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사냥의 밤
밤이 운다.
또 하나, 낙엽이 졌다.
예비된 살인자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동료가 된 하얀 낯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들은 결국 단검이 되어 적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던 아름다운 이들은 노래하며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곧.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날 것이다. 위대한 그들의 왕국이 그림자의 베일을 벗어 빛나는 왕을 추대하리라.
그리고 그날, 그들의 복수도 화려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 *
“페르달 공작 부부는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틀린가?”
“…….”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하리드는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사내의 조각 같은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잔상을. 살기, 의심,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잔악함. 선명한 이목구비와 어울리지 않는 날 것의 표정이었으나, 기이하게도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하리드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말해 봐.”
째깍, 째깍.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시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인내심의 시계였다. 내면에 있는 그만의 것이었다. 이 바늘이 모두 돌아가 마지막 선을 넘게 되면 그와 자신 사이에서는 중요한 것이 끝나게 될 것이다.
무표정한 상대의 얼굴은 고요히 빛나는 진주 같다. 희고 매끄러운 낯. 그의…… 반려. 지독한 관계. 눈먼 짐승은 올라오는 쓴웃음을 삼키며 기어코 제 발로 목줄 차게 만드는 자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나는 이 순간을 지독하게 후회하겠지.’
미래를 훔쳐보지 않아도, 권능을 발휘하여 꿈속 세계로 들어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을, 그리고 너를 만난 것을. 너를 위해 종족의 계획을 뒤로 미룬 것을.’
저 요요하게 빛나는 눈을 가진 인간은 위험했다. 온갖 욕망과 감정을 뭉쳐 만든 것처럼 사악하게 빛나지 않던가. 어쩌면 멸망의 예언시는 이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
룩센이 걱정하고 우려하는 대로 자신은 멸망시의 함정 속으로 발을 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저자를 보았기 때문에. 반려를 심장에 각인시켰기 때문에.
‘이제 널 보지 않아도 난 언제나 네 생각을 떨칠 수 없겠지.’
불안감에 심장이 좀먹을 듯 발작하면서도, 유혹이 너무나 달콤했다. 저 살갗의 향기,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그리고 선명하게 빛나는 저 푸른 눈동자. 설령 저것이 한 방울에 내장을 다 태우는 극독이라 하더라도 삼킬 것이다.
그런 유혹이었다.
“너 뭐야.”
내뱉는 그 날카로운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뭔데 그리 지껄이지.”
조금씩 제 더러운 성질을 보이는 인간의 행동이 왜 귀여워 보일까. 자신도 미쳤나. 취향이 극악해졌나?
“뭐긴. 간단하지.”
하리드는 느긋하게 제 앞에 있는 인간의 뺨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매만졌다. 부드럽다. 불쾌함으로 일렁이는 인간의 눈썹을 바라보다, 피부를 응시하다, 보드라운 실처럼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희롱했다. 더 다정하고 달콤하게 애정을 속삭이고 싶었고, 동시에 이 고운 피부에 손톱으로 상처를 내고 싶었다. 저 단정한 표정을 무너뜨리고 더욱 미치고 광기 어린 낯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끔.
내가 괴물이니, 너도 괴물이 되어야지. 르브리에.
반려라는 것은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던가.
“네 말대로 나는 황제의 개지.”
“개라고 모든 정보를 알까.”
“남다른 개였으니까. 많은 것을 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아는 사람은 모두 안다. 고귀한 브리첼 가문의 공작은 사실 황제의 개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그렇게 10년. 짐승들은 머리를 숙이고 저보다 훨씬 나약한 인간의 종으로 살았다. 영광조차 없고 미래조차 없는 자리였다. 왜냐하면.
‘너를 찾기 위해서.’
하리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상황이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피 한 방울, 살점 한 점 남지 않고 찢어 죽여야 하는 멸망의 예언시를 죽이기 위해서.’
자신은 이제부터 종족을 배반하는 수장이 될지도 몰랐다.
‘오로지 너를.’
자신들을 볼 때마다 황제의 눈에 번뜩이듯 스치는 혐오와 갈망은 굉장히 웃긴 것이었다. 인간이란 무릇 모두 그런 역겨움을 동반하리라 생각했다. 나약하고 피부가 야들거리는 수만 많은 종족. 그랬는데…….
하리드 브리첼은 준비해 온 말들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황제의 충직한 개가 네가 여태껏 은밀히 숨긴 속내를 알아 놀라운 건가? 아니면 네가 숨기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이 있나?”
“…….”
“페르달 공작 부부를 살해한 것이 황제라는 것은 온전히 나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진실이라 확신한다. 너는 그들의 아들이며 아무리 외국에 있었다 하더라도 부모의 진실을 어떻게든 알게 되었겠지.”
침묵하던 인간은 한 단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황족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겠지. 어쩌면 죽은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황제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솔직한데.”
“거래니까.”
어서 웃어라, 르브리에.
그리고 그 달콤한 혓바닥을 움직여 나를 유혹해라.
그리하면 이 눈먼 짐승은 그 발등을 기꺼이 핥을 테니.
“틀린 점을 지적해 봐. 내가 모르는 것이 있나? 아니면 너의 완벽한 복수를 위해 나를 이용할 생각이 드나?”
하리드의 눈이 욱신거리며 빛나는 순간, 인간이 돌연 입술을 휘었다. 부드럽게 물을 유영하는 연어처럼 움직이며 하리드에게 손을 뻗었다. 검은 폭포와 같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듯 훑으며 두피를 흰 손가락 끝으로 긁어 올렸다. 스윽, 아름다운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 끝이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짐승의 속눈썹까지 타고 흘러내린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페르달, 그래.”
오로지 그 눈동자에 짐승은 멍하니 빠져든다.
“흥미로운 추측이긴 하네요.”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이 향기, 배고픔을 촉발하는 이 내음, 살의 향취. 시곗바늘이 돌며 점점 미쳐가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달은 내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기사님.”
끈적한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그것은 내 이름이고 내 뿌리이며 나를 둘러싼 모든 시초니까요. 하리드 브리첼, 당신의 말이 맞다면 나는 아주 은밀한 복수를 준비하는 것일 겁니다.”
웃음으로 모든 것을 숨기고, 황녀의 곁에서 신뢰를 쌓으며 그렇게 칼을 갈았을 것이다. 하리드 브리첼은 틀리냐는 듯 바라봤고 상대는 보란듯 히죽 웃었다.
“사실은 내가 이 모든 살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며, 동시에 황제의 가장 소중한 보석인 황녀를 움켜쥔 스승일 수도 있겠죠. 그런 내밀한 살인자 말입니다.”
“그게 진실이지.”
“당신의 주장이지요.”
부드럽게 웃은 르브리에가 고개를 기울였다. 회색빛 머리카락이 인간의 매끈한 귓바퀴를 살랑였다.
“하지만 말입니다. 귀족들의 세계에서 부모에 대한 사랑이 그리 간절하진 않거든요. 나 또한 다르지 않아요. 부모님은 날 사랑했겠지만 외국에서 요양하는 세월이 참 길지 않았습니까? 말만 유학이지.”
“확실히 페르달 공작 가문의 자제는 아주 오랫동안 떠나 있었지. 바로 너 말이다.”
“나열하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로군요. 네, 그게 접니다. 사교계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었지요.”
“그래서 너는 아니다?”
르브리에의 입술이 순간, 벌겋게 빛났다. 쩍 벌어져 날아드는 곤충을 꿀꺽 삼키는 파리지옥처럼 날카롭게.
“나는 계산적인 인간입니다.”
잘 다듬어진 옅은 분홍색의 손톱이 하리드의 콧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으윽, 살갗을 긁는 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경직된 광대를 간질이다가 불거진 턱의 끝을 아프게 긁어내렸다.
“현재의 이득을 버리고 기억에서 흐릿한 부모의 애정 따위를 그리워하며 질질 짜겠습니까? 위험을 자초할 리가 없죠.”
하리드는 한쪽 입술을 천천히 비틀어 올렸다. 순순히 긍정할 리가 없지.
“그리고 이상하잖아요, 기사님. 대가리가 있다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죠. 당신 말입니다. 당신이야말로 다 가졌잖아요? 그런 당신이 그런 살인자를 도와 보장된 미래를 걷어차겠다는데, 어떤 병신이 그렇구나 하고 달려들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제 손가락의 끝은 툭 불거진 목의 중앙을 꾸욱 눌렀다. 꽤 고통스러울 정도로. 피부 위를 스칠 듯 말 듯 희롱하는 손톱의 감각이 허리를 오싹하게 했다.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는 하리드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그만큼, 간절할 수도 있지.”
“설마요. 당신이?”
그래, 너에게.
“나는 사람 보는 눈은 좋은 편이거든요. 웃기지 말아요, 브리첼. 당신은 잠깐의 충동에 모든 것을 버릴 인간이 아니야.”
그랬었다, 한때는. 이제는 아니다. 하리드는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혀를 내밀었다. 까슬한 감각이 거칠어진 입술 위를 스쳤다. 푸른 눈동자가 제 붉은 살점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뜨겁게 응시하며.
그놈의 반려. 반려만 아니었다면, 벌써 저 흰 목은 잘려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그 역시 의무를 마치고 요람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뒹굴고, 섹스하고, 사냥감을 죽이고, 목을 피로 축이며 또 끝없는 날을 살아갔을 것이다. 저 반려, 르브리에만 아니었다면.
“긴말은 별로군. 그래서 너는 황제의 목을 바라는가, 아니면 바라지 않는가? 그것만 말해.”
잠긴 첫 번째 단추를 흔들듯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오려는 인간의 손가락을 꽉 움켜잡으면서, 하리드는 그르렁거렸다. 요망한 손가락.
“말해, 르뷔.”
“하.”
치고 빠지는 사냥을 하는 기분이다. 조금씩 빠르게 뛰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하리드는 상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훅, 가까워졌다. 입술과 입술이 닿을 듯이. 은밀하게 향기를 내뿜는 숨결을 삼키며 하리드는 눈썹을 올렸다. 잡은 손을 기어코 움직여 상대가 그의 입술을 미끄러지듯 꾹 눌렀다.
“손버릇이 나빠.”
“만져 달라고 핥았잖아요. 아니었습니까? 축축하게 젖어서는.”
날카로운 눈빛이 몇 초간 부딪혔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며 르브리에가 낮게 속삭였다.
“이 망할 기사님……. 내게 황제의 목을 가져오시겠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너를 옭아매기 위해서.
