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은밀한 밤의 거래
언제나 그렇다. 원죄를 기억하는 것은 피해자다. 그는 정말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가시성에서 내쫓긴 얼음 왕자가 되어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버려진 어릴 적의 날들은 아팠다.
어느 순간은 행복했지만 그것은 너무 짧게 스치는 순간이었다.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했으랴. 철저한 삶이었고, 의지의 순간들이었다.
대다수는 괴로웠다. 너무나 나약해서,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서 짓밟혔고 뒹굴었다. 만약 그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르브리에의 인생은 지금처럼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진창 속에서 그렇게 뚝 잘린 꽃처럼 눈을 감았을 것이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르브리에는 결국 또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무언가를 얻을 때는 마찬가지로 쥐고 있는 무언가를 놓아야 할 때도 있는 법.
애석히도 기회는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릴 적의 르브리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은 있었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모든 순간들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잘 해 왔다. 내가 잘못 선택했구나, 그리 떠올리는 과거는 없었다. 입 안이 피로 가득 차고 손이 죽음으로 척척하게 물들어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도달하고 있는 지점에 다가간다는 것은 배부른 희열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왜일까. 이성적인 판단과 모든 합리적인 도출 과정이 눈앞의 남자 앞에서는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르브리에의 모든 순간은 분명 티끌 없었던 과정이었다.
‘어쩌면.’
지금 순간을 제외하고.
“너, 나와 거래를 하자.”
묵직한 목소리는 이제 달콤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타인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와닿은 것도 처음이다. 과연 뒤돌아설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황제의 개인 저 남자를 망설임 없이 버리고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을까.
“…….”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들이 강해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자신과 같이 행동하는 이가 부하였다면, 르브리에는 독약을 아낌없이 선물해 주었을 것이다. 어디서 얼빠진 짓을 하고 있나, 그렇게 일갈하면서.
르뷔. 저 남자가 그리 불렀다. 아니, 부르게 하려고 답지 않게 노력을 했다. 저 사람이 부르는 제 이름이 듣고 싶어졌다. 웃기는 일이다. 심장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들으면서도 가까스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수년간 노력한 결과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한 채 저 기사를 바라봤을까. 아주 흉악하고 흉흉한 얼굴이 아니었을까. 욕심에 가득 찬? 지금도 그렇다. 르뷔. 그놈의 이름. 왜 저 입술에서 기어코 튀어나오게 조롱하고 애원하고 괴롭혔을까.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대체 왜. 왜 그랬을까. 왜 이름을 알려줬을까? 저 정체 모를 남자가 부르는 제 이름을 왜 듣고 싶어졌을까. 왜 저 사람은 다르지?
르뷔. 기억이 아득하게 과거의 순간을 유영했다. 그 순간 르브리에는 과거를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착각이다. 어느 순간에도 저 남자는 없었다. 과거는 오롯한 자신의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리움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저런 타입이, 저런 딱딱함 속에 감추고 있는 의외성이, 진한 수컷의 겉모습이 취향이었던가. 그따위 생각을 하며 르브리에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응시했다.
“거래? 그게 무슨 뜻입니까?”
드디어 꽁꽁 감추어 놓았던 그 속을 내보이는구나. 회심의 미소를 지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어째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격렬하게 오갔던 시간을 지우고 그렇게 본래 걸어가던 길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싶은지 모를 일이다.
하리드 브리첼. 지독할 정도로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던, 자신과 같은 공작.
이상한 자였다. 인자한 얼굴로 제게 절대 곁을 주지 않는 황제가 그렇게 아낀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상대였다. 대체 왜? 절대적인 그 무력 때문인가? 파고 또 파보아도 걸리는 것이 없어 여태까지 의문스러운 자였다. 그래서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궁금증보다도 저 남자 자체에 호기심이 들었다. 알고 싶은 욕구는 거의 욕망에 가까웠다.
“르뷔.”
하지만 저 조용한 부름을 들으면, 어떤 날카로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르브리에는 자꾸 흔들리는 입가에 힘을 주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요. 거래. 말을 꺼냈으면 설명을 해야지요.”
불릴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심장의 압박이 거세다. 낮고 그윽한 목소리에 넓은 어깨, 굳건한 검과 같은 남자는 청동으로 빚은 조각상처럼 뚜렷했다. 아니, 번들거리며 빛나는 흉흉한 안광은 짐승의 눈과 비슷했다. 금색의 눈동자가 황금처럼 선명하게 빛나 멍하게 만드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모든 것이 예외인 자였다. 하리드 브리첼. 멍청하고 무식한 기사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르브리에는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 의외로운 남자에게 휩쓸리기만 했다.
심지어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잠자리에서조차 휘둘리다니. 부드럽지도, 향긋하지도 않을 사내놈에게 애원하며 제발 네 아래의 구멍에 박게 해 달라 조른 아까의 자신은 미친 게 분명했다.
‘주군, 브리첼 공작 가문을 떠보려면 다른 방법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나서실 겁니까? 그러다 꼬리가 잡히면 위험하실 겁니다. 브리첼 공작은 위험한 자입니다.’
‘위험한 놈이기 때문에 내가 움직여야 하는 거다.’
‘하지만.’
‘직접, 움직인다고 했다. 모두 브리첼 공작에게서는 신경을 꺼라.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어린 목소리로 쏟아지던 만류를 물리며 르브리에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랬다. 차가운 이성으로 인한 결정이었다. 황제의 속을 파기 위한, 그리고 뿌린 씨앗들을 원활하게 거두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욕구가 끼어들었다.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이 그 자리에 자리잡았다. 남자는 야했다. 모든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야릇했다. 고지식한 기사인 주제에 내밀히 감춰진 모습은 달랐다. 충격이었다. 침대 위에 흐트러진 채 바라보는 그 그늘진 수컷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천지가 뒤바뀌었다.
무엇을 바랐었는지 어떤 것을 이루고자 했는지, 저 단단한 육체를 접한 순간 모두 잊었다. 저 딱딱한 얼굴을 한 기사님은 모를 것이다. 이게 르브리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성욕 따위에 흔들릴 인생이었으면 애초에 짓밟힌 잡초가 되었을 것인데.
“…….”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티팩트를 돌려 이 자리에 들어오기 이전의 말끔한 모습으로 돌리면서도 어쩐지 피리 소리에 홀려 나아가는 쥐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열렬한 눈빛. 부러 느릿하게 움직이며 축축하게 축이는 입술의 습기에 더 뜨거워지는 상대의 눈동자를 보면서도 허기가 졌다.
낯설 정도로 뜨겁게 뛰는 심장의 고동은 물론이요, 뜨겁게 달아올라 혈관을 타기 시작하는 액체들이 기이하다. 르브리에는 괜스레 목덜미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말랐다. 꼭 술이라도 한 것처럼 뜨겁다. 이상 반응. 그래, 이상 반응이다. 이 모든 이변의 끝에는 저자가 있었다. 그러니 멀리해야 옳다. 예측하지 못하는 건 위험한 것이니까.
‘모르겠어.’
한 걸음 남자를 향해 다가가자, 고요한 방에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밤의 행적이 황제의 귀가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쪽도 정보가 새지 않게 움직였지만, 브리첼 가문의 움직임 또한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위험한 것이다.
‘어떻게 황제가 너 같은 자를 취했을까, 하리드. 그리고 나는 그게 왜 이렇게 탐이 날까.’
이대로 몇 걸음 더 직진하면 코와 코가 맞닿을 것이다. 르브리에는 알았다. 그 행동을 하면, 또다시 열락과 같았던 밤이 시작될 것임을. 그리고 그 생각에 동하는 자신을.
“압니까, 브리첼 공작. 난 어둠은 질색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도 흔들림 없는 저 강함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저 탄력적인 육체로, 적군 아래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얼굴을 한 주제에, 제 앞에서 달뜬 얼굴로 허벅지를 벌리던 모습은 아주 치명적이었다. 제기랄. 코끝이 찡한 기분이라 르브리에는 머리를 거칠게 휘저었다.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티를 내지 않았거든요. 약점이니까요.”
“그것을 이야기해 주는 이유는?”
“내가 이런 정보를 말해 줄 정도로 당신에게 흥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말 잘하세요. 거래라는 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니까.”
인정하자. 르브리에는 낙담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 만남을 지속할 이유와 당위성을 찾으려 머리를 굴릴 정도로 저 위험한 남자에게 흥미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눈웃음을 치려는 안면 근육을 내리누르며 르브리에는 밀려 나갔던 테이블과 그 의자를 끌어오며 엉덩이를 내렸다. 이제 단단하게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거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거래다.”
심장이 느릿하게 조금씩 빨라졌다. 이 대화가 끝나면 무언가가 바뀔 것이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손바닥의 식은땀을 느끼며, 르브리에는 입술을 끌어당겼다.
열망. 열정. 욕구. 뜨거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눈빛을 한 주제에 조용하고 묵직한 낯을 한 황제의 개는 말갛게 말했다. 진지한 시선으로, 뜨거운 눈빛으로, 달싹이는 맛있는 입술로.
“하룻밤을 걸고.”
“…….”
“대가는 너의 몸이다.”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저 남자는 왜 저렇게 돌려 말할 줄을 모르지? 과묵하고 정직한 것은 알겠다. 정직이라는 것이 어울릴 것이라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황제의 개는, 정말 기사도에 가까운 자였다.
하지만 정갈한 기사님이라고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것은 순전히 상대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을 뿐. 정숙과 신성스러움은 저 기사님에게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비릿한 쇠 내음이 날 것 같은 살기. 짙은 눈썹 아래 상대의 본능을 자극하는 관능적인 눈동자.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만 있어도 어딘가가 뜨겁게 달구어질 것 같은 적나라한 눈빛.
하리드 브리첼은 야했다. 타고난 수컷이었고, 제왕이었다. 무릇 여인이라면 한 번쯤 저 남자가 자신의 것이 되는 걸 상상할 만큼, 황녀가 한 번에 저 남자에게 반해 버린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정도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 환상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위험한 자다. 아무리 잠시의 장난을 했더라도 르브리에는 본디 쏘아붙여야 옳았다. 얼마든지 빈정거릴 수 있는 말들이 있었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에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봐요, 브리첼.”
“왜.”
저 바위 같은 얼굴이 잠자리에서 어떻게 섹시하고 녹진하게 풀어지는지 보았기 때문일까. 차갑게 쏘아붙이면 어떤 얼굴로 변모할지 은근한 기대가 돌았다.
네 취향은 최악이라고 저자가 그랬다. 부정할 생각 따윈 없다. 르브리에 자신은 비틀리고 마모된 인간이었고, 그의 관심과 호기심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비틀고 쪼개며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죠.”
“뭐가.”
헛웃음을 지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매를 내린다. 불쾌함이 가득 들어간 표정은 냉랭할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니 그 극적인 표정 변화에도 숨 한번 빠르게 내쉬지 않는 상대가 보였다. 이래도 동요 없단 말이지. 속이 비틀렸다. 여우는 한껏 자신의 물 오른 연기력을 내보였다. 적나라한 그 제안에 불쾌하고 오만한 귀족 도련님의 모습 그대로를 내보이며.
“내 몸이 어째서 거래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놈이 또 무슨 헛소리인가, 그렇게 쓰여 있는 것 같은 하리드의 눈을 보며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가 관심을 보인 기사는 흉흉하고 무서운 날짐승이었지만, 그만큼 순진하고 멍청한 매력도 있었다. 어리숙한 면을 발견할 때는 그 틈을 헤집어 보고 싶은 질 나쁜 욕망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쉽게 잠자리했다 해서 엉덩이 가벼워 보였나 본데, 사람 잘못 봤습니다. 내게 뺨이라도 맞고 싶은 거였습니까, 브리첼 공작? 농담이라고 하면 그냥 넘어가 주겠습니다. 몸이라뇨. 불쾌하게.”
