 고집한 건 박기범의 계좌로 송금을 받았다간 돈을 허공에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김인수는 당연히 박기범의 통장 비밀번호를 모른다. 박기범은 어보미네이션이 되어 죽었으니 비밀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럼 받은 돈은 통장 속에서 조용히 잠자게 될 테니 송금 같은 걸 받을 수도 없게 될 터였다.

그래서 현금으로 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10만 원짜리 지폐로 80장 이상. 그리고 잔돈이 좀 나왔다. 10년 사이에 10만 원 지폐가 나온 건 신기했지만, 덕분에 불편하나마 가지고 다닐 수 있으니 그건 고마운 일이었다.

‘앞으로 금융거래를 하려면 통장을 하나 새로 파야겠어.’

김인수는 박기범의 모습인 채 생각했다. 김인수라는 신원을 쓸 수 없는 지금, 그는 박기범으로서 살아가야 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 활동 자금이 생겼으니 다행이로군.’

김인수가 알던 10년 전의 지구와 차원 균열이 열린 지구는 상당히 차이가 있을 터였다. 단순히 세월만 흐른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가 바뀌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김인수는 아직까지 이런 차이점에 대해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공부해야 했다. 아는 것이 힘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벤저라…….”

그러고 보니 차원 균열에 대해 검색하면서 그런 직업이 있다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복수에는 힘이 필요하다. 단순히 폭력이 아닌 여러 종류의 힘이. 그리고 대장의 말을 들어보니 어벤저는 꽤 힘이 있는 직종 같았다.

“일단 검색해 볼까.”

한 번 기지개를 쫙 펴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행선지는 PC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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