“조금 더 쉽게 결정할 수 있게 해 줄까, 르브리에.”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당장 이 이야기를 황제에게 갖고 간다면, 그는 그 옹졸한 성격으로 인해 어떻게든 너를 모함하려 할 거다. 밀어내고, 떨구어 죽이겠지. 그걸 원하나?”
잠시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던 인간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네가 감질나게 입술이나 매만지고 있지 않나?”
“이런, 발정난 기사님이 화가 퍽 나셨나 본데…….”
하리드는 침을 삼키며 꼭 잠긴 단추를 타고 내려오는 인간의 손가락에 앓는 소리를 흘렸다. 탄탄한 흉곽이 호흡을 따라 흔들리면, 르브리에의 뾰족한 손톱 끝에 셔츠 안에 숨겨진 살점이 닿을락 말락 간지럽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만져 주길 원해요? 그러면 황제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당신의 이 발정을 내가 마음껏 풀어 주면, 당신의 온몸을 핥고 엉덩이를 벌려 박아 주면, 성기를 뽑을 듯이 매만져 주면?”
“후우……. 그 입.”
아주 오래전, 언젠가 황제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노려보던 어린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자신의 저택을 바라보며, 새파란 시체가 된 제 부모를 바라보면서. 연약했던 어린아이는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 연약했던 어린아이가 어찌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는지.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고귀한 기사님은 협박질을 하지 않는 겁니다.”
툭, 하고 손가락의 끝이 셔츠 안의 조금씩 도드라지기 시작한 살점을 세게 퉁겼다.
“크윽.”
“이런 곳을 세우는 것도 아니에요. 젖꼭지를 세우다니…….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하면서 말이죠. 대체 무슨 야한 생각을 했을까.”
찌잉- 아찔한 아픔과 쾌감에 하리드는 입술을 피가 날 듯 꽉 깨물었다.
“그러니까, 읏, 잘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여기 만져 주길 원해요?”
“너야말로. 르뷔. 날 원하나?”
푸른 눈이 조금 더 짙어졌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심해처럼.
“……기사님을 원하냐고. 그렇게 물었습니까? 내가. 기사님의 어디를? 당신의 은밀한 구멍을? 아니면…… 이 요망한 살점을?”
르브리에는 어느새 유려하게 웃고 있었다. 아주 흥미롭고 유쾌한 유희를 즐기듯이 사악하게 미소하고 있었다.
“말해 봐요.”
“그, 만.”
“여길 누르면 쌀 것 같습니까?”
“으윽…….”
손가락과 손가락이 천천히 서로의 것을 얽었다. 셔츠 위로도 형태가 보일 듯 우뚝 선 유두를 꾹 누르고 돌리는 손가락을 그만하라는 듯 넝쿨처럼 얽었다. 허리가 굽혀지고 상체가 뒤로 물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기를 짓누르는 손가락의 힘은 더욱 세졌다.
“응하지 않으면 여길 이렇게 세운 채로, 황제 폐하께 달려가 고할 겁니까? 페르달 공작이 내 젖꼭지를 빨아 주지 않았습니다, 폐하. 그래서 당신을 배신하지 않고 다시 훌륭한 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르뷔.
“말해 보라니까.”
르브리에.
“배신의 이유가, 정말 내 성기를 처먹고 싶어서 그런 거냐고요. 오로지 그것이냔 말이야. 타락한 기사님.”
“흐읏…….”
끈적한 손길이 단추 사이로 벌어진 셔츠의 틈새를 타고 기어들어 왔다. 차갑고 서늘한 얼음 조각이 화끈하게 달구어진 피부 위를 스치듯 흠칫했다. 우악스럽게 파고 들어온 그 손가락은 결국 방금 괴롭힌 정점을 향해 닿았다. 꾸욱, 옆을 통해 이지러지는 살점의 감각에 하리드의 발가락이 훅 오므라들었다. 다리 사이가 후끈하게 뜨거워졌다.
“나를 고발할 겁니까?”
허벅지에도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인간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손톱 끝을 세워 심이 선 젖꼭지를 세게 눌렀다. 자욱이라도 낼 것처럼.
“황제의 개답게 꼬리를 흔들며 원래 주인에게 달려갈 겁니까? 내가 누구인지 고하고, 내 잘린 목을 성벽에 걸리게 만들 겁니까?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지껄이며 충직한 기사로 돌아갈 겁니까?”
아니, 반쪽으로 갈라 버릴 것처럼.
“내가 당신을 탐하지 않으면?”
머리가 진탕되는 기분이었다. 하리드는 술에 취한 것 같은 몽롱한 감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꼬리 만 개새끼처럼 다리를 들어 봐요. 내 발등이라도 핥아 봐. 날,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가득 원한다고 말해 봐요. 그러면 혹시 압니까. 당신의 질척한 구멍에 죽여 버릴 듯이 세게 박아 줄지. 울부짖으며 애원하라니까요, 기사님. 넘어가 줄지 모르잖아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자, 짐승은 쾌락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
뚫어지게 직시하는 반려의 눈길을 삼키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원하냐고? 애원하라고? 얼마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저 달콤한 살덩어리가 눈앞에 있는데, 저 매혹적인 상대가 입술을 움직이는데.
하리드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놈의 회색 머리카락을 아플 듯 움켜쥐었다. 콱. 가늘고 고운 실 같은 회색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켰다. 그 모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력적인 쾌감을 돋게 했다. 당장 저 머리를 잡아 제 다리 사이로 처박아 버리면, 어떤 기분일까.
“기꺼이 네 개가 되어 꼬리를 말아 주지. 네발로 꿇으라면 꿇고, 굴복하라면 굴복하겠다.”
“호오?”
“핥으라면 어느 곳이든 핥고, 발등을 집어삼켜 주지. 그 어디라도. 몇 번이라도. 말했다. 너와 거래하고 싶다고. 내가 거짓을 말할 것 같나?”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입술을 집어삼킬 수 있는 거리였다. 짐승의 금색 눈동자가 더 사납게 일렁였다.
한 마디 말만 해.
허락의 말만. 그러면 그 이후에는…….
여우 같은 인간은 현명했다. 불붙은 짐승의 앞에 달콤한 먹이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도록.
“기사님, 우리 이건 확실히 하죠.”
가만히 바라보자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끈적하게 속삭였다.
“박는 건 나야.”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앞이 붉게 변했다. 참고 참았던 욕구가 폭포수처럼 분출했다. 피부가 한꺼번에 달아올랐다. 하리드는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긁으며 먹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얄미운 말만 지껄인 입술을 날카로운 이로 긁었다.
서늘하고 우아한 손가락이 들뜬 짐승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잡으며 재촉하지 말라는 듯 명령했다. 뜨거운 밤이 출렁였다.
* * *
키스를 한 것인지, 입술을 씹은 것인지 모를 만큼 살이 얼얼했다. 손가락을 잘근 씹으면서 자신을 침대 위로 휙 밀어버리는 인간 남자를 바라보며, 하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셔츠를 바닥으로 던져 버리면서 바지만 입은 르브리에가 허리 옆으로 무릎을 걸치고 올라왔다.
“단번에는 재미없죠. 단계적으로 하죠.”
“뭐?”
“우리는 일곱 번의 밤을 함께하게 될 겁니다. 3일에 한 번 만나는 게 좋겠군요. 그 이상은 없습니다. 당신과의 정보 거래는 일곱 번의 날 동안,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와 잠자리하는 것도 일곱 번의 날이 될 겁니다.”
“……단계적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하나씩, 하나씩.”
르브리에는 손가락을 움직여 하리드의 긴장한 가슴 한가운데를 스윽 훑었다.
“단계적으로 가잔 뜻이죠.”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그래도 짐승은 까다로운 반려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래, 뭐가 좋을까요.”
피식 웃으면서 도발적으로 웃은 르브리에는 돌연 무릎을 벌리고 서 있는 스스로의 하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질 좋은 면으로 만든 바지 가운데에 형태가 도드라진 것을 지시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여기가 좋겠습니다.”
“…….”
“첫 번째 단계는 당신이 내 좆을 맛있게 먹는 겁니다.”
르브리에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사르르 휘었다.
“빨아 봐요, 기사님. 맛있게.”
네가 그럴 수 있겠어? 사실은 다른 속셈이 있는 건가?
“네 좆으로 널 울리란 뜻인가?”
“할 수 있다면 해 보세요.”
떠보는 그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상대가 어디까지 허용할지 시험이라도 하듯, 언제 도발에 넘어갈지 자제하듯, 이건 누가 먼저 애원하는지에 대한 게임이었다. 애원하는 자는 상대에 대한 고삐를 움켜쥐게 될 것이다.
“좋다.”
하리드는 뜨거워지는 안구를 느끼며 놈이 가리키는 곳에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느릿한 호흡, 긴장한 듯 경직되는 상대의 복부, 그것들을 숨결로 핥으며 지익 바지 사이의 지퍼를 내리며 옷감을 헤쳤다. 그러자 휙, 부끄러움도 없이 튀어나오는 성기의 자태가 아주 훌륭했다.
“……”
“왜요. 너무 커요?”
“발정난 건 너 같은데. 세울 필요도 없겠어.”
“빨기 좋잖아요?”
꽤나 굴욕적인 자세였다. 어디 해 보라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하리드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무척 커서 버거운 성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표피에 혀를 올렸다. 뜨겁다.
“후우. 너무 조심스럽잖아요……. 사내새끼 아래를 빨 자신이 없는 겁니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되잖아요?”
“그럴 리가.”
자아, 누가 승자가 될까.
하리드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그것을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목구멍에 닿을 듯이 깊숙하게. 수컷의 향이 진하게 솟아나며 생리적인 구역질이 솟구치는 것을 혀를 내리눌러 참으며 조금씩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혀를 스치는 수컷의 단단함이 허리를 자르르 떨리게 했다.
“하아, 그래요. 의외로 재능이 있는가 봅니다.”
습한 타액에 닿아 젖은 살갗이 쭈욱 쭉 빨리는 소리, 상대의 나른한 한숨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후우, 후. 잘, 하고 있어요.”
“으응…….”
“그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리고 별 맛 없을 상대의 살덩어리가 왜 그렇게 달게 느껴지는 것인지. 타액이 솟았다. 갈증이 치솟는다. 조금씩 빨아들이는 소리가 격해졌다. 쭈웁. 쭈압. 뽑아 먹을 듯이 하리드는 그가 물고 있는 것에 집중했다. 뜨겁고 단단한 것을 목구멍까지 처박을 기세로.
“후우, 윽, 읍.”
“이렇게 게걸스럽게, 핥고 말이야. 누가 보면 내 페니스가 아니라, 맛있는 것을 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응?”
“읏, 읍. 윽…….”