“그게 왜 불쾌하지?”
느긋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매만지며 그는 입 안의 혀를 잘근 깨물었다. 다시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상대는 이제 보니 귀엽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느릿하게 갸웃하며 기울어지는 고갯짓과 슬며시 드러나는 탄력적인 목덜미가 시야를 가득 채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저 고무처럼 질기고 생생한 피부는 자꾸만 이를 박아 넣고 싶게 만들었다. 분명 피조차 향긋할 것이다.
왜 이런 남자가 지금 눈앞에 떨어졌지? 르브리에는 고뇌했다.
“당신이나 나나 잠깐의 유희일 뿐, 계속적으로 이 만남을 이어갈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당신이 평소 나를 바라봤다면 몰라도, 그것도 아니지요. 대뜸 몸을 통한 거래? 이건 대체 무슨 속셈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엉덩이를 후벼파 주며 헌신할 남자가 필요합니까? 그런 취향인 작자들이 별로 없어서?”
“그래. 네 말대로 네 손가락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지.”
“빌어먹을, 이봐요. 그 탐스러운 엉덩이가 간지러운 거면 휘하의 기사들도 많을 거 아닙니까?”
“아, 그건 곤란해.”
“왜요. 나보다 곤란하겠습니까?”
자신이 듣기에도 흠칫할 정도로 신경질이 가득 밴 목소리였다. 능숙한 가면을 우그러뜨리며 여우가 제 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르브리에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기사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미소조차도 더럽게 섹시해서 욕이 나왔다. 지금 달려들어 저 단추를 꼭꼭 채우고 있는 옷을 찢어버리면 어떻게 하려나?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
“…….”
저 입에서 흘러나온 호칭이 르뷔가 아닌 게 잠시 아쉬워졌다.
“거래 상대로 충분하다. 너도 그걸 원하겠지.”
“……”
“나는 거짓을 말하거나 돌려 말하는 것에는 취미가 없다.”
하리드 브리첼은 묵직한 숨을 내쉬며 앉아 있는 그에게 걸어왔다. 키는 같아도 체구가 다르다. 단단하고 꽉 짜인 육체는 분명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옷에 감춰진 탄력적인 몸이 다시 보고 싶었다. 등줄기는 예술이었다.
“다시 말하지. 나와 거래를 하자.”
“그럼 나도 다시 묻죠. 무엇을 걸고?”
“너와의 하룻밤. 너의 몸.”
순간 적나라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녕 미친 새끼가 틀림없었다. 누가 이딴 식으로 설득을 하지? 상대의 씹어 먹고 싶을 만큼 무지하고 순박한 언어 논리에 여우는 신경질을 가득 담아 눈을 빛냈다. 이렇게까지 취향이면 곤란하잖아? 여우는 성질을 뭉친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하리드 브리첼. 당신 눈엔 내가 남창으로 보입니까?”
순순히 넘어가면 재미없는 법이다.
* * *
“…….”
“……끄응.”
알현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기사조차 모두 물린 황제와 누군가의 알현 모습은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내민 젊은이도, 그것을 받아 든 황제의 모습 어디에도 현재 상황에 대한 불편한 자각은 없었다. 은밀하게 이어져 온 만남이라는 증거처럼.
“이게 사실인가?”
“언제나와 같습니다, 폐하.”
실력을 의심하지 말란 소리였고, 황제도 인정하는 바였다.
로티에르 제국이 여태껏 강대한 권력을 쥐고 이어져 내려올 수 있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저 젊은 남자의 가문 역시 그것들 중 하나였다. 눈에 띌 정도로 강력한 제국의 검이 브리첼 가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당대 황제가 등용한 특출한 힘일 뿐, 브리첼이 뚜렷한 태양이라면 저 남자는 은은한 달이었다.
얼굴을 굳혔던 황제는 순간, 부드럽게 웃었다.
“고개를 들게나, 시울 폰 샤나 후작.”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닐세. 황공은 무슨. 내 항상 그대에게 도움을 받고 있으니 우리 사이에 너무 격식을 따지지 말게나. 그나저나 이것이 사실이라 하면…….”
짐승을 부리고 보아 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황제가 은연중에 느꼈던 불안함으로 인한 혼인 제안이 결국 이러한 결과를 예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황제는 치밀어 오르는 초조함으로 입 안의 살을 씹었다.
“그래, 수사는 어찌 되었나?”
“뒷장을 보시면 현재까지 페르달 공작이 작성한 보고서들의 결과입니다.”
“흐음.”
팔락이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아직 아둔한 귀족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살해당한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황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용의자를 아직 특정하지 못했군. 아니, 찾긴 했으나 모두 무죄였네. 골치가 아프군.”
“예. 하지만 그건 페르달 공작의 무능함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상대가 너무 은밀하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나?”
“페르달 공작이 다른 마음을 품거나 이 사건에 연관된 자라는 증거는 발견된 게 없습니다.”
페르달 공작이 사건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책임자들이 무능하다 해야 정확했다. 그나마 사건의 패턴을 분석하고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그 유능함을 보여 주는 증거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묵직한 한숨과 함께 황제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주물렀다.
“샤나 후작. 그대는 페르달 공작과 브리첼 공작이 접촉했다고 보았네. 맞는가?”
“예, 그러합니다.”
“단순히 같은 공작 사이에 오갈 수 있는 교류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야. 옳은가?”
“예, 황공하나 그리 추측하였습니다. 연회의 밤에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보았습니다. 이후 오늘 밤, 연회장에서 모두 같은 곳을 향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현재 일어나는 일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 장소의 흔적을 마법진을 사용해 현시, 확정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황궁이란 은밀한 곳. 온갖 만남이 성행하는 곳이며, 또한 연회의 밤 속에서 가면 속의 귀족들은 차마 입에 꺼낼 수 없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그것을 읽어 내는 마법이라니? 귀족들이 알게 되면 대거 반발이 일어날 진실이었으나, 황제는 그것을 발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인자했던 주름진 얼굴 위로, 순간 잔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재도 같이 있다 보는가?”
“송구하나 그건 정확히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페르달 공작인지 아니면 브리첼 공작인지, 어느 순간 흔적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능력자들이었습니다.”
“잠깐. 그것은… 이 마법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글쎄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폐하. 브리첼 공작도 그리고 페르달 공작도 여태껏 정보 수집에 문제를 겪을 정도로 은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사안입니다만.”
그랬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을 경계하는 까닭은 그가 젊은 나이에 황녀의 스승이자, 제국의 공작 작위를 차지할 정도의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다.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황제 자신의 비위를 맞춘 것도, 딱히 원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페르달 공작 부부의 죽음을 떠올려보면 더욱 말이 안 된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분노를 내비쳐야 옳았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황제는 약점과 비밀이 상대에 대한 신뢰를 쌓는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속을 보이지 않고, 또한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깨끗하기만 한 페르달 공작은 위험한 자였다.
거기다, 브리첼이라니. 자신의 짐승은 어찌하여 그 위험한 상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불쾌하군. 그 둘이 어째서? 무엇을?”
황제는 의자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스치는 의심은 있었다. 짐승들이 여태껏 찾고 있었던 무언가. 황제가 그렇게 알고자 했지만, 알아낼 수 없었던 것. 그게 사람이고, 그 대상이 혹시라도 페르달 공작과 관련이 있다면? 황제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짐승의 힘은 황제 자신의 손에 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넘어갈 것이라면…….
“결탁만은 아니 될 일이네. 내가 한 경고 때문에 페르달 공작을 가까이했다고 하기에는, 브리첼 공작의 성격을 본인이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는 순순히 짐의 말을 들을 이가 아니야. 분명 무언가 다른 연유가 있네. 그가 페르델 공작에게 접근한 보이지 않는 이유가.”
“예, 폐하. 명심하겠으니, 하명하소서.”
“좋네, 샤나 후작. 그대에게 명하니, 여태까지와 같이 둘을 감시하되, 긴밀하게 주시하도록 하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러 오도록. 절대 들켜서는 아니 될 것이야. 은밀함이 가장 중요하네.”
황제는 짐승을 믿었다. 그러나, 그 마음까지 믿진 않았다.
반은 인간인 그들 역시 바라는 것이 있어 황제인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닌가. 그 말은 즉, 다른 이가 더 원하는 것을 내밀면 언제든 계약을 끊고 나아갈 수 있는 동물이라는 소리다. 어둠 속에서 황제의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그게 무엇이든 그 약점을 이쪽에서 먼저 쥐는 수밖에 없었다.
* * *
“남창?”
“그래요, 지금 말한 건 그런 뜻 아닙니까. 하룻밤의 대가로 상대를 산다.”
저 말을 내뱉는 연유는 무엇인가. 하리드는 눈앞의 상대를 관조하듯 관찰했다.
휙휙 바뀌는 상대의 겉모습에 속을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저것은 갑자기 거래의 이야기를 꺼낸 자신을 분노케 해 속을 내보이게 하려는 수작이거나, 아니면 순전히 제 반응에 어찌 움직이는지 보기 위한 욕망인 듯했다. 곧이곧대로 르브리에의 행동을 받아들이면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역시 배배 꼬인 인간이로군.’
어쨌거나 진실로 불쾌하다 화를 내는 낯이라 생각할 만큼 공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대단한 연기력이다. 누구든 저렇게 속아 넘겼겠지. 제 진의를 숨기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웃음을, 혹은 냉혹을 내보이면서.
하리드 브리첼은 그 공기의 질감을 느끼며 입 안의 혀로 살갗을 쓸었다. 적나라한 찌릿한 의심과 경계가 손에 잡힐 듯하다. 얼굴이 뒤바뀌고, 영혼이 뒤집힌 것처럼 우아한 인간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빙긋이 휘어진 입술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홀려 다가가면 목이 물어뜯길 험악함이다. 턱짓해 보이며 다리를 휘어 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상대는 타고난 배우다.
겉과 속이 다른 자.
비밀을 숨기고 있는 남자. 피부 위를 핥듯이 사르륵거리는 회색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잡아 바짝 끌어당기면 또 어떤 얼굴을 해 보일 것인가. 흉악하고 비틀린 생각을 삼키면서 그 역시 갑자기 내보내고 만 제 욕심을 들여다보았다. 거래를 통해서 저 남자를 붙잡아 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제 욕구의 근원을.
“이런, 기사님. 곤란한 얼굴이라도 해 보여야지요. 거래는 간절히 원해야 성사되는 겁니다.”
“…….”
순간, 르브리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주 재미없다는 듯 순식간에 풀어진 얼굴은 아까와는 또 달랐다.
“좋습니다.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지요.”
“…….”
“솔직히 말하면 당신에게 끌려요. 그리고 궁금합니다. 그 거래.”
“그래서?”
“지지부진한 대화는 딱 질색이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요, 브리첼 공작. 내 몸이 눈이 돌아갈 만큼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본데, 그 화끈한 밤을 위한 대가로 당신은 뭘 줄 생각입니까. 시간은 금과 같고, 지금도 계속 흘러가고 있으니. 만약에 조금이라도 아무 생각이 없이 모욕할 목적이었다면…….”
“그렇다면?”
흉악한 미소다.
“아주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추의 무게를 잘 가늠하도록 하세요. 이 몸은 아주, 비싸니까.”