쩌억, 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쭈웁, 쭙.
어느새 이성은 사라졌다. 혀를 움직이려 애쓰며 그 커다란 것을 문지르고 핥으며 훑었다. 뭉툭한 끝부분을 혀로 뭉근하게 핥다가, 다시 전체를 입에 넣고 흔들었다. 습하게 새어 나오는 것들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목마른 사막의 방랑자가 물속에 머리를 처박듯 하리드는 게걸스럽게 핥았다.
“핥지만 말고, 조여요.”
두껍게 일어선 기둥을 받치듯 움켜쥐며 목구멍으로 조이고 삼켰다. 다 들어가지 않는 길이에 욕설을 짓씹다. 손가락으로 표피에 선 핏줄을 긁어내렸다.
윽, 소리를 내며 상대가 그의 머리카락을 뽑을 듯이 움켜쥐었다.
“요망하게.”
그리고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격하게 머리를 잡고 아래를 처박기 시작했다.
퍽, 퍼억, 퍽!
“우, 읏…… 윽!”
“하아, 하. 싸도 됩니까, 브리첼? 당신의 입 안에?”
“흐으, 으, 으…… 응……읏.”
“삼켜요. 당신이 재촉한 거니까.”
마치 구멍을 파고들어 욱여넣는 것처럼 입으로 섹스하는 기분이었다. 마구잡이로 처박는 귀두가 뜨끈했다. 뺨의 여린 피부를 긁고 목구멍을 두드리고, 혀의 표면을 훑으며 희롱했다. 끈적끈적한 액이 입 안을 천천히 적시고, 씁쓰레한 액체가 목구멍에 가득 내리꽂힐 때까지.
“큭!”
“잘했어요.”
콜록거리며 치솟는 기침을 꾹 내리누르며 상대가 목덜미 뒤를 뜨끈하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나른하게 속삭였다. 잘했어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며 르브리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턱이 얼얼했다. 뒤늦게 은근한 수치심도 치밀었다. 정말 말 잘 듣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입 안 가득 퍼진 그 불쾌한 맛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가느다랗게 접히는 르브리에의 눈빛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고 싶었던 짐승의 욕구를 재촉했다. 정말 도망칠 건가? 당신이 먼저 판을 벌여놓고? 그렇게.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몇 번이나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은데, 그것도 참아 줄 건가요, 기사님?”
그놈의 기사님. 얼굴을 구기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방금 파정해 놓고 다시금 기운차게 일어서는 놈의 잘생긴 살덩어리를 바라보며 하리드는 고개를 느릿하게 숙였다. 입을 벌렸다.
“정보 없이 내 몸을 내주는 건 이번 한 번뿐입니다. 두 번째 밤부터는 정당한 거래를 하지요. 당신은 정보를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는 겁니다, 기사님. 그러면 나는 당신이 내 몸을 탐하게 해 줄게요. 울면서 당신이 애원한다면, 당신을 밤새 안아 주겠습니다.”
퍼억, 뜨거운 성기를 목구멍에 바로 처박으며, 놈이 예쁘게 지껄였다. 놈의 손에 숙인 목덜미가 강하게 잡혔다.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집중하라는 듯 차가운 손길이다.
“하지만 명심해요. 내게 줄 정보가 쓸데없다면 일곱 번도 채우지 못할 거예요. 아무리 오늘처럼 혀를 잘 놀려도 소용없어요. 자아, 더 깊게 빨아 봐요. 오늘 잘하면 한 번쯤 당신의 것도 맛있게 핥아 줄 테니까.”
그렇게 첫 번째의 밤, 하리드 브리첼은 입술이 부르트도록 놈의 달콤한 성기를 빨고 또 빨아야 했다. 나중에는 침에서 정액 맛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개처럼 기어 그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핥았다. 빨았다. 삼켰다. 그의 정액을, 지칠지도 모르고 계속 솟구치는 성기를.
해가 뜰 때까지. 얄미운 얼굴로 ‘혀 놀림이 능숙하지 않으니 오늘 당신의 것은 빨아 주지 않겠습니다.’, ‘다음에 분발하세요.’ 그리 지껄이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을 때까지.
첫 번째 밤은 명백히 르브리에의 승리였다.
* * *
짐승은 회복력이 빠르다. 감각조차 없어야 맞을진대, 왜 자꾸 입 안에서 텁텁한 맛이 나는 것 같을까. 목구멍으로 침을 넘길 때마다 왜 아릿한 것 같지?
‘영악한 놈. 절대 순순히 넘어오지는 않겠다는 거겠지.’
하리드는 입술을 매만지며 그 인간을 떠올렸다. 간악했던 그 웃음, 결국 저만 실컷 놈의 성기를 빨며 봉사했던 지난밤을. 영악한 놈이었다. 물고 빠는 것만 허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값어치를 귀하게 매길 줄 알았다. 하나씩, 하나씩. 한 번에 몰아치면 흥미가 떨어질까 밀고 당기는 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다음에 만나게 될 날, 하리드는 기어코 그놈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대체 그놈의 어느 부위를 맛있게 먹어치우길 원해야 할지. 어떤 정보를 주어야 할지. 그리고 두 번째 날에는 르브리에에게 어떤 요구를 해야 할지.
‘당신이 원해 수락된 거래인 걸 꼭 기억하죠, 브리첼.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빌어먹을 거친 태도는 접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까?’
시작한 건 자신이었는데, 왜 말려드는 기분이지.
‘당신은 정보를 갖고 와요. 그때부터 당신에게 봉사해 줄 테니까.’
‘다음 약속이나 잘 기억해라.’
‘왜 재촉입니까. 그렇게 엉덩이가 간지러워요? 안달이 났군.’
‘그 잘난 입만큼 침대 위에서 잘 날뛸지 궁금할 뿐이군. 기대하지.’
‘오, 이런. 누가 나가떨어지는지 내기라도 할까요? 내 손가락에 질질 짠 게 누구시더라.’
그래. 조금씩, 조금씩. 물이 스미는 것처럼 인간인 그에게도 반려의 충동을 자각시켜야 했다. 타액을 흡수하고 접촉이 깊어지면 분명히 르브리에도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타는 듯한 갈증을 그도 느끼게 해야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얽매일 수 있도록.
그런데도 왜일까.
그런데도 왜 이렇게 중요한 뭔가를 놓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지.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것처럼.
하리드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현재 황궁 복도에 서 있었다. 마침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드니 청명한 하늘이 보였다. 시원한 공기, 그리고 힐끗거리며 지나치는 궁인들의 모습. 평소와 다르지 않은 황궁의 풍경이었다. 다를 것이 하나 있다면.
“고, 공작?”
바로 저 여자.
상념은 안개처럼 자취를 감췄다. 굉장히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그 뒤로 불안한 표정의 시녀 둘도 자리했다. 두 손을 꼭 잡은 채 열렬히 바라보는 여자는 분명 황녀였다.
“예, 황녀 전하.”
“조, 좋은 아침이에요.”
“날씨는 맑군요.”
인간의 예절에 둔한 하리드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대화가 굉장히 무례했다는 것을. 정확히 황녀의 입장에서. 시녀들의 얼굴에 오묘한 분노가 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하리드는 황녀에게 다정히 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황녀와 가까워진다면 황제는 두 팔 벌려 그녀와 자신을 결혼시키려 하리라.
“용건을 알고 싶습니다만, 황녀 전하.”
인간이 자신에게 보내는 눈빛 하나 읽지 못한다면 짐승의 수장을 맡을 수 있었을까. 반짝이는 저 보라색 눈동자에 스민 것이 이성에 대한 기대였다. 그리고 탄식했다. 황녀는 아무래도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취향 한번 고약하군.’
다정히 대한 적도, 대화를 제대로 나눈 적도 없는 상대의 무엇을 보고.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반려도 아닌 저 인간이 자신의 무엇에 반했단 말일까. 겉모습에? 아니면 그가 쌓은 업적에?
“이른 시간에 불러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그래도 와 줘서 고마워요.”
“전하, 전 일정이 많이 밀려 있습니다. 용건부터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으음…….”
황녀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하지만 일정이 많은 건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황제가 돌연 급작스러운 일거리와 참가해야 할 많은 파티 초대장들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룩센은 쌍욕을 했고, 하리드 역시 간밤의 일로 찌뿌둥한 상태였었다. 귀찮은 인간들.
“부, 부, 부탁이 있어요. 공작!”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른 황녀의 목소리가 궁의 복도를 메아리치듯 울렸다.
“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생각에 빠지려던 하리드의 시선이 황녀를 그때서야 제대로 바라봤다. 당장 도망가고 싶다는 얼굴을 한 주제에, 인간 여자의 눈은 제법 고집스럽게 빛났다.
그리고.
‘……닮았군.’
그건 참 이상한 자각이었다. 누구도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두 사람. 황녀와 그 남자. 그런데 왜인지 하리드는 두 사람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어쩌면 시간을 오래 함께한 스승과 제자이기 때문일까?
‘그래. 분명히 르브리에와 닮았어, 이 여자.’
그래서였다. 상대하지 않으려 했던 인간에게 대답하고 말았던 것은.
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 눈동자가 순간 너무나 그 남자와 닮아 보였기 때문에. 어젯밤, 고양이 앞에 먹이 흔드는 인간처럼 사악하게 굴었던 그 짜증 나는 반려와.
“무엇입니까.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아?”
“부탁 말입니다.”
“정말요?”
황녀는 기쁨과 기대를 한껏 담아 눈을 빛냈다. 룩센이 곁에 있었다면 한숨 쉬었을지 모르는 일이나, 그 남자와 닮았다는 자각을 하고 나니 마냥 잔인하게 굴기가 힘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하게도.
하리드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저 작은 여자가 얼마나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식사 한번, 혹은 파티에 파트너로 참석하자는 것 정도이지 않을까 했다.
“웬만하면……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황녀였고, 그 황제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르브리에의 제자였다.
황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럭 외쳤다.
“공작, 내 검술 스승이 되어 주세요!”
생각하지도 못한 그 말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리드는 답지 않게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고, 황녀는 눈을 빛내며 농담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황당한 요구에 천하의 하리드도 몇 초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검술 스승이라니. 이 여자가 미쳤나.
* * *
“그게 무슨 개소리야?”
룩센은 날카롭게 외치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그 똥 씹은 표정은 사실 하리드가 짓고 싶은 것이었다.