심장이 느릿하게 펄떡 뛴다. 생생한 사냥감을 쫓고 싶은 것은 짐승의 본능이었기 때문일까? 하리드 브리첼은 자신이 어쩐지 그를 따라 웃고 있다고 여겼다. 이 모든 순간이 다 꿈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생동감 있게 이성을 휘어 감은 욕심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이 다 거짓 같았다.
그래. 나는 저 남자를 원한다.
“넌 분명 만족할 거다.”
문장 그대로 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르뷔.”
“아아, 지금 그 이름을 말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반칙이잖아요.”
저 안에 숨기고 있는 것을 가득 열어 바짝 들여다보길 원했고, 저 인간 남자의 운명이 대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관조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그 삶에 자신이 관여할 수 있기를 욕망했다. 저 몸을 타고 흐르는 혈액의 향기, 부드러운 살갗, 배 속을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체취 아래 근본적인 것.
“르뷔.”
“제발, 그만.”
저 인간을 제게 속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요, 기사님. 거래는 본래 사냥감이 만족할 만큼 달콤한 먹이를 흔드는 것이지요. 들어 봅시다. 유혹적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말고, 무엇으로 유혹할지 내밀어 봐요. 혹시 압니까? 내가 먼저 정신이 나가 당신의 육체를 파먹으려 들지.”
까닥, 놈의 흰 손가락이 움직였다.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고, 고개 숙인 기사를 손끝으로 부리는 오만한 여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비뚜름히 휘어지는 붉은 입술을 삼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하리드 브리첼은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해도 좋다. 네가 정신없이 달려들 만큼 달콤한 먹이이니. 넋이 나가 이를 드러낼 것을 쥐고 있지.”
“그게 뭡니까?”
하리드 브리첼은 느릿한 숨을 내쉬며 놈을 보았다. 아마 이 장소에 룩센이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네가 미쳤구나! 그렇게 찢어지는 잔소리를 퍼부으면서. 하지만 욕심이 모든 것을 이겼다. 정녕 종족의 미래 따위 상관없을 정도로, 충격적일 정도의 욕심이 심장을 꽉 채웠다.
놈의 눈앞에 달콤한 먹이를 흔들어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자신만 보도록 그렇게 유혹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눈동자를 자신에게. 그리하여 저 인간을 만족스럽게 삼키고 이 심장에 담을 수 있도록.
“너의 복수.”
“……뭐?”
아마 그 말을 내뱉었던 때가, 눈앞의 인간이 최초로 당황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면이 부서져 내리는 모습은…… 찬란했다. 바수어 뜨리고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짓밟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황홀했기에 짐승은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네 복수를 도와주지.”
* * *
황제는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느릿하게 손으로 쓸어 보았다.
“벌써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는가.”
무거운 눈동자가 떨리는 움직임으로 써 내려간 서신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온전하게 닫힌 마음은 확고부동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호소와 눈물과 애원은 안개처럼 흩어져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젊었던 날의 황제는 지금보다 욕심이 많았고, 풋내 나는 애송이였으며,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할 줄 몰랐다. 이건 그의 원죄였으나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저지를 흉이었다.
“죽은 자의 이름들이라. 이제 아무 의미 없는 것을.”
과거의 이름들을 비집어 끌어낼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대체 누굴까. 누가 짐의 심기를 이리도 어지럽히는 것이야.”
의심과 경계로 한층 날카로워진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소리 없는 비명과 찢어지는 고통의 호소가 과거를 비집고 일어나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성격을 띤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웃었다.
사냥감이 있으면 삶은 즐거운 법. 죽어 나가는 이들에게서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쫓는 자의 여유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그래. 오히려 드러나 준다면 더 좋을 터.”
만약 그의 죄질을 비방할 수 있는 자가 살아남았다면 다시 모조리 죽이면 그만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짐승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금 그 무엇이 두려울까?
예전에도 황위는 자신의 것이었고, 지금도 영원히 자신의 것이다. 그것을 노리는 자라면 혈육도 핏줄도 잘라 낼 자신이 있었다. 이미 해 보았기에 더욱 망설임이 없다. 황제는 입을 벌리며 웃었다.
“어서 오라. 어서 와, 이 목을 노리거라. 과거의 원령이여. 내 친히 마중을 나가 주도록 할 터이니!”
이 화려한 유리 정원 속의 화초들은 모두 그의 것. 그러니 그 어떤 벌레도 꼬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이 순간이 가장 소중했다.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던 그가 모든 행동을 멈췄다.
‘하리드 브리첼.’
그의 보고가 이렇게 완연히 끊긴 건 처음이다…….
또다시 변덕적으로 밀려오는 불안감에 숨을 내쉬던 황제는 별안간 탁자 위의 종을 흔들었다. 곧 문이 열리고 시종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곧장 브리첼가에 서신을 전달하라.”
“예, 폐하.”
“그리고 황녀를 불러오라.”
결과가 가장 중요했다. 흉포한 짐승을 위해, 향긋한 황녀의 목을 선물로 주더라도. 사랑에 목매는 가련한 딸의 눈을 가리고 제물로 바치더라도. 적어도 제 딸은 거짓된 사랑 속에서 행복하지 않겠는가.
황제의 두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일단 주저앉히고 난 뒤에는 이 불안함은 모두 가라앉게 될 것이다. 지금은 오만한 그 짐승조차도 제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 지상에 발을 묶이게 되리라. 황제 자신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자손을 보면 더욱 그러하겠지.
그의 얼굴이 잔악함으로 일그러졌다.
“반드시 제국을 좀먹고 있는 존재 모를 벌레를.”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는 불처럼 뜨거웠다.
“박멸해야지. 그게 맞지.”
벌레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감미롭고 황홀한 무대를 열 필요가 있었다. 브리첼 공작가, 페르달 공작가.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 설 누군가. 이 얼마나 달콤한 먹이가 될 것인가?
그의 딸은 아주 감미로운 꽃이었다. 온갖 벌레와 곤충들을 끌어들일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 황제는 최종 승자가 자신이 될 것을 자신했다.
* * *
“커, 커억!”
“모자라. 더 박아.”
“크아아악!”
무심한 어투에 피범벅이 된 남자의 등에 또다시 검이 꽂혔다. 바르작거리는 모습이 흉하고 가련했지만, 냉정하게 찔러 넣는 앳된 청년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퍽! 살을 꿰뚫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젊은 청년은 뺨에 핀 튀를 무정하게 스윽 닦아 내었다. 하지만 곁에 서 있던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아니었다.
“이런, 구두에 묻었잖아.”
“죄송합니다, 주군.”
그는 꼬고 있던 다리 한쪽을 살랑이며 심드렁하게 면박을 주었다. 갈색 가죽 구두의 코끝에 붉은 핏물이 동그랗게 묻어 있었다. 툭툭, 흔들자 떨어지는 핏방울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느릿하다.
“이봐.”
살짝 옆으로 까닥 고개를 휘자 회색 머리카락이 사르륵거리며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악마처럼 아름답다. 제 턱을 은근히 쓰다듬고 있던 남자는 히죽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우리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꿀꺽.
그 순간 비릿하게 퍼지는 피 내음에 초조함 섞인 마른침이 우아한 남자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이 방 안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름다운 남자의 푸른 눈 속에 잠시 붉은 기가 돌았다. 잔인함이 뒤섞인 눈빛을 습관적으로 감춘 남자는 입술을 매만지며 겁에 질린 자를 얼렀다.
“현명히 생각해 봐. 대체 언제까지 입을 꾹 다물 셈이지? 이 시간들 제법 지루한데. 네놈의 징그러운 비명을 더 듣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렇게 버텨 봤자 이쪽이 더 잔인해지리라는 생각은 안 드나? 이렇게 말이야.”
가볍게 지껄이던 남자가 턱짓을 하자, 남청색의 앳된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 자루를 힘 있게 박아 넣었다. 푸욱. 칼에 꿰인 이가 비명을 내질렀고, 방 안에는 조금 더 비릿한 향기가 가득 차올랐다.
“끄아악! 흐, 흐악, 이, 이, 악마 같은…….”
“아무래도 모자란가 보군. 주둥이가 너무 살아 있어. 자, 착하지. 나엘, 하나 더 박아.”
콱!
“으아아아악!”
지루하다는 듯 바라보는 관찰자, 르브리에는 졸린 듯 하품을 쩍 하며 귀를 후볐다. 비틀린 미소는 무척이나 날카로웠고,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발끝에 걸린 구두를 흔들어 보이는 모습은 퇴폐적이다. 올라간 바짓단 아래 희게 비추는 복사뼈가 탐스럽게 도드라졌다. 누가 보아도 신사적이고 수려했던 귀족 르브리에는 그 자리에 없고 잔인하고 포악한 살해자의 모습만 그곳에 있을 뿐이다.
“내가 무슨 무리한 요구를 했나? 아닐 텐데. 단순하잖아.”
“흐억, 허어억…!”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짜증 나게.”
르브리에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한껏 낮게 속삭였다. 멍청한 인간을 꾀어내는 고대의 악마처럼, 피를 바치길 바라는 죽음의 제사장처럼.
“잘못을 했으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내부 고발자는 말이야, 그렇게 나쁜 게 아니란 말이지. 더 끔찍한 일 당하기 싫으면 당장 말해 봐. 과거의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내게 고해라.”
“허윽, 컥! 끄아악!”
재촉하자 거친 숨소리를 내던 피범벅이 된 남자가 푸드득 뛰어올랐다. 지나친 고통에 의한 경련이었다.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바로 곁에 서 있던 나엘이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촤악.
“크, 크윽!”
“정신을 차려야지. 관객이 지루해지지 않나. 자, 주둥이를 나불거려 봐라. 그날의 일을 모두 고하면 목은 붙여놔 주마. 어때?”
“이익!”
고문을 받던 남자는 이를 악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억울했다. 정말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도대체 언제의 일인가? 남자는 의뢰를 받고 살아가는 직업을 지녔고, 그의 손을 지나쳐 간 의뢰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과거의 일을 말하라니.
“무, 무려 십 년 전의 일…을 너는 기억할 수 있나!”
“그걸 왜 기억을 못 해. 머저리야?”
그 발악을 보며 르브리에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것과는 이래서 대화가 안 돼.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듯 낮았으나, 울림이 큰 방 안을 진동하듯 퍼졌다.
“대가리가 금붕어보다 못하니 어쩌나. 나엘, 하나 더 박아 줘. 등에 빼곡하게 검이 꽂혀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올 듯해.”
“아, 안, 안… 크아아악!”
한동안, 죽어가는 이의 입에서 마지막 기억의 조각이 떨어져 나올 때까지 방 안에는 고문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중간중간 사납게 찌르는 관찰자의 살기 어린 목소리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방을 걸어 나오는 말끔한 남자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할 만족감이 꽃피워 있었다. 기쁨으로 휘어지는 푸른 눈동자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뒤따라 나왔던 앳된 청년이 그 옆모습을 관찰하다 물었다.
“주군, 만족하십니까?”
“그래, 제법. 소득이 있었으니.”
아무렴. 르브리에는 입술에 튄 피를 할짝, 느릿하게 핥았다. 재빠른 쥐새끼처럼 숨어 버린 놈들을 찾고 또 찾는 시간이었다. 하나를 더 찾을 때마다 배가 부르지 않을 수가 있나. 조각을 하나 더 찾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수확철의 농부가 된 기분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앳된 청년이 주군의 기쁨을 느끼듯 아주 희미한 미소를 따라 지었다.