황녀의 그 기막힌 요구에 가만히 있으니, 그 작은 여자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무척 기쁜 어조로 빠르게 고맙다고 중얼거린 뒤 쏜살같이 뛰어가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생각했을 때,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황제의 시종들이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황제와 황녀가 짜고 친 거였다. 황녀에게 두 명의 스승이 동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 반박했더니 검술에 뛰어나지 않는 페르달 공작의 특이점을 고려해 두 명의 스승을 허한다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다. 정말 개소리였다.
그리고 마치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느긋하게 나타난 제 요망한 반려는 즐겁다는 듯 속삭였다. 스쳐 지나가듯 가까워졌을 때, 하리드에게만 들릴 정도로 은밀하게.
‘나는 이미 허락했습니다. 낮에도 자주 보겠군요, 브리첼. 바보처럼 아는 척하지 말고.’
귓가가 간지러웠다. 솜털이 바짝 서는 것처럼.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는 룩센의 주먹질이 아니었다면 머저리같이 그 순간에 잠겨 있을 뻔했다. 하리드는 순식간에 뜨거워진 손바닥을 민망하다는 듯 문질렀다.
룩센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밤에도 그 거래인지 뭔지 하며 반려 새끼 만나는 판국에, 낮에도 황녀를 사이에 두고 둘이 계속 만나게 된다 이 소리잖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별문제는 없을 거다.”
“허어?”
룩센의 눈이 화살처럼 솟구쳤다.
“그렇게 되었다아? 야! 하리드, 제발 수장님아.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 같아? 일단 반려 사이에 흐를 그 끈적한 분위기를 황녀가 눈치채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그리고 정말 너랑 황녀랑 담백한 스승과 제자 관계가 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문제가 있지?”
룩센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황녀의 스승이 어떤 자리냐. 언제부터 황족이 그렇게 학구열이 넘쳤는데? 그건 그냥 수업을 빙자해서 서로 계속 만나게 하는 자리라는 거 알잖아. 황녀의 스승은 훗날 황녀의 남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리라고! 널 거기다 밀어붙인다는 게 어떤 수작질인지 몰라?”
“……남편.”
“그래!”
하리드의 손가락이 우뚝 굳었다. 자각하고 있었지만 타인의 입에서 적나라하게 들으니 기분이 굉장히 저조해졌다. 그러니까, 황녀의 스승. 그 자리의 의미. 거기에 있는 르브리에.
하리드는 미간을 좁히며 룩센의 말을 짓씹다가 불쑥 물었다.
“그렇다면 르브리에는 황녀의 결혼 상대가 되고 싶어 한단 건가? 그가 원해서 그 자리에 앉았으니. 진심으로.”
“…….”
잠시 숨을 쉬는 것을 잊고 굳어버렸던 짐승의 이인자는 배신당한 자의 표정으로 제 수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수장님아.”
“진심이었나, 그게? 그렇다면 불쾌할 것 같은데.”
“지금 묻고 싶은 게 정말 그거냐, 수장님……?”
또한 짐승들의 참모는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리드 브리첼이 누구인가. 제 친구가 어떤 녀석인가. 더없이 잘 알았던 수장이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정말 저 거래가 수장이 인간을 휘어잡기 위한 거래가 맞나? 밤에 만나 서로 몸을 섞는 게 오히려 수장을 위험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룩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참하게도 돌릴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리드는 한번 고집을 부리면 끝까지 해치우는 놈이고, 자신들은 수장의 충직한 신하들이다. 제발, 그 인간이, 멸망의 예언시의 인간이 헛수작을 부리는 무시무시한 놈이 아니기를.
룩센은 간절히 빌었다.
* * *
뜨겁다. 머리가 멍했다. 하리드는 들뜬 공기를 흡입하며 감각을 인식했다.
동시에 자각한 것은 입술에 닿아 오는 마치 핥는 듯한 시선이었다. 후끈 하고 피부 위에 끈적하고 뜨거운 열기가 퍼진다. 멍하니 바라보니 무언가를 달싹이는 상대의 입술은 보기 좋은 붉은색이었다. 달려들어 한입 깨물면 짓이겨진 꽃의 향기가 퍼져 나갈 것이다.
‘장미.’
왜 그 순간, 화려하게 꽃핀 장미가 생각이 났을까. 무척이나 희고 부드러운 생김의 인간이었는데도 흐드러지게 펴 매혹적인 향을 풍기는 붉은색의 꽃무덤이 떠올랐다. 그 색이 잘 어울렸다.
눈앞의 남자는 부드럽게 속삭인다. 휘어지는 눈매가 유혹적이었다. 노래하듯 내뱉는 음색은 짙은 심해 속, 매끄러운 육체를 지닌 인어를 연상시킨다. 매혹이다.
-하리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멍한데.
아아, 그 순간 깨달았다. 먹먹한 공간의 감각, 익숙했다. 어느새 이능이 발휘된 것인가. 이건 꿈인 것이다. 현재의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도 모를 미래인가 혹은 간절한 자신의 바람인가.
상대가 바람처럼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다. 무척 부드러운 손길이 아찔했다. 숨을 내쉬자 또 가느다랗게 웃는다.
-하리드, 어제 기억해?
-무엇을?
-아래가 빠질 만큼 격렬했는데. 또 그런 말끔한 얼굴을 하고. 역시 야속한 회복력이군. 어떻게 하면 네 피부 위에 내 흔적을 새길까.
상대는 손을 뻗으며 흐드러지게 눈웃음을 흘렸다. 마른침이 꿀꺽이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손끝이 닿는 곳곳마다 열꽃이 퍼지는 기분이었다. 간지럽고, 기이한 반응이 몸을 내달렸다.
-왜. 어디가 반응했나?
안달이 난 것 같은 제 몸 상태를 알아챘는지, 느릿하게 귓불을 매만지는 상대의 손은 예상만큼이나 부드러웠다. 내밀한 속삭임이 후끈했다. 상대는 다 아는 것 같았다. 마치 잘근거리며 조여드는 제 엉덩이 사이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보지 마, 하리드.
그 친근한 손짓에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얇은 옷자락 한 겹에 가려진 피부 위에 식은땀이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애가 탔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서서히 서는 유두의 끝이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쥐어짜듯 매만져 줬으면, 잘근거리며 깨물어 줬으면.
-어제 네가 그리도 애원했지. 그런 눈으로. 날 미치게 만들려고 두 다리를 활짝 벌리면서 더, 더 박아 달라고.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
그러나 초조함으로 바싹 마른 입술은 상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움이 생소하여, 스스로를 관찰하듯 돌아본다.
-하리드, 지금 여기서 널 먹으면 어찌 될까? 원하나?
괜찮다는 듯 달래는 손길은 이제 귓불에서부터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아니, 느릿하고 음습한 손길이다. 천천히, 천천히 살갗을 타고 미끄러지는 빗방울이라도 된 것처럼 흘러내렸다. 그 손끝은 명백히 욕망을 담고 피부를 희롱했다. 습한 손길이 끈적하게 선을 그렸다.
툭, 옷자락이 벌어졌다. 벌어진 옷깃 사이, 날것이 된 가슴팍의 오뚝 선 돌기를 잔인하게 짓누르며 남자는 꽃처럼 웃으며 명령했다. 열꽃이 심장 위로 확 퍼져 나갔다. 달뜬 숨이 헐떡거리며 목을 조였다.
남자가 웃는다.
-하리드 브리첼. 단 한 순간도 거부하지 마. 알았나?
시선을 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남자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흉흉했고, 짐승의 것처럼 흉포했다.
-기억해. 넌 나의 것이다.
-윽.
남자의 손끝이 짓누르던 돌기를 거세게 잡아 뒤틀었다. 아릿한 아픔이 찌릿하게 울렸다.
-나의 짐승, 나의 늑대.
* * *
하리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쑥 솟아 있는 성기가 제 존재감을 뚜렷하게 과시했다. 빌어먹을. 하리드는 신경질적인 움직임으로 고개를 침대 위로 털썩 내렸다. 베개의 흰 먼지가 펄럭이며 솟구쳤다.
“……요사스럽긴.”
쓸데없이 야하지 않은가. 목덜미를 조금 매만진 것만으로도 꿈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잔뜩 발기해 버리고 말았다. 하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혼란스럽다. 그 다정한 웃음, 미소, 그리고 친근했던 그와 자신.
이게 꿈이라고 하기에는 기억과 자극이 뚜렷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선명했고, 미래시라고 하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곳은 요람도, 공작저도, 그와 자신이 만나기로 한 장소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자신이 너무 허물없어 보였다.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하아.”
푸르스름한 새벽의 공기가 피부 위를 축축하게 적신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을 고요한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애타는 듯 들끓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얼굴을 덮고 탄식한다.
아아, 본능이 속삭인다. 아쉽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게 미래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가관이군.”
두꺼운 손등 위로는 굵직한 혈관이 뚜렷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며 일어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날 선 짐승의 것. 치미는 감각은 배 속을 가득 울리는 식욕이었다. 텅텅 빈 내장을 꽉 채워 넣기 위해 언제든 날카로운 이빨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냥꾼은 마른침을 삼켰다.
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하아.”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팠다. 당장 입을 벌려 그 부드러운 살갗을 우악스럽게 뜯어먹을 수 있다면 아주 황홀할 것이다. 배 속 가득 퍼지는 달콤함은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흥분으로 눈물이 아롱진 인간의 얼굴을 보며 허벅지를 한껏 베어 물면 자지러지는 그 육체를 보며 토정할 것이다.
‘제기랄, 안 돼.’
타고난 본능이란 이다지도 무섭다. 잔인한 생각들이 정욕과 식욕과 버무려져 끝도 없이 퍼져 나갈 판이다. 제법 스스로를 다스릴 나이가 되었는데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은 짙은 음영을 만들어 내었다. 쿵덕거리면서 갈비뼈를 부술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철모르는 어린 것이 된 기분이다.
‘그 살내음.’
짐승의 것과 닮은 눈동자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번뜩이는 금속성의 빛이 잔인함을 머금고 날을 세운다. 들썩이는 하리드의 흉곽은 두껍고 단단했으며, 근육이 생동감 있게 펄떡이는 어깨는 바위처럼 넓고 강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사냥한 지가… 벌써 한 달인가. 그래, 벌써 사냥을 나갈 때가 되었어. 아슬아슬해.”
한순간의 환상, 혹은 기억을 떠올리는 몽롱한 눈빛은 명확히 욕망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되새기다, 으르렁거리듯 낮게 절망했다.
그와 자신이 그렇게 다정한 시간을 가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미래의 그 어느 순간에도.
반려는…… 그렇게 달콤한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자유를 속박당한 그 인간이 어떻게 돌변할지는, 뻔했다.