“그런데 주군.”
“왜. 무슨 일이지?”
“아까부터 쥐고 계신 그것, 제가 버릴까요.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르브리에는 나엘의 말에 어느새 자신이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던 흰 쪽지를 보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또 쥐었나. 인지하지 못했으나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이것을 꺼낸 것이었다. 대체 무슨 저주라도 달려 있는 것인가.
그의 부하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기묘한 표정으로 손에 든 쪽지를 보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보셨습니다. 단순히 종이로 보이는데……. 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엘.”
“예.”
“내가 언제부터 네게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해야 했지?”
“…불쾌하셨습니까.”
“사소한 것에 신경 끌 것. 뒤처리는 맡기겠다. 알았나?”
“…예.”
미약한 불만을 담고 무어라 어물거리는 충직한 수하를 뒤로한 채 르브리에는 조금씩 빠르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도 당혹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찝찝함이 찌꺼기가 되어 신발에 눌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랬다. 꼭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손에 쥐고 있었다. 나엘이 꼬집지 않았다면 수하들 앞에서 쪽지나 매만지고 있는 허술함을 들킬 뻔했다.
‘르뷔.’
빌어먹을 그 달콤한 목소리. 어느새 그의 뇌는 또다시 그자의 목소리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살짝 찌푸려진 섹시한 미간, 짙은 수컷의 눈동자, 옷자락 속에 감춰진 뜨거운 태양의 향기를 풍기는 꽉 짜인 육체. 흉악할 정도로 파격적인 모습을 부끄러움 하나 없이 보여 주었던 놀라운 기사님. 정확히는 그날 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복수? 모르겠군요. 지금 대체 무슨 근거로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왜 그런 걸 하겠습니까?’
‘궁금한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렵지 않았다면 너무 속 보이는 거짓말일 것이다. 르브리에는 언제나 숨기고 웅크리며 살아왔다.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그 일념으로 누르고 눌러 왔다.
짓밟히고 뭉개지는 순간에도, 온전히 이 피를 타고 흐르는 권위와 권능을 자각한 순간에도 기쁨은 없었다.
오로지 복수. 뜨거운 복수.
적의 피로 화려한 연회를 벌이리라, 비탄의 순간을 위해 달리고 또 달려왔다. 죽음도,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도 상관없었다.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며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어간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자신의 자식을 희생하여 그를 받아들여 준 어느 고귀한 귀족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적은 내밀하고 음습한 꾀를 부리는 자였으므로 그 역시 영리한 여우가 되어야 했다.
얼굴을 숨기자. 진심을 속이자. 아주 유혹적으로 빛나는 꽃이 되어 홀리게 하리라.
그러나 비밀을 숨기는 자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매 순간이 두려웠다. 그것을 느닷없이 찌른 것이다. 하리드 브리첼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며 즐거워하는 순간들의 감정이 모두 숨을 죽였다. 덜컹, 흰 낯빛의 유약한 르브리에가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어떻게 안 것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내 이름의 숨겨진 의미도 알고 있나?
내가… 누군지?
심지어 상대는 그의 침묵의 이유조차 아는 듯했다.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 보인 기분이었다. 당황스럽고 공포스러웠다. 대체 뭐를 알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금색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담기지 않은 것이 유일하게 르브리에가 참을 수 있는 이유였다.
‘설명하시죠. 자세히. 내가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길 바란다면.’
하리드 브리첼. 그저 그런 사람의 하나. 그렇게 남았어야 할 남자가 자신의 삶에 끼어든 이후부터 잘 굴러가던 쳇바퀴가 삐걱거리면서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변수다. 치워 버려야 했다. 가만히 서늘하게 식는 이성을 담으며 바라볼 때, 상대가 희미하게 웃은 것도 같았다. 아니,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뭐요?’
허를 찔렸다. 큰 돌덩어리를 던져 놓은 주제에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깔끔한 태도로 물러났으니까. 그건 올가미를 벌리고 아무렇지 않게 짐승이 발을 들이길 기다리는 노련한 사냥꾼과 같아 헛웃음이 났다.
대체 눈앞의 저 인간은 어디에서 떨어진 놈인가. 황제가 정녕 저런 자를 어디서 얻은 거지?
‘그 모든 것들이 궁금하다면.’
르브리에는 바스락거리는 감촉의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뇌리에 인식된 것은 브리첼 공작의 필체가 생각보다도 예스럽고 멋지다는 것. 그다음에 적힌 내용이 들어왔다.
‘적힌 그 날짜, 그 시간. 그곳으로 나와라.’
건조했지만 오만한 말투였다.
“대범하기도 하지. 나의 귀여운 기사님은.”
네가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담긴 음성이다. 시선이 첨예하게 교환했다. 르브리에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 말을 내뱉을 때의 하리드 브리첼의 변화를. 담담한 척하는 주제에 미세하게 흔들리던 눈꺼풀을, 숨을 깊게 내쉬었던 순간을,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가 나눌 거래의 정확한 내용도. 거래에 대한 보답도 무엇을 줄지 말해 주겠다.’
뚜렷하게 빛나던 눈빛을. 거부하지 말라는 그 도발을.
‘비겁하게 지금 먹이만 던지고 도망가는 겁니까? 수가 얕군요.’
‘내가 비겁한가? 아니지. 겁먹은 건 너일 텐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이란 낯설다. 특히 르브리에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조금만 웃어 주고 조금만 유혹하듯이 바라만 봐도 대다수가 넘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능력이 되었다. 모두가 그에게 바라지 않았던 호감을 비추고, 내뱉지 않은 것들을 늘어놓으며 환심을 사려 했다.
하지만 하리드 브리첼은 달랐다.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친절하고 무례하군요, 브리첼 공작.’
‘미끼를 던지는 거지. 네가 내게 그러했듯. 선택은 네게 달렸다.’
르브리에에게 있어서 최초였다. 육체는 끌리나 마음마저 넘어오지 않는 건조한 사람. 아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하는 들뜬 감정의 근원. 르브리에는 자신이 그를 열망하고 있음을 알았다.
적어도 그 건장한 등을 할퀴고 짓씹으며 탄력적인 살덩어리를 잡아 벌리고 우악스럽게 처박고 싶은 욕구를 자각했다. 마구잡이로 뒤흔들고 섹시하게 뻗은 그 목덜미를 와락 깨물며 내장을 범하고 싶었다. 흔들리는 허벅지를 손톱으로 꿰뚫으며 탐닉하고 싶었다. 아주 흉악한 욕구였다.
‘네게 달렸다, 르뷔.’
그 뜨거운 눈은 이쪽을 염원하고 있다는 듯 바라보는 주제에 모든 것이 지독하게 담백했다. 뚝 떨어지는 시선조차도 은근한 분노가 치밀었다. 뚜벅거리며 걸어 나가던 남자가 힐끗 굳어버린 자신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스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비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멋진 은근한 미소였다.
‘무섭지 않으면 나오지 않으면 되겠지. 내키지 않으면 찢어 버려라. 그리고 잊어. 이 밤도, 나와의 시간들도.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나 역시 다가서지 않겠다. 이게 마지막이 되겠지.’
마지막. 마지막이라고?
그 남자와 마지막?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제 손가락에서 뭉그러지던 순간을 르브리에는 되새겼다. 저 강직한 얼굴이 감정을 품고 일그러지면 얼마나 멋진 광경을 연출하는지, 신사의 가면을 뒤집어쓴 기사가 꽉 짜인 육체를 한껏 내보이고 있을 때 얼마나 유혹적인 짐승으로 변모하는지. 그가 마지막을 논했을 때 어떤 흉흉한 욕망이 치솟아 올랐는지.
개처럼 목에 목줄을 매달고 숨겨 버리면 저 개는 자신만의 개가 되는 것일까. 황제도 탐하지 못하고 황녀도 욕심부리지 못하는 근사한 나의 것이 되는 것일까.
‘르뷔, 그날의 네 선택을 기대하지.’
‘…….’
제기랄. 욕이 치솟는다. 빌어먹게도 하리드 브리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험했다. 보고 있으면 목이 뜨거웠다.
마구잡이로 은밀한 속살을 내벌리고 혀를 내밀고 싶었다.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고 싶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다. 목이 탔다. 언제나 사막의 미아처럼 뜨거운 목마름에 허우적댔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 심장을 두드렸다.
갈증이다.
“그래……. 질질 끄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 결정을 내려야겠어.”
그곳에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도발적인 기사를 사로잡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놓아주어야 할지. 푸른 눈이 순간 빙하의 그것처럼 시리게 짙어졌다. 즐거웠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약속된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 * *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되잖아. 상대는 인간이야, 하리드 브리첼. 네 감각이 지금 헛다리를 거하게 짚은 거라고.”
“내가 그런 것을 착각하리라 생각하나, 룩센. 이런 일로 농담을 하리라 생각해?”
“오, 제기랄.”
차라리 아니길 바랐었던 공포는 이제 사그라졌다. 확연한 인지와 직시가 얼마나 무서운지 짐승들의 수장은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해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 같았다.
알지 못했다면 넘어갔을 감정과 열정은 이제 아가리를 벌리고 모든 것을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욕심이 마구잡이로 뛰논다. 수장으로서 의무를 행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이제 자신이 어찌 반응할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이제 자신은 르브리에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짐승은 그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항복의 깃발을 들었다.
“반려라고? 지금 그게 왜 나오는데.”
“…….”
반려.
짐승들의 유일한, 절대적인 올가미.
하리드의 일방적인 선언에 불려왔던 룩센은 허탈하게 웃었다. 당장에라도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리고 싶다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건 아니잖아. 왜 이게 튀어나와.”
“…….”
아마 거울이 있다면 제 얼굴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하리드는 저 멀리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였다.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를 자꾸만 탐하게 되었던 것은.
그래서, 그는 모든 게 달랐던 것이다.
불길이 번지는 갈대숲처럼 짙고 짙은 색깔이 뜨겁게 번져 나간다. 저 아름다운 자연의 붉음을 보면서도 르뷔라 부를 때 충혈되듯 번져 나가는 놈의 뺨의 열기를 떠올리는 자신은 이미 구제불능이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주라, 수장.”
“진실이다.”
“왜 그따위가 진실이야!”
도대체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온 거냐며 불안감 한가득 처바른 얼굴의 부하에게 수장은 아주 기막힌 고백을 한 참이었다. 떼어 버리고 온 게 맞겠지, 아무것도 아닌 게 맞았지, 라는 눈빛을 강렬하게 보내고 있는 룩센에게 하리드 브리첼은 담담하게 답했다.
‘페르달 공작은 아무래도 내 반려인 것 같다’라고.
룩센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질색하며 펄쩍 뛰었다.
‘반려? 대체 무슨 반려. 여기서 왜 반려가 나와?’
하리드는 짧지 않은 삶을 살아왔으나 그래도 모르는 것이 많은 짐승이었다. 반려의 구속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문헌을 통해서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그게 수장에 관한 것이라면.
‘놈은 내 반려가 맞다.’
‘미쳤구나!’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너무나 다른 그 감각을 착각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확인 과정은 충분했고, 하리드는 자신이 겨우 인간에게 모욕적일 만큼 엉덩이를 흔들며 두 다리를 벌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원했다. 놈이 찌르는 손과 흉악하게 발기한 놈의 성기를 한가득 품길 원했었다. 참은 것이 기적이었다.
르브리에를 갖고 싶었다. 지키고 싶었다. 모순적인 일이다. 그를 죽여야 하는데 지키고 싶다니. 그러나 알고 싶었다. 하루라도 더 그와의 접점을 늘리고 싶어 짐승은 안달이 났다.