목줄 매인 것을 좋아하는 짐승이 어디 있겠는가. 그를 보며 황홀한 감각에 젖어 드는 자신마저도 심장을 쥐어뜯고 싶은 자조가 이렇게 스미는데.
하리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황궁의 또 다른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 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넘겨주기 위한 훌륭한 정보를 골랐고 상대는 만족스럽게 웃을 것이다.
그 인간. 은밀한 거래를 주고받고 있는 남자, 황녀의 스승, 그리고 자신을 하루하루 미치게 만들고 있는 반려 르브리에를.
* * *
수정구를 매만지고 있던 주름진 노파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짐승, 노화의 세월마저도 건너뛸 정도로 아득한 시간을 보내왔다. 이제 마지막의 마지막, 종족의 위대한 수장을 위해 제 영혼과 몸을 바쳐 시간의 비밀을 캐내었건만.
수장이시여.
수정구 가득 찬 붉은 기운은 그들 수장의 것이다.
젊고, 용맹하고, 또한 아름다운 그들의 수컷.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진정하지 못하고 노파는 신음성을 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언제나 뜨겁게 치솟아 오르는 붉은 기운이 무척이나 불안정했다. 흐트러져서는 안 될 용오름과 같은 기세가 주춤, 주춤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체 누가?
대체 누가 수장을 뒤흔든단 말인가?
인간 세계로 외유를 나가는 그 순간부터 이쪽 세계와는 완벽히 단절된다. 그것이 이리도 개탄스러울 수가 없다. 그때, 음습한 밤의 짐승의 발걸음처럼, 순식간에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노파는 눈을 깜박였다.
“부르셨습니까.”
“비아드, 네가 가장 발이 빠른 자인가.”
“예, 예언가이시여.”
노파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수장을 뵈러 가야겠다. 붉은 밤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고 동시에 그분을 둘러싼 운명의 불운이 심상치 않으니, 필시 수장께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터. 내 경고를 네가 전해 주어야겠다. 조속히 일을 마무리 지으시고 돌아오시라고. 혹여라도 수장께서 듣지 않으신다면…….”
“그러면 어찌합니까?”
냉정한 젊은 청년을 바라보며 노파는 주름진 입술을 와득 깨물었다.
수장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다. 그가 명령하면 그들은 오로지 고개를 숙이고 따라야 했다. 저 젊고 어린 것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령 이 종족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이제 곧 붉은 달의 시기가 온다. 수장은 반드시, 붉은 달의 광기가 종족을 삼키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룩센이더라도 말릴 수 없다. 노파는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는 수많은 갈래로 흐른다. 그녀조차도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지 옳을 수 없다. 까마득한 방법 중 그녀가 보았던 것이 최선이라 가정할 뿐, 그 오만조차 어쩌면 실수일지도 몰랐지만.
“이것을 전하라.”
“이게 무엇입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청년의 동공은 길쭉하게 찢어져 있었다. 그것은 검이었다. 하지만 검붉은 문양과 눈동자 모양의 장식이 꽤나 불길한 것이었다.
“전하라면 아실 것이다. 분명, 아실 테지.”
“예?”
“전하기만 해라.”
무리의 본능대로 불쾌감에 일그러지는 청년의 얼굴이 이해가 갔다.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노파 역시 불쾌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혹은 관계성의 굴레라는 것은 이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으나 결국에는 마주했으니 수장은 제 ‘반려’의 굴레에 얽매였다. 강제로 떼어 낼 수밖에 없다.
하리드 브리첼은 아주 훌륭한 수장이었으니, 그 책임을 방기하지 않으리라. 이 검을 보며 떠올릴 수 있으리라. 선택의 때,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리라.
이때 노파가 알지 못했었던 것은, 반려의 강력함이었다. 그 관계의 애절함이었다. 미래의 예언시조차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몰랐다. 노파조차 다른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무리의 하나였기 때문에.
끼긱, 그렇게 운명의 실이 흔들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종족의 파멸과 또한 한 종족의 시작을.
* * *
“어머, 어머. 정말 그러셨어요?”
“페르달 공작께서는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외모면 외모, 재력이면 재력, 거기다가 젊은 나이에도 수장이 되셔서 공작가를 거뜬히 이끄시는 능력까지.”
일행의 가운데에 서 있던 미려한 외모의 남자가 살포시 웃음을 지으며 그만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 한번에도 따사로운 향기라도 난다는 양, 모두의 눈이 황홀하게 풀어지는 모습은 마치 단체로 마법에라도 걸린 듯했다.
부드러운 푸른색 눈동자, 결 좋은 회색 머리카락, 그리고 아름다운 흰 얼굴을 지닌 천사 같은 외양의 남자는 온화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는 꼭 우아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백마를 떠올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이런, 여러분께서는 저를 너무 띄워 주시는군요. 부끄럽게도 말입니다. 어디 숨어야 하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하는 걸까요?”
남자의 농담에 큰 웃음이 부드럽게 번진다. 그 웃음소리에는 상대에 대한 호의가 듬뿍 담겨 있었다.
“어머나, 무슨 겸손을. 너도나도 페르달 공작가에 청혼서를 보낸다고 하던데요.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훌륭한 상대이신걸요.”
“허어, 그게 정말입니까?”
“아유, 그럴 만도 하지요. 이렇게 아름답고 멋지신 분인걸요. 과연 어느 분이 데려가시려나.”
“또 금칠을 해 주시는 겁니까, 여러분. 이제 쥐구멍에 정말 숨겠습니다.”
남자는 화려한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군중 속에 아름다운 백조처럼 주변을 매혹하고 있었다. 달콤하게 이어지는 화려한 언변과 귀공자 같은 화려한 미모에 벌떼처럼 모여든 영식과 영애들은 감탄사를 흘리며 그를 관찰했다. 혹은 매혹당한 포로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남자가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넘기자, 몇몇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마치 달려들어 핥고 싶다는 것처럼 위험한 시선들도 몇 섞여 있었다.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윽한 목소리는 매끄러웠고 낮았으나 동시에 힘이 있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실제로 들어온 제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후후, 다 헛소문이지요. 원래 그런 이야기들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부정하는 그에게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영애 한 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 없다는 은밀한 미소를 띤 채로.
“어머나……. 혹시 각하께서 결혼 생각이 없으신 것은?”
남자, 르브리에는 빙긋 미소하며 떠보는 물음에 화답했다.
“결혼이라. 그것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상대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든 공작 각하의 청을 거절하겠어요? 혹, 이미 마음에 담은 분이 있으신 것은?”
“흐음…….”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의 결혼!
순식간에 집중되는 시선이 찌릿할 정도다. 르브리에는 꼭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작위적인 곤란함으로 팔짱을 풀었다. 싱긋 웃는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한 붉은 머리의 여인의 눈에 아찔함이 깃들었다.
“글쎄요. 진지하게 물으시니 답을 하자면, 사실 결혼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에 대한 환상은 저도 갖고 있지요. 결혼이라…….”
저를 바라보는 눈들에 하나하나 맞추며, 누구 하나 허술하게 대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 숙여 대답해 주는 모습은 가히 감동에 가깝다.
페르달 공작의 위치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주로 백작가의 핏줄이 그의 옆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 모습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감히 공작 각하께 백작가의 자제들이 저 무슨 무례란 말인가, 하고. 그러나 그 군중 속에 묻힌 꽃 같은 남자가 부러 벌을 꿰는 꿀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 달콤한 목소리에 꾀여진 이들이 도리어 불쌍한 이들이라는 것을. 그는 독을 숨긴 여왕벌에 가까웠다.
“저어, 듣기로는 황녀 전하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시라고…….”
우물쭈물하면서 나선 이의 물음에 주변 사람들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교계에서 누군가의 관계에 대해 캐묻는 것은 지나친 무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문일 경우에는 더더욱.
“이런! 자네 무슨 무례한 질문을 하는 건가?”
“맞아요. 어휴, 제 낯이 다 붉어지네요. 이곳이 어디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의 없기는. 쯧쯧. 저이 이름이 무어라 했지? 경솔하군!”
불쑥, 무례할 수 있는 말을 꺼낸 것은 얼굴이 희멀건 백작가의 자제였다. 소년이라 해야 마땅할 그의 시선은 열망에 가까운 것으로 탐미하듯 페르달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탓하는 그 목소리들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간절한 열망.
다 같이 쏘아붙이는 면박에 얼굴이 빨갛게 변했지만, 놀랍게도 물러나진 않았다. 간절함을 가득 담고 두 손을 꼭 쥐며 바라본다.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 그렇게 애원하듯. 열렬한 신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푹 빠졌군. 누군가가 빈정거렸지만 공작은 화사하게 미소하며 손짓했다. 기도하는 어린 양을 보듬어 주는 여신의 따스함처럼.
“이런, 저는 괜찮습니다. 제게 보내 주시는 관심이 감사할 뿐이지요. 먼저 영식께 대답을 드리고자 한다면, 확실히 저는 황녀 전하의 스승이니 다른 이들보다 가까운 사이는 맞을 겁니다.”
“아!”
“……하지만.”
오해는 허하지 않겠다는 듯 내뱉는 음성은 꽤 단호했다.
“이것만은 확언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황녀 전하께 그런 상대가 될 일은 없을 듯하다는 것을. 한데… 그대는 소멜 백작가의 아시스 영식이 맞습니까? 혹 실례했다면.”
말을 꺼냈던 앳된 영식이 화들짝 놀라 부르르 떨었다. 감격의 시선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아시스입니다. 절, 절 기억해 주셨군요, 각하. 정말, 정말 기쁠 따름이에요.”
제국에는 두 공작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제의 바로 아래의 권력을 지닌 이 귀족파의 수장들은 미혼이었으며, 젊은 남자였고, 무척이나 잘나고 멋진 수컷이기까지 했다. 이 무슨 기적과 같은 우연이란 말인가!
거기다 색다른 매력은 고르는 맛도 있었다. 한 명은 묵직하고 섹시한 수컷의 향기를 진하게 풍겼고, 다른 한 명은 화려한 이목구비와 찬미적일 정도로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녔다.
‘공작과 반드시.’
‘반드시 가문의 연을 맺어야 해.’
귀족 사회는 그 아름다운 혜성들에 두 손 들어 열광했다. 서글프게도 그 아름다운 혜성들이 눈곱만큼도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 페르달 공작의 결혼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달은 황제도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으며, 그 가문의 수장은 무척이나 젊고 또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번 본 자는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성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이다.
‘호오.’
‘페르달 공작이 결혼 이야기를?’
펄럭이며 부채를 흔들던 노부인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젊은 사람끼리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듯 점잖게 물러나 있던 나이 지긋한 귀족들이 조금씩 발걸음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웃고 있던 남자의 푸른 눈동자에 잠시 날카로운 예기가 스쳐 지나갔음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는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쉽게도 황녀 전하께서는 흠모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는 듯하므로, 제가 물러나야 했지만.”
그리고 남자의 눈은 어느 곳을 빠르게 훑었다.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색을, 긴장된 듯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기 시작한 징조는 흰 장갑 아래로 감춘 채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황녀 전하를 본받아 이번 해에는 제 아름다운 연인을 찾아볼 계획입니다. 사랑이란 무척이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그, 그 말씀은……!”
“설마 결혼을?”
“악! 상대, 상대는 누구인가요?”
“설마 벌써 혼약자가 있으신 건가요?”
그의 주변에 먹이를 기다리는 어린 새처럼 서 있던 영식과 영애들의 얼굴에 환한 홍조, 숨기지 못한 흥분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은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인지, 연인이 된다는 공작 앞에 모두가 한껏 기대를 가지는 모습이었다. 나를 선택해 주시지 않을까? 그런 우연이 일어나지 않을까?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공작의 시선을 받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으리라.
“후후, 그렇군요. 그 운명의 상대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실 분이 계실지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만?”
누군가가 꺄악, 비명을 질렀다. 환희에 가까운 것이었다. 저 아름다운 천사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그게 대체 누가 될 것인가! 번뜩이는 눈동자들은 주변의 이들을 훑었다. 가히 자신의 영토를 빼앗길까 경계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그리고 주변을 한껏 달아오르게 만든 회색 머리카락의 미남자는 점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고요히 주변의 길을 터 주는 모습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인파의 끝에 비추는 얼굴은 예상과 같다.
‘기사님.’
남자는 고요히 웃었다.
한편, 그 가증스러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하리드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연기를 잘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어젯밤 자신의 성기를 내보인 채로 잘 빨아 보라고 명령하며 입에 처박던 남자와 동일인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 미소가 얼마나 결백해 보이는지.
‘가증스럽군.’
거기다 저 모습은 또 무엇인가. 화려한 공작새라도 된 것처럼, 주변을 죄다 홀릴 기세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날카로운 짜증이 솟구쳤다. 당장 걸어가 르브리에의 곁에 붙어 있는 인간들을 날파리 쳐내듯 후려치고 싶었지만…….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했다.
‘화났어요?’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눈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 이 연회만 끝나면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놈을 끌고 갈 것이다.
그때, 절로 흉흉해지려는 분위기가 퍼뜩 깨져 나갔다. 호들갑을 떠는 주변 이들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느릿하게, 무척이나 느릿한 움직임으로 하리드는 눈을 깜빡이며 이성을 되찾았다.
이곳은 황궁이고,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되새기며.
젊은 귀부인들이 부채를 살랑이며 바쁘게 대화를 나누었다.
“웬일이야. 정말 브리첼 공작 각하잖아요? 혹시… 오늘 무슨 날인가요? 두 공작 각하께서 연회에 참석하시다니.”
“그러게요. 얼굴을 잘 비추지 않으시는 분일 텐데.”
“하아, 무슨 상관이에요. 저렇게 멋지신데. 한번 저 넓은 가슴에 안겨 봤으면 소원이 없겠건만. 너무 멋지지 않나요? 뱃살 뒤룩뒤룩 찐 약혼자를 보다 저분을 보면, 아휴. 침대에서 부서져라 안기고 싶어요. 흐읏.”
“어머, 어머. 망측해라. 대체 무슨 소리예요?”
“흥! 무슨 내숭을.”
“그보다는 잠자리와 거리 먼 것으로 유명하시잖아요? 평생 안길 일 없을 텐데. 정식 성혼을 한다면야 모르지만. 제 사람에게는 끔찍하게 잘하기로 유명하시잖아요. 부인에게도 마찬가지겠죠.”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이신 거지요? 설마, 황궁과 무슨 일이?”
“소문에, 황녀 전하께서 브리첼 공작과 약혼식을 치른다는 말이 있던데. 설마 그게 사실인 걸까요? 맞다면 황족과의 인연이 더욱 끈끈해지겠어요.”
미치겠군. 뚜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흘려내며 하리드는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저 말들보다 더 짐승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고 있는 주제에, 이상하게 날카로운 르브리에의 눈빛이었다.
방금까지 인간들 사이에서 살랑이며 웃고 있던 건 본인이었으면서. 하, 진정 어이가 없었다.
그때 황제가 입장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리고 더없이 만족스러운 낯의 황제가 황녀와 함께 들어섰다. 그 기대 어린 시선의 방향이 하필이면 자신이었기 때문에, 하리드는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골을 짚었다.
벌써 소문이 돈 모양이다. 황녀의 두 번째 스승에 대해서.
황제는 아주 작정한 모양이었다. 정해진 순서를 모두 생략한 채, 바로 황녀를 데리고 그에게로 걸어온 것이다.
“공작, 고맙네.”
“고, 고마워요. 브리첼 공작.”
도대체 무엇이 고마운 것인가. 하리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대로 제 구두코를 노려봤다. 제 표정을 보며 무섭다고 소곤거리는 인간들의 목소리 따위 상관없었다. 황제와 나누어야 했던 그들 종족의 계약은 이제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거추장스러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가?
번민은 뚝 끊겨 나갔다. 불쑥 파고들어 온 남성의 유려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반짝이는 회색의 머리카락, 훤칠한 키, 그리고 휘어지는 푸른색의 눈동자와 우유처럼 흰 피부.
“제국의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그 매끄러운 인사에 황제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미소로 돌변했다.
“……그대도 무탈한가, 페르달 공작. 그대는 오늘도 신수가 참으로 훤해. 모든 여인과 남성이 그대에게 반하겠네.”
“하하, 칭찬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저보다 더 멋지고 잘생긴 분이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다 사교계의 인기를 모두 이분에게 빼앗길 것 같습니다. 이런, 인사를 안 했군요. 오랜만입니다, 브리첼 공작.”
“……그렇군.”
하리드는 끙 앓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꾹꾹 눌러 삼켰다. 르브리에는 아무래도 심각한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저는 연기력이 좋지 않았고, 며칠 전에 성기를 물고 빤 상대를 향해 저런 말들을 던질 만큼 처세술이 좋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얼굴에 힘을 주며 이후로 침묵하기로 했다. 알아서 떠들겠지.
예상이 맞았다. 황제와 르브리에는 떠들기 시작했고, 황녀는 열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대가 언제나 수고해 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짐은 기대하고 있네, 그 끔찍한 사건을 금세 해결해 주리라는 것을.”
“신이 미흡하여 빨리 처리하지 못함을 언제나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곧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조금만 더 신을 믿고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폐하.”
그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 역시, 눈앞의 젊은이를 죽이고 싶다는 눈빛을 해 보였던 주제에 누구보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낯을 한 채 덕담을 던지고 있었다.
‘대단하군. 둘 다.’
역시 인간들은 참으로 무서운 종족이다. 짐승은 혀를 내두르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연회장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혼란을 느끼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황녀가 아쉬운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가고, 생판 모르는 남처럼 안부 인사만 한 르브리에가 수많은 파트너와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볼 때에도. 다가온 룩센이 제발 참으라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드디어 모든 지긋지긋한 시간이 끝나고, 기다려 온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분노를 참았다. 쓰라린 자각도 몰려왔다.
‘새삼…… 씁쓸한가. 아니면 두려운 것인가.’
그의 반려는 자신처럼 매달리지 않는다. 대체 누가 반려의 감각은 일방통행이 아니라고 했던가. 저 인간은, 분명 자신에게 어떤 초조함도 느끼지 않는 게 분명했다. 당장 황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더라도 그 미소 한 조각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바라볼 것이 분명했다.
연결되지 않는 반려의 존재, 그 텅 빈 감각. 그 쓰라린 아픔은 패배를 모르던 짐승의 수장에게 답지 않은 둔통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이 감정의 이름은 슬픔일지도 모르겠다.
* * *
그리고 연회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황녀의 곁에 서 있던 두 남자를 바라보며 떠드는 중이었다.
“예상외입니다. 브리첼 공작께서 당연히 거절하실 줄 알았건만.”
화제는 황녀의 두 스승에 대한 것이었다. 황제는 분명히 브리첼 공작의 손을 들어줄 요량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페르달 공작도 만만치 않다. 여태껏 꿋꿋하게 황녀의 스승 자리를 지켜 왔으니, 그 역시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보인 것 아니겠는가.
귀족들은 치열하게 고뇌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거래가 오간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테면, 폐하의 의중? 본래부터 양 공작 중에 눈에 띄게 브리첼 가문의 손을 들던 폐하가 아니십니까. 이제 명확히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판단하셨을지도 모르지요.”
확실히 황제의 태도는 그동안 모호하면서도 확고했다. 하리드 브리첼.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젊은이라는 것은 브리첼 가문의 주인이나 페르달 가문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황제는 언제나 제 충직한 기사의 손을 들었다.
모여 있던 이들은 귀족파이기도 했고 또한 황제파이기도 했다. 혼재한 모임은 제국 내의 권력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황제는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황권을 지니지 않았고, 제국은 한 기사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전쟁의 침략을 받지 않아 줄곧 평화로웠다. 귀족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고민은 황녀의 옆에 앉아 다음 대의 권력을 이양할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래도 브리첼 가문을 옹호하는 쪽과 페르달 가문을 옹호하는 쪽으로 크게 나뉘어 있긴 했다. 주로 직업적인 분류에 따라서. 기사 가문은 영락없이 하리드 브리첼을 비호했고, 주로 관료 쪽의 귀족들은 르브리에 페르달의 손을 들었다.
“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브리첼 공작 각하, 그분이 말입니까? 만약 권력에 뜻이 있으셨다면 일찍 앞으로 나섰을 겁니다. 페르달 공작이 지금처럼 클 수 없도록 처음부터 막았을 것이지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의 페르달 가문이 있는 이유는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브리첼 공작 가문이 침묵했기 때문이니까.”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걸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설마 내분을 바라시는 건.”
“흐음.”
모두가 놀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느닷없이 스승의 자격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황제의 통첩부터,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듯 불만을 고하지 않은 페르달 공작. 그리고 황녀의 지목에 따라 받아들이기로 한 브리첼 공작까지.
“의도적으로 보이긴 하지요.”
비스듬히 웃은 남자가 말을 보탰다. 그의 이름은 시울 폰 샤나 후작, 귀족들 사이에서도 힘이 적지 않은 자였다. 그가 황제의 은밀한 수족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없었지만 적어도 황제가 그를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입술을 축이는 자들을 향해 시울 폰 샤나 후작은 은밀하게 웃어 보였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샤나 후작은 걸어가는 황녀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그녀의 남자가 모든 권력을 차지할 거란 점입니다.”