그래서 그의 약점을 흔들었다. 복수를 빌미로 거래를 제안했을 때, 하리드는 이미 냉정한 심장을 회복했다. 그에 대한 추측을 통해 결론을 확고히 내려놓았다.
평소의 자신과는 달리 뜨겁게 뛰는 열망이 눈앞에 있었던 인간을 집어삼키고 싶어 했던 이유. 어떤 이유를 내어서라도 시선을 잡아끌고 싶었던 이유. 놈의 곁에 있던 황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은근한 질투를 가졌던 이유.
설마 반려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인간 세계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하필 지금. 인간을 반려로 맞이한 짐승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상서로운 일도 아니었다. 동족들이 알면 반발의 기세가 거세게 일어날 것이다.
수장은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였고, 인간을 반려로 둔 수장이 잉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의 문제. 그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상대는, 하물며 예언시의 대상이다.
“미쳤어. 돌았어. 이건 아니야. 다시 가서 확인하고 와. 홀랑 벗겨서 그놈의 살을 미친 듯이 핥고 파악을 하던지, 아니면 마구잡이로 안고 안다가 죽여 버리든지 해서 확인하고 와!”
“아니. 확신한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미쳤던 것일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이건 멸망시다! 하리드. 순간적인 감정의 착각으로 일을 벌이면 안 돼. 우린 놈을 죽여야 해.”
“반려다. 놈의 향기를 잊을 수가 없어. 만약 놈이 무언가를 부탁한다면 심장을 내주어서라도 들어주고야 말거다.”
“반려는 일방통행이 아니야. 그놈도 널 보고 정신없이 빠져들던? 그래? 그놈도 너에게 반응을 했느냔 말이야.”
“…….”
“제기랄, 인간이 어떤지 알 수가 있나! 하지만 하리드, 너도 알 것 아니야. 인간 놈들은 열정만으로 살아가는 것들이 아니야. 때로는 감정보다도 이 머리, 이 심장의 욕심으로 살아가. 얼마든지 감정을 속이고 잔인해질 수도 있지. 반려의 애틋한 감정이 우리처럼 진실함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건 그냥 희망적인 예측이야! 놈이 모든 것을 알면 널 이용할 거야. 보란 듯이 널 휘두를 거라고!”
“끌려가지 않을 거다.”
“퍽이나? 반려의 명을 어떻게 거부해?”
심장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뚫려 놈의 손아귀에 잡힌 쇠사슬에 묶인 것 같다. 한번 꿰뚫리면 도망갈 수 없다. 반려의 본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룩센의 눈이 그 순간 거세게 흔들렸다. 희미하게 벌어지는 그 입술을 보면서 하리드는 그가 자신과 같은 것을 떠올렸음을 알았다.
비탄, 비극, 그리고 예언자에 대한 분노. 짐승은 반려자를 거부할 수 없다. 반려자를 자각하는 순간 그에게 묶이게 된다. 열망하게 된다. 바라게 된다. 다만, 반려자들끼리는 서로에 대한 특별한 구속의 힘이 생긴다.
“설마, 설마. 그래서… 하리드 너여야 했던 거냐?”
“그건 아직 모르지.”
“예언가는 대체 어디까지 생각한 거지? 운명이라는 게 이토록 비열해?”
“…그럴지도. 그녀가 종족을 위한 예언가라는 걸 잠시 잊었지. 그녀에게는 모셔야 하는 수장보다, 종족이 먼저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모두가 택해야 하는 선택일 수도 있지.”
룩센의 얼굴에 침통함이 쓰라리게 번졌다. 비정한 예언가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할 각오가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안에 유일한 수장을 던져 넣는 것까지도. 룩센은 당장에라도 그 기억 속의 노파의 목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다는 듯 으르렁거리다가 힘을 쭉 뺐다. 하긴. 열을 내 봤자 무엇하나.
“난 아니야. 적어도 난 아니라고.”
“그래서 네게만 말하는 거다.”
룩센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뢰해 주어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빌어먹을 수장님. 그래서 뭘 어쩔 셈인데.”
그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리드는 조용히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아주 오랜 시간을 고요하게 살아온 이 살덩어리가 그렇게 감정을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감각은, 영혼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처럼 황홀하다. 하리드는 눈을 감았다.
“르브리에에게 한 달의 계약을 제안할 셈이다.”
룩센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한 달 동안 정보를 조건으로 잠자리를 할 거다. 반려와의 교미는 보통의 것과는 다르지. 놈도 나를 거부할 수 없게, 벗어나지 못하게 길들일 생각이야.”
“아하하하, 농담이지? 멀리해도 모자란 판에 접촉하겠다고? 왜. 피라도 먹이시게?”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야!”
벌떡 일어나는 친우를 내려다보며 생각하고 있던 것을 풀어놓는다.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는 시 한 편처럼 조용한 그 목소리에 룩센의 눈동자가 점차 크게 뜨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이야기를 맞췄을 때 그들 사이에는 차갑고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하리드, 그건 네가 위험할 수도 있는 도박이야. 피의 주박이 어디 한쪽에만 걸리든? 길들여지는 게 너일 수도 있어!”
“룩센. 너는 모르겠지만, 반려의 감각이라는 건 거부할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하리드에게는 쓴웃음이 피어났고, 씨근거리던 친구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냐?”
“그래. 이길 수 없다, 이 감각에게는. 앞으로 더하겠지. 그럴 바에는 이쪽에서 먼저 강하게 치고 나가는 것도 방법이다.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만나 버렸으니……. 나는 놈을 계속 탐하게 될 거다.”
“제기랄!”
하리드 브리첼은 자조했다. 패배를 몰랐던 종족의 수장은 서글픔을 받아들였다. 그 미소에 룩센의 어깨가 크게 뛰어올랐다는 것을 알면서도 패배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은 아니다. 그런 애틋한 감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세계의 중심이 르브리에를 중심으로 돌았다.
그 감각은 씁쓸하고, 두려웠고, 괴로웠으며 동시에 황홀하게 기뻤다. 피어난 숲처럼 싱그러웠으며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아니, 그대로 주저앉아 발치에 입맞춤하고 싶은 것처럼. 만약 르브리에가 칼을 들어 제 심장에 박아 넣는다고 해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반려는 저주와 같아. 그걸 몰랐지. 직접 겪기 전까지는.”
“하리드…….”
“마치 생살이 타는 것처럼 끔찍해. 놈의 생각을 끊을 수가 없지. 뇌가 타는 것 같고 욕구가 파도처럼 치밀어. 이러다 무슨 짓을 할지 겁이 날 정도다. 그러니… 나는 그 인간과 계약을 하겠다.”
“…….”
정보를 넘겨주고, 모든 것을 받아낼 것이다.
놈의 몸과 영혼과 마음을.
* * *
사내는 단 한 번도 약자가 되어 본 적이 없다. 귀족이란 으레 그렇고 신분이란 더욱 그렇다.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입장이었던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냥감이 되어 본 적도 없고, 타인에게 공포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힉, 히익!”
들이켜는 숨이 가파르다. 흉곽이 부서질 듯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들릴까 걱정되었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고 흘린 땀들에 옷이 쩌억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아니, 다 필요 없었다. 두 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콱 틀어막고 남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쉬려 노력했다.
‘어디지? 어디에 있지? 어디까지 따라왔지?’
사내의 흰자위에는 핏발이 뚜렷하게 서 있다. 쿵. 쿵쿵. 쿵. 식은땀이 주르륵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섬뜩했다.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는 고요가 아득했다.
그에게는 평소와 조금 다른 날이었다. 그를 닦달하기 위해 보낸 가문의 기사도 뒤따르지 않았고, 사내의 술 파트너였던 친구도 가문의 일로 자리를 비웠다. 우연히 자리한 술집에서 도박판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한 번쯤 위험한 내기에 도전하고 싶었던 그의 오기가 그곳으로 발걸음하게 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다. 아주 몽환적인, 아주 아름다운 여인을.
맹세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었다. 벌꿀같이 흐르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부푼 가슴골 사이로 스며들듯 움직일 때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장 부끄러움도 모르고 반응하려는 아래를 비비꼬자, 여인이 살포시 웃었다. 분명 그를 향해서.
그때의 황홀함이란.
그는 당연히 여인의 손길에 응했다. 아주 뜨거웠고 황홀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억이 뚝뚝 끊겼다. 아픔을 느꼈던 것도 같고, 공포를 겪은 것도 같다.
‘제기랄!’
술에는 아무래도 끔찍한 약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아닌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과음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명확하지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정확한 것은 그가 지금 죽다 살아났다는 것이다. 조용히, 아주 조용하기만 한 거리를 노려보면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친우의 충고를 허투루 듣지 않으리라. 이대로 저택에 틀어박혀 사교계에도 두문불출할 생각이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그런 끔찍한 악몽이라니.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난 살, 살았어. 살았다고!”
“정말?”
“그래, 당연…….”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이곳에는 그밖에 없다. 대답한 것은 누구지?
삐걱거리는 고개를 가까스로 돌리자, 그 사람이 보였다. 검은 어둠 속, 까마득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흐아아악!”
왔다. 왔어! 저 악몽이!
“어딜 가요.”
하늘거리는 몸매, 부드럽게 뻗어오는 손가락, 그리고 붉은 입술. 나풀거리며 흔들리는 벌꿀 같은 금색의 실타래. 그리고 흰 얼굴. 아름다운 여인이 씩 웃는다. 어둠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한 치아가 선명하게 빛났다.
“왜 도망가요. 그렇게 좋아해 놓고.”
“허, 허억! 헉! 허억!”
“그렇게 달콤한 시간을 보내 놓고.”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사내는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바뀌지 않았다. 여인이 다가온다.
“이렇게 아프게 해 놓고 어디를 도망가.”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순간, 희뿌연 무언가가 시야로 들이닥쳤다. 머리카락, 손, 그리고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제 몸체의 둔탁한 소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무언가가 목에 박혀 드는 굉장한 아픔과 고통, 암전이라는 것이었다.
* * *
“황녀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안색이 어두우시군요.”
“아아, 르브리에!”
우수에 잠긴 눈꺼풀을 깜빡이다 갑자기 들린 소리에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뜬 황녀의 시선이 잠시 굳어버린 듯 눈앞의 상대에게 고정되었다.
“어머나.”
“왜 그러시지요?”
“르브리에, 내 스승님. 오늘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요? 오늘따라…….”
“흐응?”
이예르라는 방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상념도 깔끔히 잊은 채, 눈앞의 사내의 모습에 솔직하게 감탄했다. 왜냐면 르브리에는 오늘따라 특히 멋졌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수컷 공작새 같은 사람이긴 했어도 오늘은 유독.
“맙소사, 내 스승님.”
적나라한 놀람과 감상이 담긴 그 눈빛이 부끄러웠던 탓인지, 살포시 입술을 휘는 남자의 모습은 과히 농도 짙은 초콜릿 같았다. 괜스레 너무나 눈부신 이성에게 자연스레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황녀가 입을 손으로 가렸다.
“오늘따라 더 눈부시잖아요. 정말 무슨 일이에요?”
“그러합니까? 황녀 전하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나쁘지 않군요. 이왕 칭찬받은 것, 매 수업 때 이렇게 차려입고 오도록 할까요?”
“아니, 그런 건 좀 심장에 안 좋을 것 같……. 아앗, 그대 또 날 놀리는 거지요?”