둘 중 누가 되었든, 혹은 둘 외의 제3자가 되었든 말입니다.
샤나 후작의 눈이 번뜩였다.
* * *
끼이익, 문이 닫혔다. 또 이런 곳은 어떻게 안 것인지, 미로처럼 얽힌 황궁을 꼭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남자는 인적도 닿지 않을 곳을 찾아냈다. 하리드는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따라오는 기척이 없는지 감각을 곤두세웠다.
“저택으로 향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말입니다. 이왕 만났으니 황궁도 나쁘지 않거든요.”
“뒤를 따르는 자는 없었다.”
“뭐, 누구 말씀인데 믿지 않을까요.”
달빛. 마치 그날과 비슷하다. 달빛을 뒤로하며 닫힌 방 안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 던지는 수컷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나저나 연회장에서 꽤 인기가 많던데요, 하리드 브리첼. 다들 당신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누가 할 말을.”
생각하니 또 불쾌해졌다. 매혹당한 것 같았던 인간들의 모습도 그랬지만, 거리낌 없이 그 사이에서 웃으며 유혹하는 듯했던 저 남자의 모습이. 언제나 그랬겠지. 르브리에의 연애 경력은 꽤 화려한 축에 든다는 것을 그에 대한 보고서를 쭉 보아 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왜 이렇게 불쾌한지 그게 더 이상할 뿐이다.
하리드는 은근히 솟아나려는 손톱을 내리누르며 거칠게 옷을 풀어헤쳤다. 연회복이 풀어지고 묵직한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투둑. 가죽을 벗어 던지듯 허물없이 벗는 그 모습을 상대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오늘은 둘째 밤입니다.”
“알아.”
“브리첼, 당신 정보가 먼저야.”
“……줄 것은 외부에 있는 황족들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호오?”
푸른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외부에 있는 황족의 거처는 황족 중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그 반응을 보며 하리드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실종된 인간들의 속도를 보니, 제법 고생했을 것 같더군. 네가 고르는 자들이 어떤 기준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내게는 현재 살아 있는 황족들의 외부 위치가 모두 있다.”
“그러니까.”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상대가 나른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매혹적인 눈매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짙어져 있었다. 당장 달려들 것 같은 끈적함을 느끼면서 하리드는 자꾸만 타는 목을 쓸어내렸다. 방금까지 솟구치던 짜증과 분노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지금은 희게 빛나는 상대의 어깨만 보였다. 날카롭게 치솟는 이를 저 달콤한 살에 처박으면 어떤 기분일까.
“정보를 모두 알려줄 테니, 내가 원하는 놈을 골라 죽이라?”
“그래. 마음대로 해. 방해하지 않을 테니.”
“황제가 무어라 하면 어떻게 말하시려고?”
“증거가 없으니 뭐라 할 수도 없지. 상대가 재빨라 잡을 수 없었다고 하면 그만.”
“그게 당신의 무능함을 말하는 것인데도 말입니까, 기사님?”
“무능함과 유능함은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느릿하게 내뱉으면서도 상대의 흰 피부에 몰두했었던 하리드는, 르브리에가 아주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기사님은 정말 이상해요.”
저건 르브리에가 너무 자주 내뱉는 말이라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이상하긴 이상할 테지. 반려에 미친 짐승을 저 인간이 또 어디서 보았을까.
“값진 정보에 대해 그만큼 합당한 봉사를 하는 게 맞을 테니. 자아, 하리드 브리첼. 어딜 만져 주길 원합니까? 어떻게 울려 줄까요? ……당신의 어딜 괴롭혀 주길 원해요?”
두 얼굴의 남자 같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온화한 얼굴의 르브리에, 그는 신사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제 반려, 르뷔. 사악함을 감추지 않는 번들거리는 욕망은 가학성을 닮았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피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손길이 아니라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손길을 던지는 제 밤 거래의 상대.
“그런 딱딱한 얼굴을 버리는 겁니다, 기사님.”
다가온 남자는 정보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휘어지는 입술을 조금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도, 닿는 그 체온에 결국에는 앓는 소리를 내뱉는 건 자신이었다. 하리드 브리첼은 셔츠를 파고들어 오는 뱀처럼 느릿하게 피부를 훑는 손가락에 전율했다. 저 정갈한 것들이 제 아래 구멍에 파고 들어와 어떻게 날뛰는지 육체는 기억했기 때문이다.
“기대하고 있군요.”
소름이 돋은 피부를 매만지며 두 손이 유려하게 남은 셔츠를 피부에서 벗겨 내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훑고, 어깨를 손톱으로 긁어 내려가다가, 단단하게 굳어 흔들리는 복부의 패인 곳들을 간지럽혔다.
“어딜 핥아 줄까요. 당신이 내 성기를 뽑을 듯이 핥았던 것처럼, 나도 당신의 은밀한 곳을 핥아 줄까?”
손바닥이 꾸욱 반쯤 일어선 바지 속의 것을 내리눌렀다. 으으윽, 하고 억눌린 소리를 내자 귓바퀴에 입술을 바짝 들이민 채 상대가 웃음을 흘렸다. 벌써 싸면 안 되지, 기사님.
성기를 누르던 손이 움직여 바지를 풀었다. 그리고 스윽 훑어내리며 침대 위로 느릿하게 상체를 내리눌렀다. 풀썩, 푹신한 감각 속에 파묻힌 육체를 짓밟을 듯 내려다보며 르브리에가 오만하게 웃는다. 하리드는 아직 다 벗지 않았는데도 그 시선 속에 헐벗은 기분이었다.
스윽, 천이 스치는 소리. 끈적이는 눈빛. 그리고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리드는 말 잘 듣는 개처럼 호흡을 내뱉으며 그의 손길에 따라 옷들을 벗어 던졌다.
달빛 아래 부끄러움도 모르는 알몸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로 빛났다.
“너는.”
이상하게 오늘따라 초조했다. 뭐든 여유로웠던 자신답지 않게. 얼음과 불처럼 확연한 온도 차이를 보이는 자신들의 이 상황이 심장을 아프게 비틀었다. 하리드는 뜨거워진 손을 뻗어 놈의 반듯한 셔츠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부욱!
“또 찢으면 어떡합니까?”
“너도 벗어 버려. 나만 벗겨 놓고 이게 뭐하자는 거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카로우실까.”
“네 말대로 정보에 따른 합당한 모습을 보여라.”
그 여유, 잘근거리며 짓씹어 주겠다. 하리드는 눈을 섬뜩하게 빛냈다. 짐승 특유의 살기가 뭉글거리며 솟아나 공기를 묵직하게 물들였다. 마찬가지로 짙어지는 상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느긋하게 비틀어지는 제 입술을 상대는 찢어버릴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
헐벗은 모습으로 사지를 내벌린 짐승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렇게 웃었다. 비틀린 제 붉은 살점을 가리키며 문질러 입술을 가리켰다. 조금씩 얼음이 들끓는 물로 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스스로의 감정에 휩싸여 재촉했다.
“여기.”
짐승의 손가락이 스스로의 육체를 타고 흘렀다. 침에 젖은 입술을 지나, 건반을 두드리듯 제 상체를 훑어 내렸다. 숨을 들이쉬는 것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탄력적인 흉곽을 찍는다.
“여기.”
그 단단한 근육 위에 자리잡은 살점을 엄지로 훑으며, 하리드는 단단하게 굳은 허벅지를 반쯤 들어 올려 다리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손을 내려 쓸어내리듯이 허벅지 안쪽을 은밀하게 짚었다.
“그리고 여기에.”
짙어지는 숨결의 인간을 뜨겁게 바라보며, 짐승은 명령했다.
“키스해라. 네 그 부드러운 입술로, 게걸스럽게 빨아.”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오만하게 명령하는 여왕처럼, 하리드는 마음껏 분위기에 취했다. 놈이 첫 번째의 밤에 그러했듯이 그도 명령할 권리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충직한 기사처럼 놈은 제 아래를 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조금씩, 체액을 교환하여 그도 이 초조한 감각을 옮게 될 것이다.
너도 똑같이, 르브리에.
“어서.”
나처럼 무너져 버려, 르뷔.
* * *
“하악……!”
“자신만만하게 명령했던 것치고는, 너무 예민한 것 아닙니까…….”
유두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놈이 젖을 빨아 먹는 기세로 엉겨붙는 것은 반려에게 내밀한 기쁨을 느끼게 했으나, 그 예민한 살점이 퉁퉁 불을 만큼 빨리는 것은 고통과 쾌락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원한 곳들이잖아요.”
흔들리는 단단한 복부에 이를 박아 넣으며, 르브리에가 노래하듯이 속삭였다. 붉은 혓바닥이 잇자국을 낸 살점을 부드럽게 희롱하며 스쳐 지나갔다.
“하으, 흐, 윽, 읏…….”
“그 억눌린 신음도 듣기 좋긴 하지만.”
“아, 하아……!”
“빌어먹을 고집쟁이 같으니. 절대 울진 않을 겁니까? 그렇게 보여 주기 싫어?”
“하…….”
부드럽게 지껄이는 르브리에의 목소리들이 스쳐 지나가는 물처럼 흘러갔다. 뭐라 하는지 제대로 된 자각도 없었다. 반려와 닿는 것은 하루가 지날수록, 횟수를 거듭할수록 지독하게 농밀한 감각을 선사했다. 꼭 약을 하고 술을 한 것처럼 허물어진다. 배 속이 녹아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찔걱 소리를 낼 것처럼 흥건하게 젖어가는 뒷구멍이 녹진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면서도 짐승의 수장은 부정하고 외면했다. 그저 뜨거웠다. 허벅지 사이로 무언가를 비비고 싶고, 당장 달려들어 꿰뚫고 싶은 구멍을 놈의 것에 내려 앉히고 싶었다.
르브리에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온몸이 침에 젖은 것 같다. 하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놈이 웃으며 말하는 것처럼 교성을 크게 내뱉고 싶지도 않았다. 하리드는 두 눈에 힘을 바짝 주며 놈의 허리를 허벅지로 조였다. 어깨를 잘근거리며 씹다가 손가락으로 왼쪽의 유두를 꼬집듯이 비튼 푸른 눈이 은밀하게 웃었다. 놈은 지독할 정도로 마지막에 요구한 하체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왜요. 안달이 나 죽겠습니까? 박고 싶어 죽겠어요?”
“하아, 하, 너, 하아, 하.”