“후후. 그럴 리가요.”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르브리에가 앉자 황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녀의 부친은 아주 다정한 아버지였지만, 동시에 황제였다. 마냥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숨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 잠깐 눈부신 아름다움에 혹했으나 황녀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얼굴을 굳혔다.
“르브리에,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솔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해요.”
“으음, 무슨 일이실까요. 우리 전하께서 정색을 하시니, 이 스승 아주 긴장되는데요?”
“르브리에, 진지하게 들어줘요. 난, 당신이 이번 사건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황족 살인 사건이요. 대체 수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어젯밤 사상자가 또 발생하였다는 것을 들었어요. 무례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무도 내게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아요.”
“이런.”
르브리에의 얼굴 위로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응? 미소라고? 황녀가 놀라 흠칫할 찰나,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아주 미미한 것으로만 남았다. 아주 애석하다는 듯,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라 그녀는 다시금 눈을 깜빡였다. 잘못 본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을 비웃을 리가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전하. 사건은 기밀이라 쉽사리 말씀드릴 수가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록 어젯밤에 일어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맙소사. 이예르라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사실이라고? 그렇다면.
“제가 반드시 범인을 잡아들일 것입니다. 절 못 믿으십니까?”
“그건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허면 왜 그러십니까?”
“불안해서 그래요. 무서워서요.”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예르라는 저들이 노리는 대상이 황족의 피가 섞인 자들이라는 것, 그것을 통해 언젠가 그 흉흉한 검이 황궁까지 찾아들 것 같다는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손을 맞잡고 떨리는 것을 숨기려 하자, 따스한 체온이 그 위에 닿았다.
“전하.”
부드럽게 미소하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아주 온화하고, 신뢰를 주는 눈빛. 절로 공포에 질렸던 심장이 조금씩 풀려 간다.
“알아요. 믿어요, 르브리에. 그대를 의심한 것이 아니에요.”
“예. 압니다. 저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혹시 숨겨 둔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요? 페르달 공작가에 청혼서가 오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부드럽게 풀리는 그 분위기에 황녀는 답지 않게 농담을 던져 보았다. 그녀를 위해 언제든 다정한 말을 해 주는 그가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주 흉한 모습도 많이 보였지 않던가. 이를테면 황녀답지 않게 체통도 잊고 누군가에 대한 달뜬 마음을 마구 고백하던 모습 말이다. 아아, 브리첼. 브리첼 공작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인지, 연회장에서 자신 쪽을 바라보던 브리첼 공작과 그런 브리첼 공작을 응시하던 눈앞의 르브리에가 떠올랐다. 그때의 대치를 보면서 그때 그녀는 아주, 기이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후후.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요. 연애라는 것은 비밀 연애가 제맛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불타오르는 게 사랑이지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을 갖는 아주 충분하고 훌륭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르브리에, 지금 아주 나쁘고 음흉한 사람처럼 보여요. 결혼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하하, 네. 온유하게 말하자면 내 사람이 되는 훌륭한 제도지요.”
“그 말도 좀 무서운걸요. 르브리에는 집착하는 스타일인가 봐요.”
가만히 황녀를 응시하던 르브리에가 손을 들었다. 흰 검지가 입술 위에 안착한다.
“집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홀린 듯 그 부드러운 손짓을 바라보고 있자, 눈이 마주쳤다. 휘어지는 눈초리는 매혹하듯 야릇했고, 뇌까리는 목소리는 달콤한 초콜릿처럼 달짝지근했다.
“르브리에! 간지럽잖아요.”
“하하하하.”
아아, 정말. 이예르라는 저 유혹이 몸에 밴 듯한 스승을 야속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는 건 자신의 마음이 가벼운 게 아니라 다 저 남자 때문이라 중얼거리며.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최대한 꾸며 보았는데 전하의 반응을 보니 제가 제대로 치장했나 보군요.”
“응? 약속? 누구와 만나는 건데요?”
“글쎄요. 비밀?”
“너무해요. 한껏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다무는 스승을 보며 황녀는 그가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녀의 스승은, 친근했지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상관없다 생각하며 오늘 수업에 쓰일 책을 확 펼치며 따라 웃었다. 스승의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지.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을 배신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내밀한 밤 약속이라고만 해 두지요, 소중하신 황녀 전하. 거기까지 궁금해하시면 곤란해집니다.”
“아휴, 정말.”
“왜요. 부끄러우십니까? 아니면 밤 수업도 필요하신가요? 으음…….”
“됐어요! 장난 그만. 이제 수업해요, 우리.”
“네, 좋습니다. 성실하신 제자님. 어디까지 했었지요?”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워진 뺨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이예르라는 힐끗,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페르달 공작. 그가 정말 지독하게도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누구와 만날지 모르겠지만 저 웃음을 보며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얼굴 모를 상대를 향해 애도의 한숨을 쉬며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브리에의 밤 약속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 * *
심장이 떨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아주 생소한 감각이었다. 다그닥 달려가는 말의 말발굽 소리와 마차를 이끄는 마부의 긴장 어린 한숨 소리, 그리고 마차의 바퀴가 돌부리에 걸리는 미세한 감각들을 그렸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후우.”
감정에 흔들리는 동물은 얼마나 나약한가. 어릴 적의 하리드 브리첼은 그것들을 모두 비웃었다. 냉엄하고 냉정한 수장이 되리라. 수장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런 수장이 되어야 했다. 그들 종족의 역대 역사를 보면 그렇게 냉철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어쨌든 자신 있었다. 나는 그리되리라, 고.
‘치기 어린 오만함이었어.’
손을 들어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어둑한 밤이었다. 검은 벨벳 같은 하늘 위로 민망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별들이 반짝였다. 습윤한 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웠고, 조금씩 약속된 장소를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인지하는 육체가 안달했다.
달뜬 심장이 뜨거운 피를 울컥 쏟아 낼 때면 몸 안의 깊은 곳이 은밀하게 자극되는 기분이었다. 단단하게 몸을 옥죄고 있는 정장을 벗어 던지고 자유롭게 달려가고 싶은 욕구가 치밀기도 했다. 그건 그들 종족에게 당연하였으나, 이성으로 무장한 성년들에게는 우스운 것이기도 했다. 동족들이 있으면 그런 이들을 손가락질하곤 한다.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 하고.
“거의 다 와 갑니다.”
“그래.”
부득불, 입 무겁고 일 처리 잘하는 이를 붙여야 한다며 마부와 마차까지 준비한 룩센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놈도 참 불쌍한 처지였다. 종족을 살리겠다는 중대한 명령으로 불편한 인간 세계에 들어와 몇 년을 고생했다. 이제 고지가 머지않았는데 대뜸 그들이 모시는 수장이 중요한 인간을 반려로 들이겠단다. 얼마나 기가 차고 열불이 솟겠나.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괜스레 그놈의 달큼한 향기가 콧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뇌리를 휩쓴다. 거짓말이다. 아직 약속된 저택에 도착하지 않았다. 언덕을 지나고, 또 하나의 언덕을 지나면 드디어 그곳에 도달할 것이다.
‘멀군.’
장소는 룩센이 준비했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며.
황궁의 이목도 다른 거추장스러운 박쥐들의 시선도 차단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르브리에 쪽은 어떠했냐 하면, 전달된 편지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응하겠다는 맥빠진 답변을 보내왔다.
‘그래. 그래도 예의는 있군!’
‘룩센.’
룩센은 만족스러워했으나 하리드는 의심했다.
르브리에, 그 인간은 영리한 여우와 같고 날카로운 뱀과 같은 사내였다. 아름답고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속아 넘어갔다가는 식인화에 목을 잘리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오만한 인간이, 그 조심성 많은 인간이 자신에게만 남달리 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그 인간 역시 반려의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섣부른 기대야, 하리드. 너 지금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반려는 본래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흥. 네 기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 인간이 어떻게 그 감각을 느끼겠어. 느낀다 하더라도 고작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으로 착각하겠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라는 감각과 비슷하게 말이야. 그 인간이 너에게 그러든? 열렬하게 아주 유혹적으로 따라붙든?’
아무리 하리드 브리첼이라도 그 답에 그렇다, 하고 대답할 순 없었다. 르브리에가 어땠는가. 반하기는커녕 노리는 것을 보란듯이 담고 와 호의를 베풀고 다가왔다가, 푹 찌르고 도망가길 주저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얼굴이 몇 번이나 바뀌며 진심을 속였다. 호기심 딱 그 정도였지 끈적한 집착과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의 말은 어느 정도 옳았다. 르브리에는 인재였고, 위험한 인간이다.
“다 왔습니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흔들렸다. 하리드는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숨을 크게 마신다.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이후 운명은 어찌 변모할지 그도 몰랐다.
* * *
“이상하군. 갑자기 희생자가 늘었어. 사인은…… 여전히 불명이군. 그런데 페르달 공작의 움직임은 변함이 없고. 이 비상사태에 황녀와의 수업에 화려하게 꾸미기까지? 뭐 하자는 행동이지.”
갑작스러운 변화나 움직임은 으레 그다지 재미없는 결과를 낳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이 남자는? 알 수가 없군…….”
보고서를 와락 구겼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거울 앞에서 흔들리는 잔상 같은 제 얼굴을 보았다. 날카로운 눈동자 속에는 스스로 알아볼 수 있는 야망이 있었다. 언제나 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만 이룰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촉이 몇 년간 가리키는 대상은 단둘이었다.
“하리드 브리첼. 그리고 르브리에 페르달.”
일말의 접촉도 없는 고위 귀족들이었지만, 한쪽은 황제의 지대한 사랑을 받는 인물이며 한쪽은 황제의 날카로운 경계를 받는 인물이다. 동시에 둘 다 현 황제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귀족이었다.
“어떤 먹이를 준비해야 당신들을 잡을 수 있을까. 황제의 시답잖은 잔챙이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바라는 것을 위해서 시울 폰 샤나는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잡아내야 했다. 은밀한 비밀의 냄새가 그의 콧김을 거세게 내뿜게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웬일일까. 흥미진진함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꾸 둘 사이에 무슨 접점이 일어나고 있다는 촉이 울렸다. 그게 무엇일까.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으나 첨예한 요새와 같은 저택에 침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노린 첫 번째 단계는 황제에게 의심을 심어 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잘 이루어졌지만, 아직 멀었다.
“결정적인 한 수가 필요한데.”
이대로 황제가 바라는 대로 황녀와 브리첼 공작이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면.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비정한 빛을 뿌렸다.
‘그렇게 된다면.’
양피지에 적힌 페르달 공작에 대한 보고서를 쓰다듬으며 그는 비스듬히 웃었다.
“…없는 증거라도 만들어야겠지.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황제가 치를 떨고, 황녀가 고개를 돌릴 만한 것. 그들이 마주쳤던 장소. 그 연관성을 지으려면…….”
그리고 황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달게 삼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유약한 지배자의 마음에 쏙 들 테니까.
“치정이 좋겠군.”
* * *
“늦었군요. 약속 시각을 정한 건 그쪽일 텐데, 예의가 별로입니다?”
저택의 시종은 벙어리에 글을 쓰지 못했고, 암묵적인 마법 제약까지 걸려 있었다. 룩센의 솜씨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이 없다는 것을 하리드 브리첼은 확인했다.
“기다렸나.”
“그래요. 브리첼.”
퍼지는 예리한 감각 속에는 주변에 어떤 인물도 없음을 알리고 있었고, 또한 이 저택에 걸린 특수한 장치는 이곳에서의 기억이 하리드와 르브리에 단 두 사람에게만 남을 것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하리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은밀한 정사에 있어 저택 두 채 값의 투자라니. 룩센도 미친놈이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화려한 문을 열고 들어간 하리드는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적당히 흥분으로 뛰는 심장과 적당히 긴장으로 굳어진 머리는 훌륭한 협상을 끌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으니까. 그 문을 열기 전까지는.
반려라는 것은 그리 쉬운 감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또 잊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그 공기의 질감은 문밖과 문 안쪽이 확연히 달랐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머리를 돌아버리게 할 반려는 환장하게도 평소와 다르기까지 했다.
“르브리에.”
천천히 돌아서는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 은은하게 반짝였다. 본래 회색빛의 것은 마치 달빛으로 인해 다른 색감으로 빛나 유혹하는 것만 같다. 은은하게 말려 있는 입술은 꿀이라도 처바른 것인지 광택이 흘렀고, 단정한 목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흰 피부는 왜 이리 단침을 고이게 하는지.
“뭘 멀거니 보고만 있는 겁니까? 멍청하게.”
문을 닫지 않고 뭐하냐는 듯 책망하는 그 서늘한 눈초리에 하리드 브리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추태였다. 상대는 그 어느 날보다 아름답고 또한 강렬했다. 단 꿀에 꾀인 늑대가 멍청하게 꼬리를 흔들며 뱀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 첫 번째 날이었다.
* * *
그것은 기억, 아직 어릴 때의 것이다. 먼지 냄새, 햇볕의 따뜻함, 그리고 그 사내. 많은 동족의 어른들 중의 하나였지만 독특한 괴짜였다. 그는 돌밭을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동족들과는 달리 실내를 좋아했다. 싸움질하면서 피를 튀기는 것보다는 조용함과 고요한 평화를 사랑했다. 아무튼, 미친놈 같다며 손가락질당했던 괴짜였지만, 하리드는 그의 주변 분위기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른들 몰래 그의 집에 숨어들곤 했다. 킁킁, 코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이밀자 눈이 마주친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왔냐? 친절하지 못한 눈이 그렇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하리드는 보란 듯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가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막으리.
‘오늘은 뭘 봐요?’
‘신경 꺼라. 귀찮아 죽겠다, 땅꼬마.’
‘땅꼬마 아니에요. 나는 다음 대 수장이라구요. 엄청 강해질 거예요.’
‘콧물이나 닦고 말하시지.’
어린 짐승은 호기심에 가득 차 콧잔등을 씰룩이며 물었다.
‘뭐예요. 뭘 보고 있는데요. 응? 나 이 글씨 알아. 반려?’
‘훠이, 이 날파리 같은 게 아주 그냥.’
‘반려가 뭐야?’
두툼하고 먼지 냄새 나는 책들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손톱이 그것을 쭈욱 찢을까 봐 뒤로 물리는 사내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하리드 브리첼은 눈을 깜빡였다.
‘뭐예요. 왜 무시해요? 빨리 설명해 주세요. 궁금하니까.’
‘무엇을?’
‘들었잖아요. 왜 모른 척해요? 반려. 설명해 봐요, 아저씨.’
그가 순간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이걸 패대기쳐 버릴까, 그렇게 갈등하는 눈이었다. 어린 짐승 역시 만만치 않게 사나운 눈빛으로 카랑 소리를 내었다. 방 안에 잠시 긴장이 서린 공기가 퍼렇게 스쳤다.
‘싸울래요? 난 좋아요.’
‘내가, 빌어먹을, 어린 것을 데리고 무얼 하겠다고.’
‘질까 봐 그러는 거죠? 뭐, 좋아요.’
하리드는 배시시 웃었고 남자는 항복했다.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걸어간 어린 짐승은 의자를 천연덕스럽게 끌어내 그 위에 앉았다.
‘넌 대체 짐승 놈들답지가 않아.’
‘왜요. 다들 나더러 아주 타고난 수장감이라던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후우. 제기랄, 좋지 않아.’
‘아저씨만큼 괴짜 소리 들을 일은 없으니까 걱정 끄시죠.’
‘애새끼가 싸가지도 없고 말이야.’
‘싸가지 없는 게 낫죠. 착해 봤자 물리기밖에 더해요?’
친절하지는 않은 상대였다. 종족의 어른들이 모두 어린 것들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늑대들이 무리 동물이긴 했지만, 그들은 동시에 사람이었으니까.
어린 짐승의 모자람을 귀찮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하리드는 열심히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해 달라 피력했다. 작은 손이 붕붕 휘둘리자 아주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질렸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어린 짐승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위협했다. 딴소리하면서 내쫓을 생각하지 마시지.
‘얼른요. 설명해 주세요. 반려가 뭔지. 오늘은 그게 궁금하니까.’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너 이 애새끼. 세간에는 이런 관계를 스승과 제자라고 하는 거 모르냐? 제자는 스승에게 아주 존경과 헌신을 다해야 하는 거야. 그따위로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직 상식이 부족해요. 그래서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내게 그런 걸 바라요?’
‘제기랄.’
코웃음 치는 어린 시절의 하리드 브리첼은 ‘현재’의 그가 보기에도 참으로 재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짐승은 참을성이 없었다. 쾅쾅 내려치는 자그마한 주먹에 탁자에 금이 쩍 가자 남자가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졌다는 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대체 이게 왜 궁금하냐. 어린놈의 자식이. 네가 반려를 만나서 뭐 섹스라도 할 셈이냐? 야, 너 몽정이나 해 봤냐?’
‘아저씨는 역시 저질이야. 그리고 지금 당장 만났댔어요? 언젠가 만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때에 대비하려고 알아 놓을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에요.’
‘웃기는 새끼. 지금 반려라는 걸 알았으면서 말 가져다 붙이기는. 그리고 인마, 이 좁아터진 세계에서 퍽도 반려를 만나겠다.’
이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내는 몰랐지만 어린 짐승은 반려에 대해 어렴풋이 듣기는 했었다. 그게 뭔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짝짓기 상대와 비슷하다는 것까지. 그리고 어른들이 쑥덕거리는 사내에 대한 비밀도.
어린 짐승의 눈이 영악하게 빛났다.
‘아저씨는 반려에 대해 잘 알잖아요.’
‘…….’
흘렀던 그 침묵 속에 섞여 있던 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하지만 그 풋내 나는 시절의 하리드는 언제든지 사내를 죽일 힘을 갖고 있었다.
그건 오만함이고 악랄함이었으나, 순진하기에 투명했다. ‘현재’의 하리드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 과거를 바라보았다. 아니, 답습했다. 놓치고 있었던 것은 없었는지. 빠뜨린 것은 없었는지.
주황색의 불빛 아래 서늘하게 빛나는 사내.
‘잔인한 애새끼.’
그 사내는 반려를 잃은 종족의 말로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반려가 동족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 모종의 이유로 죽었다고. 그 이후로 사내는 폐인처럼 처박혀서 사는 것이라고. 그 모든 것을 듣고도 어린 짐승은 갸웃했다. 짝짓기 상대가 죽은 건 아쉬운 일이지만 다른 상대를 만들면 되지 않는가. 왜 그런 것에 상심하고 괴짜가 될 필요까지 있지?
‘말해 봐요. 반려가 뭔지. 어떤 기분인지.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말이에요, 이 세계가 좁다면 인간 세계는요? 내가 장성해서 뛰놀 때, 거기서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인간이면 더 쉽겠다. 간신히 제압해서 데려오기 좋잖아요?’
상대는 코웃음 쳤다.
‘미친 애새끼 같으니. 천 년 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 반려가 인간이면 좋겠다고? 천 년 후의 네가 지금의 널 보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어 할 거다.’
어째서?
눈을 깜빡이자 사내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피곤한 낯으로 바뀌었다. 살짝 풀린 동공이 먼지 나는 오래된 책을 향했다. 활짝 펼쳐진 종이에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늑대인간과 검은색의 긴 후드를 쓰고 있는 무언가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하늘에 놓인 것은 동그란 보름달이었고 배경은 검었다.
목줄이 꿰인 늑대 같다.
‘반려를 만나면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지, 꼬마야.’
‘네.’
사내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린 짐승은 그 순간 코를 찡긋거렸다. 감정의 냄새, 흥분의 체취, 상대에게서 조금은 야릇하고 또 조금은 불쾌한 수컷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되새기고 있다. 그의 반려와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어린 하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정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저런 반응이지?
‘미쳐 버리는 거지.’
사내가 눈을 뜬 것은 그 순간이었다. 뾰족하게 솟아난 누런 손톱이 스스로의 미간을 푹 가리켰다. 찌를 듯이 거친 손짓이었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사내는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대답했다.
‘이 머리가 미쳐 버리는 거야. 반려를 보는 순간, 심장이 가장 먼저 자각하고 그다음에 온몸이 반응하게 되지. 그 전까지의 너는 그 순간 살해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모든 것이 오로지 반려를 위해 돌아가게 된다. 너 스스로의 안위조차도 그다음 순위에 놓이게 돼.’
‘이상해요.’
‘그럼. 이상하지. 우리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종족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게 한순간에 뒤바뀐다고 생각해 봐라.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 되는 거지. 그런데 더 미치게 만드는 것은.’
순간 사내의 목소리가 낮아졌고, 하리드는 고개를 바짝 숙이듯 가까이 대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악의 없는 순수한 눈동자는 오히려 사악했다.
‘현재’의 하리드는 복기하는 기억을 되새기듯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말을 내뱉었을 때의 그는 얼마나 짜증이 솟구쳤을까. 그래, 저 사내의 말이 맞았다. 반려란 미치게 만드는 존재다.
‘그 향이지.’
‘향?’
‘그 매혹적인 향. 보름달 아래 피의 축제를 벌이는 붉은 달의 늑대 새끼들이 되는 것처럼, 온종일 그 살갗의 냄새와 체취와 피의 달콤함 만을 되새기게 되지. 처음에는 식욕으로, 그다음에는 불타는 성욕으로, 그다음에는…….’
사내는 돌연 말을 멈췄다. 파르르 떨리는 어조와 붉게 충혈되는 눈을 기묘하게 바라보는 어린 짐승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 이상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불만이 가득하게 부푸는 어린 짐승의 뺨을 보면서 사내는 손가락으로 그 살을 아프지 않게 찔렀다. 포옥 들어가는 살이 몰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놈아. 반려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나는 건 줄 알아? 죽을 때까지 반려의 꼬랑지조차 보지 못하고 죽는 놈들이 대다수다. 오히려 선택의 혜택을 받는 놈이 역사에 한둘 나올까 말까인데, 뭘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어, 어린 새끼가? 반려라는 게 무슨 값진 축복인 줄 알고.’
‘반려의 피가 그렇게 죽인다는데요.’
‘허어. 고작 맛이나 보고 싶어서 반려를 바란 거냐? 너 그러다 천벌 받는다. 아니,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걸.’
본래 그들 종족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쉽사리 나가지 않는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하리드 역시 고집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눈을 부릅뜨며 입술을 달싹이며 주장했다.
‘자주 나가게 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잠깐 나갔다가도 만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동족들 사이에서 반려를 만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피를 취할 거예요.’
‘멍청한 놈. 반려는 먹잇감이 아니야.’
그가 돌연 비난했다. 짜증과 억울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자, 사내가 살랑살랑 입꼬리를 흔들며 다시 한번 선명한 비난을 던졌다.
‘반려는 재앙이야, 애새끼야. 거기다 인간? 넌 네 말대로 미래의 수장감이다. 네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홀로 죽지도 못해. 미쳐서도 안 돼. 그게 수장의 첫 번째 의무다.’