“인내심을 가져 봐요, 기사님. 원하는 대로 다 되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서 핥아 줄게요. 이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검지가 제법 날카롭게 오른쪽 유두를 확 긁어내렸다.
“하으!”
“자꾸만 커지는 것 같은데, 이곳은.”
허리가 활처럼 휘어 튕겨 올랐다.
“어쩌죠. 나중에 옷도 제대로 못 입을 만큼 커지면, 우리 기사님의 체면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럴 일은 없…… 윽!”
“다들 이곳만 보게 되면 어떡합니까?”
“웃, 기는……윽!”
“웃겨요? 이게?”
시선이 엉켰다. 들썩이는 숨결은 자신만이 아니어서, 그것이 퍽 만족스러웠다. 흐트러진 채로 희미하게 웃은 순간이었다. 푸른 눈이 한층 더 날카롭게 변했다는 것을 거친 숨을 쉬는 짐승은 알아채지 못했다. 상대의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이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는 것도, 목소리가 한껏 거칠고 낮아졌다는 사실도.
“뒤돌아봐요, 기사님. 어서요.”
“하아, 하…… 뭐라…….”
“……미치겠군.”
그 순간 확, 하고 몸뚱이가 돌았다.
“엎드리라고 했잖아요.”
“!”
“그런 얼굴을 하고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겁니까.”
하리드는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땀으로 젖은 몸을 침대 위에 엉덩이만 치켜든 채로 엎드리게 되었다. 그 불편하고 민망한 자세에 몽롱해진 머리로도 허리를 내리려 하니, 차가운 손이 그 행동을 막았다.
“쉬이, 가만히 있어요.”
“너…….”
“왜요. 엉덩이 사이 핥아 주길 원했잖아요?”
“하아, 하, 그건… 읏.”
“당신이 그렇게 기대한 거잖아. 이게 더 빨기 좋은 자세니까 닥치고 가만히 있어요, 하리드 브리첼. 묶어 버리기 전에. 아, 인상 쓰지 말아요. 그것도 사람 자꾸 달구게 만드니까. 대체 얼굴을 왜 그렇게 쓰는 거야, 기사님……. 응?”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키려고 해도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눅눅하게 젖어드는 구멍의 뜨거움이 당혹스러웠고, 조금씩 이 자세에 대한 경각심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아무리 짐승, 짐승이라고 하더라도 짐승처럼 교미 당할 생각은 없었다.
쾌락에 들떠 멍했던 표정에 힘이 들어오려고 했을 때, 뒤에서 내리누르듯 올라탄 상대가 귓가에 입술을 댔다.
“……하아!”
그리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씹고, 그리고 다시 한번 구멍 속을 거칠게 희롱한다.
“!”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그 뜨겁고 격렬한 소름에 성기가 단숨에 발기해 퉁겨 올랐다. 바짝 당기는 회음부의 살갗을 마찬가지로 문지르는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어리의 감각은 르브리에의 성기였다.
발기했다. 그 역시. 그리고 꼭 교미하는 것처럼 뒤에서 그의 사이를 헤집고 있는 것이다. 구멍에 닿을 듯이, 닿지 않을 듯이.
“흐으…….”
미칠 것 같이 초조했다. 질척거리는 액체가 피부 위에 문질러지는 뜨거움을 느끼면서 하리드는 두 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이를 악문다. 당장 파정하고 싶은 감각을 끈질기게 참으면서, 등줄기를 타고 피부를 핥으며 내려오는 상대의 입술에 요동치면서.
“압니까? 당신은 등이 참 예뻐요.”
알게 뭔가.
퍽, 퍼억, 적나라한 그 소리에 은밀한 곳이 요동쳤다.
“아, 읏, 윽……!”
“근육이 아주 잘 잡혀 있거든요. 이렇게 움직이면.”
“……아, 흐으, 윽, ……아……!”
꼭 섹스하는 것처럼 르브리에의 커다란 성기의 끝이 여린 회음부를 때리듯 찔렀다. 하으윽, 하리드는 자지러지듯 앞으로 쏟아졌다.
“안 돼요.”
“하아, …하아…….”
배를 단단히 끌어안고 지탱하는 팔만 아니었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끌어안은 상대의 차가운 팔이 배를 훑고, 괴롭혀져 바짝 선 검붉은 살점을 쥐어뜯듯이 돌리고, 뱀처럼 타고 내려와 덜렁거리는 페니스를 꽈악 휘어잡았다.
“뭡니까. 혼자 가려고요?”
은밀하게 물으며 예민한 살을 파고든 성기가 뜨겁게 뒤흔들렸다.
“하악, …하, 아아, ……하윽…….”
“뭐야. 내 손에서 싸고 싶어요?”
“아, 놔, ……으, 윽!”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리자,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뒷덜미에 섞여들었다. 부드러운 입술, 그 사이로 튀어나온 습한 살덩이가 목덜미를 주욱 타고 흘렀다. 그리고 속삭인다.
“안 돼. 참아. 명령할 때까지.”
“……!”
“허락하면 싸요, 브리첼. 아직은 안 돼.”
엄지가 성기의 구멍을 꽈악 눌러 막았을 때, 하리드는 눈앞이 희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엉덩이에 힘이 꽉 들어가고 그 사이를 들썩이던 놈의 성기가 더욱 살갗을 빠듯하게 했다.
안 돼. 제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무어라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뜨겁게 울리는 상대의 숨결, 그리고 덜덜 떨리는 자신의 허벅지. 야속하고 잔인했던 손가락이 뜨거운 선단을 놓아주는 것과 동시에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뜨거운 것이 벼락같이 쏟아진다. 배출의 욕구는 강렬했다. 젖은 회음부에 가득 쏟아지는 상대의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분출하는 감각에 바르르 허리를 떠는 중이었다.
“길게도 싸는군요.”
“흐……!”
길게 웃은 르브리에는 하리드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을 했다. 가고 있는 상대의 다리를 잡아 벌리다니. 경악하며 반항하려고 해도 번쩍번쩍 뛰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우읏, …하, 으…응…!”
뒤로 물리려는 동시에 르브리에가 한쪽 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높게 들어 올렸다. 파정의 끝이 다가와 바르르 떠는 허벅지를 억세게 가득 쥐어 벌렸다. 축축하게 젖어 엉망이 된 다리 사이, 빠끔거리며 개폐를 반복하는 구멍을 바라보며 푸른 눈이 상냥하게 웃었다.
“야하긴.”
“…….”
당황하여 바라보자 눈이 딱 마주쳤다. 얼굴을 민망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똑바로 마주본 채로, 르브리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곧장, 푹.
“……!”
아무리 정액이 흘러내려 젖었더라도, 손가락 두 개가 곧장 들어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길쭉한 그것은 숨을 쉴 시간도 주지 않고 곧장 파고들어 처박혔다. 입을 뻐끔거리며 달싹이자, 빙긋 웃은 놈은 그 입마저 삼켰다.
“아, 흐, 으읏, 윽!”
“좁아.”
잔인하고 과격한 손길에 고집스럽게 닫혀 있던 문이 흔들리며 공간을 넓히기 시작했다. 쑤욱, 빠져나갔다가 다시 퍼억 소리를 내며 처박힌다. 꿀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걱정 마요. 지금은 힘들어도, 금방 우물거리면서 먹게 될 거예요. 기억하잖아요, 여기로 내 손가락 많이 삼켰을 텐데.”
으으, 으. 은색의 실이 뚝 끊어지며 멀어진 얼굴이 제 입술을 혀로 날름 핥는다. 천천히, 천천히 구멍에 박혀 흔들리며 안을 넓히던 손가락이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다.
내밀하고 부드러운 살점이 단단한 것에 쓸리고, 마찰되고, 뜨거워졌다. 축축하게 젖어 요동치는 내벽은 그것을 꼭 반기는 것처럼 환호했다. 배속이 꽉 조여드는 감각에 바르르 떨며 하리드는 고개를 휙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입을 벌리면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눈앞이 번쩍거리면서 튀어 오르고, 죽었던 성기가 또다시 튕겨 나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바들거리며 바르작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고정한 르브리에는 손을 더 깊게 집어넣어 움찔거리는 하리드의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하리드 브리첼.”
파드득,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경련했다. 내벽 깊은 곳, 지독하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온 손가락이 어딘가를 깊게 찔렀다.
하아아악, 잔뜩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른 하리드가 이를 악물었지만 다시금 눈앞을 점멸하게 두드리는 손가락에 자지러지는 신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눈꼬리에 맺혀 뜨겁고 축축하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었네요.”
“하으, 흐, ……제, 발…… 아……!”
“더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까?”
“아, ……아니, 하, 하아, 으…… 으, 읏, 윽! 윽!”
“부탁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울면 더 박아 달라는 거 아닙니까. 손가락이 잘릴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부드럽고 쫄깃한 거지. 이 안에 뭘 숨긴 거야. 브리첼, 이봐요. 여기에, 이 음란한 곳에 내 걸 박아 넣어도 이렇게 자지러지나?”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혀가 목구멍까지 파고 들어올 듯 입 안을 마구 휘저었다. 치열을 훑고 입 안의 여린 살을 간지럽히다가, 타액을 긁어 흡입했다. 하아, 하. 거친 숨결은 이미 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몽롱하게 핀 시야로도 희뿌옇게 빛나는 반려를 바라보며, 짐승은 흐느꼈다. 지나치게 느껴서 이상해질 것만 같다. 고작 손가락에, 아니 고작 이 정도의 접촉에. 짐승들의 성욕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는데, 피가 튀기고 살이 뚫리는 섹스에도 무너진 적이 없었는데.
‘반려라서…….’
후끈하게 덮치는 달콤한 향기가 뇌를 마비시키는 게 분명했다.
하리드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팔을 뻗어, 못된 말들만 늘어놓는 상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잡아당겨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짐승의 것도, 하리드가 여태까지 보내 왔던 입맞춤도 아닌 아주 보드라운 이 기분 그대로를 전달하고 싶어서.
“…….”
빌어먹을, 그렇게 중얼거린 르브리에가 허겁지겁 혀를 섞어 왔다. 이상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왜 이렇게 달지. 적나라하게 핥는 소리를 들으며 하리드 역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이름을. 왜 당신만 이렇게 달까.
한참 동안 아래를 괴롭히고 파고들다가 결국 엉덩이 사이를 핥는 요망한 혀의 움직임에 짐승은 함락됐다. 엉덩이를 번쩍 치켜든 채, 하리드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말았다.
제발, 그만, 하라고. 그만 좀 핥아대라고.
그렇게 격렬했던 두 번째 밤이 끝났다.