‘알아요. 그 정도는.’
‘그런데 인간을 반려로 맞고 싶다고? 이 철딱서니 없고, 멍청한 놈. 그건 어떤 재앙과도 비교하지 못할 더러운 일이야!’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 *
하리드 브리첼은 눈을 떴다. 푸른 달빛, 선명한 현실이 그의 시야로 파고들었다. 몽환적이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모두 날아가고 현재의 재앙이 그를 바라본다.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 몇 겹의 거짓됨으로 자신의 진실과 영혼을 가리고 있는 복잡한 인간. 그리고…… 그의 재앙.
르브리에. 바로 그의 반려였다.
“…….”
“…….”
어떻게 할 건데. 룩센은 말했다. 심히 걱정되어 죽겠다는 얼굴로, 너보다 걔가 말을 더 잘할 것 같다면서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실제로 물에 처박아도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게 르브리에의 모습이긴 하다. 아주 젊었을 때부터 정치판에 끼어들었다지. 웬만한 노귀족도 그의 앞에서는 입을 조심한다고 했다. 속을 보이지 않고 상대를 휘어잡아라.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무언의 시선과 몸짓으로 그들은 대화를 대신했다. 굉장히 차갑고, 불평을 숨기지 않는 표정의 르브리에와 그것을 바라보면서 역시 침묵하는 하리드 브리첼, 자신. 당연히 방 안의 공기는 딱딱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과연 누가 먼저 말을 할지 초재기를 하는 것처럼 시선만 부딪힐 뿐이다.
하지만 목이 갈라지던 갈증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등골에 옷자락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허탈한 웃음도 치솟는다. 그 옛날 동족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간다. 인간의 반려라니, 만나지 않기를 빌어야 할 것이라며 애송이 취급하던 그 남자의 말로가 어땠던가.
반려는 축복이 아니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난리를 부리는 것을 무시하며, 그는 옷소매를 풀었다. 조용히 걷어내며 팔꿈치까지 올리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보지 않아도 상대의 움직임이 그려졌다. 살짝 찡그린 눈썹, 불쾌함과 경계심으로 응시하고 있을 눈동자, 그리고 비소.
“르브리에, 너에 대해 짐작하는 것은 간단했다.”
첫마디는 상대가 불쾌하게 생각할 말이었다. 역시나, 말을 내뱉으며 바라보니 인상을 와락 찌푸리고 있다. 르브리에는 가늠하듯 바라보다가 턱짓을 하며 느긋하게 다리를 꼰다. 주절주절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황제는 몇 년 전부터 깔짝거리며 신경을 거슬리는 누군가를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 그것은 더욱 명확해졌지. 모두가 단순한 살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건 황족을 노린 반역이다.”
“그래서? 대가리에 똥만 찬 것들 아니면 그건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습니다. 그 꽃 단 황녀 전하도 알고 계시는걸,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악의를 가진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럴 만한 동기를 지닌 사람들이 용의자가 되는 게 당연하지.”
“오, 이봐요. 그런 정설은 때려치우시지요. 용의자가 여기서 왜 나와. 내가 그 사건의 책임자인 건 알고 지껄이는 겁니까? 설마 범인을 못 잡았다고 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테고. 애초에 그 사건의 관련성을 짚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너지. 그래, 너.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든 혐의에서 벗어난 너.”
잠시 말을 멈춘다. 뻔뻔한 낯의 인간이 보였다.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한쪽으로 비틀려 있는 입매가 사나움을 감추고 있었다.
“모든 범인이 몸을 수그리고 숨는 건 아니지. 오히려 대가리를 빳빳이 치켜들고 더 나서는 놈도 있다. 네가 바로 그렇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일부의 진실의 뒤에 숨어 대부분의 거짓을 숨길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하!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자, 어찌할까. 단순히 몸을 취하는 건 얼핏 간단하다. 조금만 듣기 좋은 소리, 혹은 그가 바라는 정보를 던져 준다면 저 지독하게 냉정한 인간 남자는 제 몸을 던질 것이다. 그러고는 독하고 못된 말들만 늘어놓으며 꼬리를 자르고 유유히 도망갈 것이다. 잘린 꼬리나 잡고 자위하라면서 심술을 부릴지도 몰랐다.
그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결속을 원했다. 황제와 그가 나눈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그따위 계약이 아니라, 종족들이 어쩔 수 없이 피에 따라 그를 따르는 피의 약속이 아니라, 죽음조차 가를 수 없는 어떠한 것.
놈이 죽는 게 싫다. 그리고 종족이 멸망하는 것도 싫었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몇 명이나 죽였지?”
“거기서 더 하면 그대로 나가 버릴 겁니다.”
“앞으로 몇 명이나 죽일 셈이지?”
“하리드 브리첼.”
이것을 걸어 나가면, 저 손을 잡으면, 이 말을 내뱉으면, 그리고 저 살과 향을 취해 이름과 이름으로 엮게 되는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으리라. 노쇠한 예언가 이시르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종족을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수장이시여.
그 말은 이 뜻이었던가? 때가 되면 알게 된다. 그게 이 순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걸 내가 돕는다면?”
“뭐?”
“네 살인을 내가 돕는다면. 그리하여 네 복수를 돕는다면.”
피 내음이 난다.
놈에게서 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톱 속에 뿌리박힌 살인의 향에서 나는 것인가.
“너는 내게 널 줄 건가?”
하리드는 흉곽을 가득 채울 듯 숨을 마셨다. 무슨 표정일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사내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빛에 반사되는 눈빛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푸른색이었나, 아니면 붉은색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모든 것을 다 지운 색이었나. 돌연 상대가 웃었다. 날아가는 새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황제의 개. 그런 더러움 따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한 주제에. 청탁입니까?”
끼익 소리를 내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아, 달콤한 냄새. 배 속의 허기진 짐승이 하울링을 한다. 달려들라. 달려들어 욕심을 채우라. 안구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어떻게 그런 더러운 말을 내뱉습니까. 기사가 배신을 말해서 되겠어요?”
“기사도 주군을 바꾸지.”
“왜. 몸 때문에? 나와 나눈 밤이 그렇게 좋았어요? 이거 어쩌지.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 배신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당신을 어찌 믿고요.”
달콤한 미끼였다. 반려가 되면 하리드는 저자의 것이 되겠지만, 또한 저자 역시 하리드의 것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놓을 수 없게 된다. 꼭 죽음으로서 멸망을 막아야 하나? 그런 방식도 있지 않은가. 무언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으나 욕심을 취한 짐승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괜스레 초조해진 하리드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항시 모피처럼 두르고 있던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어딘가에 두고 온 것 같다. 저이를 앞에 두면 이렇다. 가열하게 타오르는 불꽃 위의 물이라도 된 것처럼.
네가 나의 반려다.
“네가 원하는 죽음을 가져다주겠다.”
“…….”
그래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누구든.”
이대로 널 죽일 수 없으니까.
말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눈을 떴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릴 나약한 인간. 저 안에 뛰어오르는 영혼이 얼마나 가파르고 생동감이 넘치든 짐승에게 있어서는 너무 짧은 한순간의 생이다. 하루살이와 같다. 후회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 하얀 목에 이를 박아 죽여 버리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나지 않을까.
그의 죽음을 상기하자, 피를 토하는 심장의 비명이 울렸다. 눈이 뒤집힐 것이다. 하리드는 자조했다. 만약 형제나 다름없는 친우인 룩센이 르브리에를 죽인다면? 동족을 죽일 것이다. 모두 죽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를 만들었다.
“난 인정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너다.”
“난 공작입니다. 돈도 많고, 얼굴도 잘났어. 거기다 황녀 전하의 스승이지요. 가지지 못할 게 없고 이루지 못할 게 없습니다. 황제의 자리? 귀찮기만 해요.”
“너다.”
“잘 생각해 봐요.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제국을 뒤집고 싶겠습니까? 손해 볼 게 없는데 굳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부정하는 건가?”
르브리에는 코웃음을 쳤다. 어깨가 흔들린다.
“설령 반역자라도 그따위 말에 덜컹 고개를 끄덕일까. 말을 좀 상냥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요. 설명해 봐요. 설득을 해. 내가 반역자인 이유.”
“…….”
“내가 누굴 죽였습니까? 아니면 전쟁이라도 내려고 하는 움직임을 잡았어요? 그것도 아니면, 왜. 은밀히 궁의 인간들을 회유했던가요? 하하, 어이가 없군요. 뭐를. 무슨 복수? 내가 왜? 의심과 추측뿐이잖습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요.”
그가 움직였다.
“괜히 이런 자리 만들어서 날 불러냈다고.”
심해의 어둠을 미끄러지는 물고기처럼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희미하게 말린 입꼬리를 습관적으로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움직임조차 달콤하다.
“사실은 날 원한다고.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정욕에 흔들려서 내 살을 탐하길 바라는 놈들, 년들. 얼마나 많겠습니까. 당신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면 간단합니다. 혹시 압니까.”
제기랄. 욕설을 삼키며 조금씩 달아오르는 피부를 식히려 노력한다. 아아, 배가 고팠다. 바로 코앞에서 달큼하게 풍기는 체취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공기가 변한다.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며 하리드는 더욱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맛없고 퍽퍽한 당신이라도 우걱거리며 먹어 줄지.”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선명하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울렸다.
“안 그래요?”
사악한 악마처럼 제 본색을 드러내 보이는 르브리에는 딱딱한 껍질 안에 숨겨져 있던 붉은색의 과실을 떠올리게 했다. 향긋하고, 새콤하고, 씁쓸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중독시키는 맛이 있어 고개를 처박고 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런 것과 닮았다.
가느다랗게 변한 눈매가 마주치고, 르브리에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이라고 해야 할 만큼 격한 움직임이었다. 하리드는 따라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만 들었다. 역광으로 인해 검게 보이는 얼굴 속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서요. 굴복해 봐. 애원해 봐요. 기사님.”
르브리에는 황제에게 복수를 원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당하게 작위를 부여받은 귀족 도련님에 불과했으나, 룩센의 조사에 따르면 그는 황제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페르달 공작가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불탔다. 부모가 졸지에 비명횡사했으니 남은 아들이 그 원수에 대한 복수심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넌 반역자가 맞다. 네 칼이 향하는 쪽이 너무나 명확하니까.”
그런데 왜.
그 글을 읽었을 때 하리드는 갸웃했다.
왜 다른 것이 더 있는 기분일까.
“내가 황녀라도 죽이려 했답니까?”
“아니.”
“혹시 황제가 그리도 아끼는 개새끼를 몸으로 유혹이라도 해서? 손가락으로 황홀경을 보여 줘서 그 개새끼가 꼬리를 뒤흔들며 주인을 바꾸려고 난리를 피워서입니까?”
“아니.”
“그 개새끼가 하리드 브리첼, 당신 본인이라서는 아니고?”
“아니.”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은 비웃음 같기도 했고, 정말 즐거워 내뱉는 것 같기도 했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앉아 있는 하리드의 허벅지 사이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밀착하듯, 들이밀듯 파고 들어와 고개를 훅 숙인다. 윤기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얼음처럼 시야에서 흔들렸다.
“네가 발정해서는 아니고? 하리드 브리첼.”
“…아니.”
바로 코앞. 그의 눈이 있었다.
“과거. 네 부모가 죽었다. 황제의 손에.”
잠시 그의 모든 것이 멈췄다. 또렷하게 바라보며 하리드는 알고 있는 것들을 부드럽게 늘어놓았다.
“페르달 공작 부부는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틀린가?”
무거운 정적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